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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헌터

[본헌터 33] 오늘도 뼈를 만진다, 모두 덜 불행했으면 좋겠다

잠용(潛蓉) 2023. 10. 24. 11:08

[본헌터 32] 오늘도 뼈를 만진다, 모두 덜 불행했으면 좋겠다
한겨레ㅣ2023-10-23 11:00 수정 2023-10-24 00:03

 

[역사 논픽션 : 본헌터 33] 정하의 호미
식당 알바하면서 본업처럼 하는 유해발굴, 엄숙하지만 즐겁게

 

▲ 정하가 기록한 올해 3월의 성재산 현장 1. 교통호를 따라 유해가 나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각자 맡은 구역에 앉아 노출 작업을 했다.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내 이름은 정하다.
호미를 들 때 행복한 정하다. 유해 발굴에 감사한 마음으로 나서는 정하다. 벌써 10년, 앞으로도 쭉 이 일을 했으면 좋겠다.
나는 식당 알바를 한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작은 한식당이다.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5시반까지 주방과 홀에서 사장님을 돕는다. 2017년부터 시작했다. 중간에 다른 일도 했는데 2020년부터는 고정 알바다. 사장님은 양해를 해주었다. 유해 발굴하러 갈 때는 통으로 시간을 빼도록 해주겠다고.

나는 올해 3월6일부터 4월21일까지 충남 아산에 내려와 있었다. 성재산과 새지기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유해를 찾는 발굴단에 준조사원으로 참여했다. 한 달 넘게 식당 일을 쉬었다. 9월11일부터는 두 달 일정으로 또다른 현장에 내려와 있다. 이 일이 끝나면 다시 식당 알바를 해야지. 첫 경험은 2013년 8월의 홋카이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제징용에 관심이 많은 한국과 일본의 젊은 친구들이 1997년부터 해마다 ‘동아시아공동워크샵’을 열고 유해도 발굴하는 행사였다. 같은 고향 출신 꽃님 언니가 함께 가자 했다. 마침 작은 출판사를 다니다 그만둔 직후여서 퇴직금으로 참여 경비를 충당했다. 흔쾌히 따라나섰다.

 

▲ 정하가 기록한 올해 3월의 성재산 현장 2. 성재산 발굴 초반에 다른 곳에도 유해가 있는지 트렌치를 넣는 작업을 했다. 현장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햇빛이 비쳐서 잘 나오지 않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빛을 가려줬다. 그 모습이 예뻐서 찍어봤다.


유해 발굴 지역은 홋카이도 에오로시 발전소와 히가시가와 유수지 부근이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40년대에 공사를 하던 조선·중국 출신 징용 노동자가 묻힌 곳이었다. 두 시설을 짓느라 각각 800여명과 1200여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아직도 방치돼 있는 노동자들의 유해를 찾아야 했다. 나는 꽃님 언니와 함께 선발대로 먼저 가 미리 풀을 깎아놓고 사무국 일도 도왔다. 현지 주민들의 증언에 따라 조릿대(대나무의 일종)가 빼곡한 숲길을 열심히 팠다.

한일 양국 30여명의 인원이 좁은 도로에서 발굴하다 보니 어려움이 많았다. 조를 나눠 순차적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식으로 일했다. 유골을 넣어 매장한 듯한 생선 상자 흔적이 발견됐다. 유골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아, 이렇게 하는구나. 많이 배웠다. 친구들도 사귀었다. 여름이라 더웠지만 힘들다는 느낌은 없었다.

▲ 정하가 기록한 올해 3월의 성재산 현장 3. 쪼그려 앉은 채 나온 A4-5 구역의 유해는 희생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한국에 돌아와 두 달 뒤 또 유해 발굴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엔 충남 공주 왕촌 살구쟁이였다. 충북대학교와 공주시가 발굴사업을 진행한다고 했다. 홋카이도에서 발굴대장을 하신 분이 이번에도 발굴대장이었다. 그 분이 참여해보라고 제안을 해주었다. 2009년에 한 번 발굴을 한 지역이라고 했다. 그때 뼈가 나왔으나 미처 발굴하지 못한 지역을 표시해놓은 상태였다. 땅을 다함께 파다가 유해가 나오면 발굴대장님과 경험이 많은 일꾼들이 세부적인 일을 했고 나는 함께 거들었다.

머리뼈, 허벅지뼈 등 드디어 유해가 나왔다. 겁이 났다. 공포스러워서가 아니라 너무 소중해서였다. 초보자인 내가 괜히 잘못 만졌다가 손상을 입힐라 노심초사했다. 발굴된 유해를 아세톤에 담가 씻어내는 세척조 일도 했다. 그 뒤부터 거의 매년 유해 발굴에 참여했다. 2015년 2월 대전 산내 골령골, 2016년 2월 홍성 광천 폐광산, 2017년 2월 진주 용산고개, 2018년 3월 아산 설화산, 2019년 3월 보은 아곡리, 같은해 5월 아산 탕정면 용두리 뒷산, 2020년 6월 청주 여우골, 2021년 3월 서산 메지골, 2022년 단양 곡계굴…

그리고 2023년에는 충남 아산 성재산과 새지기를 갔다. 모두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유해가 묻힌 곳이다. 발굴단의 조직과 성격은 그때그때 달랐다. 시민단체들이 자체 기금으로 하기도 했고, 지방자치단체 지원을 받기도 했고, 국가기관이 한 경우도 있었다. 자원봉사 차원에서 하기도 했고, 급여를 받기도 했다.

