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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상식]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누구?

잠용(潛蓉) 2013. 3. 4. 16:46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무한한 자비심으로 모든 중생의 어려움과 고통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 바로 관세음 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을 관자재(觀自在: 마음대로 본다)보살, 또는 줄여서 ‘관음보살(觀音菩薩)’이 라고도 칭한다. 관세음보살은 이름 그대로 세상 사람들이 갈망하는 소리를 다 듣고 관찰하신다. 그래서 《천수경 千手經》에서는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신 관자재보살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관세음보살님의 자비심을 설명하고 있는 《관음경》을 보면 “일심으로 정성을 다해 관세음보살님을 염송하면 그 음성을 듣고 즉시 찾아와 괴로움을 없애 주고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고 한다. 중생의 고통은 뭐든지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관세음보살의 큰 자비심과 중생에 대한 애정은 넓고넓어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는다. 이러한 원력 때문에 전국적으로 많은 불자들이 관음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처지, 자신의 원하는 바를 하소연한다. 사찰의 이름에도 ‘관음사’나 ‘관음암’이 가장 많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관세음보살을 그린 탱화나 조각상에서 관세음보살은 자애스럽고 풍만한 여성으로 등장한다. 무엇이든지 다 이해하고 받아주고 보듬어 줄 것 같은 인자한 느낌이고 만인의 어머니 같은 관세음보살의 모습이다. 절에 가면 관음전, 또는 원통전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이다. 또 음력 매월 24일이 관음재일이다. 이 날은 관세음보살님께 공양을 올리면서 소원을 비는 날이다. (출처: 철량사)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의 구별
 

(1) 아미타불(阿彌陀佛) 대승불교, 특히 정토신앙을 숭봉하는 불교 종파에서 가장 중요하게 모시는 부처님이다. 범어로는 아미타바붓다(Amitabha-Buddha)라고 한다. 무량광불(無量光佛),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 의역하기도 한다. 한량없는 광명의 부처님, 한량없는 생명의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즉 아미타불은 한량없는 광명을 지니고 중생의 번뇌로 일어나는 어둠을 밝히는 한편, 생멸(生滅)이 없는 무한한 생명을 지닌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로 숭배된다.

특히 아미타불은 수준 높은 불교의 교설을 깨닫지 못하는 중생들에게 속히 성불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육자진언(六字眞言) 또는 육자염불(六字念佛)이 그것이다. 나무란 귀의한다는 뜻이며, 중생들이 믿고 의지하여 귀의할 대상은 물론 아미타불이다. 누구든지 무량한 광명과 무량한 수명을 지닌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의미를 지닌 이 염불을 정성껏 지송하면 깨달음을 얻고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미타불 신앙은 중국과 한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의 대승 불교권에서 특히 활발하며, 아미타불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더불어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더 널리 알려진 부처님이다. 이 부처님을 좌우에서 협시하는 보살은 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다. 그리고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는 법당은 극락전(極樂殿), 미타전(彌陀殿), 무량수전(無量壽殿), 무량광전(無量光殿)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2)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범어로는 아바로키테스바라(Avalokitesvara)이고, 관자재(觀自在), 관세음(觀世音), 광세음(廣世音), 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 관음(觀音) 등으로 한역된다. 대자대비를 근본 서원으로 하는 보살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석가모니불이나 정토신앙의 대명사인 아미타불보다 더욱 많이 신앙된다. 아마 이것은 관세음보살이 일반 민중들의 현실적인 고통을 어루만져 주고, 현세의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크게 33가지의 형상이 있어 보문시현(示現普門)이라 불린다. 왼손에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이라든가 감로병을 들고 있기도 하며 대개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늘 흰옷을 즐겨 입기 때문에 백의대사라고도 하는데 이는 관세음보살의 고결함을 나타낸다. 관세음보살은 흔히 관음보살이라 약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종류로는 성관음, 천수관음, 마두관음, 십일면관음. 준제관음, 여의륜관음 등 6관음이 대표적이다. 그 후 양귀비관음, 마리아관음, 청경관음, 영류수관음, 대륜관음, 수월관음, 만월관음, 군다리관음 등 많은 관음들이 생겨났다. 이 가운데 성관음(聖觀音)이 본신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보문시현의 변화에 의해 나타난 화신이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은 관음전(觀音殿), 또는 원통전(圓通殿)으로 불린다.

