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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헌터

[본헌터 40] 골령골, 정말 그곳에서 7000명이 죽었는가?

잠용(潛蓉) 2023. 11. 16. 12:58

[본헌터 40] 골령골, 정말 그곳에서 7000명이 죽었는가?
힌겨레ㅣ2023-11-15 11:00 수정 2023-11-15 14:13


[역사 논픽션 : 본헌터 40] 위닝턴과 ‘모던 미스’
2007~2022년 대전형무소 희생자들을 위한 가장 긴 발굴]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 2022년 4월 대전 낭월동 2지점 유해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머리뼈.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 위닝턴이 골령골에 다녀와서 작성한 팜플렛 ‘한국에서 나는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의 표지. /위키미디어

위닝턴(Winnington, 1910~1983)은 보았다.
이것은 모든 언론 보도의 출발점이었다. 위닝턴은 1950년 7월31일,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구덩이에 서로 엉켜있는 붉은 살덩이들과 삐죽 솟아있는 머리를 보았다. 얼굴이 날아가 버린 주검을 보았다. 가슴에 뚫린 총탄구멍을 보았다. 줄로 묶인 두 손을 보았다. 거대한 무덤으로 변한 계곡을 보았다. 현장을 본 마을 주민 20여명도 만났다. 이를 기초로 8월에 쓴 글의 제목은 ‘한국에서 나는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 신화사 통신 등 중국 언론이 이 내용을 타전하면서 골령골은 세계에 알려졌다. 한국의 언론매체에 골령골이 처음 등장한 때는 그로부터 42년이 지난 뒤였다.

선주는 위닝턴의 글을 읽고 또 읽었다. 유해발굴에서 가장 중요한 참고자료 중 하나였다. “7월2일 이승만 경찰과 꼭두각시 군대의 트럭들이 마을로 들어와서는 마을 주민들을 총구로 위협하여 계곡으로 끌고 가 여러 개의 도랑을 파게 하였다. 모두 여섯 개의 도랑을 팠는데 가장 긴 도랑은 200m의 길이에 폭은 2m에서 4m 정도이며 깊이는 평균 2m 정도였다. 100m여 정도의 도랑이 2개 더 있었으며 나머지는 30m 정도로 폭과 깊이는 위의 긴 도랑과 같은 정도이다.” 발굴지점을 찾는 데서 중요한 단서가 될 문장이었다.

 

▲ 2022년 4월 대전 낭월동 2지점에서의 유해발굴 현장.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 2022년 4월 대전 낭월동 2지점에서의 유해발굴 현장.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위닝턴은 영국 좌파 일간지 ‘데일리 워커’(나중에 ‘모닝 스타’로 바뀜)의 베이징 주재 아시아 담당 통신원이었다. 영국공산당 소속의 공산주의자로 중국혁명을 취재하며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와도 가깝게 지낸 종군기자였다. 골령골에는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과 함께 왔다. 선주는 위닝턴이 쓴 글의 뒷부분을 다시 한 번 또박또박 읽어보았다. “7월4일부터 6일까지 3일간 학살이 자행되었다. 여기에 동원된 트럭은 60대가 넘으며 한 트럭에 50명 이상의 죄수들을 실어날랐다. 따라서 3일간 처형된 죄수는 적어도 3000명 이상으로 여겨진다.(중략) 16일 밤에 인민군은 금강전선을 돌파하고 대전 북쪽 20㎞까지 진출했다. 17일 새벽에 지프차들이 도착하고 이어 트럭들이 계곡으로 들어왔다. 이때에도 트럭에는 100명 이상의 죄수들이 앞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빼곡히 채워졌다. 인민군대가 들어오기 전까지 별로 남은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날 37대의 트럭에 3700명의 애국시민들이 실려있었으며 학살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진행되었다.”

