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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남북통일

[랭면과 철조망 ⑭] 평양에서 탄생해 서울에서 완성된 ‘핵주먹’

잠용(潛蓉) 2021. 12. 6. 14:48

[랭면과 철조망 ⑭] 평양에서 탄생해 서울에서 완성된 ‘핵주먹’
세계 최장 챔프 최현미, 파란만장한 인생역정 딛고 13년째 타이틀 지켜내
시사저널ㅣ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승인 2021.11.07 13:00 호수 1673

레프트 보디샷이 적중하자 탄탄한 근육질의 브라질 선수가 그대로 주저앉는다.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손맛’이 느껴질 만큼 강력한 한 방이다. 패자는 ‘뭐 이런 펀치가 있나’ 싶은 표정이고, 승자는 덤덤하게 글러브 낀 손을 치켜든다. 국내 유일의 세계 챔피언인 최현미(31)가 ‘또’ 승리했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20전 19승 1무의 무패 복서다. 무려 13년째 타이틀을 지켜왔다. 세계 최장(最長) 기록이다. 

ⓒ연합뉴스


체급 올리고도 9차례 방어 
처음 정상에 선 것은 2008년 10월 WBA 여자 페더급(57.15㎏) 챔피언 결정전이다. 당시 18세로 세계 최연소 챔프였다. 영국·일본·독일 등에서 귀화를 제의해 왔을 만큼 충격파가 컸다. 북한 평양에서 탈출해 온 지 4년. ‘대한민국 대표’로 당당히 세계를 평정했다는 자부심은 13년 동안 최현미를 이끌고 있는 원동력이다. 2013년까지 7차례 페더급 타이틀을 방어한 그는 그해 슈퍼페더급(58.97㎏)으로 한 체급을 올리고도 1인자가 됐다. 지난 9월18일 경기도 동두천에서 슈퍼페더급 9차 방어에 성공한 최현미는 ‘세계 최장 챔피언’ ‘21년째 무패’라는 전설을 그대로 이어가며 타이틀 방어 횟수만 15에서 16으로 수정했다. 경기 직후 최현미는 “사전 인터뷰를 통해 KO시키겠다고 했는데, (다짐대로) KO승을 거두게 됐다”며 승리가 당연한 결과임을 강조했다. 자신감의 배경에는 압도적인 실력과 훈련량이 있다. 
  
사실 이날 경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게 흘러가는 듯했다. 최현미는 프로 경력 33전의 베테랑 시모네 다 실바를 맞아 초반부터 강하게 밀어붙였다. 당초 목표가 5라운드 내 KO승이었기 때문이다. 다 실바는 노련미로 최현미의 잇따른 공격을 견뎌내며 승부를 장기전으로 끌고 갔다. 최현미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자 해설진은 오버페이스를 우려했다. 그러나 최현미는 최현미였다. 그는 “다 실바가 맷집이 세더라”면서 “그러면 (5라운드가 아닌) 10라운드까지 가자는 생각으로 임했다”고 말했다. 이어 “체력운동을 많이 했기에 오버페이스는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16차 방어는 만성적인 재정난, 코로나19로 인한 훈련의 어려움 등을 극복하고 이뤄낸 결과다. 국내에서 복싱은 비인기 종목이다. 여자 복싱은 더더욱 찬밥 신세다. 최현미에게 훈련보다 힘든 게 후원사 구하기였다. 복싱 규정상 챔피언은 의무적으로 방어전을 치르지 않으면 벨트를 반납해야 한다. 복싱 경기가 자주 열리지 않는 한국에서 경기 주최는 오롯이 챔피언의 몫이다. 시합 성사에 필요한 최소 비용은 1억5000여만원.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곳은 없었다. 

최현미는 16차례 방어전을 치르는 동안 그의 아버지 최영춘씨(57)와 매번 기업 등을 찾아다녀야 했다. ‘세계 타이틀을 지키게 해달라’고, ‘후원에 참여하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읍소하며 겨우 경기를 열었다. 최현미의 챔피언 유지 기간에 비춰볼 때 방어전 횟수는 타이틀 박탈만 간신히 피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게 복싱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슈퍼페더급으로 체급을 올리면서 페더급 챔피언 벨트를 내려놓을 때도 스폰서 유치의 어려움을 고려했다. 

