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용의 타임머신... 영원한 시간 속에서 자세히보기

★본헌터

[본헌터 30] 미군 유해를 향한 여인의 불가사의한 집념

잠용(潛蓉) 2023. 10. 14. 10:50

 [본헌터 30] 미군 유해를 향한 여인의 불가사의한 집념
한겨레ㅣ2023-10-11 11:00 수정 2023-10-11 11:10


[역사 논픽션 : 본헌터 30] 묘숙과 장진호
“발굴팀 이끌고 북한 가달라”는 소망, 창녕 박진고개를 떠올리게 하다

▲ 생전에 부산 남구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에서 남편이었던 위트컴 장군 묘역에 헌화하는 묘숙. 2012년 10월24일 사진이다. /연합뉴스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빨간 가죽 재킷에 미니스커트가 압도적이었다.
선주는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몰라 잠시 허둥거렸다. 마주 앉은 여인은 묘숙이었다. 1927년생. 2008년이었으니 80살이었다. 빨간 하이힐도 눈을 찔렀다. 자그마한 체구에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자태였다. 팔순이라는 나이를 잊게 했다. 묘숙이 일어나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처음 전화가 왔을 때 누군지 알아채지 못했다. 묘숙은 북한에서의 유해발굴에 관해 의논하고 싶다고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고 했다. 서울 용산의 미8군 장교클럽에서 만난 묘숙은 거침없이 솔직했다. 이화여전에 다닐 때 양반가인 민씨 집안 남자와 결혼했는데 남편이 집안에서 일하는 여자아이를 건드리자 묵과할 수 없어 결혼생활을 접었노라는 이야기도 했다. 선주가 알아보니 묘숙은 오래된 사회사업가였다. 무숙의 동생이자 말숙의 언니이기도 했다. 둘 다 소설가였다. 그리고 화제를 몰고 온 위트컴과의 러브스토리와 결혼.

위트컴은 한국전쟁때 유엔군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근무했던 미군 장성으로 ‘전후 재건의 영웅’으로 불렸다. 그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부산에서 각종 선행과 기부로 한국인들에게 천사의 이미지를 남겼다. 특히 1953년 11월27일의 부산역 대화재로 6000여 세대 3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미군 창고를 열어 천막과 음식을 제공한 일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위트컴은 준장으로 퇴역한 뒤에도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민간 차원에서 한국의 재건과 부흥 원조를 목적으로 하는 한미재단을 만들어 전쟁고아를 위한 보육원을 설립하고 후원했다. 위트컴은 대통령 승만의 정치고문으로, 경무대(현 대통령실)에 근무하며 미국과 연락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묘숙은 충남 천안과 서울 한남동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위트컴의 후원을 받은 일이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했다. 둘 다 재혼이었다. 1964년 결혼할 때 두 사람의 나이 차는 31살. 묘숙은 노랑머리 아이를 태어나게 할 수 없다는 가족들에 의해 반강제로 자궁적출 수술까지 받았다고 했다. 묘숙은 선주에게 북한행을 제안했다. “장진호에 남은 수천 구의 미 해병대원 유해를 꼭 데려와야 한다”는 게 1983년 7월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남편의 유지라고 했다. 위트컴은 군수보급 전문가로서 장진호 전투에 참전한 미해병 1사단의 군수품 보급에 관여한 듯 했다. 1996년부터 2005년까지 미국과 북한이 장진호 인근과 평안북도 운산 등에서 공동유해발굴 작업을 벌여 229구를 찾았다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묘숙은 이를 위해 1990년부터 25번이나 미국에 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선주에게 발굴팀을 이끌고 북한에 갈 수 있겠냐고 넌지시 물었다. 시기적으로 안 좋았다.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가 피격된 사건이 벌어진 지 얼마 뒤였다. 남북관계가 급속히 냉각되고 있었다.

게다가 북한에서 미군 유해를 한국인이 책임지고 발굴한다는 건 ‘미션 임파서블’임을, 선주는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선주는 박진고개에서 미군 유해를 발굴했던 일을 눈앞에 그렸다. 2002년 9월 초순이었다. 선주는 박진고개에 있었다. 경남 창녕군 대합면 이방리 태백산에 위치한 곳이다. 그즈음 쏟아진 폭우 탓에 수로 옆 제방이 넘칠 듯 위험해 보였다. 군용 트럭 한 대가 달달거리면서 발굴 지점 근처를 향해 힘겹게 올라갔다. 선주는 코란도를 몰고 뒤를 따르면서 마음을 졸였다. 아슬아슬했다. 옆 제방이 터지면 발굴이고 뭐고 다 끝장이었다. 50여년 전 묻힌 넋들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해야 할 판이었다.

