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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헌터

[본헌터 35] 나 A4-5의 허벅지뼈, 50ml 짜리 3개의 큐브에 담기다

잠용(潛蓉) 2023. 10. 30. 15:59

[본헌터 35] 나 A4-5의 허벅지뼈, 50ml 짜리 3개의 큐브에 담기다 
한겨레ㅣ2023-10-30 11:00 수정 2023-10-30 11:10

 

[역사 논픽션 : 본헌터 35] TRC-23-0016
플라스틱 상자에 담긴 민간인 희생자 유해들의 현재와 미래

▲ 나는 지금 50ml 용량의 큐브 안에 들어있다. 이곳은 나의 집이다. 큐브는 3개다. 한 큐브에 3개의 조각씩 나뉘어 있다. 나는 9개의 조각으로 남아 세 개의 큐브로 분산 수용되어 당분간 항온항습장에 보관될 것이다. /고경태 기자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나는 TRC-23-0016이다.
산속에 오랫동안 묻혀있다가 올해 봄 세상에 나와 아직도 영구히 먼 길을 떠나지 못한 TRC-23-0016이다. 이승에 있는 자들이 선의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덕분에 아직도 무대에 오를 일이 남은 TRC-23-0016이다. 안녕, 오랜만이다. 3개월만에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 나의 생소한 이름에 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다.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A4-5다. 충남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 산 110번지 성재산 교통호에서 나온 A4-5다. 

처형당한 뒤 쪼그린 채로 73년을 앉아있던 나는, 올해 3월 기적적으로 햇볕을 보았다. 당시 나를 꺼내준 유해발군단의 규칙에 따라 첫 발굴 지점부터 번호가 매겨졌고, 그곳에서 4m 북쪽 맨 끝에 있던 나는 A4-5로 정해졌다. 그런데 왜 이름이 바뀌었냐고? 나는 A4-5의 분신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A4-5의 허벅지뼈 조각이다. 세종시 전동면 봉대리 538. 여기는 세종 추모의 집이다. 3월10일 세상에 노출되고 3월29일 206개의 뼈가 분리되어 산에서 내려온 나는, 5월13일 산 자들의 정중한 제의 의식을 받고 이곳에 임시 안치되었다. 그리고 4개월만인 9월12일, 일군의 요원들에 의해 TRC-23-0016이라는 식별번호를 얻었다. 나는 지금 50ml 용량의 큐브 안에 들어있다. 이곳은 나의 집이다. 큐브는 3개다. 한 큐브에 3개의 조각씩 나뉘어 있다. 나는 9개의 조각으로 남아 세 개의 큐브로 분산 수용되어 당분간 항온항습장에 보관될 것이다.

▲ 나 A-5는 세상 밖으로 나와 세종 추모의 집에 안치돼 있던 9월12일, 일군의 요원들에 의해 허벅지뼛조각이 잘린 뒤 TRC-23-0016이라는 식별번호를 얻었다. /사진 진실화해위 제공

TRC-23-0016이란 DNA 시료채취 절차를 밟았다는 증명이다. TRC는 시료채취 사업을 발주한 국가기관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영어 약자다.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23은 2023년, 0016은 시료채취 순서다. 나는 과거 국가폭력의 진실을 밝히고 화해의 다리를 놓기 위해 탄생한 진실화해위가 2023년에 추진한 시료채취 용역사업의 16번째 대상이었다는 말이다.

A4-5이자 TRC-23-0016인 내가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밝혀주는 1차 정보는 있다. 이미 완료한 감식의 결과는 나를 18~20살의 건장한 남자라고 말한다. 키는 165cm이고, 허벅지로 볼 때 육체노동을 별로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내가 학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발굴된 위치와 마지막 방향으로 볼 때 나는 1순위 처형대상이었다고 말한다. DNA 시료채취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나의 신원을 밝히려고 한다. DNA 염기서열을 알아내, 73년 전 자신의 가족들이 성재산에서 죽었다고 여기는 유족들의 DNA와 대조할 것이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처럼 입을 벌려 구강세포를 제공하거나 머리카락을 뽑을 수는 없다. 대신 오른쪽 허벅지뼈를 제공한다. 내가 육체노동을 별로 하지 않았다고 증거한 그 허벅지뼈 말이다. 허벅지뼈가 없으면 정강이뼈다. 정강이뼈가 없을 경우엔 치아다.

시료채취 요원은 세종 추모의 집 2층 작업실의 플라스틱 상자에 담긴 나를 꺼내 같은 층의 작업실로 향했다. 참배실로 썼던 곳이다. 안치실에 있는 도합 3700여구의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유해 중 2000구가 채취 대상이다. 성재산 교통호에서 나온 나와 동료들은 1순위로 뽑혔다. 늦게 안치된 순서대로 시료를 채취하기로 한 결정 덕분이다.

