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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민주화

[소년이 소년에게] 5.18 민주화운동 청소년 희생자 36명

잠용(潛蓉) 2020. 5. 17. 21:41

[소년이 소년에게] 5.18 민주화운동 청소년 희생자 36명
[1부] "그날, 이 아이들이 죽어야 하는 이유 따윈 없었다"
서울신문ㅣ2020-05-17 17:19 ㅣ 수정 : 2020-05-17 17:36


대검·총·군홧발에 짓밟힌 평범한 아이들

 

▲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희생된 10대들의 일부 사진. /서울신문

 

5·18민주화운동 10대 사망자 36명
시민군 가담 않은 희생자도 다수
계엄군 도청앞 발포 13명 사망
검시기록도 조작·왜곡 가능성

1980년 5월 광주에서 소년·소녀가 숨졌다. 다 자라지 못한 그 작은 몸엔 수없이 많은 총알과 대검이 관통했고 주검은 군홧발에 짓밟혔다. 아이들이 죽어야 하는 이유 따윈 없었다. 삼촌 가게에 일하러 가던 19세 소년 노동자는 대검에 찔렸고, 공부하다 귀가하던 고2 남학생은 매복한 군인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아픈 사람 살리겠다고 헌혈에 나선 17세 여고생은 총에 맞았고, 11살짜리 소년은 묘지 근처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사망했다.


서울신문은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희생된 10대 청소년들의 발자취를 정리했다. 광주민주화운동기록관이 공개한 검찰의 검시조서와 사망진단서를 확인했고, 국군 보안사령부가 작성한 ‘광주사태 관련 사망자 명단’과 ‘광주사태 사망자 검시 결과’를 국가기록원에 정보공개청구해 확인했다. 구술 기록을 확인하면서, 연락이 닿는 유족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어떤 죽음이 억울하지 않을까. 하지만 아이들은 특히 그랬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눈시울은 그렇게 40년간 마를 날이 없었다.

 

5·18 사망자 5명 중 1명은 10대 청소년

5·18 광주민주항쟁(5월 17~27일) 당시 사망한 165명 중 10대 청소년은 36명(21.8%)이다. 평균 나이는 16.7세로 정규교육을 거쳤다면 중학교 3학년이었을 나이다. 남자가 30명이었고 여자가 6명이었다. 검시조서에 기재된 직업을 보면 고등학생이 13명으로 가장 많았다. 학업 대신 돈을 벌던 소년 노동자는 10명으로 두 번째로 많았고 중학생 6명, 학교 밖 청소년(무직) 5명, 재수생 1명, 초등학생 1명이었다.

 

▲ 박지원 대안신당 의원이 26일 5.18 민주화운동 당시 군이 정보활동을 위해 채증한 사진을 공개했다. 박 의원은 국정감사 당시 이 사진첩의 존재를 확인, 지속적으로 공개를 촉구해 왔다. 사진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계엄군에 잡힌 광주 시민들. /2019.11.26 박지원 의원실 제공


사망 원인은 총상이 32명(88.9%)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검시조서를 보면 당시 계엄군이 사용한 총기인 M16에 의해 사망한 이들은 21명이었다. 시민군이 경찰의 무기고를 탈취해 사용한 카빈총으로 사망한 이도 6명이었다. 이 기록만 보면 시민군 간 오인 사격이 발생했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 가장 객관적이어야 할 사망자 검시기록조차 조작·왜곡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전두환 신군부는 계엄군의 학살 책임을 덜고자 카빈총에 의한 사망을 의도적으로 늘렸다는 의혹을 받는다. 실제로 5공화국 인사들은 카빈총 희생자가 전체 사망자 165명 중 28~88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광주민주항쟁은 군인의 양민학살보단 시민군의 오인사격이 피해를 키웠다는 것이다. 이런 기록을 북한군이 개입한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희생된 10대 희생자 /오달란

 

▲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희생된 10대 희생자 /오달란


아울러 총에 맞아 사망했지만, 죽음의 원인을 바꿔 분류하기도 했다. 김경환(19·점원)군은 자상 3곳, 총상 등이 발견됐지만, 검찰 보고서에는 ‘자상으로 분류할 것’이라 적혀 있었고, 보안사 검시참여보고에도 총상은 빠져 있었고 최종적으로 ‘타박상으로 인한 사망’으로 분류됐다. 검찰의 검시기록이 조작되는 삼엄한 시대였다. 한편 10대 사망자 중 차량 추락사가 3명이고 두들겨 맞아 사망한 이는 1명이다.


