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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70년②] 유홍준의 안목… '靑衣 童子, 玉과 같구나'

잠용(潛蓉) 2016. 11. 9. 06:58

[공감 70년] (2) 유홍준의 안목 -

"靑衣 童子, 玉과 같구나" 이규보가 읊은 비취빛 사랑

경향신문ㅣ 2016.02.05 20:03

 

[경향신문] ㆍ고려청자의 노래

“문화를 창조하는 것은 생산자이지만, 문화를 창달시키는 것은 소비자이다.”

이 명제는 아무리 뛰어난 예술적 생산이 있다 해도 세상이 이를 알아보지 못하면 묻혀버리고 만다는 명구로 예술 작품이든 상품적 제품이든 똑같이 해당된다. 고려청자의 예술적 성취는 분명 고려 도공의 뛰어난 솜씨에서 나온 것임이 틀림없지만 그 아름다움이 높이 고양될 수 있었던 것은 이를 아끼고 사랑했던 고려인들의 안목 덕분이기도 하다. 고려인의 청자 사랑은 당대의 대안목이었던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동자모양 청자연적’에 붙인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청자동자연적, 고려, 높이 11.1cm,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저 청의(靑衣)동자/ 고운 살결 옥과 같구나/ 허리 굽힌 모습은 공손하고/ 이목구비는 청수하네/ 종일토록 게으름 없이/ 물병 들고 벼룻물 공급하니//네가 내 옆에 있어 준 뒤로는/ 내 벼루엔 물이 마르지 않았단다/ 네 은혜 무엇으로 갚을 건가/ 잘 간직하여 깨트리는 일 없게 하겠노라’ 얼마나 사랑스러웠으면 이렇게 노래했을까. 그러나 공부하고 글쓰는 일이 직업일 수밖에 없었던 옛 문인들이 언제나 정숙하고 진지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풍류를 즐기는 데 이골이 난 선비도 있었을 것이 분명한데 그런 서생이 사용했음직한 고려청자 연적이 하나 있다.

 

■ 애교 있는 별격 예술품, 청자 복숭아연적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청자 복숭아연적’(보물 제1025호)은 사랑스러움을 넘어 색태(色態) 넘치는 명품으로 이름 높다. 흔히 그림 속 복숭아는 곤륜산(히말라야산)에서 나오는 반도(蟠桃)로 장수를 상징한다고들 하는데 실제로는 사랑의 이미지인 경우가 많다. 본래 복숭아의 열매와 꽃에는 색기가 완연하여 음란 영화를 도색(桃色) 영화라고도 부른다.

 

↑ 청자복숭아연적, 고려, 높이 8.7cm, 보물 1025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이 연적의 복숭아 형태는 여인의 봉긋한 젖가슴을 닮았고, 뒤태의 둥글게 갈라진 선은 여지없이 여인의 히프를 연상케 한다. 거기에다 때깔은 ‘굴욕없는 꿀피부’이고, 맵시있게 살짝 벌린 주구와 방끗 웃는 듯한 꽃봉오리는 애교 만점이다.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한답시고 이런 복숭아연적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으려니 필시 난봉기를 감추지 못하는 날나리 학자의 애장품이었으리라. 그러나 이런 애교 있는 별격의 예술품이 있다는 것은 고려 사회가 결코 경직된 사회가 아니었음을 방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고려청자의 가장 큰 주제는 차와 술이다. 그래서 고려청자의 대종은 다완과 차주전자, 그리고 술병과 술단지인 매병이다. 다완에는 다도에 걸맞은 고요하고 맑고 정숙한 분위기가 있다. 반면에 술은 감성적 해방이 허용되기 때문에 술병과 매병에는 풍류와 낭만의 서정이 넘친다. 때로는 술에 관한 명시를 새겨넣어 취흥을 돋우기도 했는데 이런 시명(詩銘)청자는 중국과 일본 도자기에는 없는 우리 도자사의 전매특허처럼 되어 있다. 이태백의 음주시를 비롯하여 왕유, 백거이 등 당나라의 명시를 즐겨 새겨넣었는데 고려 문사의 시를 새긴 ‘청자 표주박형 술병’도 있다.

