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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헌터

[본헌터 32] 타지에서 와 죽었으면 고향에 연락해 줘야지!

잠용(潛蓉) 2023. 10. 22. 13:01

[본헌터 32] 타지에서 와 죽었으면 고향에 연락해 줘야지! 
한겨레ㅣ2023-10-18 11:00 수정 2023-10-18 11:09

 

[역사 논픽션 : 본헌터 32] 홋카이도의 3인
1976년 광현사와 1997년 슈마리나이를 지나 2015년 ‘70년만의 귀향’까지

▲ 1940년 슈마리나이 우류댐 공사현장. 1938년부터 댐공사와 함께 철도공사가 시작되었고 일본 하층 노동자들과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동원되었다. 1943년까지 조선인 노동자들의 수가 3000여명이나 되었다.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이 뼈, 한국 사람 맞나요?”
주삿포로 한국총영사 혜진이 말했다. 이른바 ’70년만의 귀향’이 시작될 참이었다.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한 뒤 일본 열도를 종단해 홋카이도까지 먼 길을 왔을 조선인(한국인) 강제징용자 유골 113구. 2015년 광복 70돌을 맞아 그 길을 거꾸로 하여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탈 없이 귀향하기 위해서는 홋카이도에 있는 주삿포로 한국총영사의 승인과 보증을 받아야 했다. 잘못하면 한국 세관을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총영사는 113구가 정말 모두 조선인들인지 묻고 있었다.

‘강제노동희생자추모 및 유골귀환추진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여한 선주는 난감했다. 유해발굴 뒤 증언과 유품에 기초해 최대한 조선인임을 확인하고자 했지만, 아닐 수도 있었다. 일본인이나 중국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 해도 완벽하게 국적을 증명하라고 요구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게 할 방법도 없었다. 선주는 “모두 억압당하던 동아시아 사람들이라 여기고 대승적으로 품어주자”고 말했다. 통하지 않았다.

유골귀환추진위원회도 뜻을 꺾지 않았다. 일단 떠나기로 했다. 2015년 9월13일, 한자리에 모인 홋카이도의 유골 113구가 홋카이도 토마코마이 항구를 출발했다. 오아라이 항구-도쿄-교토-오사카-히로시마-시모노세키를 거쳐 여객선을 타고 부산으로 왔다. 총영사 허가를 받지 못해 긴장했으나, 부산 세관에서는 특별히 유골을 문제 삼지 않았다. 유골들은 9월18일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19일 서울광장 장례식 일정을 마친 뒤 마침내 20일 경기도 파주시 서울시립묘지에 안장됐다. 안장식에서 선주는 흰옷을 입고 상주 노릇을 했다. 70년 만의 귀향은 모든 난관을 뚫고 훌륭하게 마무리됐다. 선주도 18년에 걸친 홋카이도 유해발굴 여정을 마감했다.

▲ 1997년 여름, 한국과 일본의 대학생들이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외곽에서 유해발굴을 하는 모습. 이때부터 홋카이도 유해발굴은 거의 해마다 열리면서 동아시아 평화의 깃발이 휘날리는 양국 만남의 장으로 승화되었다.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선주는 1997년 4월, 처음으로 홋카이도에 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홋카이도 소라치 지청 우류군 호로카나이쵸에 있는 슈마리나이 공동묘지에 왔다. 공동묘지 바로 옆 사유지에 묻힌 조선인 징용 노동자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한 현장 답사였다. 슈마리나이는 1940년대 우류댐 건설로 조성된 일본 최대의 인공 호수다. 담수면적이 2373㏊나 된다. 1938년부터 댐공사와 함께 철도공사가 시작되었고 일본 하층 노동자들과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동원되었다. 1943년까지 조선인 노동자들의 수가 3000여명이나 되었다. ‘타코베야’, 즉 문어항아리라 불리는 합숙소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배고픔, 추위, 구타를 견디지 못하고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들은 공동묘지에 가지도 못하고 그 바깥에 있는 조릿대(대나무의 일종) 덤불 밑에 아무렇게나 묻혔다.

선주는 그해 7월31일부터 일주일간 유해 발굴을 책임지고 진행했다. 1997년 한 해로 그치지 않았다. 홋카이도 내에서 지역을 바꿔가며 2013년까지 8회에 걸쳐 발굴을 이어나갔다. 선주는 2001년 한 해를 빼고는 모두 참여했다. 슈마리나이 뿐 아니라 아사지노 비행장, 아시베쓰 광산마을, 에오로시 발전소, 히가시가와 유수지 등에서도 발굴을 했다. 이 작업에 참여한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은 유해 발굴 때마다 야스쿠니신사, 역사교과서, 천황제 등의 주제를 내건 공동워크숍을 열었다. 첫해인 1997년 첫해, 양국에서 무려 230명이 참가했다.

▲ 1997년 4월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외곽 조선인 노동자들이 묻힌 곳을 현장답사하러 갔을 때의 모습. 왼쪽서 두번째가 선주, 맨 오른쪽이 병호.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선주를 홋카이도에 오게 한 사람은 병호였다. 병호는 선주가 있는 충북대에서 시간강사를 한 인연이 있었다. 병호를 홋카이도 조선인 징용사에 눈뜨게 한 사람은 홋카이도 후카가와의 정토진종 일승사(이치조사) 주지 도노히라였다. 병호는 미국 일리노이대 일본센터 소장직에 있던 1989년 겨울, 도노히라와 인연을 맺었다. 연구년을 받아 보육연구를 위해 일본의 어린이집을 돌아보다 일승사 부설 다도시 어린이집을 방문했던 것이다. 다도시 어린이집의 독창적 운영 방식에 흥미를 느낀 병호는 한 달간이나 일승사에서 머물게 되었다.