휴교조치 내려진 5월 20일, 10대 첫 사망자 발생<>

1980년 5월 17일,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의결한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1979년 12월 12일 군사정변을 일으킨 후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의 요구가 커지자 전두환 신군부는 이를 저지하고자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다음날인 18일 계엄군은 전남대를 봉쇄했다. 군과 학생 간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시위가 격해지자 군인은 학생을 군홧발로 짓밟았다. 학생들은 광주시내 중심가인 금남로로 이동했고, 계엄군은 쫓아와 진압작전을 펼쳤다. 19일 전두환 신군부는 11여단을 광주에 증파했다.

 

▲ 26일 박지원 대안신당(가칭) 소속 의원이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보안사가 군의 정보활동을 위해 체증한 일자별, 시간대별 진압기록 사진 및 김대중 내란음모 사전 범죄 개요 수기, 군의 정훈활동 일지 등을 공개했다. /박지원 의원실 제공


광주시민은 분노했다. 대학생부터 시민까지 무차별적으로 폭행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광주시민들은 침묵하지 않고 돌을 들었다. 이날 오후 4시 30분 광주 동구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에 다니는 김영찬군이 계엄군이 쏜 총에 의해 부상을 당했다. 광주시내 고등학교에 휴교조치가 내려진 20일 처음으로 사망자가 나왔다. 금남로에서 택시 200여대가 경적을 울리며 차량 시위를 벌이던 날이다. 10대 사망자도 2명이 나왔는데, 동신중 3학년 박기현(당시 14)군과 상점에서 일하던 김경환(19)군이 군인의 무자비한 폭행에 숨을 거뒀다. 특히 이날은 박군이 수학여행을 다녀온 날이었다. 부산에 누나의 산후 수발을 간 어머니를 기다리다 심심해진 박군은 밖으로 나가보고 싶었다. 박군은 책을 사와야 한다며 아버지의 만류에도 자전거를 끌고 나섰고, 그 이후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계엄군이 박군을 낚아채고 무자비하게 폭행한 것을 봤다는 목격자가 있었다. 이틀 뒤 박군은 전남대병원에서 숨진 채 가족에 의해 발견됐다.

 

계엄군의 도청 앞 발포, 청소년 13명 숨지다

21일 오후 1시 최소 10만여명의 시민이 모인 전남도청 내 스피커에선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애국가가 끝나기 무섭게 공수부대의 사격이 시작됐다. 10분여간 지속한 사격에 최소 54명이 숨지고 500여명이 총상을 입었다. 10대라고 총탄이 피해가진 않았다. 이날 목숨을 잃은 10대 청소년은 총 13명에 이른다. 부처님오신날이었던 그날 김완봉(14·무등중3)군도 금남로에 있었다. 김군의 어머니인 송영도씨는 아들과 함께 절에 가려고 집을 나섰지만 이내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고생하는 청년들에게 빵을 먹이자는 주변의 제안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송씨는 그 길로 집에서 10만원을 들고 와 빵과 우유, 담배, 계란 등을 슈퍼에서 사 모아 도청 시위대에 건네줬다. 그러는 사이 집에 있던 아들이 금남로로 나왔던 것이다. 전남대병원과 적십자병원 등을 백방으로 찾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다음날 새벽 송씨는 결국 적십자병원 시체실에서 아들을 찾았다. 전날 아침에 아들이 입었던 줄무늬 셔츠와 청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전교 13등을 했다며 학교에서 배지를 받아온 착한 아들이 싸늘한 주검이 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들은 뒷목 쪽에 총을 맞아 사망한 상태였다.

