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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1700년전 백제인들은 임진강변에 '작은 풍납토성'을 세웠다

잠용(潛蓉) 2022. 9. 2. 11:53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1700년전 백제인들은 임진강변에 '작은 풍납토성'을 세웠다… 아무도 몰랐다
경향신문ㅣ2022.08.23 05:00 수정 : 2022.08.23 08:34

 

▲ 경기 파주 적성 육계토성과 서울 풍납토성. 임진강변(육계토성)과 한강변(풍납토성)에 조성되어 있는 평지성이다. 크기는 육계토성(둘레 1.858㎞)이 풍납토성(둘레 3.5㎞)의 절반 규모이다. 육계토성은 ‘제2의 풍납토성’, ‘리틀 풍납토성’ 등의 별명이 붙어있다. /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리틀 풍납토성?’ ‘풍납토성의 재림?’ 7월 말 문화재청 소속 국립문화재연구원이 아주 심상치않은 보도자료를 하나 냈다. 임진강변인 경기 파주 육계토성 발굴조사에서 이 토성이 백제 초기(3세기 후반~4세기)에 축조된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이었다. 자료를 검토하던 필자의 시선이 꽂힌 부분은 토성을 쌓는 기법이었다. 흙을 다져 높게 쌓아 올리는 ‘성토기법’도 32m 정도 확인되었지만, 성의 출입구인 성문(동문터) 쪽 18m는 이른바 ‘판축기법’을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 육계토성은 풍납토성의 미니어처라 할만큼 입지조건과 형태가 흡사하다. 강변에 조성되어 있고, 주변에 산과 배후성이 있으며, 지배계급의 무덤인 적석총 등이 분포되어 있다.

■ 임진강변에서 왜 풍납토성이 나와?
‘판축(版築)’이 무엇인가. 나무판 등으로 틀을 사각형 형태로 만들고, 그 안에 넣은 흙이나 모래를 층층이 방망이 등으로 찧어 단단하게 쌓아올리는 축성기법이다. ‘달구질’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판축’하면 떠오르는 성이 있지 않은가. 바로 한성백제의 궁성인 ‘풍납토성’이다. 육계토성의 판축층에서 수습한 목탄의 탄소연대 측정 결과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으로 추정됐다. 성을 처음 쌓은 초축연대는 그보다 앞섰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요즘들어 풍납토성의 축성연대를 두고 설왕설래하지만 초축연대는 최소한 3세기 이전일 것이다.
따라서 한강변에 풍납토성을 세운 한성백제의 성 축조기법이 임진강변에 육계토성을 쌓을 때도 그대로 적용됐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디테일은 다소 차이가 있다. 풍납토성의 경우 성 전체를 판축기법으로 조성했다.

그러나 육계토성은 더 단단해야 할 성문 부근에 ‘판축(3.2×3.5m)기법’을, 나머지 부분은 흙을 단순히 쌓은 ‘성토 기법’으로 쌓아갔다. 아무래도 도성(풍납토성)보다는 품이 덜 들어갔다는 얘기다. 아무튼 현장을 본 연구자들은 육계토성의 발굴성과를 두고 ‘제2의 풍납토성’이니 ‘풍납토성의 재림’이니 하는 표현을 쓰고 있다.

전용호 국립문화재연구원 학예연구관은 “아직 발굴을 더 해봐야 육계토성의 초축연대를 가늠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성토 및 판축 부분의 연대 차가 있는 지도 더 알아봐야 한다. 단순히 흙을 쌓은 성토 기법이 먼저이고, 후에 더 선진적인 판축기법으로 보완한 것인지도 파악해봐야 한다. 이 육계토성은 1990년대에 들어서야 ‘풍납토성의 재림’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육계토성을 발굴을 자문했고, 인근 학곡리 적석총의 발굴을 책임진 당시 기전문화재연구원 김성태 연구실장(현 경기문화재단 수석연구원)은 이번 국립문화재연구원의 본격 발굴이 있기 전부터 ‘육계토성=리틀 풍납토성’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것이 이번 발굴 성과로 밝혀진 셈이다. 이렇게 학계에서는 나름 소문나있던 육계토성은 과연 어떤 성이었을까?