 

(아미타불상 - 불교중앙박물관 소장)

 

(속리산 법주사 목조 관세음보살상)


두 분의 전생(前生)

 

아주 먼 옛날, 남인도(南印度)에 '장나'라는 장자에게 조리와 속리라는 두 아이가 있었다. 두 아이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새 어머니에 의해 무인도에 버려졌다. 이들은 슬픔과 피로를 이기지 못해 굶주린 채 그만 숨을 거두게 된다. 숨지기 직전 동생은 어린 나이에 죽게 되는 기막힌 운명을 한탄한다. 그런데 말없이 듣고만 있던 형이 부드러운 말로 아우를 위로한다.

 

"속리야, 이제 우리는 목숨이 다된 것 같다. 살려고 해도 살 수 없는 우리 신세가 가련하구나. 그러나 세상에는 틀림없이 우리와 같은 신세를 가진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다. 부모 형제를 잃고 배고픔과 추위에 떠는 사람, 동무가 그리워 애통해 하는 사람, 망망대해에서 풍랑에 휩싸여 고생하는 사람, 부처님을 만나지 못해 해탈을 얻지 못한 사람, 그런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그들에게 알맞은 몸을 나누어서 구제해 주도록 하자."

 

두 형제는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써 찢어진 옷에 자신들의 서원(誓願: 맹세하는 글)을 써서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죽는다.

이상은 <관음본원경>에 담긴 관세음보살의 전생 이야기다. 형이 관세음보살이 되고, 동생은 대세지보살이 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 관세음보살은 누구보다 인간이 가진 고통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손과 눈이 1000개나 된다. 이것은 중생의 고통을 두루 살피고 어루만져주기 위해서이다.

천수경(千手經)


바로 이 관세음보살을 주인공으로,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을 담고 있는 경전이 천수경(千手經)이다. 천수경의 본래 이름은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이다. 우리나라 불자라면 거의 모든 이들이 외울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는 경이다. 현재 모든 법회나 의식에서 일상적으로 독송되는 천수경은 외우기 좋도록 재구성된 것이다. 팔만대장경에 있는 원래의 천수경은 그 양이 훨씬 많다. 본래의 천수경에서 관세음보살이 모든 존재에게 안락과 평안을 주기 위해 설한 '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중심으로, 의식을 행할 때 독송하기에 적합하도록 귀의 찬탄, 참회. 발원 등의 내용을 담아 재구성하고 재편집한 것이다. (사진: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상- 진부 부석사 소장)

천수경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신묘장구대다리니'는 진언이라고 하는데 진언은 고통과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암호와도 같은 것이다. 암호는 해독이 어렵다. 흔히 번역을 하지 않고 독송하는 이유다. 그러나 그 암호는 암호를 알고 있는 이들끼리는 아무런 설명 없이 통하듯 고통과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데는 틀림없는 효력이 있기 마련이다. 천수경을 외움으로써 생기는 효능에 대한 믿음은 천수경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일상적으로 독송되는 경으로 자리 잡게 했다. 부처님은 삶을 고해(苦海)라고 했다. 고통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게 인간사이고 보면,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고해에서 빠져나오길 염원하는 천수경이 널리 독경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를 일이다.

천수경이 유독 사랑받고 있는 이유를 들여다보면 결국 시대가 바라는 종교의 역할과 마주친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종교는 그 행복에 기여해야 한다. 그래서 힘든 이들에게는 적극적으로 즐거움을 주려는 관세음보살의 자심(慈心)과 고통을 함께 공감하며, 그 고통을 없애주려는 관세음보살의 비심(悲心)은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성이요, 실천윤리다. 즉 천수경은 관세음보살의 자비와 지혜를 통하여 바람직한 삶을 제시해 주는 경전이다. 결국 천수경의 진정한 가치는 내가 가진 단 두 개의 손 중 하나라도 내밀어 다른 이의 고통을 어루만질 때 완성된다. 모두들 힘들다 고 아우성이다.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이 심장처럼 뛰고 있는 천수경이 이 땅, 이 시대에 더욱 소중한 이유다. (자료: 정해학당 원장 오경스님)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과 <반야심경 盤若心經>

 

관세음보살과 관자재보살은 결국 같은 분이다. 하지만 우리는 관자재보살보다 관세음보살이 훨씬 익숙해져 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관세음보살이 아닌 관자재보살이라 칭하고 있다.