▲ 박지원 대안신당 의원이 26일 5.18 민주화운동 당시 군이 정보활동을 위해 채증한 사진을 공개했다. 박 의원은 국정감사 당시 이 사진첩의 존재를 확인, 지속적으로 공개를 촉구해 왔다. 사진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모여있는 광주 시민들. /2019.11.26 박지원 의원실 제공

 

시신 담을 관 구하러 갔다… 9발 맞은 소년군도

무장한 시민군의 저항에 따라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한 22일 이후에도 10대 사망자는 계속 나왔다. 이날 6명이 사망했고, 23일 4명, 24일 3명, 25일 2명, 전남도청에서 최후의 항쟁이 있었던 27일에는 5명이 숨졌다. 계엄군의 잔혹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23일 사망한 손옥례(19·무직)양은 전남 화순으로 시신 담을 관을 구하러 가는 버스에서 매복한 군인에게 피습을 당해 사망했다. 당시 손양은 머리와 가슴 등 M16 총탄 7발을 맞았다. 그래도 부족했던지 계엄군은 손양의 가슴부위를 대검으로 찔렀다. 그렇게 손양의 주검은 2번 죽었다. 같은 버스를 탄 것으로 추정되는 황호걸(19·방송통신고3)군도 복부를 비롯해 9곳의 총상을 입었다. 절단된 10대의 시신도 있다. 시위대 차량에 탑승해 총을 들고 군인을 추격하다가 24일 사망한 김부열(17·조대부중3)군은 계엄군의 총격에 사망했다. 시신 발견 당시 심한 부패로 사인 및 상해 수단을 규명하기 어려웠지만, 목이 잘려 나가고 없었다. 가슴과 한쪽 팔도 떨어져 나간 상태여서 유족은 사타구니 옆 점으로 신원을 확인했다. 김군의 시신은 광주 동구 지원동 뒷산에서 발견됐다.

 

□ 광주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광주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서울 손지민 기자 sjm@seoul.co.kr

 

[2부] "나는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서울신문ㅣ2020-05-17 18:06 ㅣ 수정 : 2020-05-17 19:00

5·18 소년이, 40년 후 소년에게

 

▲ 1980년 5월 20일 광주시 동구 금남로에서 시내버스, 택시 운전기사들이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 시위를 벌이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5·18 계엄군에 처참하게 희생된 10대 36명의 기록…

文대통령 “발포명령자 진상 규명돼야”

 

▲ 5·18 광주민주항쟁에서 희생된 10대 36명의 얼굴. 그래픽 이다현 기자 

 

뜨거웠던 1980년 5월 광주·전남에서 165명이 숨졌다. 36명은 10대였다. 독재정권과 계엄군의 폭력 진압에 분노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 속엔 어린 그들이 있었다. 소년은 총 맞은 시신을 수습하다, 소녀는 부상자에게 기꺼이 피를 나눠 주다 짧은 생을 마감했다. 서울신문은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청소년 희생자들이 오늘의 소년들에게 건네는 이야기를 지면에 싣는다. 살아 있다면 자식들에게 건넸을 무용담과 당부를 대신 하고픈 생각에서다. 40년이 지났지만 숙제는 그대로다. 문재인 대통령은 17일 광주MBC 프로그램에 출연해 “발포 명령자가 누구였는지, 발포에 대한 법적인 최종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며 “집단 학살 피해자들을 찾아내는 일, 헬기 사격까지 하게 된 경위 등이 모두 규명돼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신문 홈페이지(www.seoul.co.kr)에서 보다 상세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3부] “죽더라도 끝까지 남겠습니다”… 전남도청 10대 시민군 셋의 죽음
서울신문ㅣ2020-05-17 18:14 ㅣ 수정 : 2020-05-17 19:46

 

▲ 5·18민주화운동 당시 희생된 10대 시민군

 

계엄군의 전남도청수복 작전이 시행된 27일 새벽 도청에 끝까지 저항하다 10대 시민군 3명은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산화했다. 왼쪽부터 문재학군, 박성용군, 안종필군.

