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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불교·죽음

[불교상식] 석가모니 부처님 10대 제자

잠용(潛蓉) 2013. 3. 3. 16:48

 = 통일신라 시대 경주석굴암 본존과 주변부조에 표현한 =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과 10대 제자들

 

(석굴암 석가모니 본존 부처님, 통일신라, 국보 제24호)

 

원래 문헌을 통해서는 10대 제자로 밝혀져 있는 인물은 일정하지가 않다. 고대 부파불교나 원시 경전, 특히<증지부 增支部>에서는 10대 제자로 한정하지 않고 비구 또는 비구니, 그리고 남녀 재가 신자의 이름을 수십 명을 열거하여 ‘○○ 제일’이라는 식의 표현으로 그가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자임을 표시하고 있다. 소승불교에서는 5대 제자를 부처님의 뛰어난 제자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을 거쳐 들어온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유마경 維摩經> 제자품에서 언급된 10대 제자로 고정 관념화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유마경>에 따르면 10대 제자는 아래와 같다. (잠용)



[1] 마하가섭(摩訶迦葉, 大迦葉, Mahakasyapa)
☞ 두타 제일(頭陀第一) :먹고 입고 사는 일에 집착을 버리고, 작은 것에 만족하며 몸과 마음을 오직 수행하는 데만 전념하여 이런 별명을 얻었다. 두타(頭陀)는 ‘탁발’과 같은 말이다.

 

왕사성(王舍城, 라자가하) 출신으로 원래 이름은 핍팔라(pippala)였으나 출가한 뒤 가섭(kasyapa) 으로 이름을바꿨으며, 가섭 3형제와 구별하여 그를 대가섭(Mahakasyapa)이라 칭한다.

가섭은 마가다국의 왕사성 근처에서 태어나 여덟 살에 바라문이 되었으나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출가하려고 했다. 그러나 후손의 단절을 염려한 부모님의 결혼 권유로 마지못해 장인(匠人)에게 찾아가 아름다운 황금빛 여인상을 만들게 하여, 부모님께 그 여인상을 보여주며 이와 같은 여인이라면 결혼하겠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웠다.

그러나 부모는 수소문 끝에 베살리 교외 카필파카 마을에 사는 한 바라문의 딸 밧다카필라니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는 몰래 그녀를 찾아가 세속적 욕망에메인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그녀도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결국 이들은 결혼했으나 무려 12년 동안 서로 육체적 관계를 맺지 않았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두 사람은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각자 출가하여부처님께 귀의했으며 아내 밧다카필라니는 외도수행자 문하에 들어갔다. 나중에 부처님 교단에서 비구니의 출가가 허용 되었을 때, 그는 그녀를 데려와 마하파자파티에게 구족계를 받게 했다.

그는 부처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뒤 8일 만에 깨달았다. 어느 날 부처님이 라자가하에서 탁발을 마치고 잠시 쉬고자 할 때 그가 가사를 벗어 앉으실 자리를 마련하고그 가사를 부처님께 바쳤다. 부처님은 당신의 오래된 낡아빠진 베옷을 그에게 주었다. 그 뒤 그는 한결같이 그 옷을 입고 다녔다.

부처님이 코살라국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도 그의 행색이 초라하여 다른 수행자들이 부처님께 위의(威儀)를 갖추지 않았다며 조롱했으나 이것을 안 부처님이 설법 도중 그를 부처님의 자리 옆에 함께 앉도록 하여 그가 제자로서 손색이 없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고된 수행을 잘 견뎌내 두타행(頭陀行)에서는 아무도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부처님 입멸후(入滅後) 불교교단의 중심 인물이 되어 교단을 이끌었으며, 500 아라한(阿羅漢)의 상수(上首)가 되어 제1 결집을 주도하였다. 아난에게 불법을 부촉하고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계족산에 들어갔다고 하며 선종(禪宗)에서는 서천 28조 중에서 제일 조(第一祖)로 추앙 받고 있다. 


[2] 아난타(阿難陀, 阿難尊者 Ananda)

☞ 다문 제일(多聞第一) :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듣고 기억을 잘한 제자.

 

가비라성 출신으로 부처님의 사촌 동생이다. 여러 왕자와 함께 출가하여 부처님의 시자(侍者)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까지 25년 동안 언제나 정성을 다해 시중을 들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10대 제자 중 다문 제일(多聞第一)로 불렸다.

