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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헌터

[본헌터 ⑬] 왜 소리 없이 도망갔을까, 역사상 빛나는 겁쟁이

잠용(潛蓉) 2023. 9. 9. 09:06

[본헌터 ⑬]  왜 소리 없이 도망갔을까, 역사상 빛나는 겁쟁이 
한겨레ㅣ2023-08-07 11:00 수정 2023-08-07 11:12


[역사 논픽션 : 본헌터 ⑬] 나는 판사다
일등으로 도망간 이들의 거짓말에 속아 피난을 안 갔더라면

 

▲ 전쟁이 터지자마자 수원으로, 대전으로, 대구로, 다시 대전으로, 이리로, 목포로, 부산으로 도망간 이승만 대통령. 1950년 8월 15일 대구에서 열린 국회 개회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 국가기록원 제공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내 이름은 병진이다.
공산주의를 싫어한다. 금덩이를 준다 하더라도 공산 지배 아래서 살고 싶지 않다. 운명의 날인 1950년 6월28일,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한강을 건널 것이냐 말 것이냐. 서울에 남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느덧 거리에선 붉은 기를 매단 자동차가 달리고 있었다.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나를 붙잡고 이렇게 물어볼 것만 같았다. “혹시 판사님 아니시오?” 나는 결단했다. 차라리 생명을 걸고 모험을 택하는 편이 낫다고. 오늘 밤 한강을 건너 수원까지 가리라 결심했다. 한남동 나루에 다다랐다. 한강은 유달리도 아름답게 흐르고 있었다. 나는 배에 몸을 던졌다.

내 고향은 이북이다. 1914년 함경남도의 소도시 함주에서 태어났다. 1939년 함주 동쪽 함흥에서 관리를 뽑는 보통시험에 합격했다. 일본에 유학을 갔다. 1943년,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1946년, 판·검사 단기양성을 위해 설립한 사법요원양성소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1948년 4월1일, 서울지방심리원 옹진지원 판사가 되었다. 1949년 11월15일, 서울로 자리를 옮겼다. 서울지방법원 판사가 되었다.

그렇다. 나는 엘리트였다. 서울에 온 뒤 7개월만에 전쟁이 터졌다. 전쟁의 포화는 엘리트라고 피해 가지 않았다. 6월25일 일요일 오후3시경 종로 번화가엔 벽보가 붙었다. “오늘 새벽을 기해 인민군은 38선 전 지역으로부터 남침하였으며 개성시는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불안했지만 별스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곧 국군에게 격퇴당하리라 굳게 믿었다.

다음날인 26일 정동에 있는 법원에 출근했다. 정부는 지난밤 수원 천도를 결정하였고, 정부 인사들은 이미 수원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라디오에선 일본으로부터 미군 전폭기가 출동하여 인민군을 공격할 예정이라 걱정할 게 없다고 했다. 우리는 법원을 사수하기로 하고, 내일도 전원 출근하기로 했다.

꽝, 뽕, 땅.
27일, 제멋대로 포탄이 퍼부어졌다. 외출할 수가 없었다. 출근을 결의했으나, 신당동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가족들은 옷 보따리를 꾸려 옆 콘크리트 건물 속으로 들어갔다. 거리에는 피난민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포탄은 점점 가까워졌다. 아내는 피난을 가자고 졸라댔다. 나는 말했다. “놈들이 아무리 발악을 하더라도 수도 서울은 그렇게도 손쉽게 빼앗을 수 없을 거야.”

 

▲ 한국전쟁, 피난민들의 행렬. /사진 국가기록원 제공


28일, 아침 일찍 일어나 이웃집에 들렀더니 아무도 없었다. 큰길로 나가봤다. 5~6명씩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어젯밤 이승만 대통령의 방송이 있었어. 오늘 새벽엔 미국 응원부대가 서울에 도착할 터이니 시민은 안심하라 하셨는데 정말로 미군 응원부대가 신당동까지 들어왔다지. 이제는 어떻게 놈들을 쳐부수겠지.”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포탄 소리는 격렬해졌다. 피난민들은 건물 속으로 숨느라 난리였다. 시가전을 하는지 소총 소리까지 난무했다.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 화장실 뒤에 물끄러미 앉아 생각을 해보았다. 약 한달 전 국방장관 성모는 진격의 명령만 떨어진다면 며칠 안 되어 북한을 휩쓸 거라고 호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탱크 한 대도 없었단 말인가. 아아, 우리 국군은 왜 멍하니 있었단 말인가. 도대체 정보기관은 잠자고 있었단 말인가. 그런 형편에 서울은 문제없다는 허언망담, 가짜뉴스는 웬 말이던가. 솔직하게 전황이라도 알렸다면 대부분 피난이라도 하였을 게 아닌가?

아내를 남겨두고 나는 한강을 건넜다. 흰 셔츠, 흰 바지, 반짝이는 구두, 헐어빠진 등산모. 오늘 새벽에 한강다리를 폭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수원으로 방향을 정했다. 관악산 근처에서 사법요원양성소를 함께 다녔던 봉제를 만났다. 반가웠다. 과천까지 함께 가서 하룻밤을 보냈다.