용기는 나이에 비례하지 않는다. 전두환 신군부 계엄군이 곧 들이닥칠 걸 알면서도 까까머리 소년들은 끝끝내 도청에 남았다. 누군들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까. 한사코 말리는 가족을 뒤로하고 총을 든 10대 시민군은 장렬히 산화했다. 지금 그들이 살아 있다면, 50대 중반의 나이다. 평범했을지도 모를 삶이 국가 폭력으로 사라진 후 야속한 40년이 흘렀다. 서울신문은 17일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문재학(당시 16·광주상고1), 박성용(17·조대부고3), 안종필(16·광주상고1)군의 유족을 만났다. ‘빨갱이’의 가족으로 몰려 모진 세월을 보낸 이들이다. 생때같은 아들과 동생의 죽음을 부정당할 때마다 마음속 상처는 수없이 덧났다. 유족들은 지금 재학이, 성용이, 종필이 나이인 소년·소녀들에게 한 가지만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내놓았다고.

 

“창근이 놔두고 어찌 가겄어요”…

문재학, 1964년 6월 1일~1980년 5월 27일

 

▲ 문재학군의 어머니 김길자씨

 

어려서부터 그랬다.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 생활이 어려워지자 재학이는 상업고등학교에 가겠다고 자청했다. 어머니 김길자(80)씨가 “누나도 인문계 갔는데, 너는 왜 상고 갈라 그라냐” 묻자 “공부 잘해 은행 취직하면 아부지 돈 찾기 쉽지 않것어요”라고 답하던 아들이었다. 재학이는 3남매 중 막내였다. 애교도 많았다. 세 사람 누우면 꽉 차는 좁은 다락방에서 막내 재학이는 꼭 엄마와 아빠 사이의 품을 파고들었다. 아들의 온기는 따듯했다. “엄마, 창근이가 죽어갖고 드러누워 있어요. 관에 담아지지도 않고 그라는디, 어찌 놔두고 가겄어요.”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전남도청 재수복 작전)이 시행되기 이틀 전인 25일 도청에서 시신을 수습하던 재학이, 엄마에게 한 말이다. 재학은 전날부터 도청에서 시신 수습하고 유족 안내하는 일을 했다. 그러다 시위 도중 총에 맞아 사망한 초등학교 동창 양창근(16·숭일고1)군을 본 것이다. 김씨는 괜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내 자식만 살리자고 재학이를 데리고 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창근이 시신만 수습하고 집에 오겠다는 아들을 김씨는 믿었다.

 

▲ 박지원 대안신당 의원이 26일 5.18 민주화운동 당시 군이 정보활동을 위해 채증한 사진을 공개했다. 박 의원은 국정감사 당시 이 사진첩의 존재를 확인, 지속적으로 공개를 촉구해 왔다. 사진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계엄군에 잡힌 광주 시민들. /2019.11.26  박지원 의원실 제공


다음날에도 아들은 집에 오지 않았다. 김씨는 남편과 함께 도청에 갔다. 본관에 들어서자 재학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1층으로 내려왔다. 집에 가자고 사정했지만 아들은 통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설득에 실패하고 재학이를 두고 집에 왔다. 그날 통금 시간인 오후 7시 재학은 집에 전화를 걸었다. 차가 끊겨 못 온다는 말에 김씨는 맥이 풀렸다. 27일 새벽 3시쯤 됐을까. 도청에서 나는 총소리는 꼭 번개 같았다. 김씨는 발만 동동 굴렀다. 그래도 학생은 항복하면 살려준다는 말을 믿고 살아 있을 거란 작은 희망만은 버리지 않았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김씨는 남편과 함께 도청으로 갔다. 새벽 6시쯤 도착했는데, 시민군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물청소까지 하고 난 뒤였다.

