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용의 타임머신... 영원한 시간 속에서 자세히보기

회화·서예·사진

[공감 70년①] 유홍준의 안목… '환재 박규수의 추사론'

잠용(潛蓉) 2016. 11. 8. 18:30

[공감70년] (1) 유홍준의 안목 -

'桓齋 朴珪壽추사론'
경향신문ㅣ2015.12.31 21:25 수정 2016.01.02 14:16 

 

추사체의 묘미 간파한 박규수 "함부로 흉내 내지 말라" 
경향신문은 창간 70주년을 맞아 삶의 양식이자 원형질을 이뤄온 한국문화의 흐름을 조망하는 ‘공감 70년’을 연재합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한국의 미적 가치와 예술세계에 탐조등을 들이대는 ‘안목(眼目)’, 염무웅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는 광복 이후 70년간 한국 문단과 문인들의 작품을 짚어보는 ‘문단과 문학, 시대정신의 그림자’를 집필합니다. 박철수 서울시립대 교수는 지난 70년간 시민들이 살아낸 공간과 거처를 생활문화사로 엮은 ‘거취와 기억’,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성공회대 초빙교수)는 대중문화에 투영된 민심을 읽어내는 ‘돈과 사랑의 변주곡’ 집필을 맡습니다. 

필자 유홍준

 

‘미(美)를 보는 눈’을 우리는 ‘안목(眼目)’이라고 한다. 안목이 높다는 것은 그것의 미적 가치를 감별하는 눈이 뛰어남을 말한다. 안목에 높낮이가 있는 것은 미와 예술의 세계가 그만큼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예술적 형식의 틀을 갖춘 작품에 대해서는 안목의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기존 형식에서 벗어나 시대를 앞서가는 개성적인 작품에 대해서는 안목의 차이가 완연히 드러난다. 영조시대 문인화가인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1710~1760)은 그림과 글씨 모두가 너무도 파격적이어서 안목이 낮은 사람의 눈에는 얼른 들어오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대상의 묘사가 소략하여 기교가 잘 드러나지 않고 먹을 묽게 사용하여 얼핏 보면 싱겁다는 인상까지 준다.

 

그러나 안목이 높은 사람은 오히려 그 스스럼없는 필치 속에 내재된 고담한 아름다움에 심취한다. 한껏 잘 그린 태(態)를 내는 직업화가들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고상한 문기(文氣)가 있다고 더 높이 평가한다. 작품의 이런 예술적 가치를 밝히는 것은 미술사가의 몫이라고 하겠지만 일반 감상가 중에서도 안목이 높은 분은 실수없이 그 미감을 읽어낸다. 능호관과 동시대를 살았던 김재로(金在魯)라는 문인은 그의 서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인상 ‘雪松圖’, 18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117.2 X 52.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세상에는 능호관의 그림과 글씨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좋아하는 사람은 기(奇)해서 좋다고 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허(虛)해서 싫다고 한다. 그러나 능호관을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바는 참됨[眞]에 있다. 능호관의 매력은 기름진[濃]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담담한[淡] 데 있으며, 익은[熟] 맛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生] 맛에 있다. 오직 아는 자만이 알리라.”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예술로 말할 것 같으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를 능가할 예술가가 없다. 거의 앵포르멜 수준이다. 오늘날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감히 공졸(工拙)을 말하는 이는 없지만 추사 당년에 모두가 그렇게 공감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개성적인 서체를 법도를 벗어난 괴기 취미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추사는 어떤 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근자에 들으니 제 글씨가 세상 사람의 눈에 크게 괴(怪)하게 보인다고들 하는데 혹 이 글씨를 괴하다고 헐뜯지나 않을지 모르겠소. 요구해온 서체는 본시 일정한 법칙이 없고 붓이 팔목을 따라 변하여 괴(怪)와 기(氣)가 섞여 나와서 이것이 금체(今體)인지 고체(古體)인지 나 역시 알지 못하며, 보는 사람들이 비웃건 꾸지람하건 그것은 그들에게 달린 것이외다. 해명해서 조롱을 면할 수도 없거니와 괴하지 않으면 글씨가 되지 않는 걸 어떡하나요.”