어느 날 그가 사밧티 거리에 탁발을마치고 기원정사로 돌아오던 중 어떤 계급보다 천시되던 마등가(摩登伽)라는 종족이 살고 있는 촌락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우물가에서 프라크리티라는 아가씨에게 마실 물 한 그릇을 청했는데 아가씨는 자신이 천민임을 들어 물을 줄 자격이 없다고 거절했으나 그는 부처님의 제자는 신분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프라크리티는 그의 수려한 용모와 자비로움에 반해 그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이에 부처님이 중재하여 프라크리티는 비구니가 되었다.

부처님이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실 때 임종을 지켜보며 슬퍼하던 그를 보고 부처님은 가진 정성을 다해 자신을 시봉했던 유능한 수행자라고 주위의 대중들에게 칭찬했다. 그러나 너무 부처님의 수행에 의존한 나머지 부처님의 입적 때까지 아라한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든 후 5백 명의 제자들이 라자가하 교외의 비파라산(毘婆羅山)에 있는 칠엽굴(七葉窟)에 모여 최초로 경전을 결집할 때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단의 지도자 마하카사파(大迦葉) 등이 아직 깨닫지 못한 그를 경전 정리의 책임자로 지명하는데 반대했다. 그는 책임감을 통감하고 결집이 열리기 전날 밤 용맹정진(勇猛精進)하여 깨달음을 이루고 이튿날 경장(經藏) 송출의 책임자가 되었다. 지금도 대부분의 경전에서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如是我聞)...”로 시작되고 있는데 여기서 ‘나’ 는 바로 아난타를 지칭하는 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모인 교담미(?曇彌 : 마하파자파티)의 출가를 도와 부처님께 청하여 최초의 비구니를 만들게 하였으며 대가섭의 뒤를 이어 선종 제2조가 되었다. 120세까지 살다가 입적할 때는 마가다국의 아쟈타삿투 왕과 베살리의 리차비족 사람들이 서로 사리를 차지하려고 싸울 것을 미리 예견하고, 이 두 나라의 국경을 이루는 갠지스강 가운데에서 몸을 불태워 입적(入寂)하자 두 나라 사람들은 그의 이런 태도에 감복하여 사리를 서로 공정하게 나누어탑을 세웠다고 한다.


[3] 사리불 (舍利佛, 사리풋타 Sariputta)
☞ 지혜 제일(智慧第一) : 지혜가 가장 뛰어난 제자.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王舍城) 근처 나라다 마을에 사는 부유한 바라문의 여덟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원래 이름은 우파티샤였으나 어머니의 이름인 사리를 따서 사리풋타라 불렀다. 어려서부터 목건련(目健蓮)과 절친하였으며 불법에 귀의한 뒤 지혜가 매우 날카로와 능히 모든 의심을 해결해 주었기 때문에 지혜 제일(智慧第一)이라는 칭송 받았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이미 고대 인도의 성전인 네 가지 베다(Veda)를 익혀 그 뜻을 통달했고, 16세 때는 부친의 제자들을 모두 굴복시켰으며 예술에도 재능이 출중하여 코리가 마을의 목갈라나와 함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어느 날 그들은 근처의 산에서 바라문교의 제사를 구경하다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진실한 깨달음을 구하기로 맹세하였다.

그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7일간의 단식 끝에 출가를 허락받았으며, 목갈라나(목건련, 목련존자)와 함께 출가했다. 그들은 라자가하에서 당시 명성을 떨치던 유명한 회의론자(懷疑論者)인 산자야의 문하에 들어가 그 교지(敎旨)를 통달하고, 불과 7일 만에 스승을 대신할 만큼 되어 250 제자의 상수(上首)가 되었으나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얻지는 못했다.

그 며칠 후 라자가하의 길거리에서 탁발하던 부처님의 제자 앗사지(馬勝, 아설시 阿設示)를 만나 연기(緣起)의 가르침을 들었다. 그는 목갈라나에게 알려 산자야 문하 250명의 다른 수행자들과 함께 죽림정사로 가서 부처님께 귀의하여 15일만에 아라한과를 얻었다. 뛰어난 지혜로 많은 중생을 제도하였으며, <반야심경 般若心經>, <화엄경 華嚴經> 또는 <법화경 法華經>이나 어려운 경전 내용을 설명 할 때는 반드시 이 사리불을 중심으로 말씀한다.