▲ 2022년 4월 대전 낭월동 2지점에서의 유해발굴 현장.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2007년, 선주는 골령골에 갔다. 대전 동구 낭월동 11번지, 13번지, 산4번지 일대로서 산내초등학교 인근 산기슭이었다. 위닝턴이 다녀가고 57년만이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의뢰를 받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유해발굴단’을 총괄하는 조사단장으로서 현장을 답사했다. 유해발굴은 한국전쟁이 터진 6월25일부터 9월22일까지 장장 90일간에 걸쳐 진행됐다. 충남대 박물관이 발굴 실무를 맡았다. 1999년부터 골령골에서의 처형 사진을 비밀해제했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기록에 따르면 희생자는 1800명에 이르렀다. 

유족들은 “7000여구의 시신이 온 계곡을 둘러싸고 있다”는 위닝턴의 보도를 근거로 희생자가 최대 7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선주 역시 골령골에서 많은 유해가 나오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2007년 골령골에서는 34구밖에 나오지 않았다. 당초 7개 지점으로 추정했던 유해매장지 중에서, 가장 유력하게 선정된 1·2지점에서 토지소유주(교회)와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3·4·5·7 지점만 발굴할 수 있었다. 3지점에서 29구, 5지점에서 5구가 나왔다.

 

▲ 대전 동구 낭월동 유해매장(추정)지 위치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유해발굴(3차)보고서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골령골에 묻힌 사람들은 누구인가. 모두 대전형무소에서 왔다.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으로 형을 살던 재소자, 전쟁 직후 예비검속으로 잡혀온 충남지역 국민보도연맹원, 징역 10년 이상을 받은 일반사범이었다. 당시 대전형무소엔 4000명의 재소자가 있었고, 이중 2000명 정도가 정치·사상범이었다고 한다. 대전의 남동쪽 끝부분에 자리한 골령골은 본래 대전형무소 사형 집행장이었다. 대전 동구와 충북 옥천군의 경계를 따라 이어지는 식장산-망덕봉 산줄기와 대전천 사이에 위치했다. 경찰의 지시를 받은 청년방위대원들이 미리 구덩이를 파놓고 기다렸다. 대전시 중촌동 1번지에 위치한 대전형무소에서 골령골까지는 9.4㎞ 거리였다.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은 형무관들에게 묶여서 헌병들이 징발한 미군 트럭에 실려왔다. 아스팔트 포장이 안 된 시골길을 1시간 넘게 달려왔을 것이다. 경찰과 헌병들은 골령골 구덩이 앞에서 재소자들에게 무릎을 꿇게 한 뒤 등을 밟고 뒷머리에 총을 쏘아 죽였다. 헌병 장교가 확인 사살을 했다. 골령골에서의 학살은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있었다고 전해진다. 1차, 1950년 6월28일부터 30일까지. 2차, 7월3일경부터 5일경까지. 3차, 7월6일경부터 17일 새벽까지, 그중에선 특히 15~16일. 희생자 추정 규모는 각각 세 번의 시기별로 1차 1400명(미군 제25사단 CIC 파견대 전투일지), 2차 1800명(미대사관 소속 육군 무관 에드워드 중령 보고) 또는 3000명(위닝턴 기록), 3차 1700명(프랑스 신부 카타르 증언) 또는 3700명(위닝턴 기록)이다. 각 최대치를 합하면 8000명을 넘는다.

▲ 대전 동구 낭월동 유해발굴 1지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유해발굴(3차)보고서

기록이 이러할진대 34구가 전부일 리는 없었다. 2010년 12월로 진실화해위가 활동을 중단하자 2014년 시민단체들이 힘을 모아 ‘한국전쟁기민간인학살유해발굴공동조사단’을 조직한다. 그리고 2015년 2~3월 골령골 1지점에서 20여구의 유해와 도랑의 존재를 확인한다. 위닝턴의 글에 나오는 그 도랑일지도 몰랐다. 발굴 주체가 조금씩 달라졌지만, 유해발굴은 2020년 9~11월, 2021년 6~11월, 2022년 4~12월 계속된다. 2020년 1지점에서 234구가, 2021년 1지점에서 무려 962구가 나왔다. 2022년 발굴에서는 191구(1지점 111구, 2지점 80구)가 나왔다. 점토성 토양이라 유해 상태는 극도로 안 좋았다. 사지뼈들 위주로 나왔다. 유해들이 층층이 겹쳐진 채로 있었다. 다섯 번의 발굴 결과 골령골에서 나온 총 유해수는 1441구(유품은 4587점)였다. 선주는 조사단장으로 또는 책임조사원으로 전 과정을 함께 했다.