 

▲ 26일 박지원 대안신당(가칭) 소속 의원이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보안사가 군의 정보활동을 위해 체증한 일자별, 시간대별 진압기록 사진 및 김대중 내란음모 사전 범죄 개요 수기, 군의 정훈활동 일지 등을 공개했다. /박지원 의원실 제공


열흘 동안 아들을 찾아다녔다. 6월 6일 재학이 학교 담임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남일보에 사망자 명단이 실렸는데, 재학이가 있다는 것이다. 계엄사 4-3, 묘지번호 104, 관 번호 94. 국가는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시신을 망월동에 묻었다. 재학의 이야기는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 담겼다. 친구 정대의 시신을 수습하겠다며 도청에 남은 주인공 동호가 재학이다. 오월이 되면 김씨는 아들이 사무치게 보고 싶다. 자식 죽은 것도 서럽고, ‘빨갱이’로 낙인찍혀 사람 대접 못 받은 세월도 분하다. 지금은 크게 바라는 것 없다. 아들 재학의 죽음이, 5·18의 역사가 잊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지가 무식해서 무슨 할 말이 있당가요. 재학이 같은 선배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갔다는 걸 꼭 기억해 줬으면 좋겠지요. 그거면 됐어요.”

 

“무고한 사람들을 왜 그렇게 때린다요”…

박성용, 1963년 1월 26일~1980년 5월 27일

 

▲ 안종필 누나 안경순씨

 

성용이는 경찰이 되고 싶었다. 공부도 잘해 경찰대학을 지망했다. 천상 사내였다. 말이 없었지만 우직하고 인내심이 강했다. 한여름 폭염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 큰누나 박해숙(68)씨가 “안 더웁냐”라고 물으면, 성용이는 “여름이니까 덥지”하고 말았다. 자기 할 일은 알아서 했다. 주변 정리도 깔끔해 남동생 셋 중에 성용에게 유독 마음이 더 갔다. 그런 성용이가 27일 도청에서 끝까지 남아 계엄군과 싸우다가 총에 맞아 숨졌다. 시신도 열흘 뒤 망월동에서 찾았다. 제대로 된 관도 구하지 못해 박판(베니어·원목을 칼로 얇게 켠 것)으로 만든 관이었다. 썩은 피가 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장 귀하게 여겼던 둘째 동생 성용이는 그렇게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무자비한 실탄 발포가 있었던 21일 광주는 분노로 가득 찼다. 성용이도 마찬가지였다. 계엄군의 총칼은 아이와 여성, 노인을 가리지 않았다. 처참한 광경을 본 성용은 집에 와서도 잠도 못 자고 씩씩거렸다. 박씨도 분했지만, 동생 걱정이 앞섰다. “너같이 어린 것이 나가서 뭣을 하것냐. 너도 개죽음당하기 십상이여. 긍게 성용아. 지발 나가지 말고 집에 좀 있어라잉. 어미 말 좀 들어.”

 

▲ 26일 박지원 대안신당(가칭) 소속 의원이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보안사가 군의 정보활동을 위해 체증한 일자별, 시간대별 진압기록 사진 및 김대중 내란음모 사전 범죄 개요 수기, 군의 정훈활동 일지 등을 공개했다. /박지원 의원실 제공


어머니의 걱정에도 성용이는 자주 집을 나갔다가 돌아와 목격한 참상을 가족에게 얘기했다. 성용이는 자취하는 친구가 걱정된다며 26일 집을 나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도청에 들어간 것이다. 형들은 어린 성용을 집으로 보내려 했지만 성용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성용이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화병에 매일 술로 지새우다 1년 뒤 결국 숨을 거뒀다. 어머니는 재학이 엄마 김씨와 함께 5·18 참상을 알리려고 매일같이 시위현장에 나가 최루탄을 뒤집어썼다.

 

▲ 박군을 기리고자 고등학교 동창이 조대부고 교정에 세운 추모비. /유족 제공


그로부터 40년이 흘렀다. 얼마 전 조대부고 동창 150여명이 기금 3000여만원을 모아 2020년 5월 17일 성용이를 기리는 추모비를 교정에 세운다고 연락이 왔다. 그 옆에 학교 후배들이 쉴 수 있도록 ‘오월의 쉼터’도 만들었다고 한다. 누나 박씨는 지금 학생들이 5·18이 왜 발생했는지 원인과 결과까지 폭넓게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 5월 광주에 있었던 사실을 있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좋겠다고 했다. “지만원도 그렇고 우리를 여전히 빨갱이로 보는 사람이 있잖아요. 전혀 아니었어요. 광주사람들은 하나의 공동체였어요. 김밥이며, 음료수 값이며 돈 아까운 줄 모르고 내놨어요. 4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건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예요.”