이들은 점차 불교교단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며 교단 내의 여러 문제들도 맡아서 해결해 냈다. 데바닷타(제바달다, 提婆達多)가 부처님에게 반대하여 교단이 분열의 위기에 처했을 때도 혼란 속에 빠진 수행자들을 설득하여 사태를 수습했다. 불교교단에 반대하거나 데바닷타를 따르던 무리들이 누차에 걸쳐 그들을 박해해 목갈라나는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르도록 몽둥이로 맞기까지 했는데 그와 목갈라나(목건련, 目健連)가 교단을 지키려는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부처님보다 나이가 많으며 이 사건 이후 목갈라나와 함께 부처님께 입적을 위한 작별을 고하고 나라다 마을로 가서 친척들에게 마지막 포교를 편 뒤 목건련 입멸 후 슬퍼하다가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먼저 입적(入寂)하였다.


[4] 목련(目連, 目健連, 目連尊者 Moggallana)
☞ 신통 제일(神通第一) : 신통력(神通力)이 가장 뛰어난 제자.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한 뒤 신통(神通)을 잘 익혀 신통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 신통력으로 부처님의 법을 전하려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능히 시방(十方)을 날아다녔으므로 신통 제일(神通第一)이라 불렸으며, 우란분(盂蘭盆)의 기원이 되기도 한 제자이다.

마가다국 라자가하(王舍城) 근교 코리가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건장하고 학문에 통달하여 인근 나라다 마을의 사리풋타(舍利弗)와 함께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두 사람은 서로 친하여 어느 날 바라문교의 제사의식을 함께 구경한 뒤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 라자가하의 유명한 회의론자인 산자야 문하로 들어갔다. 거기서 곧 스승을 대신할 만큼 지혜를 얻었으나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얻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라자가하의 거리에서 탁발을 하던 부처님의 제자 앗사지(馬勝, 아설시)를 만나 연기(緣起)의 가르침을 들은 사리풋타(사리불)의 권유로 산자야의 제자 250명과 함께 죽림정사를 방문해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불교에 귀의한 후 1개월만에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으며 사리풋타와 함께 점차 불교교단의 중심 인물로 부각되었다.

데바닷타(提婆達多)가 부처님에게 반대해 교단이 분열 위기에 처했을 때도 수행자들을 설득해 혼란을 수습했다. 코살라국의 비두다바왕이 샤카족을 멸망시키려 할 때도 그는 신통력으로 카필라성에 철제방을 쌓아 막으려 했으나 샤카족의 멸망은 그들 업(業)의 과보(果報)라는 부처님의 만류로 그만둔 적이 있었다. 이로 인해불교교단에 반대하거나 데바닷타를 따르는 무리들의그에 대한 박해도 점차 거세졌다.

말년에 그는 라자가하에서 집장외도(執杖外道) 일파에게 몽둥이로 맞아서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갈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을 본 사리풋다가 물었다. “그대는 신통 제일로 불릴 만큼 훌륭한 법력을 가지고 있는데 왜 피하지 못했는가?” 그러자 그는 “나는 전생에 부모를 괴롭힌 과보를 받는 것일 뿐이네.”라고 대답했다.

목갈라나의 대답은 오히려 담담할 뿐이었다. 이러한 일에 대해서 또한 부처님은 “그는 전생에 아내에게 속아 부모를 숲속에 버렸다. 그 악업이 아직도 남아 박해를 받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 사건 이후 부처님께 입적을 허락받은 뒤 고향 코리가로 돌아갔다. 코리가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전생의 인연에 따라 집장 바라문에게 와석(瓦石)으로 맞아서 부처님보다 먼저 입적하였다.

한편 우란분재(盂蘭盆齋)는 목련존자가 어머니가 죄를 지어 아귀도(餓鬼道)에 떨어져 있을 때 대중에게 공양(供養)을 올려 그 혼령(魂靈)을 구제한 것에 기원한 것으로 이날(음력 7월 보름)은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어 조상의 영전(靈前)에 바쳐 아귀(餓鬼)에 시주(施主)하고 조상의 명복(冥福) 을 빌며 그들이 받는 고통을 구제해 주려고 재를 올린다. 이를 민속 절기(民俗節氣)로 백중(百中, 百衆))이라고 한다.

 


[5] 아나율(阿那律, Aniruddha)
☞ 천안 제일(天眼 第一) : 자신의 눈알을 보시하고 지혜의 눈을 얻어, 사물의 진면목(내면)을 보게 되고 보이지 않는 것도 모두 볼 수 있는 천리안(千里眼)을 가진 제자.

