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노무현·DJ에겐 있고, 지금 민주당에 없는 것
한겨레 ㅣ성한용 기자 2022-07-17 07:30 수정 :2022-07-18 00:13
[한겨레S] 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437
정당의 존재 이유와 시대정신
‘중산층·서민 정당’으로 정권 창출
사람사는 세상, 사람이 먼저다 등
새 가치 제시할 때 다른 정당 압도
8·28 전당대회 시대정신 제시될까?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의원(가운데)이 11일 의원총회에서 윤석열 정부를 비판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정당은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결사체입니다. 정치적 이상이 없으면 정당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더불어민주당이 왜 5년 만에 정권을 잃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조국 사태로 드러난 정권의 위선, 부동산 정책 실패로 인한 정권의 무능 때문에 졌다는 진단이 있습니다. 맞는 분석입니다. 구도와 인물 대결에서 밀렸다는 진단도 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게 전부일까요? 혹시 좀 더 근본적인 다른 원인이 있지 않을까요?
민주당이 잃어버린 것
문재인 정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한 경제학자 홍종학 전 의원이 대통령 선거 직후 <민주당이 이기는 법―가치 선거 매뉴얼>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가치를 이야기하지 않는 선거 전략을 구사하면 김대중과 노무현과 같은 정치인은 더는 나오지 못한다. 선거 때마다 민주당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면, 국민은 민주당과 다른 당의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무엇으로 민주당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할 것인가?”
“보수는 현상을 지키는 정당이고 진보는 바꾸려는 정당이다. 진보는 바꿔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세계의 가치를 국민에게 설득시켜야 한다. 개혁을 받아들이기 주저하는 일반인들의 불안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진보의 꿈은 실현될 수 없다. 민주당에 유리한 구도와 인물은 가치 선거를 할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 문재인 정부 마지막 통일부 장관을 한 이인영 의원은 지난달 페이스북에 대선과 지방선거 패배 반성문을 연재한 일이 있습니다. 6월9일에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왜 졌는가? 첫번째, 민주당의 가치를 잃어버렸다. 대통령 선거 후, 지방선거 후 공통점은 기억에 남는 민주당의 주장, 그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제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패배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무엇을 주장했는지조차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에 더 가슴이 아픕니다. 가치의 깃발이 없으면 다시 시작하는 것조차 힘들기 때문입니다.” 8·28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에 도전하는 송갑석 의원은 7월13일 출마 선언에서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낮은 출산율, 불평등과 양극화의 심화, 세대와 젠더 갈등 등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진보와 개혁의 방향을 다시금 정립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산업구조, 일자리, 기후변화와 에너지 등을 둘러싼 거대한 변화는 민주당의 가치가 담긴 새로운 비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우리는 이 같은 요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대선 패배였습니다.”
세 사람 모두 민주당이 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가치’와 ‘비전’과 ‘시대정신’을 제시하지 못한 것을 대선 패배의 근본 원인으로 진단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민주당의 역사를 조금만 되짚어 봐도 이런 분석이 꽤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87년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하며 ‘계층’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평화민주당은 중산층과 노동자, 농어민 및 도시 서민의 권익을 적극적으로 대변할 것이다. 우리는 중소기업자, 봉급생활자, 상공인, 지식인 등 그동안 역대 정권에 의해 무시받고 소외되었던 사람들의 이익 신장이 사회 안정뿐 아니라 사회 정의를 위해서도 절대 필요한 과제라고 여긴다.”(평민당 창당 선언문)
▲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2월 25일 국회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평민당 이전 민주당 계열 정당의 정체성은 대부분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었습니다. 평민당의 계층 정체성은 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치에 복귀하며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로 이어졌습니다. 새정치국민회의는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었습니다. 새정치국민회의 당사가 있던 여의도 한양빌딩에는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라고 쓴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라는 이미지는 참신하면서도 강렬했습니다.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 아시지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정치부 기자였던 저는 아침에 여의도 근처 대방역에서 택시 합승을 해서 국회나 국민회의 당사로 출근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국민회의 당직자, 신한국당 당직자와 합승했습니다. 신한국당 당사는 한양빌딩 대각선 건너편 극동브이아이피빌딩에 있었습니다. 앞좌석의 국민회의 당직자가 택시 기사에게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 아시지요? 그리 갑시다”라고 호기롭게 외쳤습니다. 제 옆자리에 있던 신한국당 당직자는 혼잣말로 “아니 그럼 우리는 뭐 부자의 정당인가?”라고 투덜댔습니다. 신한국당 당직자가 출근길에 ‘의문의 1패’를 당한 것입니다. 저는 웃음을 참느라고 애를 먹었습니다.