 

자신의 개성을 알아주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추사의 하소연이 애절하게 다가온다. 그래도 당대의 안목들은 추사 예술의 진가를 잘 알고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동시대 문인인 유최진(柳最鎭)은 추사를 두둔하여 이렇게 말했다.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怪奇)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妙)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이것이 추사체의 본질이자 매력이다. 추사체의 내력에 대해서는 또 한 분의 안목인 환재(桓齋) 박규수(朴珪壽·1808~1876)가 다음과 같이 정곡을 찌르는 글을 남겼다.

 

“추사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당시의 모더니즘이라 할) 동기창(董其昌)체에 뜻을 두었고, 중세(中歲·24세)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는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옹방강(翁方綱)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 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骨氣)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그러나 소동파(蘇東坡), 구양순(歐陽詢) 등 역대 명필들을 열심히 공부하고 익히면서 대가들의 신수(神髓)를 체득하게 되었고, 만년(54세)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마침내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一法)을 이루었으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 그래서 내가 후생 소년들에게 함부로 추사체를 흉내 내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추사체는 귀양살이 이후에 완성되었다는 학설의 모태다. 나는 박규수의 이 글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며 감동하였다. 흔히 위대한 예술가를 말할 때면 그의 천재성을 앞세우곤 한다. 그러나 박규수는 젊은 시절 추사의 결함까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추사의 개성적인 서체는 고전 속으로 깊이 들어가 익힌 다음에 이룩한 것, 즉 입고출신(入古出新)이기 때문에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법도에 구속받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추사를 배우려면 그의 글씨체를 모방하지 말고 그런 수련과 연찬을 배우라고 한 것이다. 박규수의 이런 예술론 행간에는 인생론조차 서려 있다.

 

김정희, ‘谿山無盡’, 19세기 전반, 62.5×165㎝. 간송미술관 소장

(시내와 뫼는 끝이 없구나)

 

박규수가 미를 보는 안목은 이처럼 높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세상을 보는 안목도 뛰어났다. 본래 안목이란 예술에만 국한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안목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분별하는 식견이다. 역사를 보는 안목, 경제 동향을 읽어내는 안목, 정치의 방향을 제시하는 안목,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 등 모든 분야에 해당된다.

 

박규수는 19세기 후반, 서세동점이라는 어지러운 시대를 온몸으로 살았던 분이다. 그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제너럴 셔먼호 사건 때 평안감사를 지냈고, 1862년 임술민란 때는 백성을 무마하는 안핵사로 진주에 내려갔었다. 그는 현장에 당도하여 지금 일어난 농민들의 소요는 수령들의 잘못이 빚어낸 이 지역만의 현상이 아니라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 등 사회 전반의 문제 때문이라는 조정에 보고서를 올렸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역사책에서 ‘진주민란은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일어났다고 배우고 있는 대목이다.

 

박규수는 세상의 추이를 볼 줄 아는 안목도 있었다. 그는 말년엔 조국의 장래를 위하여 서울 가회동 집에서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등 20대의 젊은 양반 자제들을 불러모아 개화사상을 가르칠 정도로 안목이 원대했다. 지금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대안목(大眼目)이었다. 그래서 한번은 이 시기 역사를 전공하는 안병욱 교수에게 그의 안목에 대해 말을 건넨 적이 있다.

 

“안 교수, 박규수는 안목이 대단히 높았던 것 같아.”
그러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아냐, 박규수의 안목은 깊었어.”

이에 우리는 안목이 높으냐, 깊으냐를 놓고 한참 논쟁을 하였다. 이때 마침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을 만나게 되어 우리는 누가 옳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당신의 대답은 또 달랐다.

“둘 다 틀렸어. 박규수의 안목은 넓었어.”

 

확실히 박규수의 안목은 보기에 따라 넓고, 깊고, 높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같은 안목이라도 분야마다 그 뉘앙스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역사를 보는 안목은 깊어야 하고, 현실(정치·경제·사회)을 보는 안목은 넓어야 하고, 미래를 보는 안목은 멀어야 하고, 예술을 보는 안목은 높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 사회 각 분야에 굴지의 안목들이 버티고 있어야 역사가 올바로 잡히고, 정치가 원만히 돌아가고, 경제가 잘 굴러가고, 문화예술이 창달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당대에 안목이 없다면 그것은 시대의 비극이다. 천하의 명작도 묻혀 버린다. 많은 예술작품이 작가의 사후에야 평가받은 것은 당대에 이를 알아보는 대안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홍준 |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Music by Davg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