두 사람은 마음이 통했는지 거의 매일밤 술친구로 지냈다. 도노히라는 아버지가 운영해온 정토진종 사찰을 물려받은 승려였지만, 1967년 교토 류코쿠대 학생회장을 지낼 만큼 한때 학생운동에 몰두했던 인물이었다. 병호는 한반도의 분단현실에 예민한 촉수를 뻗치고 있는 문화인류학자였다. 병호는 도노히라가 1976년부터 조선인 징용자 유골의 존재를 추적해왔을뿐 아니라 유족을 찾아내기 위해 1982년 한국 방문 등 숱한 노력을 했다는 이야기에 흠뻑 빠졌다. 병호는 “한국에 돌아가면 학생들을 데리고 발굴하러 오겠다”는 약속을 했고, 8년이 흐른 뒤 그 약속을 지켰다.

1973년 학업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도노히라로 하여금 조선인 유해발굴에 나서도록 이끈 것은 1976년 슈마리나이 호수에 놀러갔다가 근처 광현사(고겐사)라는 절 본당에서 본 80개의 위패였다. 위패에 적힌 이름과 사망연월일이 그의 눈을 강렬하게 잡아당겼고 놓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조사를 거듭한 끝에 관할 관청에서 매·화장 인허증을 찾아냈고, 호적기록을 뒤져 한국에 편지를 보내 유족을 수소문했으며, 1980년부터 3년간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외곽에서 직접 16구의 유해를 발굴하기도 했다. 1992년에는 조선인 징용자들이 사망하면 장례를 치러줬던 광현사를 인수하기까지 했다.

도노히라는 병호를 끌어들였고, 둘의 의기투합은 홋카이도 유해발굴을 동아시아 평화의 깃발이 휘날리는 양국 만남의 장으로 승화시켰다. 그만큼 두 사람에겐 신념과 사명감이 있었다. 그리고 병호는 유해 발굴의 전문성과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선주를 끌어들인 거였다. 선주는 반농담 삼아 이렇게 말하곤 했다. “동아시아 평화는 당신들끼리 얘기해. 그건 내 소관이 아니야.” 선주는 1997년 슈마리나이에서 4구를 찾아냈다. 이 가운데 2구는 일본인으로 보였다. 하나는 일본 매장 풍습에 맞게 베니어판 상자 안에 있었고 또 하나는 일본인 이름을 새긴 도장과 함께 발견됐다. 나머지는 조선인일 가능성이 컸다. 유골이 나왔던 공동묘지 바깥쪽에는 대부분 조선인 징용자들이 묻혔다는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골은 머리뼈 조각 서너개와 팔뼈, 허벅지뼈, 치아 정도였다. 감식 결과 모두 18~20세였다. 도노히라가 확보했던 매·화장 기록에서 그 나잇대 조선인 노동자를 조회했다. 한 명의 고향은 전남 고흥이었다. 또 다른 한 명은 불확실했다. 2구를 한국으로 가져왔다.

▲ 2015년 9월20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서울시립추모공원에서 열린 일본 훗카이도 강제 노역 조선인 유골 115명 합동 안장식에서 선주(왼쪽)의 안내를 받으며 유골귀환추진위원회 공동대표 병호(가운데)와 도노히라(오른쪽)가 참배하고 있다. /사진 공동취재단

이듬해인 1998년 초여름, 유골 2구의 유족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났다. 병호와 함께 5명의 일본인 방문자들이 동행했다. 고흥부터 갔다. 매·화장 기록에서 추정한 인물이 졸업한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찾아갔다. 다행히 한국전쟁 중 학교 건물이 불타지 않아 생활기록부를 볼 수 있었다. 이름 옆에 적힌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이다. 옛 주소지엔 여동생이 아직도 살고 있었다.

뻘에 일하러 나간 그를 기다렸다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1945년 해방 직전 오빠 대신 돌멩이가 담긴 상자만 돌아왔다고 했다. 뼈 대신 보낸 거였다. 과연 유골의 주인공은 진짜 오빠일까? 그러나 디엔에이(DNA) 채취를 거절했다. 이제서야 상처가 아물었다며 다시는 생각하기 싫다고 했다. 나머지 1구의 유골도 유가족을 추적했다. 우여곡절 끝에 충북 괴산에서 조카로 추정되는 사람과 연결됐으나 소극적으로 나와 더 진전시키지 못했다. 그래도 조선인 유골들의 국적을 증명하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2015년 9월에 만난 그 홋카이도 총영사에게 부끄러울 일은 없었다.

2구의 유해는 플라스틱 통에 담겨 18년간 선주의 청주 사무실 한 켠에 쌓여 있었다. 그러다가 2015년 9월20일 파주의 서울시립묘지로 70년만의 귀향을 했다. 당시 유골귀환추진위원회가 밝힌 115구는, 선주가 보관하던 2구를 포함한 것이었다.
왜 꼭 그 유해들을 데려와야 하는 것일까. 도노히라는 ‘역사와 목숨에 대한 상상력’을 말하곤 했다. 그것은 도리와 상식에 대한 상상력이었다. 가령 타지에서 온 사람이 죽으면 고향에 연락해주어야 하는 게 도리다. 슈마리나이 우류댐 공사에 자본과 기술을 댔던 왕자제지(오지제지)와 일본 정부는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조선인들을 강제노동이 아닌 정당한 모집과정을 거쳐 고용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선주는 체질인류학자이기 전에 사학도로서 그 말이 어이없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제국주의 침탈은 그 자체로 강제약탈이었다. 그것이 상식이었다. 70년만의 귀향은 도노히라가 말했던 ‘역사와 목숨에 대한 상상력’을 세상에 전파한 멋진 퍼포먼스였다. 홋카이도의 3인, 즉 도노히라-병호-선주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