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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헌터

[본헌터 42] ‘불바다 동굴’서 나온 피난민에 세 시간 공중 폭격

잠용(潛蓉) 2023. 11. 23. 18:17

[본헌터 42] ‘불바다 동굴’서 나온 피난민에 세 시간 공중 폭격
헌겨레ㅣ2023-11-22 11:00 수정 2023-11-22 11:35


[역사 논픽션 : 본헌터 42] 곡계굴 무연고 유해
3시간 넘는 폭격과 기총공격, 왜 민간인 식별 노력을 안 했을까?

▲ F-80 슈팅스타. /위키미디어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슈팅스타가 창공을 날았다.
구름이 점점이 박힌 맑고 푸른 하늘이었다. 눈이 쌓인 소백산맥 줄기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슈팅스타는 무스탕과 합류하여 빠르게 날았다. 저 멀리 아래서는 아이들이 참새처럼 재잘거리며 놀고 있었다. 하늘의 굉음이 가까워졌다. 놀란 아이들이 뛰기 시작했다.

1951년 1월20일 오전 10시, 동굴의 비극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아이들이 굴속에 들어가자마자 폭탄이 떨어졌다. 그 중엔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불태워버리는 네이팜탄도 있었다. 유독가스가 굴 안으로 퍼졌다. 아이들의 가족이 300명 넘게 있었다.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일부는 굴 깊숙이 도망갔다. 또 다른 일부는 굴 밖으로 나왔다. 폭음과 비명과 피비린내가 굴 안팎에 진동했다. 굴 안에서는 숨을 쉬지 못해 죽었고, 굴 밖에서는 불태워지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 하늘 위의 슈팅스타와 무스탕은 비정했다. 불바다가 된 굴 앞에 세 시간이 넘도록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공격을 가했다.

선주는 석회암으로 이뤄진 굴속으로 들어갔다. 입구는 두세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좁았다. 안에서는 꽤 넓은 공간이 나왔다. 구간에 따라 폭이 들쭉날쭉했다. 길이는 83m에 이른다고 했다. 한국전쟁기에 피난민들이 떼죽음을 당한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느티마을) 곡계굴 현장이었다. 유해 발굴을 할 참이었다. 굴속에 유해가 남아있지는 않았다. 유해는 두 차례나 장소를 옮겨 매장됐다고 했다.

 

▲ 석회암으로 이뤄진 곡계굴 입구는 좁지만 안에서는 꽤 넓은 공간이 나온다. 길이가 83m에 이른다.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2022년 3월이었다. 선주는 2014년부터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의 공동대표이자 발굴단장을 맡아 일했다. 2014년 이전의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이 국가 차원 사업이었다면, 2014년부터는 시민단체들이 힘을 모아 발굴단을 구성했다.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을 지원하기도 했는데, 단양군도 그중 하나였다. 단양에서의 유해발굴은 선주에게 두 번째였다. 2003년 단양 노동리 실금산에서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을 했다. 그때 마을 주민들이 말했다. 단양의 또 다른 지역에서는 미폭으로 엄청 죽었다고. 미폭? 미군 폭격을 일컫는 말이었다. 2000년,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영동군 노근리 쌍굴다리 사건에 관해 유감 표명을 한 이후 한국전쟁 때의 미군 범죄가 세간의 관심을 모으던 때였다. 단양 곡계굴은 노근리 사건보다 희생자가 많다고 했다. 미군 폭격 중에서도 희생자가 많은 편이라고 했다. 2003년에 곡계굴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로부터 19년 만에 찾은 단양에서, 미군 폭격 유해 발굴을 처음 해보는 거였다.

 

▲ 곡계굴 입구는 두 세명 들어갈 정도의 크기다.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 곡계굴 입구는 두 세명 들어갈 정도의 크기다.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슈팅스타와 무스탕은 각각 미 공군의 F-80, F-51 전투폭격기 별칭이었다. 그날 미7사단 17연대는 단양군 영춘면 일대의 공중공격을 미5공군에 요청하고, 이에 따라 미49전투폭격단과 미35전투요격단 소속인 F-80 및 F-51 11대(또는 13대)가 정찰기의 인도 아래 영춘면 용진리 및 상리 일대에 대대적인 폭격을 단행했다. 초토화 작전이었다. 당시는 1·4후퇴 직후였다. 북한군 2군단이 미10군단과 국군3군단 관할구역 사이 틈을 뚫고 소백산맥 지대로 침투한 상황이었다. 미7사단은 영주에서 단양으로 본부를 옮기고 후방으로 침투하는 인민군을 막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유해는 곡계굴 맞은편 산 너머 상2리 6~8번지 양계장 뒤편 야산 산기슭 초입에 묻혀있었다. 폭격이 끝난 뒤 한 차례 방화선에 묻은 무연고 시신들을 1970년대 후반 일대 야산 개발과정에서 영춘면사무소 주도로 재이장한 거였다. 1951년 3월 방화선에 처음 시신을 묻은 인부들은 전체 희생자 규모를 360여명으로 추산했다고 한다. 그 뒤에도 영월에서부터 내려오는 동강의 수위가 높아질 때 곡계굴을 가득 채웠던 물이 시신을 끌고 나오기도 했다. 이제 매장지 앞까지 개발이 진행되면서 거의 40년 만에 유해 발굴을 하게 된 거였다.