 

산스크리트 명은 아니룻다(Aniruddha, 阿尼樓陀)이다. 무멸(無滅), 불멸(不滅) 무탐(無貪), 여의(如意) 등으로 의역된다. 부처님 설법시 졸다가 꾸지람을 듣고 눈을 뜨고 정진(精進)하다가 육안(肉眼)을 잃었으나 그 뒤부터 정신이 맑고 밝아 지혜의 큰 눈인 천안(天眼)을 얻게 되어 모든 것을 볼 수 있었으므로 천안 제일(天眼第一)이라 칭송받았으며, 뒤에 경전을 결집할 때 큰 힘이 되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뒤 카필라성에 돌아왔을 때 바드리카(跋提), 아난다(阿難陀), 난디(難提), 데바닷타(提婆達多), 파아샤(波娑), 금비라(金卑羅) 등의 왕족과 함께 출가하여 부처님께 귀의하였으며 이후 입적하기 전까지 55년 동안 수행을 계속했다. 그러나 왕사성 출신인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샤카족의 가난한 요리사였다는 설과 샤카족 마하나마(摩訶男)의 아우로 부처님의 사촌동생이라는 설이 있다.

일찍이 부처님께서 코살라국의 수도 사밧티에 있는 기원정사에서 많은 제자와 신자들에게 가르침을 설할 때 그가 졸았던 일이 있다. 이때 부처님은 “아니룻다야, 너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불제자가 되었느냐?” 라고 조용히 꾸짖었다. 이에 아니룻다는 곧 “오늘 이후부터 저는 설사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부처님 앞에서 졸지 않겠습니다.”라고 부처님께 참회하고 다짐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밤이 깊고 아침이 되어도 결코 잠을 자지 않았다. 부처님은 “수행을 게을리 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그대처럼 지나쳐도 잘못이다.”라고 염려의 말로 타일렀으며 더욱이 그의 시력이 나빠짐을 걱정하여 명의(名醫) 지바카(耆婆)를 시켜 그의 눈을 보살펴 주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부처님의 누차에 걸친 설득에도 불구하고 결심을 바꾸지 않아 끝내 실명(失明)하고 말았는데 대신 철저한 수행 끝에 지혜의 눈을 얻었으며 이를 인정한 부처님은 그를 천안 제일이라고 칭찬했다. 그 뒤 역시 기원정사에 있을 때 자신의 옷을 꿰매려는데 도저히 바늘구멍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모습을 본 부처님은 손수 그의 옷을 꿰매어 주면서 “내가 쌓는 공덕은 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을 위한 것이다.” 라고 수행의 바른 길을 제시하였다.

아나율은 8 가지 수행자의 조건을 제시해서 그것을 구도자의 표상으로 삼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팔대인념 八大人念>이다. 팔대인각(八大人覺)이라고도 하는 이 말의 내용을 알아보자.
① 지족할 줄 아는 마음가짐(知足者), ② 시끄럽지 않고 조용한 곳에 머무르는 마음가짐(閑居者), ③ 욕심없는 마음가짐(小欲者), ④ 계율을 지키는 마음(持戒者), ⑤ 생각이 고요한 마음가짐(三昧者), ⑥ 지혜로운 마음가짐(智慧者), ⑦ 많이 들으려는 마음가짐(多聞者), ⑧ 정진하려는 마음가짐(精進者) 등이다.

석굴암의 10대 제자상에는 본존불을 향하여 우측 네 번째로 등장하는데 눈에 이상이 있는 듯한 모습이다. 두 손을 가슴쪽으로 모아 홀(笏)을 다소곳이 부여잡고 있는데 그 홀의 윗부분이 아랫입술에 닿아 있다. 조용하고 단아한 분위기에서 아나율 존자의 침착하고 의젓한 모습이 서려 있는 듯하다. 그는 수행을 계속하다가 마지막으로 밧지족이 살던 베루바 마을에서입적했다.

 

 


[6] 수보리(須菩提, Subhuti)
☞ 평등 해공 제일(平等 解空 第一) : 부처님의 공(空)에 대한 설법을 가장 잘 이해한 제자.

 


공(空)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하여 해공 제일(解空第一)이라불렀고 결코 남과 논쟁하지 않았다 하여 무쟁 제일(無諍第一), 누구보다도 신자의 공양을 후하게 받았다 하여 피공 제일(被供第一)이라 고도 불렸다.

