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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헌터

[본헌터 36] 난사 뒤 섬 떠났던 경찰… 다시 와 주검에 석유를 부었다

잠용(潛蓉) 2023. 11. 1. 14:36

[본헌터 36] 난사 뒤 섬 떠났던 경찰… 다시 와 주검에 석유를 부었다 
한겨레ㅣ2023-11-01 11:00 수정 2023-11-01 11:30



[역사 논픽션 : 본헌터 36] 진도 갈매기섬의 비극
50일간 아침저녁 드나들며 수습한 해남 보도연맹원들의 뼛조각

▲ 전남 진도군 의신면 구자도리 산94번지, 산91번지에 위치한 갈매기섬. 본섬 옆에 중간 섬이 붙어있다.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섬에서는 소리가 났다.
섬과 섬은 거의 붙어있었다. 그 사이에서 자갈톱은 물이 빠질 때 드러났다가 물이 찰 때 숨었다. 물이 찰 때마다 섬과 섬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냈다. 쉬쉬쉭, 쉬쉬쉭. 귀신이 산다고 했다. 정말 그런지도 몰랐다. 이곳에 낚시하러 왔다가 물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누군가가 밑에서 다리를 잡아당겼다고 했다.

2008년 9월, 선주는 귀신섬에 갔다. 전남 진도와 연륙교로 연결된 접도 수품항에서 배를 빌렸다. 20여분 남쪽으로 가면 오른쪽에 구자도(구자도리)가 나왔다. 거기서 부산으로 가는 뱃길에 있는 김 양식장 사이로 20분을 더 가면 귀신섬, 아니 갈매기섬이 나왔다. 전남 진도군 의신면 구자도리 산94번지, 산91번지. 일제 강점기에는 갈명도라고 불린 무인도였다. 세 개의 섬이 잇닿아 있었다. 멀리서 보면 갈매기가 나는 형상이라 하여 갈매기섬이었다.

접안시설이 따로 없었다. 동력선 앞에 매단 거대한 타이어를 바위에 붙이고 밧줄을 당겨 절벽으로 올라갔다. 이후에도 경사가 심한 암벽을 타고 이동했다. 섬에는 잡목과 덤불투성이였다. 귀신은 없었다. 귀신 때문에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게 아니었다. 경찰이 사람들을 죽여놓고 못 오게 하면서 괴담과 소문이 부풀려졌다. 이제는 낚시꾼들도 오지 않았다. 선주는 귀신이 아니라 경찰에 의해 죽은 사람들 흔적을 찾기 위해 이곳에 왔다.

▲ 갈매기섬에는 접안시설이 따로 없었다. 동력선 앞에 매단 거대한 타이어를 바위에 붙이고 밧줄을 당겨 절벽으로 올라간 뒤 경사가 심한 암벽을 타고 이동했다.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2000년부터 국군 전사자 발굴을 하던 선주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유해발굴단’ 조사단장을 맡은 것은 2007년이다. 처음으로 국가가 나서서 한국전쟁기 학살 희생자 유해 발굴을 선언한 일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해 여름 대전 산내 골령골, 청주 분터골, 경산 코발트광산, 구례 봉성산에서 발굴이 시작됐다. 선주가 있는 충북대 박물관을 비롯해 충남대와 경남대, 한양대 박물관이 함께 했다. 첫해부터 유해들이 적지 않게 나왔다. 분터골 118구, 골령골 34구, 코발트광산 107구, 봉성산 14구.
2008년에는 더 쏟아졌다. 분터골 211구, 코발트광산 220구, 산청 원리 및 외공리 257구. 갈명도는 2008년의 마지막 유해 발굴이었다. 선주는 전국 각지의 유해 발굴을 총괄 지휘하고 본인이 속한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유해발굴센터를 통해 발굴 유해들의 감식을 도맡아 했지만, 현장 발굴조사를 직접 책임진 경우는 갈매기섬이 처음이었다.

섬에는 물도 없었다. 숙식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접도항의 식당 한쪽을 빌려 발굴사무소를 설치하고, 2층에서 민박을 했다. 도시락을 맞춰 매일 오전 9시 빌린 배로 섬에 들어갔다가 오후 5시에 나왔다. 정기 배편이 없어 하루 배를 빌리는 데만 30만원이 넘게 들었다. 너울성 파도가 치는 날에는 항만 파출소 연락을 받고 한 시간 만에 철수하기도 했다. 선주는 10명의 발굴단원과 함께 9월18일부터 11월9일까지 무려 50여일간 매일 접도항과 갈매기섬을 오갔다.

 

▲ 접도항의 식당 한쪽을 빌려 발굴사무소를 설치하고, 2층에서 민박을 했다. 도시락을 맞춰 매일 오전 9시 빌린 배로 섬에 들어갔다가 오후5시에 나왔다.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유해발굴 대상지는 큰 섬 서쪽 약 60도 경사면으로 배가 닿는 북쪽 해안에서 약 50여m 높이였다. 발굴지의 3분의2가량이 동백나무와 구지뽕나무 및 가시나무 등으로 우거졌고 나머지는 이끼류로 덮여 있었다. 나무들을 뽑아 태워서 발굴장을 확보했다. 나무뿌리가 감싸고 있는 뼛조각이 많았다. 일부 유족들이 2004년 섬에 들어와 이엉 등으로 뼈를 덮어 만든 초분도 있었다. 주로 허벅지뼈, 정강이뼈 등 긴 뼈들이었다. 발굴단원들은 경사면에서 위태롭게 자세를 잡고 일했다. 낫과 가위를 사용해 나무뿌리 등을 제거하면서 뼈를 찾았다. 출토된 뼈들엔 공통점이 있었다. 불에 탄 흔적이었다.