여기에는 숨은 의도가 있다. 즉, 반야심경은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는 ‘관세음보살’이 아니라 수행자인 ‘관자재보살’이 설하는 수행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을 경의 첫 단어에서부터 명확히 해두자는 의도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아버지’가 아닌 ‘사장’의 자격으로서 말한다는 선언인 셈이다. 아마 이 반야심경 만큼 해설서가 많은 경전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반야심경의 시작이 우리에게 익숙하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관세음보살이 아니라 관자재보살로 시작하는 이유를 밝혀 놓은 책을 나는 여태껏 보질 못했다.

법당에서 부처님전에 예불한 후 신중단(불법을 지키는 신들을 모신 단)에 이 반야심경을 독경하는 까닭은 신중들에게 부처님의 법을 즉, 반야심경의 도리를 잘 알고 따르라고 법문을 해주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 어떤 불자가 신중단에서 반야심경을 읽으며 절도 같이 한다면 이는 잘못된 경우다. 어명(御命)을 전하는 사람이 졸개라도 그 명을 받드는 사람이 임금이 아니라면 당연히 무릎을 꿇고 어명을 받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신중단에 반야심경을 독경하는 법은 퇴옹 성철스님이 젊은 수좌(선 수행을 하는 스님)때 선방의 몇몇 수좌들과 ‘장차 부처가 될 수행자가 불법을 옹호하는 신에게 절할 수 없다. 오히려 법문을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행한 것이 정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시 퇴옹다운 대단한 기개가 탄복스럽다.

말이 나온 김에 또 한번 옆길로 새어볼까 한다. 관자재보살이 관세음보살과 같은 분임은 충분히 설명된 듯한데, 관세음보살은 그 전신前身이 남자였는데 불화佛畵의 모습이나 그 표현은 거의 중생의 자비로운 어머니로 묘사되고 있는데 그 연유는 다음과 같다.

당나라의 회창법난(842~845 무종의 불교 말살 정책) 때, 무주 황제의 딸이 여러 스님들을 모시고 보타락가산(관세음보살이 상주하신다는 산 이름)으로 가던 중 군사들이 쫓아오자 관세음보살을 불렀는데, 이들이 건널 때는 멀쩡했던 다리가 뒤쫓아 온 군사들이 건널 때는 끊어졌다고 한다.그로 인해 사람들은 이 공주를 관세음보살의 화현化現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그 이후 관세음보살을 여자로 묘사하게 되었다는 그럴듯한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이렇듯 중국불교가 한국불교에 미친 긍정적 영향과 부정적 영향 역시 이 책이 풀어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다. (성법스님 지음 <마음, 깨달음 그리고 반야심경>에서)

 

관세음 보살의 12명호(名號)

 

관세음보살은 다음과 같은 12 가지나 되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1.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 (南無觀世音菩薩摩訶薩)
2. 나무대세지보살마하살 (南無大勢至菩薩摩訶薩)
3. 나무수보살마하살 (南無千手菩薩摩訶薩
4. 나무여의륜보살마하살 (南無如意輪菩薩摩訶薩)
5. 나무대륜보살마하살 (南無大輪菩薩摩訶薩)
6. 나무관자재보살마하살 (南無觀自在菩薩摩訶薩)
7. 나무정취보살마하살 (南無正趣菩薩摩訶薩)
8. 나무만월보살마하살 (南無滿月菩薩摩訶薩)
9. 나무수월보살마하살 (南無水月菩薩摩訶薩)
10.나무군다니보살마하살 (南無軍茶利菩薩摩訶薩)
11.나무십일면보살마하살 (南無十一面菩薩摩訶薩)
12.나무제대보살마하살 (南無諸大菩薩摩訶薩)

