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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불교·죽음

[불사 기와] 공사장 깔려 짓밟힌 1000장... "스님이 트럭에 싣고왔다"

잠용(潛蓉) 2021. 12. 18. 13:50

공사장 깔려 짓밟힌 기와불사 1000장... "스님이 트럭에 싣고왔다"
중앙일보ㅣ김서원 입력 2021. 12. 18. 05:00 수정 2021. 12. 18. 06:24 댓글 149개

□ 종교가 없었던 이모(67)씨는 십수 년 전 부모가 아프고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닥치자 불교 신자가 됐다. 한 달에 한 번씩 전국의 조계종 사찰을 다니며 기왓장에 가족의 이름과 주소를 적으며 건강을 염원했다. 사찰에서 건물 축조 등을 위해 신자와 관광객에게 소정의 금액을 받고 기와를 제공하는 ‘기와불사’를 한 것이다. 이렇게 모인 기와는 보통 법당 지붕을 이룬다. 이씨 역시 자신의 염원이 담긴 기왓장이 법당 지붕에 올라가 있다고 생각했다.

 

▲ 경기도 여주시 한 민가에 불사한 기와가 바닥에 깔려있다. /독자 제공

 

▲ 민가 공사현장 바닥에 깔린 기와에는 가족의 행복과 건강을 비는 소원과 함께 '부처님 많이 보살펴 주세요'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독자 제공

 

하지만, 이씨의 기원이 담긴 기왓장은 사찰과는 전혀 동떨어진 산속 어느 민가에서 발견됐다. 경기도 여주시 산속 외딴 공터, 이씨의 기와 외에도 기왓장 약 80개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기왓장에는 ‘사랑하는 나의 아들딸 00 00, 나의 남편 00. 늘 건강하고 행복하자’ 식의 소원이 적혀있었다. 시멘트에 묻힌 기왓장은 이곳저곳 밟혀 잉크가 지워지거나 일부는 파손되기도 했다. 공사현장에서 도보로 약 5분 정도 떨어진 산길에는 이런 기왓장 최소 1000장이 먼지가 쌓이고 나뭇잎이 덮인 채 방치돼 있었다. 이 기와들은 모두 자식의 입시, 가족의 건강과 행복 그리고 사업 번창 등 신도들의 소원이 적힌 기와불사였다. 법당 지붕 등에 있어야 할 기와들이 민가에 반출된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이다. 특히 상당수 기와에는 주소의 동호수와 생년월일까지 자세한 개인정보가 기록돼 있었다.

“10년 전, 아는 스님 통해 트럭에 실어와”
기와들이 사용된 민가의 소유주는 중앙일보에 “경기도 양평군의 한 사찰에서 약 10년 전에 가져왔다. 두 사찰 중 하나인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가깝게 지냈던 사찰의 부전스님(예불 집행 등을 담당하는 스님)이 오래된 기와들을 무료로 준다길래 트럭을 통해 운반했다”며 판매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의심되는 두 사찰은 모두 조계종 소속이다.

 

▲ 민가에서 도보거리에 위치한 한 산길에 기와불사 최소 1000장이 방치돼있다. /석경민 기자


두 사찰 중 한 곳은 이에 대해 “개인의 일탈일 수는 있지만, 스님들은 보통 4년마다 돌아다니기 때문에 10년 전 일은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면서 “개인들이 주소를 쓰고 신심 다해서 쓰는 기와인데, 사찰에서 그걸 함부로 반출할 수 없다”고 했다. 다른 사찰 측 역시 “사찰끼리 돕기 위해 남는 기와를 다른 사찰로 줄 수는 있어도 개인에게 반출한 적은 없는 거로 알고 있다”고 했다.

 

“생전 가족 위해 기도하시던 어머니 모습 떠올라”
외부에 반출된 기와를 불사한 신도들은 분노했다. 이씨는 “한글자 한글자 성의껏 글자에 마음을 담아서 불사했다. 영원히 법당 지붕에 올라가길 바랐다. 그런데 길바닥에 깔아서 짓밟힌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다”고 했다. 김모(66)씨는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살아생전 자식들 잘되라고 했던 기와불사다. 절하면서 우리의 건강을 빌어준 부모의 마음이었는데, 사찰에 있어야 할 기와가 왜 민가에 갔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을 보름 앞둔 3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수험생 가족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기사 내용과 관련없음. /뉴스1

불자인 박모(67)씨 역시 “십수 년 전 여행지의 유명 사찰을 다니며 기와 불사를 했다. 자식들이 입시를 앞두고 있을 때라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어느 부모든지 같은 마음일 것이다. 기도를 담은 정성이었는데, 그걸 아무렇게나 반출했다는 게 정말 황당하다. 불자로서 업무상 절차 등이 개선돼 이런 일이 반복되질 않길 바란다”고 했다.

 

▲ 민가에 반출된 기와의 대다수에 이름과 주소 등 개인정보가 적혀있었다. /석경민 기자


연락이 닿은 신자들은 대부분 전국 사찰을 돌아다니며 불사를 했기 때문에 정확한 사찰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다만 사찰 관계자에 따르면 기와가 부족하거나 남는 사찰의 경우 기와를 주고받기 때문에 한 사찰로 모였을 가능성이 있다. 조계종 관계자는 “기와불사는 일반적으로 법당 축조를 위해 쓰이는 게 맞다. 오래되거나 파손된 기와의 경우 각 사찰의 재량으로 폐기 처리된다”고 했다.

[석경민·김서원 기자 suk.gyeongm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