▲ 절단기 앞에서 절단부위를 표시한 허벅지뼈들이 대기 중이다. /고경태 기자

요원은 플라스틱 상자를 열어 한지로 싸놓은 나의 허벅지뼈를 개봉했다. 허벅지뼈를 쓰는 이유는 가장 길고 두껍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기질이 많다고 한다. 나의 허벅지뼈에 검은 선이 4개 그어졌다. 요원 중 최고 책임자가 자를 대고 5cm씩 두 곳에 표시했다. 허벅지뼈 중에서도 가장 두꺼운 부분을 골랐다. 이제 자료로 남기기 위한 사진촬영을 할 시간이다. 플래시 조명이 나를 감싼다. 그리고 가차없는 절단….

드르르르르르르르.
절단기 전원이 켜졌다. 맹렬한 소음이 작업실을 점거했다. 절단기의 전기 드릴은 작업실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다. 절단부위를 표시한 허벅지뼈들이 제각기 쟁반에 담겨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분진마스크를 쓴 담당 요원이 나를 들고 조심스럽게 절단기 앞으로 향했다. 검은색 네임펜으로 표시해놓은 단면을 톱 앞에 갖다 댄다. 드르르, 드르르, 드르르르르. 톱은 한 번에 나를 깨지 못한다. 두 번, 세 번 시도 끝에 나는 잘린다, 잘린다, 잘린다.

뼛가루가 날리고 냄새가 퍼진다. 요원들의 코는 진저리를 친다. 이것은 뼈의 냄새다. 이것은 73년 전 지옥의 현장을 환기시켜주는 냄새다. 이것은 살아서 돌아갈 수 없었던 거대한 구덩이 감옥의 냄새다. 나는 5cm 길이로 잘린 두 개의 동그랑땡이 되었다. 다시 사진 촬영. 허벅지뼈보다 작은 나는 18~35mm 광각렌즈가 아닌 60mm 단렌즈 아래서 포즈를 취했다.

▲ 허벅지뼈를 두 부위로 절단한 뒤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다음에는 망치다. 요원은 무심하게 망치를 휘둘러 나를 때리고, 2개였던 나는 9개의 조각으로 갈라졌다. 요원은 나를 3개의 큐브에 나눠 담았다. 3개의 큐브가 마지막 사진 촬영에 임할 시간이다. 앞에서 두 번 부끄럽게 누드사진을 찍었다면, 이번에는 정장을 차려입고 화보 촬영을 하는 느낌이다. 촬영을 마친 큐브들은 한자리에 모였다. 우리들은 아산 성재산의 큐브들이다. 정해진 시간이 오면 각자 2개의 큐브씩 DNA 포렌식 업체로 갈 것이다. 나머지 1개의 큐브는 남는다. 나의 신원이 밝혀질 경우를 대비한 유족 인계용이다.

DNA 포렌식 업체로 가서 나는 가루가 될 것이다. 포렌식 요원들은 나에게서 유기질을 추출해 DNA 염기서열을 분석해낼 것이다. 옛날에 쓰던 미토콘드리아 분석으로는 모계 쪽으로만 확인이 가능했다. 이제 SNP(단일염기 다형성, Single Nucleotide Polymorphism) 방식을 활용하면 3촌까지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SNP 중에서도 고속 분석인 NGS(차세대 염기서열 분석, Next Generation Sequencing)방식을 쓰면 8촌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절단되고 남은 허벅지뼈는 다시 플라스틱 상자에 담겼다. 나의 모체, A4-5는 원래 있던 자리로 갔다. 이곳의 유해들은 2025년 대전시 동구 낭월동(옛 산내 골령골)에 ’진실의 숲’이라는 국가단위 위령시설이 세워지면 영구 안장된다. 그때 뼈들은 화장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마지막 뼈 실물은 DNA 포렌식 업체로 가지 않은, 나머지 하나의 큐브에 담긴 세 조각인 셈이다.

 

▲ 지난 3월 아산의 유가족들이 DNA 시료를 채취하는 작업에 응하고 있다.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아, 나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가. 나의 DNA 하나를 분석하는데 300만원 이상이 든다. 하지만 신원 확인율이 높지는 않다. 1.5% 정도다.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에서도 그 정도 확률이었다. 충분한 유족 DNA 수집이 되지 않을 경우엔 1% 이하로 떨어질 가능성도 높다. 단 한 명도 못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시도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생각한다. 국가의 마지막 책임이자 예우이며 서비스다.

내가 살아있다면 91~93살이다. 부모는 이미 오래전 떠났을 것이다. 내 동생이 있었다면 살아있을까. 형제가 죽었다면 나를 연결시켜 줄 사람은 조카들뿐이다. 조카는 나에게 관심이 있을까. 나를 찾겠다며 DNA 검사에 응했을까.
나는 지금 이승과 저승 그 어디에도 없다. 어중간하게 경계를 떠돌고 있다. 로벤이라는 학자는 빠르고 고통 없는 죽음을 ‘좋은 죽음’이라고 말했다.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나쁜 죽음’이라고 말했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비참한 죽음이다. 그래서 아직도 떠나지 못한 것이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큐브에 담긴 나, TRC-23-0016은 앞으로도 말할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