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진정한 영웅... 평화· 화해의 수호자로 기억할 것"
국민일보 | 입력 2013.12.06 22:06
그동안 살아 있음으로써 희생과 포용의 가치를 증명해온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5일(현지시간) 타계하자 전 세계의 상실감은 컸다. 탄압한 백인을 향해 복수를 다짐하기보다 용서와 화합을, 무력을 앞세우기보다 이해와 평화를 호소해온 삶의 행적은 만델라를 아프리카의 '소영웅'이 아닌 전 세계의 '위인'으로 만들었다.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하우튼에 있는 고인의 자택 밖은 자정을 넘긴 시간에도 추모 인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매튜 라마카차라고 이름을 밝힌 시민은 "목 놓아 울고 싶은 심정"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사람들이 가져다놓은 꽃다발과 촛불, 남아공 국기로 인해 집 앞은 자연스럽게 임시 추모소가 됐고 만델라의 사진도 곳곳에 세워졌다. 일부 추모객은 2010년 남아공월드컵 때 응원도구로 썼던 길쭉한 나팔 '부부젤라'를 불어댔다. 국기를 흔들며 거리를 행진하던 이들은 "넬슨" "비바(만세) 만델라"를 외치며 반(反)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노래를 불렀다.
같은 시각 지구촌 곳곳에선 길고 긴 애도가 이어졌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이 시대의 위대한 빛이 졌다"며 "만델라는 비범한 인물이자 신화였고 진정한 영웅이었다"고 추도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만델라의 메시지는 절대 사라지지 않고, 자유를 위해 싸우는 전사를 고무시키고 보편적 권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줄 것"이라고 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인류의 존엄과 평등, 자유를 위한 그의 투쟁은 전 세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생전 만델라와 각별한 인연을 맺은 지도자들도 비통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세계는 가장 중요한 지도자이자 가장 훌륭한 인간을 잃었다"면서 "역사는 만델라를 평화와 화해의 수호자로 기억할 것"이라고 애도했다.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 여사는 "피부색과 태어난 환경으로 인해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모두가 깨닫게 했다"고 칭송했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는 "전 인류에 자유와 인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영면했다"며 "증오를 넘어 사랑의 위대한 힘을 보여줬다"고 추도했다. 만델라와 수지 여사, 김 전 대통령 세 사람은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기여로 각각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공통점이 있다.
한편 만델라는 '이름값'에 힘입어 1000만 파운드(약 172억8000만원) 규모의 큰 재산을 남겼다고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이 보도했다. 만델라는 생전 자서전 인세에 펀드 27개를 보유했으며 가족들은 만델라 브랜드로 와인, 의류, 예술품 제작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백민정 기자 minj@kmib.co.kr]
인간에 의한 인간의 억압 넘어선 인간 승리
한겨레 | 입력 2013.12.06 08:50 | 수정 2013.12.06 21:50
[한겨레][토요판] 커버스토리 / 넬슨 만델라 1918-2013
▶ 넬슨 만델라가 서거했다. 정의는 마침내 이긴다고, 역사가 그리 말해 준다고…, 우리 아이들에게 말하기 망설여질 때, 그의 95년 생애는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만델라는 불의한 인종차별의 사슬을 끊었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평화롭게 존엄을 가지고 사는 '무지개 나라'를 꿈꾸었다. 하지만 위대한 꿈은 아직 미완성이다. 우리는 거인의 죽음을 그래서 더 슬퍼한다.
"우리는 마침내 정치적 해방을 이뤘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을 빈곤과 수탈과 고통과 차별의 굴레에서 해방시킬 것을 서약합니다. (중략) 우리는 흑인이든 백인이든 모든 국민이 어떤 두려움도 없이 당당히 걸어가는 사회, 양도할 수 없는 인간 존엄이 보장되는 '무지개 나라'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나라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억압을 경험하는 일이 다시는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없어야 합니다."
1994년 5월10일, 76살의 투사 넬슨 롤리랄라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여러 색깔이 어울려 찬란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무지개 나라'를 역설했다. 수십년간 이 나라를 찢어놓았던 아파르트헤이트'(백인 지배집단의 인종차별주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넬슨 만델라의 삶은 자유와 평등을 위한 불굴의 투쟁 자체였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헌신은 한 세기에 걸친 대하극이자 감동적인 인간 승리의 기록이다.