사위국 출신으로 어렸을 때 악동(惡童)으로 유명했으나 뒤에 가출하여 숲에 있다가 신선(神仙)의 인도(引導)로 석존(釋尊)께 귀의하였다. 그 뒤 수행으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고 특히 공(空)의 이치에 대단히 밝았다. <금강경 金剛經>은 수보리 존자와 부처님과의 대화에서 이루어진 경전이다.

한편 코살라국 사밧티(舍衛城)에 살던 기원정사를 기증했던 수달(須達, Sudatta) 장자의 아우 수마나의 아들로 수닷타가 기원정사를 부처님께 봉헌하는 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했다.

불법에 귀의한 뒤 능히 공(空)의 뜻을 잘 깨달았으므로 해공 제일(解空第一)이라 칭송 받았으나공 사상은 후대 대승불교(大乘佛敎)에 와서야 성립되었으므로 아마도 해공 제일은 대승권에서 붙인 호칭인 듯하며 본래는 은둔 제일(隱遁第一)이라고 불리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가 마가다국의 라자가하(王舍城)에 있을 때 빔비사라 왕이 그의 설법을 듣고 감격하여 그에게 정사를 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당시 마가다국은 인도 대륙에 있던 16대국 중에서도 가장 강성하여 다른 나라를 병합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므로 왕이 국사에 쫓겨 미처 정사의 지붕을 만들어 주지 못한 채 이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떤 물건이든 탓하지 않고 공양을 감사하게 여겨 온 그는 아무 말 없이 지붕 없는 정사에 머물렀다.

더운 햇빛과 밤 이슬을 피하지 못하고 지내기란 무척 괴로운 일이었지만 무려 수 개월을 그대로 지냈으나 다행히도 그 동안 비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마가다국 사람들은 강렬한 햇살에 시달리고 농작물이 말라 가뭄의 고통을 견디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왕이 마침내 그 까닭을 수소문하자, 그의 정사 지붕을 만들어 주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답을 듣고 왕이 시급히 정사의 지붕을 완성하자 곧 비가 내리고 백성들은 생기를 되찾게 되었는데그제서야그도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수보리존자를 피공 제일이라 부르는 것은 공양을 많이 받아서가 아니라, 이처럼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공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이 세상이 모두 공허한 것이지만 성실하게 살며 모든 중생과 동고동락 하겠다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러므로 <반야경 般若經>에서는 공(空)을 설하는 부처님의 상대자로 그가 등장하기도 한다.

 

 


[7] 부루나(富樓那, Purana)
☞ 설법 제일(說法第一) : 언변이 뛰어나고 논리(論理)가 분명해서 설법을 가장 잘한 제자.

 

 

원래 이름은 푼나마타니풋타라로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언변이 가장 뛰어나고 의리(義理)를 분별하여 설법하였으므로 설법 제일(說法第一)이라 불렸다.

부처님이 태어난 카필라성의 도나바투라고 하는 바라문 촌(일설에는 수나아파란타라고도 함)에서 부처님과 같은 날 태어났다. 아버지는 숫도다나왕의 국사이며 어머니는 만타니로서 콘단냐 장로의 여동생이다. 푸라나는 여려서부터 총명하여 친구 33인과 함께 출가수도(出家修道)하다가 부처님의 성도 소식을 듣고 귀의(歸依)하여 제자가 되었다.

한편 수달장자의 소개로 불법에 귀의한 뒤 설법 제일이라는 칭송 받았고 후에 고향인 수나아파란타국에 가서 전도를 펼쳤다고도 한다. 뒤에 아라한과를 얻은 후 지혜의 눈을 뜨고 부처님을 따라다니며 탁월한 지식과 언변으로 무려 9만 9천 명의 사람을 교화했다고 하는데, 그는 상대를 굴복시켜 자기 주장을 주입하는 방법보다는 상대의 입장을 일단 인정하고 그런 다음 참다운 종교심을 싹트게 하는 포교법을 구사했다고 전한다.

어느날 그는 마가다국 라자가하(王舍城)의 죽림정사에 머물고 계신 부처님께 포교활동을 위해서 서방의 수아나파란타로 가겠다는 결심을 전했다. 이에 부처님은 그에게 물었다. “그 지방 사람들이 너에게 욕을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하시자 그는“모두 착한 사람들이어서 때리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시, “만일 너를 죽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물으시자 그는, “세상에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고 자신을 죽여 줄 것을 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원하는 죽음을 나에게 베풀어준다고 생각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그의 착한 마음을 칭찬하고 이를 허락했다.

