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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불교·죽음

[명상] 라즈니쉬 법구경(法句經) 강의

잠용(潛蓉) 2012. 10. 22. 11:11

 

 

“라즈니쉬의 법구경 강의”


 


◈ 도(道)의 길을 가라.

붓다는 말한다.

그는 불굴의 끈기로 명상한다.
자유와 행복을 성취하며.
명상은 주시를 의미한다. 명상하라.

그러면 자유와 행복을 얻을 것이다.
그렇게 깨어 있고, 비추고, 주시하라.
매사에 주의 깊게 행동하라. 도의 길을 가라.

그러면 그대 안에 빛이 자랄 것이니.
빛은 스스로 성장한다. 더 침묵하고 주시하라.
더 명상적이 되라.

그러면 빛은 제 스스로 그대를 찾아온다.
그대는 아무 데로도 갈 필요가 없다.

주시와 노력으로 스승은 자신을 섬으로 만든다.
어떤 홍수가 덮쳐도 그 섬을 휩쓸어가지 못하리라.

그대의 주시는 하나의 섬이 된다. 난공불락의 요새가 된다.
어떤 탐욕과 분노도 그 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
그 섬과 더불어 그대는 난생 처음으로 통합된 개체가 된다.

그대는 난생 처음으로 인간(humanbeing)이 된다.
오늘에는 이 '인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새로운 인간,-호모 노부스(homo novus)....



 


◈ 주의깊은 의식으로...

어리석은 자는 주의 깊지 못하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주의 깊음을 잘 보존한다.

그것이 그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그는 결코 욕망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명상한다. 그 끊이지 않는 명상의 힘으로
그는 진정한 행복을 발견한다.

그는 욕망을 극복한다. 그는 지혜의 탑에 올라
슬픔에 잠긴 중생을 평온하게 내려가 본다.

마치 산 위에 오른 자가산 아래 사람들을 내려다보듯이.
경솔한 자들 가운데 주의 깊고,
다른 자들이 꿈꾸는 동안에 깨어 있는 사람은 앞으로 질주한다.

둔마(鈍馬)를 뒤로 하고 달리는 준마(駿馬)처럼
깊은 주의력에 의해 인드라(Indra)는 신중의 왕이 되었다.

깊은 주의력은 얼마나 훌륭한가 .
그리고 잠자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마음을 경계하고 사념의 변덕을 조심하는 수행자는
경계의 불꽃으로 모든 장애를 태워 없앤다.

마음을 경계하고 혼란을 조심하는 자는 결코 실패하지 않나니,
그는 니르바나로 가는 길을 발견한다


◈ 그는 진정한 행복을 발견한다.

그런데 명상(meditate)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것에 생각을 집중한다는 뜻이 아니다.
명상이라는 단어는 오해의 여지가 많다.

영어에는 붓다의 'sammasati'를 옮기기에
적당한 단어가 없다. 어느 단어도 '삼마시티(삼매:三昧)'의
특성을 고스란히 살려주지 못한다.

'삼마사티'는 의식이 존재할 뿐,
아무 내용물도 담겨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사념도 없고 욕망도 없다.
아무 것도 그대의 내면을 휘젓지 않는다.

신에 대한 묵상도 없다. 자연과 그 아름다움,
성경, 코란, 베타, 그 경전들 안에 담긴 중요한
문장들......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묵상하지 않는다!

그대는 특별한 대상에 집중하지 않는다.
만트라(mantra)를 외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마음의 내용물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마음은 텅 비어있으며, 그대는 그 비어 있음 안에 존재한다.
아무 데로도 가지 않고 그대 자신 안에서
휴식하는 순수한 현존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붓다가 말한 명상의 의미이다.
또한 '삼매(三昧)를 이룬다'는 뜻이다.

명상에 대해 붓다 만큼 아름답게 표현한 사람이 없다.
명상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많지만 붓다 만큼 아름답게 표현하고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 인물은 없다.

그는 결코 욕망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명상한다. 그 끊이지 않는 명상의 힘으로
그는 진정한 행복을 발견한다.






◈ 지복(至福)이 진정한 행복이다.

지복(至福)이 진정한 행복이다.
그대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행의 변장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오락이나 쾌락일 뿐이다.
그것은 순간적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것이 될 수 없다.
진리는 하나의 특성을 갖는데,
그것은 영원성이라는 특질이다.

만일 어떤 것이 진리라면 그것은 영원하다.
그리고 진리가 아닌 것은 순각적이다.

진정한 행복은 마음이 완전히 작용을 멈추어야만 발견된다.
그 행복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이 넘쳐흐르기 시작하고
그대는 지복(至福)의 샘이 된다.

그는 욕망을 극복한다.

그는 지혜의 탑에 올라 슬픔에 잠긴 중생을
평온하게 내려다 본다.

마치 산 위에 오른 자가
산아래 사람들을 내려다 보듯이.


◈ 어떤 사람이 붓다가 되면...