그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은 1997년 대선에서 이겨 정권을 잡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했습니다. 총재로 취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천년민주당은 그 이념으로써 민주주의, 시장 경제, 그리고 생산적 복지를 지향하는 개혁 정당입니다. 새천년민주당은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중산층과 서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민 정당입니다.”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라는 민주당의 정체성은 이후 대선을 거치며 다양한 구호로 표출되었습니다. 2002년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내세웠습니다. 2012년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던 손학규 후보는 ‘저녁이 있는 삶’을, 문재인 후보는 ‘사람이 먼저다’를 내세웠습니다. ‘사람이 먼저다’는 2012년 대선에서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경제민주화’에 밀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17년 대선에서는 다른 정당과 후보들을 압도했습니다.
참신하고 강렬했던 깃발도 세월이 지나면 색이 바랠 수밖에 없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민당을 창당한 지 벌써 35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은 사람들의 가슴을 더는 설레게 하지 않습니다. 민주당에는 바야흐로 새로운 가치와 비전과 시대정신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민주당은 8월28일 새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합니다. 17일과 18일 후보 등록, 7월28일 예비경선입니다. 전당대회에 나서는 대표 및 최고위원 후보들이 어떤 가치와 비전과 시대정신을 들고나오는지 궁금했습니다. 7월15일까지 출마 선언을 한 후보들이 출마 선언문에서 밝힌 가치와 비전과 시대정신을 추려봤습니다.
[당 대표 후보]
―강병원 의원(서울 은평을·재선) “새로운 민주당, 유능한 민주당, 젊고 역동적인 통합의 리더십”
―박용진 의원(서울 강북을·재선)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아래에 위치해 있는 많은 노동자, 노동자로 분류되지 않는 새로운 노동자들과 젊은 청년들의 정당”
―강훈식 의원(충남 아산을·재선) “기본과 상식의 정치, 국민이 공감하고 쓸모있는 정치”, “진보의 재구성”
―김민석 의원(서울 영등포을·3선) “유류세 인하, 한국형 1만원 교통권, 8800만원 이하 소득세 조정 등 민생 회복을 최우선으로 권력 개혁과 정치 혁신”
―박주민 의원(서울 은평갑·재선) “경제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범국민적 공론화 기구’와 ‘사회적 의제 연석회의’”
―이동학 전 최고위원 “증오 정치, 혐오 정치, 패거리 정치와 결별”, “대안정당, 정책정당”
―박지현 전 비상대책위원장 “청년의 도전이 넘치는 ‘더 젊은 민주당’”
[최고위원 후보]
―정청래 의원(서울 마포을·3선) “당원이 주인인 정당”
―서영교 의원(서울 중랑갑·3선)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민생정당”
―장경태 의원(서울 동대문을·초선) “혁신 민주당, 메타 정당, 오티티(OTT) 정당, 마켓 정당”
―양이원영 의원(비례대표·초선) “탄소 중립으로 지속 가능한 대한민국”
―박영훈 대학생위원장 “청년과 청소년이 지지하는 민주당”
―윤영찬 의원(경기 성남중원·초선) “정의·민주·유능”
―고민정 의원(서울 광진을·초선) “‘민생정치연석회의’ 구성”
―고영인 의원(경기 안산단원갑·초선) “보편적 복지국가”
―송갑석 의원(광주 서갑·재선) “민생이 최고의 개혁”
―박찬대 의원(인천 연수갑·재선) “민생에 강한 유능한 민주당”
―이수진 의원(서울 동작을·초선) “민생회복 민생우선 정당”
―권지웅 전 비대위원 “을을 지키는 민생 최고위원”
―조광휘 전 인천시의원 “국회의원-지방의원 인격헌장 제정”
―김지수 ‘민주당 청년 출마자 연대 그린벨트’ 공동위원장 “도전하는 민주당”
다시, 시대 꿰뚫는 ‘가치 경쟁’ 가능할까?
어떻습니까? 민주당의 새로운 가치와 시대정신이 잘 보이십니까? 정치부 기자인 제 눈으로 보기에는 뭔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대표나 최고위원 후보로 나서는 사람들이 이 시대를 꿰뚫는 핵심 의제를 정확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출마 선언과 후보 등록을 할 사람이 몇명 더 있을 것입니다. 절대 강자인 이재명 의원과 중진 설훈 의원도 17일에 출마 선언을 합니다. 이재명 의원은 과연 어떤 가치와 비전과 시대정신을 들고나올까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지난 7월7일 우원식 의원이 전당대회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쓴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재명 의원이 출마한다면 대세가 아닌 명확한 대안을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설명해야 합니다. 여전히 대한민국을 바꿀 시대정신을 갖고 있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옳은 주문입니다. 이런 대목도 있습니다. “모쪼록 이번 전당대회가 세대, 계파를 불문하고 민주당다움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 앞으로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분명한 입장을 가진 분들이 신나게 경쟁하는 장이 되길 바랍니다.” 대표 및 최고위원 후보들이 명심해야 할 충고입니다. 지금 민주당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그저 그런 대표나 최고위원이 아니라 민주당의 새로운 가치와 비전과 시대정신을 높이 세울 수 있는 차세대 지도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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