비폭력 평화투쟁에서 무장투쟁으로 전향
넬슨 만델라는 1918년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동부의 케이프주 트란스케이에서 태어났다. 2009년 11월 유엔은 이날을 '넬슨 만델라의 날'로 제정해 이듬해부터 기념하고 있다. 만델라의 부계는 토착 템부 부족의 추장 가문이다. 만델라라는 성은 친할아버지의 이름에서 비롯했다. 만델라의 중간 이름인 '롤리랄라'는 모계인 코사 부족의 낱말로 '나뭇가지 잡아당기기' 또는 '말썽쟁이'라는 뜻인데, 어렸을 땐 부족 작명에 따른 '마디바'란 애칭으로 불렸다. 만델라는 9남4녀의 남매 중 처음으로 학교교육을 받는 혜택을 누렸다. 넬슨이란 영어 이름은 초등학교 교사가 지어주었다.
19살 때인 1937년, 그는 동부 이스턴케이프에 있는 포트헤어대학교에 입학해 평생의 벗이자 동지인 올리버 탐보를 만난다. 그의 첫 대학생활은 1학년 때 학생대표위원회가 학교 정책에 반대하는 동맹휴업에 참여했다가 제적당하면서 끝났다. 만델라는 포트헤어를 떠나 남아공 최대 도시인 요하네스버그의 한 법률회사에 취직한 뒤, 독학으로 법률 공부를 계속했다.
남아공대학의 통신교육으로 법학사 과정을 마친 뒤 25살이던 1943년 비트바테르스란트대 법학부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만델라는 동급생이자 인종주의 철폐 투쟁의 평생 동지인 리투아니아계 유대인 조 슬로보와 독일계 유대인 해리 슈바르츠를 만난다. 둘은 뒷날 만델라 정부에서 각각 주택장관과 주미대사를 지냈다.
'아파르트헤이트' 내세운
극우 야당 국민당 집권하자
인종차별 철폐운동을 시작
67명 숨진 샤프빌 학살 뒤
도시 게릴라 투쟁 이끌어
국가반역죄로 종신형 선고받고
28년간의 옥중투쟁 벌이는 동안
차별받는 이들의 희망됐던 그는
흑인들이 처음 참여한 대선에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
1944년 남아공의 보어인(네덜란드계 백인) 목사인 다니엘 말란이 이끄는 극우 야당인 국민당이 의회에서 '아파르트헤이트' 노선을 주창하자, 만델라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입해 청년동맹을 만들면서 본격적인 인종차별 철폐 운동에 뛰어들었다.
1948년 국민당의 집권은 서른살 만델라의 삶의 방향을 확정짓는 사건이었다. 2년 뒤인 1950년 아프리카민족회의 청년동맹 의장을 맡은 데 이어, 34살 때인 1952년에는 요하네스버그에서 올리버 탐보와 함께 흑인 최초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해 흑인 인권운동과 법률 서비스를 했다. 그해 12월엔 아프리카민족회의 부의장을 맡았다. 이때만 해도 만델라는 인도 마하트마 간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비폭력 평화투쟁을 지향했다.
1956년 만델라는 시민불복종 운동을 벌이고 '자유헌장'을 작성한 '반역죄' 혐의로 150명의 동지들과 함께 기소됐다. 5년에 걸친 재판 끝에 1961년 피고들은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는 이듬해 시작될 기나긴 투옥생활의 예고편일 뿐이었다.
1960년 3월엔 아프리카민족회의에서 갈라져 나온 범아프리카회의(PAC)가 주도한 대규모 집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67명이 숨지고 수백명이 다치는 유혈사태(샤프빌 학살)가 벌어진다. 영화 <파워 오브 원>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 사건을 계기로 만델라는 평화시위 운동에서 무장투쟁 노선으로 전환한다.
이듬해인 1961년 만델라는 아프리카민족회의 산하에 '움콘토 웨 시즈웨'(민족의 창)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초대 사령관에 올랐다. 초기 투쟁 방식은 주로 백인 정부와 군에 대한 사보타주였지만, 그해 첫해 12월 정부 청사 공격을 시작으로 점차 백인 민간인, 군사시설, 산업시설에 대한 도시 게릴라 투쟁을 본격화했다. 남아공 정부와 미국은 이 조직을 테러조직으로 규정하고 무력대응에 나섰다.