 

▲ 올해 국립문화재연구원의 육계토성 발굴에서 성벽의 중심축조연대가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육계토성의 판축층에서 수습한 목탄의 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이다.특히 육계토성은 흙을 단순히 쌓은 성토구간과 함께 단단하게 쌓은 판축구간도 함께 확인됐다. /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 대홍수 때문에 드러난 한성 백제인의 삶
예부터 경기 파주 적성 주월리 임진강변에 아주 수상한 성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조선의 문인·학자인 미수 허목(1595~1682)은 “사미천(임진강 지류) 변에 만호(萬戶·고려 무관직)가 지키던 보루가 있는데, 맞는 지 모르겠다”(<기언별집>)고 했다. 지리지인 <여지도지>(1765년)는 “적성현에 둘레 7692척에 달하는 옛 성(육계토성)이 있고, 성의 초석이 남아있는데, 마을 주민들은 옛 궁궐터라 하지만, 고려 때의 별궁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임진강변에 언제, 누가 쌓았는지 모르는 옛 성터가 남아있는데, 고려시대의 성이라는 추정이 구전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던 1993년 윤무병 충남대 교수(1924~2010)가 ‘고구려와 백제의 성곽’이라는 글에서 심상치않은 내용을 얹어놓는다.
“풍납동 토성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유적이 1곳 있는데 경기 연천 적성읍 서북방에 해당되는 임진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그 존재가 학계에 알려져 있지 않지만 5만분의 1 지도에 육계토성터라고 표기되고 있다.”

 

▲ 육계토성에서는 판축기법과 성토기법이 함께 쓰였다. 단단하게 쌓아야 할 성문 구간에는 판축으로, 다른 구간은 성토기법으로 쌓았다. /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윤무병 교수의 간단한 언급 이후 육계토성은 서서히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던 1996년 엄청난 집중호우가 임진강 유역을 덮쳤다. 340~600㎜나 되는 비가 7월26~28일 사이에 매일같이 쏟아졌다. 3일간 내린 강우량은 연평균 강우량의 50%에 달했다.

한달여가 지난 8월 말 민통선~비무장지대 일대 자연 및 역사유적에 정통한 이우형씨가 홍수로 엉망이 된 지점들을 답사했다. 그런데 수마가 할퀴고 간 육계토성의 바닥층에서 엄청난 양의 토기편과 철제유물들이 노출되어 있는 것을 목도했다.

이우형씨의 신고를 받은 경기도박물관의 긴급 수습 조사가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경작지이니까 빨리 조사해달라”는 주민들의 재촉이 빗발쳤다. 그러나 파면 팔수록 유구와 유물이 쏟아지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홍수로 마구 떠내려온 지뢰가 유적 전체에 나뒹굴어 있었다. 지뢰는 널려있고, 조사구역은 넓고, 시간은 없고….

경작지를 복구해야 수해에 따른 보상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이었으니 주민들의 불만도 쌓여갔다.
그해 12월 한양대박물관의 조사구역에서 중장비와 덤프트럭이 나타났다. “지금 복토하지 않으면 내년 농사 망친다”는 주민들의 항변이었다. 이때 이 구역 발굴을 책임졌던 한양대문화재연구소 소속 황소희 연구원(작고)이 막 복토를 위한 흙을 쏟아부으려던 덤프트럭을 몸으로 막아섰다. 황 연구원은 ‘차라리 나를 묻으라’는 듯 트럭 뒤에 앉아버렸다.

덤프트럭이 ‘방형과 여(呂)자’ 형 주거지 바닥면이 잘 남아있는 유구에 흙을 막 쏟아부을 참이었다. 자칫하면 흙더미에 깔릴 판이었지만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경지정리반도 유적을 사수하겠다는 연구원들의 ‘항전’에 두 손 들고 말았다.