 

‘금꽃을 아로새긴 푸르고 아름다운 이 술병/ 분명코 호기(豪氣)로운 집안의 기쁨이었으리’

멋을 아는 집안에서는 이처럼 술병과 술잔을 마련하고 손님을 맞이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규보는 <청자 술잔에 부친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청자로 술잔을 구워내/ 열에서 우수한 것 하나를 골랐으니/ 선명하게 푸른 옥빛이 나는구나/ 몇 번이나 연기 속에 파묻혔기에/ 영롱하기는 수정처럼 맑고/ 단단하기는 돌과 맞먹는단 말인가/ 이제 알겠네 술잔 만든 솜씨// 주인이 좋은 술 있으면/ 너 때문에 자주 초청하는구나’

 

그런데 고려시대 문인들은 술마시기 바빠서 그랬는지 정작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미술사적 증언은 남기지 않았다. 확실히 예술적 생산보다 소비에 더 마음을 많이 쓴 것 같다. 그런 고려청자가 국제적,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된 것은 1123년(인종 원년)에 송나라 휘종 황제의 사신으로 개성에 온 서긍(徐兢)이라는 대안목이 펴낸 <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 高麗圖經)> 덕분이다. 선화는 휘종의 호이고, 그림을 곁들인 책이기 때문에 도경이라고 했다.

 

청자연꽃모양향로, 고려, 높이 15.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눈썰미가 귀신같았던 서긍

서긍은 진실로 뛰어난 안목을 갖고 있던 분이었다. 그는 개성에 머문 1개월간 보고 느낀 바를 아주 세밀하게 기록했다. 어느 집 파티에 갔더니 실내장식이 어떻게 되어 있고, 잔칫상에 나온 그릇은 어떻게 생겼다고 정확히 기록했다. 그는 눈썰미가 귀신 같아서 심지어는 말 안장에 장식된 나전칠기를 보고 ‘극정교 세밀가귀(極精巧 細密可貴)’, 즉 ‘극히 정교하고 세밀해서 가히 귀하다고 할 만하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리고 고려 궁궐의 대문부터 회경전(會慶殿)에 이르는 모든 건물의 배치를 발걸음 옮길 때마다 기록했는데 그 정확성이 아주 놀랍다. 만월대(滿月臺)라 불리는 빈터로 남아 있는 고려궁궐 자리를 연전에 우리 문화재청에서 남북 문화교류 사업으로 발굴해 보니 주춧돌이 서긍의 기록과 꼭 일치했다고 한다. 서긍은 귀국 후 개성에서 본 바를 고려의 건국, 성읍, 궁전, 인물, 사찰, 풍속[雜俗], 그릇[器皿] 등 300여 항목으로 자세히 설명하고 그림까지 덧붙여 이듬해(1124) 휘종에게 바쳤다. 고려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이 책보다 더 잘 말해주는 기록은 없다.

 

휘종은 크게 기뻐하며 서긍에게 높은 벼슬을 내려주었다. 그러나 2년 뒤인 1126년 금나라가 송나라 황실을 유린할 때 이 책은 소실되었다. 다행히 서긍의 집에 있던 부본(副本)은 살아남아 서긍의 조카가 이 책을 1167년에 간행했다. 다만 아쉽게도 그림 부분은 없었다. 중국인들과 후대 조선의 학자들은 이 책을 통해 고려의 높은 문화를 알 수 있었다. 특히 <고려도경>은 고려청자의 상황을 아주 잘 말해 주고 있다. 청자 술단지인 ‘도준(陶樽)’이라는 항목에서 서긍은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부르는데, 근래에 와서 제작 솜씨가 공교해졌고 빛깔도 더욱 아름다워졌다”고 했다. ‘고려비색’이라는 말은 이렇게 전해지게 된 것이다.