▲ 최현미가 2008년 10월11일 처음 세계 챔피언(WBA 페 더급)이 되어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후원 유치·경기 성사 ‘첩첩산중’
간혹 후원을 요청하는 최영춘씨에게 “왜 딸에게 그런(험한) 운동을 시키냐” “딸이 맞으면서 번 돈을 어떻게 쓰냐” “시집이나 보내라”는 등의 말로 비수를 꽂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최현미는 2019년 시합 주최에 대한 부담을 줄이려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선 코로나19 팬데믹에도 무관중 복싱 대회를 개최하는 등 여건이 더 나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훈련에 전념하던 최현미에게 다시금 시련이 닥쳐왔다. 지난해 2월22일 미국에서 IBF 슈퍼페더급 챔피언인 마이바 하마두체(프랑스)와 통합 타이틀전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경기가 무기한 연기된 것이다.

 

올해 5월15일엔 영국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슈퍼페더급 WBA·WBC·IBO 통합 타이틀 매치가 개최 1주일을 앞두고 취소됐다. 상대 선수 테리 하퍼(영국)의 부상 탓이다. 최현미는 부푼 마음으로 영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딱 6시간 전에 경기 취소 통보를 받았다. 분위기 반전의 계기가 된 이번 방어전도 몇 차례 미뤄지고 한국, 미국 등 장소가 불분명하다가 가까스로 개최됐다. 최현미의 화려한 커리어 뒤에는 여전히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최현미는 “안타깝고 속상하다”고 토로하면서도 늘 그랬듯 묵묵히 인생의 링에 오른다. 특유의 쾌활한 웃음에선 자신감마저 느껴진다. 상대가 빨리 쓰러지지 않아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 경기 스타일 그대로다.

▲ 9월18일 경기도 동두천에서 WBA 슈퍼페더급 9차 방어에 성공한 최현미 ⓒ최현미 인스타그램


복싱으로 편견 ‘KO’… 통합 챔프 꿈꿔 
의연함의 비결은 역시 체력, 즉 인생의 내공이다. 1990년 11월 북한 평양에서 태어난 최현미는 이른바 ‘금수저’였다. 아버지 최영춘씨는 고위 공무원으로서 북한 경제의 핵심인 무역을 담당했다. 최현미가 11세 때 처음 복싱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극렬하게 반대했다. 복싱의 매력에 푹 빠진 최현미는 아버지 몰래 3개월간 복싱체육관을 드나들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었다. ‘올림픽에서 꼭 금메달을 따서 목에 걸어드리겠다’는 약속에 아버지는 ‘포기할 거면 시작도 하지 마라’라는 말로 허락을 대신했다. 

최현미의 복싱 경력은 하마터면 짧게 끝날 뻔했다. 2004년 2월 가족 전체가 탈북하면서다. 그들은 중국과 베트남을 거쳐 그해 7월 대한민국에 정착했다. 정착 초기 최현미는 복싱을 더 이상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운명처럼 복싱이 그를 따라왔다. 급격한 환경 변화, 생활고 등을 겪으며 최현미는 좋아하고 자신 있는 복싱으로 눈을 돌렸다. 타고난 재능에 ‘이 사회에서 성공하고 싶다’는 열망이 더해지자 복싱 실력은 무섭게 성장했다. 
 
서울체고에 진학한 최현미는 2006년 대통령배 전국시도대회 –57kg과 전국여자신인선수권 –60kg 및 2007년 대통령배 전국시도대회 –57kg,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회장배대회 –60kg에서 정상을 차지했다. 2007년 9월 프로로 전향한 뒤 1년여 만에 세계 챔프로 우뚝 섰고, 13년간 왕좌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가 굴복시킨 것은 상대 선수뿐만이 아니다. 탈북민, 그리고 동양인 챔프로서 받아야 했던 편견 어린 시선도 실력으로 뭉개버렸다. 