1441명, 아직도 많이 남았다. 선주는 각종 자료와 증언에 기대어 파 볼 곳은 거의 다 파보았다고 여겼다. 세월이 지나면서 유실되기라도 했을까. 그럴 가능성도 크게 없었다. 물론 유일하게 접근하지 못한 송전탑 아래 8지점이 있었다. 토지소유주가 허락하지 않았다. 거기서 유해가 대규모로 나온다면 3000구 가까이 된다는 추정이 얼추 맞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위닝턴이 주장한 7000구에는 한참 모자랐다. 선주는 2009년과 2013년 공주 상왕동 왕촌 살구쟁이를 발굴하며 참고한 영국 <픽쳐 포스트>(Picture Post)의 트럭 사진을 다시 꺼내보았다. 공주형무소 재소자들이 두손을 뒤로 묶인 채 태워져 있는 트럭을 오스트레일리아 기자가 찍은 것이다. 대전형무소 재소자들도 이 트럭을 타고 왔다고 했다. 아무리 빽빽하게 채워도 35명 이상은 탈 수 없어 보였다.

 

▲ 2022년 4월 대전 낭월동 2지점 유해발굴 현장에서 여러 머리뼈가 나와 있다.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그러나 위닝턴은 7월4일에서 6일까지 이 트럭으로 50명 이상을 실어날랐다고 썼다. 17일 새벽에는 트럭에 100명 이상이 탔다고 했다. 37개의 트럭에 3700명이 실려 왔다고 했다. 위닝턴은 왜 50명과 100명의 숫자를 적시했을까. 트럭이 37대였다는 것은 어떤 기준에서 나왔을까. 위닝턴은 또한 200m의 도랑이 하나였고 100m짜리 도랑이 두 개였다고 했다. 그러나 선주가 파 보니 도랑은 1지점의 90m짜리 하나가 전부였다.

선주는 골령골을 언급할 때마다 ‘모던 미스’(modern myth)라는 용어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종의 고고학 개념이다. 사실처럼 알고 있는 지식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무엇인가 덧붙이고 덧붙여져 움직일 수 없는 신화처럼 굳어졌을 수도 있다는 것. 가령 한국전쟁 때 100만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고들 말한다. 사실인가? 선주는 골령골에서 3000명 이상, 아니 최대 7000명 죽었다거나 한국전쟁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100만명이라는 것 모두 모던 미쓰일 개연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골령골이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는 수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위닝턴이 주장했던 도랑의 실재에 근거해 그런 말을 하는 건 곤란했다.

 

▲ 대전 골령골 현장을 세계 최초로 보도했던 위닝턴(Winnington, 1910~1983)의 생전 모습. /위키미디어


학살의 존재나 범죄행위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었다. 실증하고 또 검증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인류학자의 못된 버릇이었다. 선주는 아무리 높게 쳐도 골령골의 희생자는 3000명 안팎이라고 보았다. 이는 1951년 1·4 후퇴 시기에 부역 혐의로 골령골에서 사형집행을 받은 166명까지 포함한 숫자였다. 골령골 사건의 진실규명을 했던 진실화해위 조사보고서도 “최소 1800여명 이상”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위닝턴은 1954년 영국 당국으로부터 반역자 낙인을 받고 본국 입국을 할 수 없게 된다. 한국전쟁기 남한의 학살을 보도하고 북한 포로수용소를 호의적으로 보도했다는 이유였다. 중국에 남았던 그는 1960년 <데일리 워커> 동베를린 통신원 자격으로 동독으로 건너간다. 1967년 비트브로트라는 현지 여성과 재혼하고, 범죄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영국에서 영화배우로도 활동했던 그는 사진 속에서 멋지게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다. 위닝턴은 진실을 보았다. 선주는 진실 속의 허점을 보았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