당시 사밧티나 라자가하와 같은 대도시에는 많은 종교가들이 있어서 종교나 철학에 대한 지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으나 수아나파란타 같은 변경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대도시에서 누릴 수 있는 안일한 삶을 버리고 많은 부처님 제자들처럼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를 하고변경지역의 포교에 임했다. 그는 수아나파란타에서 일년 동안 5백명의 사람들을 불문에 귀의시킨 후 입적하였다.

 

 


[8] 가전연(迦延, Katyayana)
☞ 논의 제일(論議第一) :부처님의 설법을 논리 정연하고 분명하게 확립한 제자.

 


<시설족론 施設足論>의 저자로 해박(該博)한 불교이론과 부처님 교설의 이치를 문답하고 분별하는데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으므로 부처님은 그를 논의 제일(論議第一)이라고 칭찬했으며 후에 귀국하여 왕과 국민을 교화하였다.

서인도 아반티국 웃제니에서 왕사(王師)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부처님을 만나고자 하는 왕의 명으로 아반티국에 모셔 오기 위해 찾아갔다가 설법을 듣고 감동하여 출가하였다. 그는 불교 전도에 큰 업적을 세웠으며 특히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변경 포교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불교교단의 규정에 의하면 출가를 원하는 자에게 구족계를 주려 할 때에는 계를 주는 계화상(戒和尙), 계를 받는 취지를 설하여 부처님과 대중에게 알리는 사회자 역할을 하는 갈마사(褐磨師), 계를 받는 사람의 태도와 행동방법을 지도하는 교수사(敎授師) 그리고 일곱 명의 증명인(證明人) 등 모두 열 명의 비구가 필요했다. 그러나 마가다국이나 코살라국처럼 출가자가 많은 곳에서는 열 명의 비구를 확보하기가 쉽지만 변경에서는 출가자가 흔치 않아 계를 주기가 힘들었다.

그가 아반티국에서 포교하고 있을 때 그에게는 소나라는 시자(侍者)가 있었는데 이 시자가 출가하여 수행하고 싶어도 그가 허락하지 않았다. 아반티국은 불교의 중심지인 마가다국이나 코살라국 등으로부터 많이 떨어진 중인도의 서부에 위치해 있어서 수계의식을 치르는 데 필요한 열 명의 비구를 모두 확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삼 년을 기다려서야 열 명의 비구를 모아서 소나에게 구족계를 줄 수가 있었다.

그 후 어느 날 소나가 부처님을 뵙고자 길을 떠날 때 그는 소나에게 이와 같은 수계의 어려움과 계율 때문에 지방의 풍습과 마찰을 일으키는 문제도 아울러 부처님께 전하고 돌아오게 했는데 코살라국의 사밧티에 있는 기원정사에서 소나를 맞은 부처님은 변경의 특수한 사정을 헤아려 그의 부탁을 모두 수용하셨다고 한다.

 

 


[9] 우바리(優婆提, Upali)
☞ 계율 지계 제일((戒律 持戒 第一) : 계율을 잘 지키고 또한 그 실천에도 가장 뛰어난 제자.

 

 

고대 인도의 사성(四姓 : 4가지 신분) 중에서 가장 낮은 계급인 수드라(노예) 출신으로 샤카족의 궁중 이발사였다. 석존의 성도 6년 후에 석가족과 함께 출가하여 사성(四姓) 무차별(無差別), 평등(平等)의 첫번째 출가자가 되었다. 불법에 귀의한 뒤 계율을 잘 지키고 실천에 가장 훌륭한 제자가 되었으므로 지계 제일(持戒第一)이라 불렸으며 제1결집 때 율(律)을 송출(誦出)해 내는 역할을 맡았다.

부처님이 성도 후 카필라성에 돌아왔을 때 바드리카를 비롯한 아난다, 데바닷타, 아니룻다 등의 샤카족 귀공자들이 부처님께 출가하려고 그를 찾아와서는 수행생활에 불필요한 자신들의 옷과 장신구를 모두 가난한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이들이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하는 것이 부러워 이들보다 한 발 앞서 출가하였다.