 

▲ 육계토성의 판축구간. 한성백제의 도성인 풍납토성은 전체를 판축기법으로 쌓았다. /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 임진강변에서 보이는 고구려계 적석총
사실 윤무병 교수가 육계토성을 두고 입지가 풍납토성과 비슷하다고 운을 뗀 이유가 있었다.
육계토성과 풍납토성의 항공사진과 지도를 보자. 풍납토성은 북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강안을 따라 축조된 평지성이다.
그런데 육계토성 역시 북서쪽으로 임진강이 굽이 돌아가는 강안을 따라 축조된 평지성이다. 두 성 모두 도강이 가장 유리한 교통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두 성 모두 평지성인 토성이면서 청야수성을 위한 산성을 배후에 두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풍납토성의 배후에 남한산성, 육계토성의 뒤에 칠중성이 버티고 있다. 청야술은 외부세력이 침공하면 식량과 같은 보급품을 모조리 없앤 뒤 모든 백성이 배후산성에 들어가 농성하는 전술이다. 고조선과 고구려 등이 한과 수·당 등 중국 세력과의 다툼에서 즐겨 쓴 전술이 바로 청야술이었다.

두 성의 공통점은 또 있다. 인접지역에 고구려계 적석총이 분포하고 있다. 개풍 장학리(북한)~연천 횡산리~삼곶리~삼거리~우정리 1·2호분~동이리~학곡리 적석총 등 8기가 7㎞ 정도 간격으로 확인됐다. 한탄강의 전곡리 적석총까지 포함하면 9기나 된다. 적석총의 연대는 기원후 1~2세기로 편년된다. 왜 고구려계 적석총이 임진강변에 보일까?

 

▲ 풍납토성의 판축 복원모형. ‘판축(版築)’은 나무판 등으로 틀을 사각형 형태로 만들고, 그 안에 넣은 흙이나 모래를 층층이 방망이 등으로 찧어 단단하게 쌓아올리는 축성기법이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 하북 위례성일까?
백제의 창업주인 온조왕(기원전 18~기원후 28)과 그 형 비류(생몰년 미상)는 고구려 창업주 추모왕(기원전 37~기원전 19)의 두 아들이다. 두 형제가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부여로 망명한 뒤 고구려를 세운 아버지의 뒤를 이을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동부여에서 태어난 아버지의 첫아들(유리왕·기원전 19~기원후 18)이 나타나자 상황이 변한다. 아버지가 유리를 태자로 세운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온조왕’조는 “온조와 비류 세력은 (어느날 갑자기) 태자가 된 유리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 하여 오간·마려 등 10명의 신하들과 함께 남하했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남하한 온조·비류 세력의 첫번째 정착지가 바로 임진강변 육계토성은 아니었을까?
그 남하세력과, 그 후손들이 기원후 1~2세기 순차적으로 묻힌 것이 아닐까. 뭐 이렇게 상상해볼 수 있다.

풍납토성 인근은 어떨까. 일제 강점기 자료를 보면 석촌동과 방이동·가락동 일대에 근초고왕(346~375)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을 포함해서 무려 293기의 적석총이 석촌동과 방이동·가락동 일대에 흩어져 있었다.

또하나 토성 안에 대규모 취락지가 확인된다는 점도 같다. 육계토성 내에는 한성 백제 시대의 토기가 포함된 ‘방형과 여(呂)’자형 주거지들이 확인됐다.
무엇보다 육계토성(둘레 1.858㎞)은 풍납토성(둘레 3.5㎞)의 절반 규모이다. 그래서 육계토성에 ‘작은(리틀) 풍납토성’이라는 별명을 붙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육계토성=하북위례성’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
즉 <삼국사기> ‘백제본기·온조왕’ 조는 “기원전 18년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았다”면서 “(13년 후인) 기원전 6년 ‘낙랑과 말갈의 침공 때문에 한강 남쪽에 기름진 땅으로 도읍을 옮긴다”고 했다.

따라서 기원전 18~기원전 6년 사이 13년간의 도성을 하북위례성으로, 그 이후의 도성을 하남위례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백제 창업 당시의 ‘하북위례성=육계토성’으로 보는 견해가 나왔다. 물론 아직까지 ‘육계토성=하북위례성’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포착하지 못했다.

 

▲ 육계토성에서는 한성백제 시대의 주거지인 凸자형과 여(呂)자형 주거지가 확인됐다. 도성인 풍납토성에서도 역시 엄청난 규모의 주거지가 보였다. /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끈 기리영 전투
다만 이번 국립문화재연구원의 발굴 성과로도 의미있는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
즉 3세기 중후반~4세기 전반이라는 성벽 축조의 중심연대만으로도 숱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무려 53년간 재위하면서 백제 고대국가의 기반을 닦았다는 평을 듣는 고이왕(234∼286)을 소환해본다.