모든 중생의 근기와 원력에 따라 수천수만의 모습으로 응신하시는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비와 대지혜 광명을 (천수경)에서는 열두 가지 다른 이름으로 표현하여 지성귀의하고 있습니다. 곧 관세음보살님께서 지니고 계신 능력을 중생의 바라는 바에 대응하여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진: 관세음보살 입상 소장)

열두 가지 이름 이외에도 경전에서는 관세음보살을 42가지 이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을 이렇게 여러 가지 이름과 모양으로 분별하여 나타내고 부르더라도, 이 모두가 결국은 우주의 대지혜심이요 대자비심 자체인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이름 하나하나에 대해 살펴봅니다.

1)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 (南無觀世音菩薩摩訶薩): 세상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소리에 응하시는 보살. 관세음! 관세음은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조용히 살핀다’는 뜻입니다. 실로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마음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응하여 답을 주시고 고통을 여의게 하는 분입니다.

소리! 이 세상에 메아리 없는 소리는 없습니다. 메아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작은 울림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메아리는 이미 도달하였지만 우리의 귀가 열려 있지 않아 느끼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세상 모든 중생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중생들이 관세음보살님을 찾는 생각의 파장을 일으키면, 관세음보살께서는 그 생각의 파장을 감지하여 답하는 메아리, 즉 가피를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2) 나무대세지보살마하살(南無大勢至菩薩摩訶薩): 대자비, 대지혜의 광명으로 우주를 가득 채우고 계신 관세음보살님은 너무나 자애롭습니다. 이로 인해 우매한 중생들이 자칫 버릇없이 함부로 대할 수가 있으며, 그것이 중생에게는 새로운 업이 됩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께서는 스스로 위덕과 위엄의 상을 나투셨으니, 바로 그 이름이 ‘대세지(大勢至)입니다.
마치 아이들을 자애심만으로 키우면 버릇없는 아이가 될 수 있으므로, 때로는 엄격하게 위덕과 위엄으로 다스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관세음보살의 무한한 자비심에 귀의함과 동시에 그릇됨을 막는 대세지 보살의 위덕과 위엄에 귀의하여 ‘나’ 스스로의 자비심과 위덕과 위엄을 일깨우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3) 나무천수보살마하살(南無千手菩薩摩訶薩): 반복되는 말이지만 ‘천개의 손’이란 우주에 가득차 있는 자비를 베푸는 손이요, 중생 스스로가 본래부터 간직하고 있는 무한 능력을 발현하는 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수보살께 귀의하면서,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나’ 스스로 지니고 있는 수많은 손으로 중생들의 손을 잡아주고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삶을 발현시켜야 합니다.

 

4) 나무여의룬보살마하살(南無餘意輪菩薩摩訶薩): 그렇게 되고 나면 우리는 모든 것을 ‘뜻과 같이’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발원문을 외우며 축원을 합니다.

“내 이름을 듣는 이는 삼악도를 벗어나고, 내 모습을 보는 이는 해탈을 얻어지이다.”

참으로 거창한 축원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축원처럼 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마음자리를 찾고찾아 ‘나’ 속의 자비심이 온전히 발현되면 이러한 축원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억지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행이 아니라, 행하는 그대로가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이 여의륜입니다. ‘나무여의륜보살마하살’은 마음의 문을 열어 중생의 뜻대로 바퀴를 굴리는 내 마음 속의 여의륜보살님께 귀의하라는 것입니다.

5) 나무대륜보살마하살(南無大輪菩薩摩訶薩): 대륜보살 또한 여의륜보살의 다른 이름이며,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입니다. 대륜보살의 ‘대륜(大輪)’은 큰 바퀴입니다. 소승적인 바퀴가 아니라 중생 모두를 위하는 대승의 바퀴입니다. 그리고 그 바퀴가 크다고 하였지만, 실은 ‘크다. 작다’는 상대적인 개념을 초월한 크기입니다. 모든 상대적인 개념을 벗어나 오로지 베풀고 구하고 대해탈의 법륜을 굴리는 분이 대륜보살, 바로 관세음보살인 것입니다.