데클레르크 대통령과 노벨평화상 공동수상
만델라는 44살이던 1962년 8월 요하네스버그에서 거주지 이탈 및 파업 선동 혐의로 체포돼 5년형을 선고받고 프리토리아 감옥에 갇혔다. 1964년에는 국가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로벤섬 감옥에서 기나긴 옥중투쟁이 시작됐다. 감옥에 갇힌 만델라는 철저히 격리되고 차별받는 남아공 흑인사회의 정신적 지주이자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동안 '민족의 창'은 1980년대 남아공 백인정권을 상대로 집중적인 게릴라전을 펼쳤다. 1982년 케이프타운 인근의 핵발전소 공격, 1984년 수도 프리토리아에 있는 공군본부를 겨냥한 폭파 사건, 1986년 더반에서의 자동차 폭탄 공격 등이 대표적이다. 도로변 지뢰매설 공격도 병행했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들도 생겼다. 만년에 만델라는 이처럼 무차별적인 무장투쟁이 인권을 침해했다고 인정했다가 '변절' 논란을 낳기도 했다.
1989년 남아공 대선에서 극우 국민당 후보이면서도 인종차별 철폐 등 개혁 노선을 내세운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가 당선됐다. 데클레르크 대통령은 이듬해인 1990년 2월 마침내 만델라의 석방을 전격 단행했다. 수감 28년 만이었다. 백인 소수 권력층이 아프리카민족회의의 끈질긴 저항과 국제사회의 압박, 더는 감당하기 힘든 사회적 갈등과 비용에 굴복한 것이다.
만델라는 석방 일성으로 "무장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더는 무장투쟁이 필요없도록 흑백간 정치협상을 하자"고 제안했다. 남아공의 평화는 흑인들의 광범위한 참정권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이듬해 만델라는 합법화된 아프리카민족회의 의장 자격으로 데클레르크 정부와 수차례 협상을 통해 임시정부 헌법안을 기초했다. 둘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한다. 만델라는 수상 연설에서 "우리는 이 상이 지나간 과거사에 대한 칭찬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고 믿는다"며 "지금도 우리는 온 세상에서 차별 시스템의 종식을 호소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고 말했다.
1994년 남아공 흑인들이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한 자유 총선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승리했다. 만델라는 오랜 흑백 차별의 나라에서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76살의 만델라는 대통령 취임 직후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출범시켜, 수십년간 나라를 할퀸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의 초석을 다지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뿌리 깊은 백인우월주의에 젖은 이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고, 억눌렸던 흑인들의 요구도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그의 대통령 임기 5년은 이런 갈등을 수습하고 왜곡된 사회 구조를 개혁하는 과도기적 성격이 짙었다.
만델라는 타고난 건강체질이었지만, 엄청난 격무와 스트레스를 감당하기엔 너무 고령이었다. 퇴임 2년 뒤인 2001년(83살)에는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노쇠해진 몸도 그의 정열까지 갉아먹진 못했다. 2007년 만델라는 89살의 나이로 세계의 주요 지도자들과 '디 엘더스'(The Elders)라는 자문그룹을 구성했다. 말 그대로 '원로들'이란 뜻이다. 데즈먼드 투투(주교), 코피 아난(전 유엔 사무총장), 엘라 바트(인도 인권운동 변호사), 지미 카터(전 미국 대통령), 리자오싱(전 중국 외교부장), 메리 로빈슨(전 아일랜드 대통령), 무함마드 유누스(방글라데시 그라민은행 설립자) 등이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우리가 무관심과 냉소, 이기심 탓에 휴머니즘이라는 이상에 부끄럽지 않게 살지 못했다는 말이 미래 세대에게서 나오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합시다. 인도주의가 더이상 인종주의와 전쟁이라는 별이 없는 한밤중에 묶여 있을 수는 없다고 한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말이 옳았음을 우리가 증명하도록 노력합시다. 진실한 형제애와 평화가 금과 은, 다이아몬드보다 더 값지다고 말한 그가 단순한 몽상가가 아니었음을 우리 모두가 증명하도록 노력합시다." 만델라가 1993년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했던 절절한 호소는 이제 후대 인류의 과제로 남았다. [조일준 기자iljun@hani.co.kr]
만델라는 누구인가? 투사에서 장기수, 최초의 흑인대통령까지
헤럴드경제 | 입력 2013.12.06 07:52 | 수정 2013.12.06 08:13
[헤럴드 생생뉴스]큰 별이 떨어졌다. 5일(현지시간) 95세를 일기로 타계한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인권 투사에서 용서와 화해의 정치인으로 거듭난 '우리 시대 최고의 위인'(고든 브라운 전 영국총리)이었다.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그는 27년동안 정치범으로서 옥고를 치르는 등 백인정권의 강고한 아파르트헤이트(흑백차별) 정책에 맞서 현 집권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를 이끌며 투쟁했다.