 

청자상감시문표주박모양병, 고려, 높이 39.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긍은 이어서 고려비색은 대개 월주의 고비색(古秘色)이나 여주(汝州)의 신요기(新窯器)와 유사하다고 했다. 여주 신요기란 휘종 황제 시절의 새 관요(官窯)로 중국 청자에서 최고봉이었으니 고려청자가 최고의 수준에 올라와 있었다는 증언인 셈이다. 그리하여 12세기 송나라의 태평노인(太平老人)은 ‘천하제일론’을 말하면서 종이, 먹, 벼루, 차 등 각 분야에서 최고의 명품을 꼽을 때 청자는 송나라 월주요, 용천요를 제쳐두고 “고려비색 천하제일”이라고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서긍은 고려비색 중 연꽃 받침 위에 사자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청자향로인 ‘산예출향(猊出香)’이 가장 빼어나게 정교한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비록 뚜껑은 없지만 서긍이 보았다는 것과 비슷한 ‘청자연꽃모양 향로받침’이 있는데 오늘날에 보아도 상찬을 금할 수 없다.

 

■ 청자 생산과 소비가 쇠퇴했던 고려 말기

그러나 고려왕조 말기에 들어와서는 청자의 생산과 소비 모두가 쇠퇴일로에 들어가더니 급기야 조선왕조로 들어서면서 분청사기와 백자에 그 자리를 내어주고 고려비색이라는 말조차 까맣게 잊혀지게 되었다. 망각 속의 고려청자가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8세기 들어와 성호 이익 같은 실학자, 고증학자들이 서긍의 <고려도경>을 읽고 비로소 그 존재를 알게 된 때문이었다. 자하 신위(申緯·1769~1845)는 자신의 애장품 중 하나로 ‘고려비색 항아리’를 노래하면서 서긍의 예찬으로 알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진작부터 고려청자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것은 추사 김정희였다. 그는 “최고 가는 붓은 산호(珊瑚) 필가(筆架)에 걸어두고, 제일가는 꽃은 비취병에 꽂아두네”라는 멋진 서예 작품을 남길 정도였다.

 

1827년, 추사 김정희 나이 43세. 다산 정약용 66세 때 얘기다. 추사는 평안감사로 부임한 부친을 뵈러 평양에 왔다가 중국에서 돌아오는 사신이 선물로 가져온 수선화 한 포기를 얻게 되자 이를 정성스레 화분에 심어 남양주 여유당(與猶堂)에 계신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 보냈다. 이에 다산은 감격하여 ‘수선화’라는 시를 한 수 짓고는 부제로 “늦가을에 추사가 평양에서 수선화 한 포기를 부쳐 왔는데 그 화분은 고려청자[古器]”였다고 했다. 다산에 대한 추사의 존경심이 얼마나 지극했는가를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조선 지성사의 명장면이 아닌가.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고려청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고려청자의 99%는 고려 고분에서 출토, 정확히는 도굴된 것이다. 고려사람들은 돌아가신 분이 저승에서 사용할 수저, 거울, 도장 등과 함께 청자 다완·주전자·향로·꽃병·술병·연적 등을 부장품으로 넣어주었다. 그 장례풍습으로 고려청자가 뒷날 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되살아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무덤 속의 고려청자가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세기 말 개항 이후 일본, 미국, 유럽 등 제국주의자들이 한국의 민속자료를 수집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대포를 앞세우기 전부터 민속학, 지리학, 고고학, 식물학자를 보내 식민 대상 지역의 실상을 조사하곤 했다. 그사이 개성과 강화도의 고려고분들이 백주에 도굴되었다. 우리가 아무 영문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본, 유럽, 미국으로 국보급 고려청자들이 무더기로 실려 나갔던 것이다.

 

1905년 초대통감으로 온 이토 히로부미는 최고의 장물아비였다. 그는 고급 청자를 마구 사들여 메이지 일왕과 일본 귀족들에게 선물했다. 그 숫자가 수천점에 이른다. 그런 이토가 어느 날 고종황제를 만나면서 고려청자 한 점을 보여주자 고종이 “이 푸른 그릇은 어디서 만든 것이오”라고 물었단다. 이에 이토가 고려자기라고 대답하자 고종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는 없는 것이오.”

이 허망한 독백이 결국 고려청자의 마지막 기록이다. 게다가 이 기막힌 이야기를 마치 신기한 이야기인 양 ‘안목’이라는 이름으로 새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자니 우리는 고려시대 조상들에게 짖는 죄가 정말로 많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유홍준 |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Music by Davg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