사람들을 배에 태워 멀리 섬까지 데려와, 죽이다 못해 불태워 버린 경우였다. 피해자들은 한국전쟁 직후 예비검속으로 수감된 해남지역 국민보도연맹원들이었다. 이들은 해남경찰서, 해남식량영단창고 등에 갇혀 있다가 1950년 7월16일 해남 경찰병력에 의해 범선에 태워졌다. 보도연맹원들은 해남군 화산면 해창항과 송지면 어란항 두 곳에서 승선했다. 이들은 손이 묶인 채 배에 타자마자 모포와 이불을 뒤집어써서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40여분 걸려 갈매기섬에 내린 이들은 10명씩 바위 위에 선 채 기관총으로 난사를 당했다. 확인사살까지 행해졌다. 총격을 마치고 섬을 떠났던 경찰은 곧 다시 돌아와 주검에 석유를 붓고 불태워버렸다.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 발굴단원들은 경사면에서 위태롭게 자세를 잡고 일했다. 선주가 경사진 곳에서 팔뼈를 찾아낸 모습.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갈매기박’이라 불린 상배는 극적인 생존자였다. 그는 시쳇더미 밑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뒤 경찰이 불 지르기 위해 돌아오기 직전 섬 위 동백나무 숲으로 도망쳤다. 고무신에 빗물을 받아마시고 굴을 따먹으며 연명하다가 지나가는 낚싯배를 얻어타고 섬을 탈출했다. 그는 해남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구자도에서 벙어리 머슴 행세를 하며 10년간 숨어 살았다고 했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증언했다. 생존자는 또 있었다. 이들을 통해 여러 증언이 구전됐다. 갈매기섬에 도착하기 전 돌에 매단 100여명을 바다에 빠뜨렸다거나, 갈매기섬 앞 ’여’에 100여명을 그냥 놓고 떠났다는 이야기였다. ’여’란 썰물에만 드러나는 바위를 말했다. 사건 두 달 뒤인 1950년 9월13일, 갈매기섬의 시신을 수습하러 가던 희생자 가족 5명이 해남군 해상에서 경찰에게 모두 사살당한 일도 있었다.

2008년 9월 한 달간 갈매기섬에서는 머리뼈, 빗장뼈, 주걱뼈, 위팔뼈, 엉덩이뼈, 허벅지뼈, 정강이뼈, 종아리뼈 등 유해 299점이 수습되었다. 이 가운데 왼쪽 허벅지뼈를 기준으로 가늠할 수 있는 개체 수는 19구였다. 유해 감식결과 모두 남성이었다. 20대 이하 2구, 20대 11구, 40대 이상 3구, 식별불가 3구였고 평균 키는 167.6cm였다. M1 탄피 15개, 카빈 탄피 22개, 45구경 탄피 3개 등과 고무신, 고무줄 혁대, 버클, 안경알도 출토되었다.

자료에 따른 갈매기섬 희생자 수는 들쭉날쭉해 최소 51명에서 최대 350명까지였다. 선주는 2002~2003년 해남신문과 진도군지의 조사인터뷰에서 언급한 51명이 가장 신빙성 있다고 판단했다. 갈매기섬으로 오다가 수장됐다는 이들은 여기에 포함하지 않았다. 모든 학살이 그렇지만, 외딴섬에서의 학살은 더욱 야만적이고 반인륜적으로 다가왔다. 이전에 7년간 했던 국군 전사자 발굴이 국가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업이었다면, 민간인 희생자 발굴은 이렇게 국가폭력의 악독한 민낯과 먼저 마주하는 일이었다. 최선의 발굴 결과를 통해 희생자들의 아픔을 보듬어 국가 정체성에 기여한다 해도 말이다. 그래서 삐딱한 시선을 받고 있었다. 대학 학부 때부터 가깝게 지내온 고고학 분야의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밖에서 말이 많아.”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좌파로 변신했냐는 이야기였다.

▲ 갈매기 본섬 오른편으로 중간 섬이 보인다. 발굴단원이 비디오 촬영을 하고 있다.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선주는 그럴 때마다 영화 ‘존 웨인의 기병대’에 나오는 캔들 소령에게 감정이입을 했다. 19세기 미국 남북전쟁 시기를 그린 영화다. 존 웨인이 연기한 북군 사령관 말로우 대령은 기병대를 데리고 남군 철도 폭파 작전에 나선다. 본부에서는 군의관 캔들 소령을 파견하는데, 말로우 대령의 눈에는 못마땅하다. 마을의 원주민 도움 요청에도 기꺼이 응하는 캔들 소령에게 말로우 대령은 “군인들만 치료하라”고 명령한다. 캔들 소령은 군인과 민간인, 남군과 북군을 가릴 생각이 없다. 말로우 대령이 남군 추격을 받은 끝에 북군 지역으로 퇴각할 때, 캔들 소령은 남군 지역에 남아 부상자를 치료한다. 그에게는 환자가 중요했다.

죽은 자의 뼈엔 색깔이 없다. 선주는 어느 편이든, 정치적 의미가 어떠하든 유해 발굴에만 충실했다. 그것은 소명이라기보다 학문적 호기심에 가까웠다. 2005년 고양 금정굴에선 수직 동굴이 처음이었고, 2008년엔 망망대해 속 무인도 산비탈이 처음이었다. 선주는 새로운 여정을 기꺼이 반겼다. 2009년 충남 공주 상왕동 왕촌 살구쟁이는 또 다를 것이었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