주지하다시피 백제는 마한 소국 54개국을 야금야금 복속시켜 세력을 키워갔다. 그중 246년(고이왕 13) 8월에 있었던 이른바 ‘기리영 전투’를 계기로 임진강~한강 사이의 요충지를 차지하는 한반도 중북부의 패자로 발돋움한다. 이때의 <삼국사기>와 <삼국지> 기록은 워낙 복잡하다.
당시 고대국가로 발돋움하던 백제 고이왕의 기준에서 정리해보자. 즉 한나라는 부종사 오림(생몰년 미상)을 파견, 마한의 8개국을 강제로 낙랑에 귀속시키려 한다. 마한 8개국이 어디일까?

<삼국지> ‘한전’은 마한 54개국을 나열하면서 첫번째부터 원양국→모수국→삼외국→소석색국→대석색국→우휴모탁국→신분고국→백제국(伯濟國) 순으로 배치했다. 연구자들은 대체로 <삼국지>가 마한의 북쪽 소국부터 열거한 것으로 해석한다.

 

▲ 육계토성 주거지에서 확인된 한성백제 시대 토기류. 고구려에서 남하한 초기백제인들의 삶을 가늠해볼 수 있다. /경기도박물관 조사자료

이중 8번째로 나열된 백제국이 주목을 끈다. 그러니까 한나라가 강제로 낙랑에 복속하려 한 마한 8개국은 ‘원양국에서 한강 이남에서 성장 중인 백제국까지’를 의미한다. 그렇게 한나라가 마한 8개국을 강제 복속시키려고 낙랑·대방군의 군대를 파견하자 마한 제국이 가만 있지 않았다.

마한 제국은 당대 유력세력으로 부각된 백제국 고이왕을 ‘신지(臣智·수장 혹은 제사장)’로 추대하면서 마한 연합군을 이끌게 한다. 고이왕은 백제국의 북부 세력 가문의 장수인 진충을 연합군 사령관으로 임명해서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한다.

이것이 기리영 전투이다. 백제 고이왕이 이끄는 마한 연합군은 대방·낙랑군과의 첫번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한나라군은 이때 대방 태수 궁준이 전사하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소기의 성과를 이룬 고이왕은 “더이상의 확전은 곤란하다”면서 전투를 멈추려 했다.

그러나 다른 마한 제국은 고이왕의 말을 듣지않고 독단적으로 낙랑·대방군과 전투를 계속하다가 대패하고 만다. 이에 고이왕은 지원군을 보내 전멸의 위기에 처한 마한 제국을 구한다. 이 기리영 전투를 계기로 마한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반면 고이왕의 입지는 더욱 높아져 명실상부한 마한의 패자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 육계토성 한성백제 시대 주거지에서 확인된 각종 유물들,|경기도박물관 조사자료

■ ‘리틀 풍납토성의 주인은?’
오죽하면 기리영 전투에서 쓴맛을 본 대방군 태수가 자신의 딸(보과)을 백제 태자(책계왕·286~298)에게 시집보냈다.
대방의 요청으로 결혼동맹을 맺은 책계왕은 즉위하자 마자(286년) 대방군이 고구려의 침략을 받자 “대방과 백제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니 그 요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지원군을 파견했다. <삼국사기>는 “이때 패한 고구려가 백제를 크게 원망했다”고 기록했다. 백제는 이때부터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이루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때 기원 전 후에 비류·온조 등 선조들의 남하 루트이자 첫번째 정착지였던 바로 그곳, 임진강변에 토성을 쌓았던(혹은 수축) 것이 아닐까. 풍납토성을 방불케 하는….

마한 54개국을 차례차례 병합한 백제는 기본적으로 지방분권제도를 채택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다면 그 중에서도 ‘제2의 풍납토성’, 즉 ‘리틀 풍납토성’을 다스린 세력은 누구일까? 어떤 연구자(정재윤 공주대 교수)는 기리영 전투(246년) 때 연합군 사령관을 맡은 진충의 가문을 눈여겨 보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충(眞忠·생몰년 미상)은 대대로 백제의 북부 지역을 담당한 가문의 후손이다.
기리영 전투(246년 8월)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진충이 우보(우의정)로 승진하고, 좌장 자리에 같은 진씨 가문의 인물인 진물이 승진 임명된다. 기리영 전투 발발 6개월 뒤인 247년 2월의 일이다.