어떤 사람이 붓다가 되면,

즉 욕망과 마음, 시간을 극복하고 에고를 초월한
사람은 더 이상 세속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세속에 살 것이지만 그의 영혼은 높이 비상한다.
그는 빛나는 정상에 올라 어두운 계곡에서
슬픈 삶을 살고 있는 군중을 내려다본다.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싸우고, 야망, 탐욕,
분노, 폭력으로 가득 찬 사람들......
좋은 기회를 헛되이 낭비하고 있는 사람들.

그의 존재에 커다란 자비가 솟아난다.
그의 모든 열정(passion)은 평온(dispassion)을 거쳐서
자비(compassion)가 된다.

열정(passion)은 다른 사람을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비도덕적이다.

어떤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비도덕적인 행위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그를 착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남편은 부인을 이용하고 부인은 남편을 이용한다.
자식은 부모를 이용하고 부모는 자식을 이용한다.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마음의 계략이다.
그것은 설탕을 곁에 바른 독약이다.

이런 사랑은 메스꼅다. 우리가 온 세상을 바라보면서
메스꺼움을 느끼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이런 사랑은 병든 사랑이다. 그리고 온
인류의 영혼을 병들게 한다.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을 도구로 이용하려는 탐욕이며 욕정이다.

명상을 시작할 때, 그대는 평정(平靜:dis-passion)이라는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선다.

사랑이 사라지고 그대는 중립 단계에 들어간다.
그것은 자동차의 기어를 바꿀 때마다
기어가 중립 위치를 통과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열정(passion)은 중립 단계로 들어가
평정(dis-passion)이 된다. 사랑이 사라진다.

붓다를 향해 가는 사람은 그 중간에 너무나 냉정해진다.
그 다음에 세 번째 단계가 있다.

붓다가 되었을 때, 그는 마르지 않는 지복(至福)의 샘물을 발견한다.
아이스 담모 사난따노(Ais dh-ammo sanantano)....

연원한 진리를 발견했을 때,
고갈되지 않는 삶의 보물을 발견했을 때,
그는 넘쳐흐르기 시작한다.

다시 사랑이 돌아온다. 난생 처음으로
진정한 사랑이 일어난다. 그 사랑은 자비이다.

이제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의 비를 뿌린다.
그는 다가오는 사람 모두에게 자신의 지복과
통찰력을 나누어 준다.



 


◈ 붓다는 깨어 있다.

경솔한 자들 가운데 주의 깊고,
다른 자들이 꿈꾸는 동안에 깨어 있는 사람은 앞으로 질주한다.

둔마(鈍馬)를 뒤로하고 달리는 준마(駿馬)처럼.
명상과 자비 속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을 때
그대는 더 이상 잠과 꿈의 희생자가 아니다.

그대는 잠자는 동안에도 깨어있다.
그 다음에 그대의 삶은 빛처럼 빠른 속도로
표적을 향해 곧장 날아가는 화살이 된다.

그대는 최초로 '존재(being)'가 된다.
[경솔한 자들 가운데 주의 깊고, 다른 자들이 꿈꾸는
동안에 깨어 있는 사람은 앞으로 질주한다.

둔마(鈍馬)를 뒤로하고 달리는 준마(駿馬)처럼.]
이것이 붓다와 다른 사람의 차이점이다.

다른 사람은 꿈꾸고 있을 뿐, 진정으로 살아 있지 못하다.
그는 어느 날엔가 살게 되기를 희망하며 준비하고
있을 뿐 아직 살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 날은 결코 오지 않는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죽음이 그를 덮친다.

붓다는 깨어 있다. 그는 잠자는 동안에도 꿈꾸지 않는다.
욕망이 사라지면 꿈 또한 사라진다.

꿈은 욕망이 잠의 언어로 번역된 것이다.
붓다는 완전히 깨어 있는 의식으로 잔다.

그의 내면에는 밝은 빛이 계속 타오르고 있다.
육체는 휴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잠잔다.

그러나 그는 휴식이 필요 없다.
그의 에너지는 무궁무진하다.

그의 존재의 중심에는 작은 불빛이 계속 타오른다.
주변이 온통 깊은 잠에 빠져도 그 불빛은 언제나 깨어 있다.

우리는 깨어 있는 동안에도 잠잔다.
그러나 붓다는 잠자는 동안에도 깨어있다.






◈ 그대는 새로 태어난다.

깊은 주의력에 의해 인드라[帝釋天:제석천]는 신중의 왕이 되었다.
깊은 주의력은 얼마나 훌륭한가. 그리고 잠자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마음을 경계하고 사념의 변덕을 조심하는 수행자는
경게의 불꽃으로 모든 장애를 태워 없앤다.

'비구(bhinkkhu)'는 '산야신(sannyasin)'을
가리키는 붓다의 단어이다.

나는 '비구(bhinkkhu)'대신 '산야신(sannyasin)'이라는 단어를 쓴다.
나는 붓다의 단어를 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비구(bhinkkhu)'가
문자적으로 볼 때 거지를 뜻하기 때문이다.

붓다는 자신의 왕국을 포기하고 거지가 되었다.
그는 거지로 떠돌아다니는 중에도 황제처럼 걸었다.

그는 전보다 더 우아하고 기품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왕국을 포기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비구(bhinkkhu)',즉 거지로 부르기 시작했다.