 

▲ 2022년 3월 곡계굴 맞은편 산 너머 상2리 6~8번지 양계장 뒤편 야산 산기슭 초입에서 진행된 유해발굴. 발굴 현장에는 70개의 작은 봉분들이 1m씩 떨어져 열을 이루고 있었다. /사진 주용성 작가

▲ 2022년 3월 곡계굴 맞은편 산 너머 상2리 6~8번지 양계장 뒤편 야산 산기슭 초입에서 진행된 유해발굴. 발굴 현장에는 70개의 작은 봉분들이 1m씩 떨어져 열을 이루고 있었다. /사진 주용성 작가

희생자들은 영춘면과 그 북쪽 지역에서 왔다. 영춘면 사람들은 이장 또는 면사무소 직원으로부터 “마을이 공격 목표가 될 수 있으니 빨리 떠나라”는 소리를 듣고 짐을 싸 피난길에 나섰다. 그러나 가곡면 향산리 근방에서 탱크를 앞세운 미군에 의해 가로막혔다. 북한군이 민간인들 속에 잠입할지 모른다며 차단한 것이다. 피난민들은 결국 되돌아와 곡계굴을 피신처로 선택했다. 발굴 현장에는 70개의 작은 봉분들이 1m씩 떨어져 열을 이루고 있었다. 봉분 앞에는 시멘트로 만든 사각의 작은 표지석이 서 있거나 땅속에 묻힌 상태였다. 표지석마다 숫자가 보였다. 봉분을 모두 걷어내고 바닥을 호미, 트롤(흙손), 대나무칼을 이용해 파내었다. 10여명의 발굴단원은 엎드린 자세로 일했다. 구덩이 안 유해는 가로세로 폭과 높이가 각각 40cm씩인 나무관 속에 들어있었다. 하루에 잘해봐야 발굴단원 한 명당 나무관 한 개를 꺼낼 수 있었다. 영춘면 상2리로 되돌아온 피난민들은 북한군과 조우했다. 북한군 병사들은 폭격 당일인 20일 새벽 떠나기 전 “절대 굴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미 미군에게 노출된 지역이고 폭격당하면 다 몰살하므로 하얀 보자기를 쓰고 눈밭에 엎드려 있거나 산에 숨어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했다. 피난민들은 그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 곡계굴 미군 폭격 희생자 유해는 가로 세로 폭과 높이가 각각 40cm씩인 나무관 속에 들어있었다.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슈팅스타와 무스탕의 조종사들은 왜 민간인, 그것도 아이들이 있는 현장에 폭탄을 투하하고 총격을 가했을까. 당시 북한군 병사들은 민간인 복장이 아닌 군복 차림이었다. 날은 맑았고, 가시범위가 최대 24km일 정도였다. 만약 미군이 자신들이 탱크로 막았던 피난민들의 정황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였거나 폭격 이후 뛰쳐나온 민간인을 식별하는 최소한의 노력만 기울였다면 희생은 발생하지 않았다. 미군이 북한군 은신처는 물론이고 은신처가 될 만하다고 의심되는 곳을 모두 공중공격과 소각작전의 대상으로 삼은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진실화해위 조사에 따르면, 7사단장 바(Barr) 준장이 “무리한 작전”이라며 상부에 이의를 제기할 정도였다.

발굴 결과 50구가 나왔다. 나머지 20개 봉분은 비어 있었다. 두 차례 이장 과정에서 상했는지, 머리뼈는 하나도 없고 긴 사지뼈들 위주로 459점이 나왔다. 50구 중 남자가 30구, 여자가 9구, 알 수 없음이 12구였다. 연령별로는 60대 이상이 많았다.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신원이 확인된 곡계굴 사건 희생자 수는 167명이었다. 상리와 인근 지역 거주자들이었다. 선주가 발굴한 50구의 유해는 무연고자들이었다. 영월 등 다른 지역에서 왔을 가능성이 컸다. 이들을 찾으려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당시 피난민 유가족을 수소문해 DNA 검사부터 해야 했다. 50구의 유해는 일단 세종 추모의 집으로 보내졌다.

▲ F-51 무스탕 ./위키미디어


미17연대와 그 상부인 미 7사단 기록에는 1951년 1월20일 오전 13대의 폭격기가 굴을 공격한 사실이 명시돼 있었다. “굴속의 적군들과 다수의 짐실이(짐을 싣는) 가축들에 대해 공중공격, 다수의 사상자 발생.” 민간인 희생자가 적군으로 기록돼 있었다. 진짜 적군은 도망쳤고, 오히려 적군 병사들의 권고를 무시하고 아군을 믿은 피난민들은 아군에게 목숨을 잃으며 ‘적군’으로 둔갑했다.

사건 일주일 뒤 미군 헬리콥터가 곡계굴 앞 밭에 앉았다. 미군 2명이 사진기를 들고 동굴로 갔다. 무연고 시체가 동굴 안에 가득 차 있을 때였다. 주민들은 두 미군 중 한 명이 사진찍기를 마치고 내려오다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미 공군은 한국전쟁기에 압도적 제공권을 누렸다. 곡계굴은 수십 가지 사건 중 하나였다. 포항, 울진, 영월, 강릉, 고성, 홍천, 경주, 김천, 함안, 의령, 오창, 예천, 여수, 나주, 순천, 화성, 오산, 신갈, 용인, 월미도와 그 밖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천여명이 죽었다. 서울에서 가장 많이 죽었다. 중구, 종로구, 동대문구, 성북구, 성동구, 서대문구, 마포구, 용산구, 영등포구에서 4250명이 죽었다. 슈팅스타와 무스탕을 비롯한 미군 전폭기들이 창공을 장악한 결과였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