1950년 8월4일부터 9월5일까지 미군 2·24단과 북한군 2·4·9사단이 치열하게 맞붙은 현장이다. 대전에서 손실을 입고 급하게 투입된 미군 24단이 북한군 제4사단의 기습적인 낙동강 도하 작전에 밀리면서 유엔군은 일대 위기를 맞는다. 미군의 지속적인 병력 투입으로 북한군은 결국 서쪽으로 퇴각했다. 미군 500여명과 북한군 2,500여명이 전사했다. 미군은 이미 1951년 여기서 수차례 유해발굴을 했다. 선주는 미군이 예전에 유해발굴을 목적으로 찍어놓은 위성지도를 보았다. 구체적으로 척후병 실종 지역까지 찍혀 있었다. 다만 몇 구를 못 찾았다고 했다. 실제로 땅을 파고 메꾼 흔적이 여럿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중 아직 손을 안 댄 것으로 보이는 지점이 눈에 띄었다. 발굴병들에게 그곳을 뒤지라고 했다. 조금 뒤 누군가 나무뿌리 하나를 휙 던졌다. 유해 발굴지의 나무뿌리는 그냥 나무뿌리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도 사람 뼈였다. 팔뼈 안에 나무뿌리가 들어가 자라 있었다. 계속 땅을 팠더니 위턱이 나왔다. 인식표도 나왔다. 새겨진 이름은 에드먼드(Edmund). 나중에 포병 소위였음이 밝혀졌다.

위턱에 있는 치아엔 아말감으로 때운 흔적이 나타났다. 당시 한국의 치과엔 없던 기술이었다. 치아로 인종을 구분할 수 있었다. 앞니에 쇼블 쉐이프(shoverl shape)라 부르는 휜 흔적이 있으면 몽골로이드 아시아인이나 흑인이었다. 그게 아니면 코카소이드(Caucasoid), 즉 백인종이라는 의미였다. 열쇠, 유리약병, 연막수류탄 신관, 모시나강 탄피, 판초 우의 단추, 플라스틱 숟가락 등 유품도 나왔다. 에드먼드는 한 달간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발굴된 아군 유해였다. 창녕에서 총 23구가 발굴됐는데 에드먼드를 제외한 22구가 모두 북한군으로 추정되었다. 미군 유해 발굴 소식을 육군본부에 알렸고, 국방부를 통해 미8군으로 전해졌다. 미8군 쪽에서는 “미안하지만 한국군의 유해발굴과 감식 실력을 믿을 수 없다”면서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유해발굴과 관련한 한-미간의 교류나 협조가 전혀 이뤄지지 않던 때였다. 심지어 미군 유해발굴 감식 천막에 한국군은 출입금지였다.


선주는 미8군 참모장에게 손편지를 써서 보냈다. 미군 유해의 해부학적 특징을 조목조목 밝히고, 이걸 감식한 이는 버클리 인류학 박사과정에서 뼈를 공부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태도가 달라졌다. 하와이에 있는 미군 발굴부대 DPAA(미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의 영현부대(주검처리 부대) 문관이 헬기를 타고 현장에 왔다. 조총을 쏘는 등의 의식을 하고 유해를 모셔갔다. 미8군 쪽에서 미안하다는 뜻을 전하며 공동 유해발굴을 제안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DPAA를 통한 한-미간의 유해발굴 협조 관계의 물꼬가 터졌다. 이 관계는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 미 해병 1사단 병력과 기갑 부대가 북한 장진호에서 탈출하고 있다. 미 해병 1사단은 1950년 11월27일부터 중공군(중국군)이 장진호에서 미군을 포위하고 공격하면서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위키미디어

창녕 박진고개에서 미군이 간신히 전세를 뒤집었다면, 장진호에서 미군은 다 이긴 줄 알았다가 뒤집혔다. 북한 정부의 임시수도였던 강계를 공격해 북진통일이라도 이룰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고도 1000m의 산악지대인 개마고원 장진호에서 중공군에 기습을 당하고 포위되어 간신히 흥남으로 철수했다. 1950년 11월27일부터 12월13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1만명 넘는 미군이 죽었다. 묘숙은 어느 인터뷰에서 1990년대 초 북한에 들어가 장진호를 방문한 이야기를 한 적 있었다. 북한 사람에게서 “한국전쟁 당시 미군 병사들이 죽을 때 마미(mommy)하고 외치더라”는 증언을 들었다는 거였다. 국적 불문 인종 불문 마지막 순간에 젊은 병사들은 엄마를 불렀다.

미군을 격파한 중공군은 다시 38선을 넘어 남하했다. 1.4후퇴와 함께 수많은 전투가 벌어지고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다. 가평-춘천-화천-양구로 이어지는 용문산 전선에서 중공군은 국군에게 궤멸을 당했다. 그 결과 양구의 파로호에 2만명 넘는 중공군이 수장됐다. 미군에겐 장진호가, 중공군에겐 파로호가 거대한 무덤이었다. 미군 유해발굴에 대한 묘숙의 열정은 불가사의했다. 북한을 방문하면서 이중스파이가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의약품을 마련해 유해 발굴과 송환을 타진했고, 이를 위해 탈북자나 조선족을 상대로 미군 인식표를 비싼 값에 사들이는 수고도 했다. 안타깝게도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다. 묘숙은 선주를 만나고 9년 만인 2017년 1월1일 세상과 작별했다. 향년 90살이었다. 선주에게 묘숙은 미군 유해발굴에 대한 집념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았다. 미완의 집념이었다. 선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발굴에 관해 집념을 불태웠던 한 인물을 떠올렸다. 홋카이도 후카가와의 도노히라 이야기를 해보자.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