서서히 그 명칭은 붓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다.
나는 그대들을 거지로 부르고 싶지 않다.
나는 그대들이 주인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는 '산야신'이라는 명칭을 선택했다.
산야신은 올바르게 사는 법을 아는 사람을 의미한다.

'산야스(sannyas:구도의 길에 입문하는 것)는 포기가 아니다.
반대로 즐거움이며 축제이다. 그렇다, 명상은 불이다.
명상의 불꽃은 그대의 사념과 욕망, 기역을 태운다.

그대의 과거와 미래를 태우고 마음과 애고를 태운다.
명상은 그대가 '그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명상은 죽음인 동시에 환생이다. 십자가인 동시에 부활이다.

그대는 새로 태어난다. 그대는 기존의 동일시(identity)를
완전히 잃고 삶에 대해 새로운 비전(vision)을 획득한다.

그 삶의 비전이 신, 담마(Dhamma), 도(道),
로고스(Logos)의 의미이다.

그대는 그것을 마음대로 이름 붙힐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에는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표현 불가능하다.
오직 암시할 수 있을 뿐이다.


◈ 그 탄생이 깨달음이다.

마음을 경계하고 혼란을 조심하는 자는 결코 실패하지 않나니,
그는 니르바나로 가는 길을 발견한다. 마음은 곧 혼란이다.

생각 생각..... 수많은 생각이 아우성치고 충돌하며
서로 그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싸우고 있다.

수많은 생각이 그대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그대가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은 것만도 기적이다.

그대는 어느 정도 통일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겉모습만 그럴 뿐이다.

깊은 곳에서는 전쟁이 끊어질 않는다.
아우성치는 군중이 우글거린다. 수많은 생각이 서로 싸운다.

그들은 서로 자기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그대에게 매달린다.
그것은 엄청난 혼란이다.그런데 그대는 그것을 마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마음이 곧 혼란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음과 동일시되지 않는다면,
그대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마음이 무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주시함으로 해서 그대의 에너지는
서서히 마음에서 철수할 것이다.

마음은 더 이상 에너지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일단 마음이 죽으면 그대가 태어난다.
무심(無心)으로서의 그대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 탄생이 깨달음이다. 그 탄생은 그대에게 평화의 땅을,
연꽃의 극락(낙원)을 가져다 준다.

축복과 은총의 세계를 가져다 준다.
그렇지 않는 한 그대는 지옥에 남을 것이다.

지금 그대는 지옥에 있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로 결단을 내린다면,
의식을 선택한다면 지금 당장 지옥에서 점프하여
극락(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은 그대에게 달렸다.
그대는 지옥을 택할 수도 있고, 극락(낙원)을 택할 수도 있다.
지옥은 손쉽게 얻어진다.

그러나 극락(낙원)은 상당한 노력을 요구한다.
불굴의 인내와 결단력이 있어야 극락(낙원)에 들어갈 수 있다.

지옥은 그대가 지금처럼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극락(낙원)은 그대 자신을 초월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대는 어두운 계곡에서 정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 그대는 신이 될 능력이 있다.

그 정상은 그대의 것이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힘든 노력이 필요하다. 주의 깊은 의식으로 주시하라. 명상하라.

그러면 어느 날엔가 햇살 찬란한 정상에서
그대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이 해방이고 모크샤(moksha:해탈의 세계)이다.
이것이 니르바다(nirvana:열반)이다.

에고가 사라지고 신이 탄생한다.
그대는 신이 될 능력이 있다.

지금 그대가 신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바로 그대의 책임이다.

붓다의 말에 귀기울여라. 다만 듣는 데서
그치지 말고 행동으로 옮겨라. 의식의 삶을 살아라.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다시 한 번 상기 시켜야겠다.

이것은 삶의 한 차원일 뿐이다.
엄청나게 풍요롭긴 하지만 하나의 차원에 불과하다.
그대는 그 이상의 무엇인가 해야 한다.

나는 그대에게 붓다가 주었던 것보다 더 어려운 과제를 준다.
붓다는 하나의 차원을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대가 세 개의 차원을 모두 갖기를 원한다.
나는 그대가 위대한 종합이 되기를 바란다.

지금에는 새로운 인간이 필요하다. 부패한 낡은 인간은 끝났다.
낡은 인간은 미래가 없다. 그들은 더 이상 살아 남을 수 없다.

그들은 종착역에 왔다. 그들은 임종의 침대에 누워있다.
새로운 인간이 태어나지 않는 한. 동양과 서양이 만나고
세 개의 차원이 합쳐지지 핞는한, 인류의 운면은 암울하기만 하다.

여기서 행하고 있는 이 실험은 새로운 인간의
표본을 만들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대들은 엄청나게 중요한 거대한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
이것을 행운으로 생각하라. 그대들은 무엇에 참여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대들은 역사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들이 이 수행에 얼마나 깊이 참여하느냐에 달렸다.
이것은 지금까지 시도된 가운데 가장 위대한 종합이다.






◈ 가슴의 동굴 안에 앉으면...

지혜로운 자는 변덕스러운 마음을 다스려 바르게 한다.