 

가슴에 사랑 가득했던 아이, 도청에 남다…

안종필, 1964년 7월 3일~1980년 5월 27일

 

▲ 안경순씨

 

27일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시민군 가운데 교련복 차림의 소년이 있었다. 호주머니에서 얼마 전 산 교복 영수증과 500원, 그리고 인적 사항이 적힌 쪽지가 나왔다. 광주상고 1학년 안종필. 종필이는 계엄군이 몰려오는 날 도청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했다. 이 쪽지 덕에 가족들은 다음날인 28일 종필의 사망소식을 접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족들은 종필이를 찾아 수십일씩 헤맬 필요가 없었다. 죽음 직전에서도 가족을 배려한 종필이었다. 누나 안경순(63)씨 기억에 종필이는 참 사랑이 많았다. 동네 꼬마들이 코 흘리고 있으면 맨손으로 닦아 줬다. “더럽지도 않냐”고 물으면 “더럽긴요. 닦아 줘야죠”하고 종필은 답했다. 먹을 것 생겨도 자기 입으로 먼저 들어가지 않았다. 가족을 챙겼고, 배고픈 친구를 먼저 챙겼다. 어머니가 하는 식당에서 어려운 친구들 밥 먹이고 고기도 먹였다. 종필이가 엄마 심부름으로 고기 사러 가면 정육점 주인은 더 좋은 부위를 골라 줬다. 동네 사람들은 고기 살 일 있으면 종필에게 부탁했다. 한 번은 어머니가 다른 사람들 심부름까지 하는 게 언짢아 한마디 하면 종필은 “나 믿고 시킨 일을 어떻게 안 한단가. 그것 좀 해주믄 또 어찐단가. 엄마 그러지 마”라며 타박을 무색케 했다. 어머니 가게에 들어선 손님들은 종필이부터 찾았다. 누나 안씨는 인터뷰 내내 울먹였다. 인터뷰하고 나면 동생이 너무 보고 싶어져 처음엔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러나 동생의 흔적을 남겨야 했다. 그리고 남기고 싶었다.

 

▲ 안종필군의 누나 안경순씨가 소복을 입고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를 기리는 행사에서 추도문을 읽고 있다


종필이는 18일부터 시위에 참여했다. 참다 못한 어머니가 26일 종필의 신발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옷을 죄다 물에 담가도 종필은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입을 옷이 없어서 두꺼운 겨울용 교련복을 꺼내 입었다. 하필 아버지 기일이었다. 제사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27일 새벽, 총소리가 창문을 뚫었다. 어머니는 종필이가 죽었다고 직감했다. 28일 광주시청 간부에게서 연락이 왔다. 종필이 시신이 상무관에 안치됐다는 전보였다. 도청에 실려오는 무연고 시신을 보며 종필은 분노했을 것이다. 누나 안씨는 ‘자신마저 도청을 떠나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은 누가 돌보느냐’는 책임감으로 종필이 맞섰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종필을 신군부가 폭도라 몰았을 때 누나 안씨는 결심했다. ‘너는 절대 폭도가 아니다. 그러니 누나가 열심히 투쟁할게.’ 안씨는 유족회에서 수년간 총무를 맡아 줄기차게 싸웠다. 누나 안씨는 소년들이 정의감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야 살 만한 세상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좌우가 너무 극과 극으로 갈리니까 가슴 아파요. 서로 믿고 따듯한 사회가 와야 종필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은 거잖아요. 전두환부터 본인 입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제대로 된 처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 청소년들도 거짓됨 없이 진실한 삶을 살지 않을까요?”

 

□ 광주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광주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서울 손지민 기자 sjm@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