▲ 정하가 기록한 올해 3월의 성재산 현장 4. 교통호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했다. 포크레인이 땅을 파헤치면 사람이 들어가 유해가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한다.

힘들어서 기억에 남는 곳은 홍성 광천 폐광산이다. 일단 코가 괴로웠다. 발굴 지역 옆에 돼지 막사가 있어서 축사 분뇨 냄새로부터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게다가 눈과 비가 번갈아 왔다. 미끄럽고 추웠다. 아산 설화산에서는 200구 넘는 유골이 나와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부녀자와 아이들이 많이 나와 충격을 먹었다. 그리고 아산 성재산. 길이 30m에 불과한 좁은 교통호에서 수많은 유해가 나왔다. 2019년 탕정에서도 교통호에 희생자가 매장됐다는 증언을 따라 발굴했으나 한 구도 나오지 않았었다. 성재산은 특히 온전하게 나온 유해가 많은 곳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과 정반대 방향에서 쪼그려 앉은 채 나온 A4-5 구역의 유해는 희생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성재산에서 나도 쪼그리고 일했다. 왼쪽 팔을 땅에 붙여 몸을 지탱하고 오른손을 뻗어 호미로 팠다. 그러다 보니 왼쪽 팔이 가장 아팠다. 어떤 발굴이든 초기에 허벅지와 골반, 허리 등 그동안 안 쓰던 근육들이 조용히 비명을 질러댄다.

▲ 정하가 기록한 올해 3월의 성재산 현장 5. 유해 수습이 모두 끝난 모습. 처음 올 때는 삭막했는데 어느새 나무에 새순이 돋아나 있었다.

성재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유해는 A10 구역 부근에서 나온 두 분이었다. A12 구역에 고무신이 유독 많았는데 그 구역과 인접해 있는 곳에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유해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노출을 하다 보니 두 분이 반대 방향으로 누워 있어서 기억에 남아있다. 한 사람 머리가 상대편 발쪽에 있는 구조였다. 한 명씩 개인 식별이 가능했다. 잘못해서 부위별로 수습했다면 놓칠 수도 있었다. 대전 골령골 같은 경우는 희생자들 모두 엉켜있어 정해진 발굴기간 내에 개인식별을 해내기가 불가능했다. 성재산에서는 처음에 다리 하나를 찾을 경우 이 사람의 머리까지도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최대한 뼈를 안 상하게 조심조심 다뤄야 했다. 그러려면 어떻게 땅을 파들어가느냐가 중요했다. 뼈가 나오는 길을 잘 따라가야 한다. 발굴을 여러 차례 하다보면 노하우를 체득한다. 가령 위를 놔두고 아래부터 작업했다가는 낭패를 본다. 윗 부분 흙이 아래로 흘러내려 앞서 완료했던 일을 다시 하거나 작업이 번잡해진다. 그래서 넓게 보고 넓게 파는 게 중요하다고들 말한다. 유해 발굴의 이미지는 어둡고 숙연하다. 외부에서 볼 때는 항상 엄숙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일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일을 하는 사람들은 또 그렇지만은 않다. 유해 발굴이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하면서 죽음을 실감하는 일이지만, 사실 그 안에서 즐거운 일도 많다. 즐겁게 일하려고 한다.

어릴 적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집에서 3일장을 치른 적 있다. 묘에 매장되기 전까지 병풍 뒤에 할아버지가 계속 있었다. 조문객들은 잠시 슬픈 표정을 지었지만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들과 만나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다 갔다. 그 모습이 즐거워보였다. 그때 죽음은 슬픈 것이지만 만남의 장이 되어주기도 하는구나 생각했다. 누군가의 죽음이 슬프기만 한 건 아니구나 싶었던 기억이다. 발굴 현장에 있는 유해들은 일반적인 과정을 거친 유해가 아니라 슬프게 느껴졌고, 죽음이 평등하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 이번에는 정하가 성재산 교통호 발굴 현장에서 찍힌 사진. 가운데 초록색 조끼를 입고 쪼그려 일하는 사람이 정하다.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나와 늘 함께 해온 발굴대장이 있다. 현장에서 전혀 권위적이지 않고 유머도 많다. 발굴단원 개개인의 일하는 방식을 존중해준다. 그래서 현장에서 웃을 때가 많고 보람도 더 있는지 모른다. 일부 고고학 발굴 현장은 본인에게 주어진 직급에 따라 맡은 역할이 분명하고 그 직급은 보통 현장에서 얼마나 일했는가에 따라 나뉘기 때문에 권위적인 편이라고 들었다. 내 삶의 모토는 “덜 불행하자”다. 늘 행복할 수 없지만, 늘 불행해서는 안된다. 오늘도 나는 유해를 만진다. 모든 사람이 덜 불행했으면 좋겠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