화살 만드는 사람이 굽은 화살을 펴듯이.
물에서 잡혀 나와 땅 위에 던져진 물고기가 팔딱거리듯 마음은 부르르 떨며 몸부림친다.

마음이 어떻게 욕망을 털어낼 수 있겠는가?
마음은 함부로 날뛰면 헤매는 것, 마음는 제멋대로 방황한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진정 훌륭한 일이니,
마음을 다스리면 행복이 온다.
마음은 미묘하여 포작하기 어렵다.

그 마음을 조용히 가라앚히는 것이 과제이다.
그리고 잘 다스려진 마음에 의해 행복을 발견한다.

지혜로운 자는 전력을 다해 사념을 조용히 가라앉힌다.
그는 마음의 방황을 끝낸다.
그는 가슴의 동굴에 앉아 자유를 발견한다.


◈ 자유는 인생의 목표이다.

자유는 인생의 목표이다.
자유가 없는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정치, 경제, 사회적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자유는 시간과 마음,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마음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순간, 그대는 우주와 하나가 된다.
그대는 우주만큼 광활해진다.

마음은 그대와 실체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이 장애물은 그대를 어두운 감방에 가둔다.

빛 한 점 없는 그 감방은 조금의 즐거움도
둟고 들어오지 못한다. 그대는 불행하게 산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토록 작은 공간 속에 갇혀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의 존재는 존재계의 근원에 닿을 때까지 팽창되기를 원한다.
그대의 존재는 바다가 되기를 염원한다.

그런데 그대는 이슬 방울이 된다. 그러니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불행한 것은 감옥에 같혀서 살기 때문이다.

고탐 붓다는 '탄하(tanta)' 즉 욕망이 모든 불행의 뿌리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욕망은 마음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욕망이 미래를 창조하고 그대를 미래에 투영한다.
내일이 들어올 때 오늘은 사라진다.

그대는 더 이상 오늘을 볼 수 없다.
그대의 눈은 내일에 의해 가려졌다.

내일을 가져오면 어제의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일은 어제에 의해 영양을
공급받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욕망은 과거로부터 태어나며 미래에 투영된다.
과거와 미래가 마음 전체를 구성한다.

마음을 분석하고 해부해 보라. 그러면 과거와 미래 외에
다른 것은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현제는 조금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현재는 유일한 실체이다.
유일하게 존재하는 순간이다.

현재는 마음이 완전히 멈추었을 때에만 발견될 수 있다.

과거와 미래가 더 이상 그대를 소유하거나 지배하지 못할 때,
그대가 추억과 상상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었을 때,
그 순간에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그대는 누구인가?

그 순간 그대는 아무도 아니다(nobody)
그대는 상처를 입을 수 없다.

에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에고는 상처입을 준비를 갖추고 있다.

에고의 존재 자체가 불행과 고통에 의존한다.
아무도 아닐 때 고통은 불가능하다. 내면에는 아무 소음도 없다.

거대한 침묵이 있을 뿐이다.
과거가 가고 미래가 사라진다.
그러니 어디에서 소음이 생기겠는가?

침묵은 천상의 신성한 음악을 들려준다.
무심의 공간에서 그대는 난생 처음으로 영원한 축제를 인식하게 된다.

존재계는 영원한 축제로 만들어졌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존재가 지복에 넘친다.

오직 인간만이 그 대열에서 이탈했다.
그리고 오직 인간만이 이탈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안간에게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 의식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의식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의식은 그대 안에 엄청난 빛을 가져올 수 있다.
그 빛에 비교하면 태양조차 희미해 보일 것이다.

붓다는 그 경험이 수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오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무심으로 내면을 들여다 보면 내면은 온통 빛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빛은 영원하다. 그 빛은 조금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기쁨이다.

지복이며 순진 무구함이다. 엄청난 경이감이다.
그 아름다운과 장엄함은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 은총은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다.

아이스 담모 사나따노. 그것은 궁극적인 법이다.

마음을 옆으로 밀어놓을 수만 있다면
그대는 우주의 유희흘 알게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유일한 에너지이다.
그 에너지는 항상 지금 여기에 있다.

결코 지금 여기를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수수한 의식이 되는 겻, 그것이 첫 번째 가능성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자의식(自意識)이 되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추락한다. 그대는 세상과 분리되어 고립된 섬이 된다.

그대는 감방에 같힌다.그 감방은 칠흑처럼 어둡다.
조금의 빛도 없다. 그 감방은 그대를 불구자로 만들고 마비시킨다.

자의식(self-consciousness)은 구속이 된다. 자아(self)는 구속이다.
순수한 의식만이 자유이다. 자아들 버리고 의식적이 되라!

이것이 모든 붓다의 메시지이다.
메시지의 본질적인 핵심은 아주 간단하다.
-자아(self), 에고, 마음을 버리고 그저 존재하라.

바로 이 순간 ,침묵이 충만한 이 순간 그대는 누구인가?
아무도 아니다. 그대에겐 이름도 형상도 없다.

그대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힌두교인도 모하메드교인도 아니다.

그대는 어떤 국가, 민족, 인동에 속하지 않는다.
그대는 육체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무엇인가?
이 침묵 속에 그대는 어떤 맛인가? 어떻게 하면 그것을 맛볼 수 있는가?