최현미의 당면 목표는 한 차례 무산된 WBA·WBC·IBO 통합 챔피언 등극이다. 이를 달성하고 나선 IBF까지 4대 기구 통합 챔프에 오르고, 한 번 더 체급을 높여 세 체급 최강자가 되겠다는 목표까지 세워 뒀다. 전 WBA 주니어플라이급 세계 챔피언 유명우(57)가 세운 국내 최다 17차 방어 기록 경신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유명우는 최현미의 주먹에 대해 “한번 꽂히면 링에 주저앉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고 평가했다. 평양에서 탄생해 서울에서 완성된 ‘핵주먹’은 앞으로도 수많은 역경을 KO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 

정치·사상적 목적으로 엘리트 체육 양성하는 北 
최현미, 11세 때 올림픽 유망주 발탁

북한의 엘리트 체육 정책은 대한민국과 비슷하다. 북한은 엘리트 체육 강화를 위해 각종 스포츠에 대해 체계적인 지도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온 나라에 체육 열풍을 일으킬 것’을 지시하는 등 선대보다 더욱 체육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2012년에는 국가체육지도위원회를 신설해 체육의 과학화와 엘리트 선수 양성을 도모했다. 통일부 북한정보포털에 따르면, 북한에서 운동선수 입문은 체육교사나 종목별 지도자에 의해 학교, 공장, 협동농장 등 현장에서 발탁되는 게 일반적이다. 개인이 학교체육소조 활동에 참가하는 방법도 있다. 체육소조는 운동에 관심 있는 학생을 중심으로 학교에서 이뤄진다. 

최현미도 평양 장원고등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2001년 한 감독의 눈에 띄어 복싱에 입문했다. 체육교사의 친구인 그 감독은 남다른 체격과 운동신경을 지닌 최현미를 한눈에 알아보고 복싱 선수의 길을 권유했다. 이에 최현미는 평양 김철주사범대학 부속중학교 복싱 양성반에 들어갔다. 여자 복싱의 2008년 베이징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 가능성을 바라보고 유망주를 키우는 곳이었다. 북한 당국의 안정적인 지원하에 온전히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고 최현미는 회상했다. 

상급 학교 진학, 직업 운동선수 선발 등 탄탄대로를 예약했던 최현미는 2004년 탈북과 함께 북한 엘리트 체육인의 길에서 벗어나게 된다. 북한 각 도에 위치한 체육전문학교와 평양체육대는 종목별 전문 훈련을 받는 일종의 체육영재 교육기관이다. 중앙기관에 설립된 중앙체육단, 도(직할시)체육단, 겸직 체육단은 성인 중심의 기관으로 국가대표 선수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일과 운동을 병행하거나 운동에만 전념하는 일종의 실업팀 형태로 운영된다. 

아울러 북한은 수준별로 우수 선수 등급을 규정하고 체육인 우대 제도를 펼치고 있다. 각종 국제대회에 참가해 우수한 성적을 낸 선수에게 ‘인민체육인’ ‘공훈체육인’ ‘체육명수’ 등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고 은퇴 후 생활도 보장해 준다. 다만 북한의 체육은 정치·사상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사회주의 헌법 제55조에는 ‘국가는 체육을 대중화, 생활화하여 전체 인민을 노동과 국방에 튼튼히 준비시키며 우리나라 실정과 현대 체육기술 발전 추세에 맞게 체육기술을 발전시킨다’고 명시돼 있다. 북한 주민들은 항상 국방체육, 집단체육, 군중체육 등에 강제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엘리트 체육인들도 철저히 체제를 위해 존재한다.  

아티스틱 스위밍(수중발레) 북한 국가대표 출신인 탈북민 류희진씨(30)는 “운동 중에 ‘생활총화’(주민들이 공개 석상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동료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의식)를 철저히 했고 체제 선전을 위한 공연에도 숱하게 동원됐다”며 “그럴 때는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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