(사진: 개성 관음사의 관음상 소장)

나무관자재보살마하살(南無觀自在菩薩摩訶薩): 관자재보살의 ‘관자재(觀自在)는 ’보는 것을 자유 자재로이 한다‘는 뜻입니다. 우주 전체와 한 몸인 관세음보살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중생들의 아픔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한자리에 가만히 계시면서도 모든 세계를 꿰뚫어봅니다.
그분은 멀리 보타낙산에 계시다가 중생의 신음소리를 듣고 이곳으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에게는 이미 너와 나가 하나요, 여기와 저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없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자유 자재로 중생의 고통을 관찰하고 그들에게 행복과 안락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이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관자재’가 우리들 마음자리의 능력이라는 것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7) 나무정취보살마하살(南無正趣菩薩摩訶薩): 관세음보살님은 모든 중생의 소원과 함께하지만, 삿된 길과는 함께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바른 길로 나아가는 것(正趣)’에 초점을 맞추고 계신 것입니다. 공부를 하고 기도를 하는 이들로 하여금 방법상으로 둘러가게 할 수는 있어도, 결국은 그것이 씨앗이 되어 바른 길로 나아가게 만드는 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정취보살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나무정취보살마하살’을 염할 때는 언젠가는 바른 길로 나아가 근본 마음 자리를 깨닫겠다는 원을 발하여야 합니다.

8) 나무만월보살마하살(南無滿月菩薩摩訶薩): 우리가 정취보살의 바른 길로 나아가게 되면 근본 마음자리를 완전히 깨달아 모가 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만월을 이루게 됩니다. 둥글고 둥근 그 만월은 ‘나’의 마음자리를 완전히 깨달아 8만4천 보리(菩提)로 바꾼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만월보살이 되면 성을 내고자 하여도 성을 낼 수 있는 기운이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모든 기운이 완전히 만월로 바뀌고 나면, 우주 그 자체의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9) 나무수월보살마하살(南無水月菩薩摩訶薩):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만월(滿月, 둥근 달)은 ‘천강유수천강월(千江流水千江月)’이 됩니다. 일천 개의 강에 물이 있으니 일천 개의 강마다 달이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릇에 물을 담으면 이 그릇 속에 달이 하나 비치고, 저 그릇에 물을 담으면 저 그릇 속에 달이 하나 비칩니다. 작은 접시 물에도 큰 호수 물에도 달이 하나씩 비칩니다. 관세음보살은 마치 이 수월(水月, 물에 비친 달)과 같아서 어디에서나 같은 모습을 나타냅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자리도 평등한 수월과 같아서 나와 너의 구별이 없고, 친하고 친하지 않은 구별이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관세음보살님과 우리의 근본 마음자리에 귀의하는 것이 ‘나무수월보살마하살’인 것입니다.

10)나무군다리보살마하살(南無軍多利菩薩摩訶薩): 범어인 ‘군다리’는 감로병으로 번역됩니다. 이 감로병은 모든 중생들이 필요로 하는 감로수를 담은 자비의 상징물이요, 그 속에 있는 감로수는 써도 써도 줄어들지 않는 무한 존재 세계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픈 중생에게 약이 되고, 주린 자에게 밥이 되며, 목마른 자에게 물이 되고, 피로한 이에게 상쾌함을 주는 무한의 자비심, 군다리보살님께 귀의를 합니다. 아울러 ‘나’의 몸 안에도 마르지 않는 감로의 샘이 있어, 군다리보살님께 귀의하며 그 마음의 고향을 일깨우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11) 나무십일면보살마하살(南無十一面菩薩摩訶薩): 십일면보살은 십일면관세음보살의 줄인 이름입니다. 관세음보살의 머리 위에 또다시 열한가지 얼굴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이와같은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 11면 속에는 자애로운 모습. 화난. 모습 등이 두루 갖추어져 있습니다. 어른들이 아이를 키울 때 꾸중. 칭찬. 분노. 격려 등의 여러 모습을 나타내어 참된 인간을 만들어주듯이, 관세음보살도 여러가지 표정으로 우리를 제도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12) 나무제대보살마하살(南無諸大菩薩摩訶薩): 이제 개별적인 특성에 따른 열한 분의 관음에 대한 귀의를 끝내고 모든 보살님께 귀의하는 순서입니다. 일체의 모든! 여기에 불법의 소중함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을 믿는다고 하여 관세음보살께만 귀의할 것을 불법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문수. 보현 등의 모든 보살께도 귀의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 불법입니다. 나아가 일체 중생도 모두 귀의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의 근본 마음자리에서 보면 불보살 아닌 중생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보살이 관음이요 모든 중생이 관음임을 뜻하는 ‘나무제대보살마하살!’ 참으로 멋진 표현이요 멋진 끝맺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진스님)