다만 침묵과 평화가 있을 뿐.....그 곳에서
커다란 기쁨이 표면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아무 이유도 없이 기쁨이 생솟는다.
그것은 그대의 즉흥적인 본성이다.






◈ 이것이 종교의 모든 비밀이다.

마음을 옆으로 밀어내는 기술,
이것이 종교의 모든 비밀이다.

마음을 옆으로 밀어놓을 때
그대의 존재는 현란한 색체로 폭발하기 시작한다.
그대는 천 개의 잎을 가진 연꽃이 된다.

돌연 그대는 활짝 만개한다.
그때, 존재계의 무한한 아름다움이 모두 그대의 것이다.

하늘의 별이 모두 그대 안에 있다.
하늘조차 그대의 경계선이 아니다.
그대는 더 이상 아무 한계도 없다.

침묵은 우주와 용해되어 사라지고 증발될 기회를 준다.
그대가 존재하지 않을 때 그대가 존재한다. 난생 처음 존재한다.
그대가 없을 때, 신이 존재하며 니르바나가 있고 깨달음이 있다.

그대가 사라질 때 모든 것이 발견된다.
그리고 그대가 존재할 때 모든 것이 실종된다.
인간은 자의식(自意識)에 구속되었다.
그것이 궤도의 이탈이며 근원적이 타락이다.

모든 종교는 어떤 식으로든 근원적인 타락에 대해 말한다.
그중에 가장 훌륭한 이야기는 기독교의 전설이다.
근원적인 타락은 인간이 지식의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이다.
지식의 열매를 따 먹었을 때 자의식이 생겼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질수록 그대는 에고에 더 갇히게 된다.
그것이 학자들의 에고이다.

에고는 지식과 경전, 사상 체계로 장식된다.
그러나 그런 장식품이 그대를 순진무구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대에게 어린아이 같은 개방성, 신뢰, 사랑, 유희성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지식에 사로잡히면 신뢰감, 사랑, 유희성이 사라진다.

그런데 우리는 지식을 쌓으라고 배워왔다.
우리는 순진 무구해지라고 배우지 않았다.

존재계의 경이를 느끼는 법에 대해 배운 바가 없다.
우리는 꽃의 이름을 배웠을 뿐, 어떻게 산과 교류하는지,
어떻게 나무와 교류하는지, 어떻게 존재계와 조화를 이루는지 배우지 않았다.

조화가 없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조화가 없을 때, 그대는 불행하고 고통스런 상태에 남을 수 밖에 없다.
그대는 오직 존재계와 더불어 춤출 때에만 행복해 질 수 있다.

존재계의 춤에 한 부분이 될 때,
그대 혼자 따로 떨어져 노래하지 않고 이 거대한 오케스트라에 동참할 때,

오직 그럴 때에만 행복할 수 있다.
그 완벽한 용해의 상태에서만 인간은 자유이다.






◈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자유는 정치, 경제, 사회적인 것이 아니다.
자유는 정신적인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적 자유는 정신적인 자유에
도움이 될 때에만 자유의 가치가 있다.

만일 도움이 안 된다면 그것은
자유라는 이름을 사칭하고 있을 뿐이다.

그때, 인간은 자유라는 미명 아래 점점 더 노예가 된다.
표면의 아름다운 이름이 추악한 실체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자유롭지 않다면 그대는 결코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런 경우, 그대의 모든 자유는 허구이고 환상이다.
그대는 기만당하는 것이다. 그대는 갖고 놀 장난감을 부여 받은 것이다.
붓다는 실체에 대해, 진정한 자유에 대해 말한다.

그는 그것을 '니르바나(nirvana)'라고 부른다.
'니르바나'라는 단어는 매우 아름답다.

니르바나는 자의식의 중지, 자아의 완전한 중지 상태,
에고가 없는 적나라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커다란 엑스터시(ecstasy)와 많은 수확을 가져다 준다.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보물을 안겨준다.

그런 까닭에 붓다는 '담마파다'에서 두 문장을 계속 반복한다.
그중의 한 문장은 '아이스 담모 사난따노-
이것이 영원한 법이다'라는 말이다.

그대가 사라지면 그대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매우 역설적인 말이다. 사라짐에 의해 발견한다.

자아를 버림에 의해 궁극적인 자아가 된다.
이슬 방울이 사라져 바다가 된다.

붓다가 반복하는 또 하나의 문장은
'아이스 담모 비수디야(Ais dhammo visuddhiya)
- 그것이 순수성의 법이다'라는 문장이다.

순수성의 법(the of purity)이란 무엇인가?
마음과 동일시도지 않는 것, 그대 자신을 마음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이것이 순수성의 법이다.

붓다는 마음에 반대하지 않는다.
붓다는 그대가 마음을 사용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대가 마음을 사용하기를 원하지만,
마음에 의해 사용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대게는 두 번째 경우에 속한다.

-마음이 그대를 사용한다. 그대는 노예가 되었다.
주인은 노예가 되고, 노예가 주인이 되었다다.
모든 것이 거꾸로 되었다.





◈ 자연의 상태로 존재하라.