그 후에 바드리카 등이 출가했을 때 여러 장로들에게 예배하면서 조금 먼저 출가한 우팔리에게도 똑같이 예배를 했다. 수드라 출신의 그가 크샤트리아(왕족) 출신의 귀공자들로부터 예배를 받았다는 사실은 당시의 사회 통념으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불교 교단에서는 사람의 계급이나 빈부의 차이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그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수행하여 어떤 경지에 도달하였느냐 또는 얼마나 먼저 입문하였느냐가 가치 척도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는 교리를 이해하는 데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딘 듯하다. 그가 부처님께 “저도 다른 비구들처럼 아란야(阿蘭若)에 들어가 수행해도 좋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대중과의 단체생활을 버리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숲 같은 곳에서 혼자 수행하는 것이 그에게 아직 잘 맞지 않으리라 판단한 부처님은 “깊은 연못에 코끼리가 들어가 목욕하는 것이 부러워 토끼나 고양이도 따라 들어가서야 되겠느냐?”라고 훈계하였다.

그러나 그는 계율을 매우 잘 지켰으며 다른 수행자들이 계율에 위반되는 행동을 했을 때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공정히 평가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든 후 교단의 지도자 마하카샤파(大迦葉) 등 5백 명의 제자들이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 교외의 비파라산(毘婆羅山)에 있는 칠엽굴(七葉窟)에 모여 최초로 부처님의 말씀을 결집(結集)할 때 그가 부처님의 계율을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잘 알고 있었으므로 계율을 외우는 일을 도맡아 했다.

 

 


[10] 라후라(羅喉羅, Rahula)
☞ 밀행 제일(密行第一) :남이 모르게 착하고 훌륭한 일을 가장 많이 한 제자.

 


부처님 출가 이전의 아들로 석존이 성도 후 6년만에 귀향을 할 때 부처님이 사리불을 은사(恩師), 목건련을 아사리(阿梨: 수계사 授戒師)로 하여금 득도시켰으며, 이 때부터 사미승(沙彌僧)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변소 옆에 거주하고 금계(禁戒)를 잘 지키며 남이 보지 않아도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밀행 제일(密行第一)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부처님이 출가하시기 전 부인 야소다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 태자로 있을 때 출생이 부처님 당신의 출가에 장애(障碍)가 된다는 의미로 이름을 ‘라훌라’(장애물)라고 지었다. 숫도다나 왕을 계승할 카필라성의 왕위 계승자가 되었으나 부처님이 성도한 뒤 진리라는 보배를 그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고자 사리풋타(舍利佛)를 시켜 그를 출가시키도록 했다. 이때 그는 어린 나이로 최초의 사미(沙彌)가 되었다.

그는 어리기 때문에 계율에 아랑곳하지 않고 장난을 많이 쳤는데 부처님은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 발을 씻은 물을 마시라고 하였다. 그가 너무 어리고 모르므로 부처님은 “한번 더럽혀진 물은 사람이 먹을 수 없다. 사람도 올바른 지혜와 자신을 닦지 않으면 이 물처럼 버릴 수밖에 없다.”고 훈계하였다. 이후부터 그는 계율을 엄정히 잘 지켰다고 한다.

그가 아직 비구계를 받지 못했을 때 부처님은 코삼비의 비다리카 사원에서 많은 수행자와 신자들을 위해 밤에 설법을 하였다. 그날 밤 설법이 끝나자 수행자와 함께 잠자리에 든 신자들의 잠버릇이 수행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부처님은 이런 사정을 듣고 비구와 그 외의 사람들은 함께 잠자리에 들지 말라는 규칙을 선포했는데 그러자 그는 몹시 난처했다.

비구들은 그에게 매우 호의적이었으나 계율 때문에 이제 아무도 그와 함께하지 않았으며 할 수 없이 부처님이 사용하는 변소에 들어가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 이를 눈치 챈 부처님이 계율의 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사리풋타 등의 비구들을 꾸중했다. 이로서 계를 받지 않은 사람은 비로소 이틀간 머물 수 있게 되었으며 비구는 사흘째까지 거처를 찾아 주어 수행을 하게 되었다. 비구들은 그의 철저한 지계(持戒) 정신을 더욱 칭찬했으며 그는 20세에 비구계를 받고 부처님의 제자로서 철저히 수행하였다.

(텍스트: 동국역경원, 사진: 경주 석굴암 본존 및 주변부조, 구성: 잠용)

 


(‘한마음 있음이여’ 정율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