29일 수원까지 걸어간 뒤 기차를 타고 천안까지 갔다. 천안지청을 찾아 역시 사법요원양성소 출신인 완민을 찾아갔다. 나를 보더니 의아해했다. 오늘 아침 “서울 상공에서는 미군 비행기 백여대가 인민군을 폭격하여 이를 전멸상태에 이르게 하였다. 국군은 이미 반격태세를 갖추어 있으며 하루 이틀 새에 서울을 탈환할 수 있을 것이니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라”는 방송이 나왔다고 했다. 대통령 승만은 27일 새벽2시 특별열차를 타고 대전에 가 있었다. 대전에서 가짜뉴스를 내보내고 있음을 나중에 알았다.

 

▲ 1950년 7월 20일 마을을 통과하며 전진하고 있는 미군 탱크. /사진 국가기록원 제공

 

오후 5시경 해가 질 무렵 어디선가 마이크 소리가 울려왔다. “여기는 천안경찰서입니다. 지금 들어온 경찰 정보에 의하면 국군은 반격을 감행하였으며 서울 탈환도 목전에 있다고 합니다. 친애하는 피난민 여러분. 안심하시고 도로 올라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피난 열차가 도착할 때마다 이러한 선전을 되풀이했다. 완민이도 나에게 올라갈 것을 권유했다. 국군이 선전한다고 하니 적잖이 안심됐다. 천안까지 온 마당에 온양온천에나 들렀다 갈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정부를 믿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순진하고 우매했다.

그래도 정부 소재지가 된 대전까지 가보기로 했다. 열차를 타고 대전에 도착해 재판소를 찾았다. 각 대법관과 행정처장, 서울지방법원장님도 계셨다. 다른 행정부도 모두 도청에 와 있다고 했다. 피난 여비도 받고 여관에서 잠도 잤다. 그러나 다음날인 30일 오전 재판소로 가보니 방이 모두 텅텅 비어 있었다. 새벽에 정부가 이동했다는 거였다. 이동장소는 비밀이라고 했다. 왜 정부는 소리 없이 갔을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그 누구에게 지지 않을 역사상 빛나는 겁쟁이였다.

“이 땅에 구세주를 내려주시옵소서.” 나는 이렇게 천주님께 빌며 걸어가다가 전신주에 부딪히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어디로 갈 것인지 궁리를 해보았다. 봉제가 제안했다. 이렇게 된 마당에 배라도 타려면 부산으로 가는 게 상책이라고.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겨우 잡아탔고, 7월부터 그곳에서 안정을 찾았다. 7월10일 부산지방법원 판사 직무대리로 일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판 사무는 한가하기 짝이 없었다. 전황은 점차 가열되었다. 놈들의 부대는 호남을 휩쓸고 진주를 거쳐 마산 근교까지 이르렀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포항, 영천, 왜관 등에서 뼈 맺히는 일진일퇴가 반복된다고 했다.

 

▲ 한강 근처 피난민들의 모습. /사진 국가기록원 제공


어느 날 퇴근하다가 법원 선배를 만났다. 화제는 돌고돌아 비상조치령 위반범 처리에 이르렀다. ”여보게, 자네는 만약 후퇴하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하였을테야?” 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선 우익인사들의 자수와 이른바 명사들의 반역 방송이 화제였다. 놈들의 지배하에 있는 몸으로서 불행히도 신변이 대단히 위태하여 체포당할 염려가 농후하였을 때 자수하거나 협조하지 않으리라 단언하지 못하겠다. 좋은 일은 없겠지만 단순한 자수나 소극적 협조야 별로 문제가 없을 것이 아닌가?

부산에서 동료들과 한담을 할 때면 이런 말들도 오갔다. “여보게, 자네 부인은 하도 잘 났기에 인민군의 물건이 되었을 거야.” “그렇게 됐을지도 모르겠네. 그러나 같이 살기까지야 하겠나. 설마 욕을 당한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은 다만 목숨이 아깝고 아이들 걱정 때문에 부득이한 것이겠지. 가족을 버리고 혼자 나온 나로서는 무슨 할 말이 있겠나.”

9월이 되었다. 일진일퇴는 여전하였다. 경주, 경산을 거쳐 마산. 최후의 선이 무너질지도 몰랐다. 어디선가 상륙작전설이 떠돌았다. 9월15일이었다. 거리에 쏟아지는 호외, 군중들의 환희. “야, 인천상륙이다! 인천상륙이다!” 뉴스는 순식간에 전 부산을 휩쓸었다. 모든 고뇌가 이슬처럼 사라졌다. 우울에서 명랑으로. 모든 생물은 소생한 듯했다. 이때만 해도 몰랐다. 부역자 처단을 놓고 몸서리치게 고민할 줄은. <다음 회에 계속>

※ 이 글은 유병진 판사가 쓴 <재판관의 고민>(신동운 편저, 법문사, 2008)을 발췌, 재구성하고 <법률가들>(김두식 지음, 창비, 2018)을 참고해 썼음을 밝힙니다. 출판사와 편저자의 허락을 얻었습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