그런데 이 진씨 가문은 백제의 북부지역을 관장한 가문이었다. 예컨대 <삼국사기> ‘다루왕’조는 “기원후 37년(다루왕 10) 북부(北部) 진회를 우보(우의정 역할 추정)로 삼는다”고 했다. 또 “214년(초고왕 49) 북부의 진과가 군사 1000명을 이끌고 말갈의 석문성을 공격했다”(<삼국사기> ‘초고왕’조)는 기록도 있다. <삼국사기>에서 보듯 백제의 대성팔족 중의 하나인 진(眞)씨는 백제의 북부지역을 관장한 가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육계토성을 다스린 가문은 대대로 백제 북부지역을 관할했고, 246년 벌어진 기리영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진씨 가문이 아니었을까? 물론 ‘육계토성=하북위례성’이며, 고구려에서 남하한 백제의 왕족이 이 육계토성을 관장했을 것으로 보는 연구자(김성태 경기문화재단 수석연구원)도 있다.

<삼국사기> ‘비류왕’조는 “321년(비류왕 18) 왕의 이복 아우인 우복이 내신좌평으로 임명됐고, 6년 뒤인 327년(비류왕 24) 우복이 북한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북한성’이 바로 한때는 하북위례성이었던 ‘육계토성’이라는 것이다. 물론 ‘진씨 가문설’이나 ‘백제 왕족설’은 문자 그대로 아직 ‘설’에 그치고 있다.

 

▲ 육계토성에서 확인된 고구려 토기들. 396년 광개토대왕의 남침 이후 육계토성은 잠시나마 고구려인들이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경기도박물관 조사자료

■ 백제의 북벌을 위한 거점성
그러나 어떤 경우든 이쯤에서 제기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있다.
즉 기리영 전투를 계기로 임진강~한강 유역 사이를 차지하고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 한성백제가 이제 본격적으로 고구려를 겨냥한 북벌에 나서기 위한 거점성으로 활용하려고 육계토성을 쌓은(혹은 수축한) 것이 아닐까?

이 성을 바탕으로 근초고왕과 그 아들 근구수왕(375~384)이 북벌에 나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백제 최전성기를 이룬 것이 아닐까. 그리고 육계토성의 주거지 내에는 390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고구려 토기가 확인됐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396년(광개토대왕 6) 고구려가 한성백제를 공격해서 58성 700촌을 빼앗았다.

비문에서 거론된 58성 가운데 2~3번째 성인 구모로성(臼模盧城)과 각모로성(各模盧城) 중 한개 성이 육계토성이었을 것이다. 어떤가? 이것이 이번 국립문화재연구원의 육계토성 발굴성과와 역사기록을 토대로 복원해본 스토리텔링이다.
발굴 현장을 본 연구자들의 코멘트와 논문, 그리고 그들의 도움말에 따라 한번 이야기를 꾸며봤다. 발굴 결과에 따라 과장이거나 거짓말로 판명될 수도 있음을 분명히 밝혀둔다. 후속발굴에서 더 이른 시기의 유구와 유물이 확인될 수도 있다.

(이 기사를 위해 전용호 국립문화재연구원 학예연구관과, 김성태 경기문화재단 수석연구원, 권오영 서울대·신희권 시립대·정재윤 공주대·최종택 고려대 교수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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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백종오·신영문·오강석, <파주 육계토성>(경기도박물관 유적조사보고서 24책), 경기도박물관, 2006
□ 기전문화재연구원, <경기 학곡리 적석총 보고서>(학술보고서 38책), 2004
□ 김성태, ‘삼국사기의 북한산성에 대한 역사고고학적 고찰’, <북한산성 연구논문집>, 경기학연구센터, 2016
□ 정재윤, ‘초기백제의 성장과 진씨 세력의 동향’,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29권, 호남사학회, 2007
□ 정재윤, ‘위의 대한정책과 기리영 전투’, <중원문화연구> 5,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2001
□ 윤무병, ‘고구려와 백제의 성곽’, <백제연구총서>3권, 충남대 백제연구소, 1993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명상음악/ 홀로 앉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