그러나 그의 위대성은 민주적 선거를 통해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더욱 빛났다. 흑인을 탄압하던 백인을 용서와 화합 정신으로 포용해 무지개처럼 서로 다른 인종이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오늘의 남아공을 건설한 것. 탄압을 받던 피지배 계층이 권력을 장악한 뒤 압제자들을 대거 숙청하지 않고 평화공존을 도모한 것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드문 일이다. 그는 또 권력욕을 버리고 대통령 자리를 물러난 뒤에도 인류 평화를 위한 외길에 매진함으로써 남아공은 물론 세계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성자'의 길을 걸어왔다. 연합뉴스가 그의 일생을 정리했다.
▲ 출생과 성장
'롤리흘라흘라 만델라'. 1918년 7월18일 남아공 동남부 트란스케이의 시골마을 음베조에서 템부족 추장 가문 후손으로 태어난 만델라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그의 아버지가 붙여준 롤리흘라흘라는 '나뭇가지를 잡아당긴다'는 뜻으로, '말썽꾸러기'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만델라는 후에 기독교 계통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은사로부터 넬슨이라는 서양식 이름을 얻게 된다.
남아공의 제2대 부족인 코사족에 속하는 템부 부족의 마디바 가문 출생인 그는 음베조 마을의 족장이던 아버지 헨리 음가들라 만델라가 9세때인 1927년 사망하자 템부족 왕을 후견인으로 해서 교육을 받게 된다.
나중에 남아공 국민은 만델라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가문 이름을 따 '마디바'로 부르곤 했다.
만델라는 템부족 왕실이 있는 음케케즈웨니로 옮겨 당시 흑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초등학교와 중·고교를 졸업하고 포트헤어 대학에 진학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얻어 홀로 된 어머니에게 기쁨을 안겨드려야겠다고 생각하던 만델라는 그러나 대학에서 정학처분을 당하며 인생 행로가 바뀌었다. 6명으로 구성된 학생회의 대표로 선출된 그는 학생회가 대학 당국의 정책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거수기 노릇에 머물수 없다며 학교 측의 뜻을 거스르고 학생회 대표를 사임한 것. 음케케즈웨니로 돌아온 만델라는 템부족 왕이 미리 정해둔 여인과 결혼시키려 하자 이를 피해 무작정 요하네스버그로 상경했다.
▲ 투사가 되다
법률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환으로 일하며 방송통신대학인 남아공대학(UNISA) 학사 과정을 이수했다. 이 과정에서 만델라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 등 흑인지식층과 교분을 트면서 백인정권의 흑인 차별정책에 눈을 떠 민주화투쟁을 시작했다. 25세때인 1943년 당시 민주화 투쟁의 중심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담했고 이듬해인 1944년에는 ANC 청년조직인 'ANC청년동맹'(ANCYL)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34세때인 1952년에는 변호사 자격을 획득해 또다른 민주화 운동 지도자 고 올리버 탐보와 함께 남아공 최초의 흑인 법률사무소를 설립했다. 만델라가 ANC의 중심인물로 확고한 위상을 구축한 것은 1952년의 전국적 저항운동이었다. 그는 당국의 차별적 조치에 맞서 전 국민이 궐기하는 불복종 운동의 동조자를 규합하는 책임을 맡아 전국을 돌며 치밀하게 지지자를 확보, 수 개월에 걸친 저항운동을 벌였으며 처음으로 당국에 체포됐다.