아미타불의 ‘48 대서원(大誓願)’

 

과거에, 아미타불이 되기 이전인 법장보살 때 처음 세운 원으로서, <불설무량수경>에 그 내용이 나온다. 

1. 나의 불국토에는 지옥 아귀 축생 등 삼악도의 불행이 없을 것이다.

2.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다시는 삼악도에 떨어질 염려가 없을 것이다.

3.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다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날 것이다.

4.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한결같이 훌륭한 몸을 가져 잘나고 못난이가 따로 없을 것이다.

5.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숙명통을 얻어 백천억 나유타 겁 이전의 과거사를 다 알게 될 것이다.

6.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모두 천안통을 얻어 적어도 백천억 나유타 세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7.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중생은 모두 천이통을 얻어 백천억 나유타 부처님 설법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8.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모두 타심통을 얻어 적어도 백천억 나유타 세계에 있는 중생들의 마음 을 알게 될 것이다.

9.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중생은 신족통을 얻어 백천억 나유타 세계를 순식간에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10.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번뇌의 근본되는 아집이 뿌리째 없어질 것이다.

11.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이 생에서 바로 열반이 결정된 부류에 들어가 필경에 성불할 것이다.

12. 나의 광명은 끝이 없어 적어도 백천억 나유타 불국토를 비추게 될 것이다.

13. 나의 목숨은 한량이 없어 백천억 나유타 겁으로도 셀 수 없을 것이다.

14. 나의 불국토에는 수없는 성문 수행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나올 것이다.

15. 나의 불국토에 와서 태어나는 중생들은 목숨이 한량없을 것이다. 다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목숨의 길고 짧음을 마음대로 할 것이다.

16.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나쁜 일이라고는 그 이름조차 들을 수 없을 것이다.

17. 나의 이름과 공덕을 시방세계 부처님들이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18. 어떤 중생이든지 지극한 마음으로 내 불국토를 좋아하여 와서 태어나려는 이는 내 이름을 열번만 부르면 반드시 왕생하게 될 것이다.

19. 보리심을 내어 여러 가지 공덕을 닦고 지극한 마음으로 원을 세워 내 불국토에 태어나려는 중생들은 그들이 임종할 때에 내가 대중과 함께 가서 그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20. 시방세계 중생들이 내 이름을 듣고 내 불국토를 사랑하여 여러 가지 공덕을 짓고 지극한 마음으로 내 국토에 태어나고자 하는 중생들은 반드시 왕생하게 될 것이다.

21. 내 불국토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반드시 32상의 빛나는 몸매를 갖추게 될 것이다.

22. 다른 세계의 보살로서 내 불국토에 태어나는 이는 마침내 ‘일생 보처’라는 보살의 가장 높은 지위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의 본래 소원이 여러 부처님 세계로 다니면서 보살행을 닦고 시방 여래께 공양하며 한량없는 중생을 교화하여 위없는 도에 이르게 하려는 이는 더 말할 필요도 없으며, 그것은 보살의 보통 일을 넘어 보현보살의 덕을 닦고 있기 때문이다.

23.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밥 한 그릇 먹는 동안에 수없는 불국토로 다니면서 여러 부처님께 공양하게 될 것이다.

24.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중생들이 부처님께 공양하려 할 때는 어떤 공양물이든 마음대로 얻게 될 것이다.

25.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보살들은 누구든지 부처님의 온갖 지혜를 얻어 법을 말하게 될 것이다.

26.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보살들은 모두 용이나 코끼리와 같은 굳센 몸을 얻게 될 것이다.