그대는 물구나무서 있다!
그러니 어떻게 걷고 움직이고 춤출 수 있겠는가?
물구나무서서 춤추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물구나무서 있다면 그대의 삶은 운동
(movement)이 사라질 것이다.
그대의 삶은 더러운 물웅덩이처럼 고일 것이다.

그리고 썩기 시작할 것이다.
물구나무서 있을 때 그대는 불구이고 마비 환자이다.

다시 다리로 선다면 그것은 작은 변화이지만
급진적인 혁명을 초래한다. 다리로 서는 즉시 그대는 움직일 수 있다.

움직임은 곧 삶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다.
그대는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죽은 사람은 움직일 수 없다. 그는 숨쉬지 못한다.
호흡은 운동(movement)의 일종이다. 그는 보지 못한다.

보는 것 또한 운동의 일종이다.
그는 걷지고 말하지도 못한다.
이 모든 것이 여러 형태의 운동이다.

모든 운동이 중단되었을 때 우리는 그를 죽었다고 말한다.
더 많은 운동이 있을수록 그대는 더 활발하게 살아 있다.

여러 형태의 운동을 취하라! 그러나 그것은
물구나무서기를 그만두어야만 가능하다.

그대는 올바른 자세를 취해야 한다.
내게 오던 날 그대는 거꾸로 선 상태에서 왔다.

산야스(sannyas)의 입문은 평생동안 계속해 온
물구나무를 그만두고 두 발로 서라고
설득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자연의 상태로 존재하라. 자연의 부분이 되라.
에고를 부풀리며 허세를 부리지 말라.

우리는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 부분은 전체와 더불어
작용하면 말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전체에 반대해서 작용하면 추악하기 이를 데 없다



◈ 그대는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대는 사회로부터 이런 말을 들어왔다.

"끊임없이 싸우고 투쟁하라. 인생은 생존 경쟁이다.
싸우지 않으면 패배할 것이다.
너는 승리자가 되고 유명해져야 한다."

그대에겐 거대한 야망이 주어졌다.
그리고 모든 야망은 사슬이 되어 그대를 묶어놓는다.
그 야망들이 마음의 뿌리이다.

그들이 마음을 창조하는 것이다.
붓다의 'tanta'라는 단여에는 욕망과 야망,
성취욕의 모든 의미가 들어 있다.

이런 욕망들이 마음의 자양분이다.
마음에 계속 자양분을 공급한다면
그대는 자신을 독으로 중독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점점 더 거대해지고 그대는 점점
더 왜소해진다. 마음은 암세포처럼 성장한다.

산야스(sannyas)는 수술을 의미한다.
붓다는 산야스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변형시켰다.

그는 휼륭한 의사였다. 불행의 원인은 바로
그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대는 더 이상 자신의 불행을 돕거나 자양분을 공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는 마음이 아니라 주시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대는 마음을 초월하여 상승하기 시작한다.

그대는 더 이상 사슬에 묶이지 않는다.
그대는 날개를 펴고 더 높은 하늘로 비상하기 시작한다.

마음은 항상 어두운 골짜기를 헤맨다.
그러나 그대는 독수리가 되어 높이 날아오를 수 있다.

그대는 주인이 될 수 있으며 그 다음에는
마음을 이용할 수 있다. 마음은 목적에 맞게 이용될 수 있다.

◈ 자신의 생각조차 멈출 수 없다.

이 경전은 그대가 마음의 주인이 되는 법을 말한다.
여기에는 주인이 되는 과학이 있다.

붓다는 말한다.
지혜로운 자는 변덕스러운 마음을 다스려 바르게 한다

화살을 만드는 사람이 굽은 화살을 펴듯이.
그대는 자신의 사념을 통솔하는가?
아니면 사념이 그대를 통솔하는가?

그대는 생각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들이 그대를 여기저기로 몰고 다니는 것은 아닌가?
생각들이 조종하고 그대는 노예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아니면 그대가 주인인가?
그대가 생각에 대해 '멈춰'라고 말하면 그들이 멈추는가?
그대는 사념의 스위치를 켜고 끌 수 있는가?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명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에게 굴욕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무능함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조차 멈출 수 없다.






◈ 그 생각을 주시하라.

그대는 마음이 아니라 의식(consciousness)으로서 태어났다.
그대의 깊은 내면에 있는 핵심은 의식이지 마음이 아니다.
마음은 축적된 생각에 불과하다. 마음은 과거의 페기물이다.

그대는 마음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생각을 주시하라. 그러면 서서히 거리감을 느낄 것이다.
생각이 떠 오를 때, 그 생각을 주시하라.

아무 판단도 없이 주시하라. 그 생각에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말라.
거울이 자물을 비추듯이 그냥 지켜보라.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질 것이다.

-생각은 그대와 분리되어 있다.

생각은 왔다가 사라지지만 그대는 영원히 지속된다.
거울에 비친 사물은 거울이 아니다.
많은 사물이 오고 가지만 거울은 항상 그대로 이다.

생각이 거기에 있다. 분노, 탐욕, 질투 등
온갖 생각이 오고 간다.하지만 그것은 그대가 아니다!