이 저항운동으로 ANC는 소규모 결사조직에서 전국적으로 10만명의 회원을 지닌 강력한 조직으로 거듭 태어났다. 그러나 백인정권의 탄압정책은 더욱 강경해져 1960년 3월 요하네스버그 인근 샤퍼빌에서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해 69명이 사망하는 '샤퍼빌 대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백인정권은 같은해 4월엔 반(反)공산당법을 발표, ANC를 불법조직으로 규정했다. 이후 만델라는 더 이상 비폭력 저항운동으로선 민주화를 이룰 수 없다며 ANC 지도부에 무장저항운동을 펼 것을 강력히 주장, 1961년 지하 무장조직인 "움콘토 위 시즈웨(민족의 창)'의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검은 뚜껑별꽃'을 잡아라"
이후 당국의 감시를 피해 1962년 출국,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수개월 간 체류한 뒤 비밀리에 남아공에 귀국했으나 같은해 8월 그를 추적해온 경찰에 체포됐다. 이에 앞서 만델라는 노동자, 운전기사 등으로 변장하며 백인정권의 감시망을 용케 피해다녀 경찰이 그에게 '검은 뚜껑별꽃'이란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1964년 '리보니아 재판'에서 내란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그가 법정에서 행한 최후진술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저항운동의 상징적인 연설이기도 하다.
그는 "난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 흑인이 지배하는 사회와도 맞서 일생동안 투쟁해왔다. 모든 사람이 함께 조화롭고 평등한 기회를 누리며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상을 품고 있다. 나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으며 이를 성취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이를 위해 죽을 각오가 돼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백인 재판부가 사형을 선고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고 훗날 자서전에서 술회한 바 있다.
만델라는 1964년 케이프타운 앞바다에 위치한 로벤섬의 악명높은 교도소에서 환갑을 지내는 등 18년의 옥고를 치렀다. 죄수번호 46664였다. 64년에 로벤섬에 수감된 466번째 죄수라는 뜻이다. 그는 1982년 케이프타운에 소재한 폴스무어교도소로 이송됐다가 1988년 웨스턴케이프주 팔에 있는 빅터 퍼스터 교도소로 옮겨져 1990년 2월 출감했다. 모두 27년간의 긴 옥살이였다.
백인 정권은 노조의 파업 투쟁 등 국내적 저항과 국제사회의 제재 등 압력에 더 이상 흑인탄압정책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마지막 백인 대통령인 F.W. 데 클레르크 대통령은 만델라를 석방하는 한편 ANC도 합법조직으로 인정했다.
이후 백인정권과 만델라가 이끄는 ANC 등 흑인 정당·단체 등이 협상에 나서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민주화 시대에 대한 청사진을 그렸다. 이를 통해 1994년 민주적 선거를 실시하고 시장경제의 틀을 유지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만델라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시기가 바로 이 때로 1993년이었다. 그는 클레르크와 함께 공동으로 상을 받았다.
▲용서와 화합으로 무지개 국가 건설
만델라는 1991년 ANC 총재로 취임했다. 1994년 4월 27일 흑인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첫 민주적 선거에서 ANC가 다수당으로 승리했다. 이를 통해 아파르트헤이트 시대가 공식적으로 종식됐다.
헌법의 간선제 규정에 따라 국회는 다음달인 5월에 만델라를 이 나라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의 나이 76세 때였다. 만델라는 취임 연설에서 "자유를 향한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따로 떨어져 행동할 경우 성공할 수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단합된 국민으로서 함께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화해와 국가 건설을 위해 함께 행동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평화를 누리도록 하자. 모든 사람이 일자리와 빵, 물 그리고 소금을 갖도록 하자. 다시는 이 아름다운 나라에 압제와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대통령 재임 기간 만델라는 백인사회에 대한 보복을 취하지 않고 역시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데스먼드 투투 주교를 위원장으로 '진실화해위원회(TRC)'를 출범시켜 피를 흘리지 않고 과거사를 정리했다.
백인정권 당시 경찰, 군 등 안보 기관에 근무하면서 흑인에 대한 테러와 인권탄압을 자행한 가해자가 TRC에 출두해 진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할 경우 사면하는 대화합조치를 취했다.