27.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중생들이 쓰는 온갖 물건은 모두 아름답고 화려하여 비교할 수 없는 것들 뿐이어서 비록 천안통을 얻은 이라도 그 수효를 알 수 없을 것이다.

28.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아무리 공덕이 적은 이라도 높이가 4백만 리 되는 보리수의 한량없는 빛을 보게 될 것이다.

29.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스스로 경을 읽고 외우며 남에게 말하여 듣게 하는 재주와 지혜를 얻을 것이다.

30.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모두 걸림 없는 지혜와 말 솜씨를 얻을 것이다.

31. 나의 불국토는 한없이 밝고 깨끗하여 수없는 부처님 세계를 비추어 마치 거울로 얼굴을 비추어 보듯 할 것이다.

32. 나의 불국토는 지상이나 허공에 있는 궁전이나 누각, 시냇물, 연못, 화초나 나무 등 온갖 것이 모두 여러 가지 보석과 향으로 되어 비길 데 없이 훌륭하며, 거기에서 풍기는 향기는 시방세계에 두루 번져 그것을 맡는 이는 모두 거룩한 부처님의 행을 닦게 될 것이다.

33. 시방세계 한량없는 중생들이 내 광명에 비치기만 해도 그 몸과 마음이 부드럽고 깨끗하여 천인보다도 더 뛰어날 것이다.

34. 시방세계의 어떤 중생이 내 이름을 듣기만 하여도 보살의 무생법인과 깊은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35. 시방세계의 어떤 여인이든지 내 이름을 듣고 기뻐하여 보리심을 내는 이가, 만약 여인의 몸을 싫어하면 죽은 후에는 다시는 여인의 몸을 받지 않을 것이다.

36. 시방세계의 한량없는 보살들이 내 이름을 듣기만 하여도 죽은 뒤 항상 청정한 행을 닦아 반드시 성불하게 될 것이다.

37. 시방세계의 한량없는 천인이나 인간이 내 이름을 듣고 예배하고 귀의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보살행을 닦으면 모든 천인과 인간의 공경을 받게 될 것이다.

38.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옷 입을 생각만 해도 아름다운 옷이 저절로 입혀지고, 그 옷은 바느질한 자국이나 물들인 흔적이나 빨래한 흔적이 없을 것이다.

39.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생각하는 대로 받는 즐거움이 번뇌가 없어진 비구니와 같아 집착이 일어나지 아니할 것이다.

40. 나의 불국토에 태어나는 중생들이 시방세계에 있는 부처님들의 참 모습을 보려고 하면 소원대로 보석의 나무에 나타나 비치기를 거울에 얼굴이 비치듯 할 것이다.

41. 다른 세계의 어떤 중생이나 내 이름을 들은 이는 성불할 때까지 육근이 원만하여 불구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42. 다른 세계의 어떤 중생이나 내 이름을 들은 이는 모두 깨끗한 해탈삼매를 얻게 되고, 이 삼매를 얻은 이는 잠깐 사이에 한량없는 부처님께 공양하면서도 삼매를 잃지 않을 것이다.

43. 다른 세계의 어떤 중생이나 내 이름을 들은 이는 죽은 뒤에 부귀한 가정에 태어날 것이다.

44. 다른 세계의 보살로서 내 이름을 들은 이는 즐거운 마음으로 보살행을 닦아서 선근 공덕을 갖추게 될 것이다.

45. 다른 세계의 보살로서 내 이름을 들은 이는 한량없는 부처님을 한꺼번에 뵈올 수 있는 평등한 삼매를 얻어 성불할 때까지 항상 수없는 부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46. 내 불국토에 태어나는 보살들은 소원대로 듣고 싶은 법문을 저절로 듣게 될 것이다.

47. 다른 세계의 보살로서 내 이름을 들은 이는 곧 물러나지 않는 자리에 들어갈 것이다.

48. 다른 세계의 보살로서 내 이름을 들은 이는 첫째로 설법을 듣고 깨달을 것이며, 둘째로 진리에 수순하여 깨달을 것이며, 셋째로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도리를 깨달아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Imee Ooi - The Dharani of Sri Devi (Sanskr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