우리가 받아온 교육, 우리의 조건화 (conditioning)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우리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우리의 언어는 잘못된 개념을 준다.

마음속에 배고프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
그대는 즉시 "나는 배가 고프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난센스이다.
그대는 배고픈 적이 없으며 배고플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의식은 배고픔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육체가 배고프다는 현상이다.

그대는 그것을 안다. 그대는 다만
육체의 상황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내 몸이 배고프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몸이 음식을 필요로 함을 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언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배고프다. 나는 목이 마르다."

나는 "나는 내 몸이 목마르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보다"나는 목마르다."고 말하는 것이
더 간단하다는 것을 안다.



◈ 그 사내는 바로 그대이다!

여기 널리 알려진 티벳의 우화가 있다.

한 사람이 몇 년 동안 스승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봉사는 순수한 것이 아니였다.

숨은 동기가 있었다. 그는 스승에게 어떤 비밀을 배우고 싶었다.
그는 스승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비법을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스승의 시중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차마 그 동기를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스승은 제자의 동기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관찰하고 있었다.

어느 날, 스승이 물었다.
"이젠 네 마음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는 것이 좋겠다.
내가 너를 관찰한 바에 의하면 너의 봉사는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나는 너의 행동에서 조금의 사랑도 엿볼 수 없다.

조금의 겸손함도 없다. 너의 봉사는 일종의 뇌물이다.
그러니 숨김없이 말하라. 네가 원하는 바가 무엇이냐?"
제자는 이런 기회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기적을 일으키는 비밀을 알고 싶습니다."

스승이 말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시간을 낭비해 왔느냐?

너는 여기에 온 첫날 그것을 말할 수도 있었다.
너는 쓸데없이 자신을 고문한 것이다.
그것은 나에 대한 고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는 불순한 동기가 있는 사람들을
내 주변에 두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기만 해도 추악하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탐욕스럽다.

탐욕이 그들을 추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기적을 일으키는 비법은 간단하다.

왜 처음부터 묻지 않았느냐?
여기 그 비밀이 있다............"

붓담 사라남 가차미(귀의불: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담마 사라남 가차미(귀의법:불법에 귀의합니다)
상감 사라남 가차미(귀의승:스님들게 귀의합니다)

스승은 종이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 주문을 딱 다섯 번만 외워라. 아주 간단하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주문을 외기 전에
목욕을 하고 문을 잠근 다음 조용히 앉아라.

그리고 주문을 외는 동안에는 절대로
원숭이에 대해 생각하지 마라."

제자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원숭이라니요?
제가 왜 원숭이를 생각하겟습니까?
저는 평생 동안 원숭이를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스승이 말했다.
"그것은 네가 할 나름이다.
원숭이를 생각한 적이 없다니 다행이구나.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절대 돌아오지 마라.
너는 비밀을 얻었다.

이제 그 한 가지 조건만 지키면
기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을 날수도 있고 사람들의 마음들 읽을 수도 있으며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밖에도 수많은 기적을 일어킬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집으로 달려갔다.
그는 스승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조차 잊었다.

그것이 탐욕의 방식이다.
탐욕은 고마움을 모른다.

탐욕은 감사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탐욕은 도둑이다, 그리고 도둑은 감사할줄 모른다.

그는 집으로 달려가면서도 매우 당황했다.
머리 속에 원숭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 종류의 원숭이를 보았다.
작은 놈, 큰 놈, 주둥이가 빨간 놈,
주둥이가 검은 놈.............

그는 너무나 당황했다..-"이게 무슨 일인지?" 사실,
그는 원숭이 외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원숭이의 무리는 점점 불어나더니 사방에서 우글대기 시작했다.

그는 집에 돌아와 목욕을 했다.
그러나 원숭이들은 떠나지 않았다.

이제 그는 주문을 외는 동안에도 원숭이가
떠나지 않으면 어떡하나하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 주문을 외기도 전이였다.
다만 준비를 하고 있었을 뿐이다.

목욕을 마치고 문을 잠그자 온 방 안에 원숭이가 가득 찼다.
어찌나 많은 원숭이가 우글대는지 앉을 공간도 없었다!

눈을 감아도 원숭이가 보였고, 눈를 떠도 원숭이가 보였다.
그는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기가 막힐 지경이였다.

그는 밤새도록 노력했다. 수차례 목욕하고 재차 시도했지만
원숭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완전히 실패했다. 아침에 되자
그는 주문을 돌려 주기위해 스승에게 달려갔다.

그가 말했다.
"이 주문은 당신이 가지십시오.

이 주문 때문에 저는 미칠 지경입니다.
이제 저는 기적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원숭이들을 쫓아 주십시오!"

단 하나의 생각을 없애는 것도 그토록 불가능하다!
제거하기를 원하면 더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생각을 없애려고 할 때에는,
결정적인 순간에 누가 주인이냐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누가 주인인가?
마음인가, 그대인가?

마음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자신이
주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할 것이다.

수 많은 세월 동안 주인은 노예로 지내왔다.
그리고 노예가 주인 행세를 해왔다.
이제 노예는 그 권력과 선취권을 쉽게 포기 하지 않는다.