이를 통해 남아공은 극심한 흑백 갈등을 겪지 않고 안정과 평화공존의 걸을 걸었다. 이를 통해 남아공 경제가 다시 성장의 길로 전환했다. 흑인과 백인이 피부 색깔이 다르지만 무지개처럼 조화를 이루는 나라를 지향하게 된 것.
▲'정신적 대통령'
만델라는 1999년 5년 임기를 마치고 대통령직에서 퇴임했다. 헌법 규정상 재임이 가능했지만 단임으로 끝냈다. 그는 퇴임 이후 어린이재단, 만델라재단 등을 통해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및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 퇴치 활동과 어린이 교육을 위해 기금마련과 자선활동을 정력적으로 추진하는 등 사회에 대한 공헌활동을 지속했다. 지난 2001년 전립선암 진단을 받기도 했던 그는 그러나 고령으로 점차 쇠약해지면서 2004년 모든 공식 활동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도 남아공의 정신적 대통령이자 '살아있는 성인'으로 존경받아왔다. 남아공이 2010년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을 개최할 당시 한 장면은 남아공 국민의 만델라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당시 남아공에서는 월드컵을 유치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그가 과연 월드컵 기간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낼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미 92세의 고령인 그는 당시 폐막식에 부인 그라사 마셸 여사와 함께 골프카트를 타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하며 그라운드를 가로 질러 퇴장하기까지 수만명의 사람들이 '마디바'를 연호하고 부부젤라를 불며 그에 대한 극진한 애정과 존경심을 표시했다. 그후 약 1년이 지난 2011년 5월 17일. 제이콥 주마 대통령이 만델라 자택을 찾아 1시간 가량 오찬을 함께 했다.
주마 대통령의 만델라 방문은 지방선거를 하루 앞두고 이뤄졌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도가 담긴 행위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당시 제1 야당 민주동맹(DA)의 백인 여성 당수인 헬렌 질레는 선거 운동 과정에서 DA가 만델라의 화합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당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주마 대통령이 직접 만델라를 만남으로써 ANC야말로 만델라의 정신을 계승하는 정당이라는 점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라는 해석이다. 현직 대통령이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만델라 전 대통령에게 기대는 형국인 것. 만델라는 월드컵 이후에는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난 2011년 1월에는 호흡기 질환 증세를 보여 요하네스버그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가 이틀만에 퇴원했다.
남아공 정부는 이후 군의관이 이끄는 팀을 보내 만델라와 함께 기거하면서 그를 24시간 돌보도록 했다. 만델라의 갑작스러운 입원으로 국민이 거의 공황 상태에 빠지자 그의 건강을 정부가 더욱 세심히 살피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워낙 고령인 만델라는 호흡기 질환 증세로 병원을 찾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그는 27년의 옥살이 기간 약 13년을 채석장에서 노역했다. 이 때문에 폐결핵을 앓기도 했다. 그는 2012년 12월 폐 감염증 치료를 받느라 성탄절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고 이듬해인 2013년 3월과 6월에도 폐렴이 재발해 입원 치료를 받았다.
▲'우리 시대 최고 위인'
만델라는 국제사회에서도 매우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이 때문에 남아공을 방문하는 유명 인사는 꼭 만델라를 만나고 싶어했다. 수도 프리토리아에서 900㎞ 떨어진 쿠누로 날아가는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난 2012년 8월 남아공을 방문한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일부 취재진과 수행원을 데리고 쿠누를 방문해 만델라와 면담했다.
2011년 6월에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부인 미셸 오바마 여사가 남아공을 방문하면서 당시 요하네스버그 자택에 거주하는 만델라를 만났다.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는 지난 2006년 11월 남아공의 일간신문 프리토리아 뉴스에 기고한 글에서 만델라에 대해 "(우리시대) 생존 인물 중 최고 위인"이라고 말한 뒤 "만델라의 위대함은 증오하기를 거부하고 다인종 국가인 남아공을 탄생시킨 것"이라며 남아공이 유혈사태 없이 평화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점을 극찬했다.
유엔은 지난 2009년 11월 만델라가 태어난 7월18일을 '만델라의 날'로 지정하기도 했다. 만델라가 67년동안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한 정신을 기려 이날 만큼은 세계 만인이 하루 중 67분을 할애해 이웃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자는 취지다. [onlinenews@heraldcorp.com] [사진=BBC, 가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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