그는 그대에 맞서 크게 저항한다.
그대도 한 번 실험해 보라!

목욕을 하고 문을 잠근 다음
이 주문을 외워보라.

"붓담 사라남 가차미, 상감 사라남 가차미, 담맘 사라남 가차미."

그리고 원숭이를 못 오게 하라.. 그대는
그 불쌍한 사내를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도 실험을 해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 사내는 바로 그대이다!






◈ 그러나 마음은 주인이 아니다.

어떤 남자가 큰 호텔에 투숙하러 갔다.
빈 방이 하나 있는데도 지배인은 그에게 방을 주기를 망설였다.

남자가 말했다. "아니 빈 방이 있는데 왜 망설이는 겁니까?"
지배인이 말했다. "이유는, 바로 그 방 밑에
정치가가 투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 아주 유명한 세도가입니다.
근 조그만 일에도 화를 잘 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투숙한 사람이 조금만 소리를 내도
그는 화를 벌컥내며 야단 법석을 떨 것입니다."

남자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주 조심하겠습니다.
게다가 나는 딱 하룻밤만 묶으면 됩니다.
나는 시내에 불일이 있어서 밤 열두시쯤 되어야 들어올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 다섯시면 떠날 것입니다.
그 잛은 시간 동안 그를 화나게 하는 일이야 있겠습니까?

나는 피곤에 지쳐서 돌아오는 즉시 잠에 골아떨어질 것입니다.
설마 꿈꾸는 것이야 그에게 방해가 되겠습니까?"

지배인이 속으로 생각했다.
'다섯 시간 머문다면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배인은 그의 투숙을 허락했다.
그는 시내에 나갔다가 열두시쯤 들어왔다.

그는 완전히 지쳐 있었으며 수많은 일로 골치가 아팟다.
근 아래층의 정치가에 대해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는 침대에 앉아 구두를 벗어 방 구석으로 던졌다.
그때, 그는 갑자기 아래층의 정치가가 생각났다.

구두 떨어지는 소리에 아래층의 정치가가
잠을 깰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 짝을 벗어서 조용히 내려놓았다.
한 시간쯤 지나 후, 정치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는 자다가 벌떡 이러나 문을 열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저는 자고 있었는데요."
정치가는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 있었다.
정치가가 말했다. "당신 한 쪽 구두는 어디에 있소?

나는 그 생각에 통 잠을 이룰 수 없단 말이오!
내 머리 속엔 이런 생각이 따나지 않았소.
'이 사람은 한 쪽 구두를 신고 잠들었을까?

한 쪽 구두를 던진 것은 알겠는데 나머지 한 쪽은 어찌 된 것일까?'
나는 그 생각을 없애려고 온갖 수단을 다 셨소.
'이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내가 왜 그의 구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생각을 지우려고 할수록 더 그 생각에 사로잡혔소.
이제 당신을 깨워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야만 잠을 잘 수가 있소.
그러지 않으면 궁금해서 잠을 잘 수가 없단 말이오!"

터무니 없는 생각조차 지우기가 어렵다.
아무 의미도 없고 우연히 떠오른
생각 하나를 없애는 것도 그토록 어렵다.

그대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에 대한 생각이 유령처럼
그대를 쫓아다니며 괴롭힌다. 그 생각은 엄청나게 강역해져서
그대를 미칠 지경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대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는 게 더 났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굴욕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노예로 보는 것은 굴욕적이다.
그리고 마음은 아주 오랫동안 권세를 누려왔다.

마음은 주인의 자리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마음은 주인이 아니다.

◈ 그 생각을 주시하라.

그대는 마음이 아니라 의식(consciousness)으로서 태어났다.
그대의 깊은 내면에 있는 핵심은 의식이지 마음이 아니다.
마음은 축적된 생각에 불과하다. 마음은 과거의 페기물이다.

그대는 마음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생각을 주시하라. 그러면 서서히 거리감을 느낄 것이다.
생각이 떠오를 때, 그 생각을 주시하라.

아무 판단도 없이 주시하라. 그 생가에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말라.
거울이 서물을 비추듯이 그냥 지켜보라.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질 것이다.

-생각은 그대와 분리되어 있다.
생각은 왔다가 사라지지만 그대는 영원히 지속된다.
거울에 비친 사물은 거울이 아니다.

많은 사물이 오고 가지만 거울은 항상 그대로 이다.
생각이 거기에 있다. 분노, 탐욕, 질투 등 온갖 생각이 오고 간다.

하지만 그것은 그대가 아니다!
우리가 받아온 교육, 우리의 조건화(conditioning)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우리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우리의 언어는 잘못된 개념을 준다.

마음속에 배고프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
그대는 즉시 "나는 배가 고프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난센스이다.
그대는 배고픈 적이 없으며 배고플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의식은 배고픔과 아무 상관고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육체가 배고프다는 현상이다.

그대는 거것을 안다. 그대는 다만
육체의 상황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내 몸이 배고프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몸이 음식을 필요로 함을 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언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배고프다. 나는 목이 마르다."
나는 "나는 내 몸이 목마르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보다
"나는 목마르다."고 말하는 것이 더 간단하다는 것을 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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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uds of Light, Mehd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