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위선적 신자보다 무신론자가 낫다"
뉴시스ㅣ이수지ㅣ입력 2017.02.24 10:38 수정 2017.02.24 10:52 댓글 153개
↑[바티탄시티=AP/뉴시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위선적 기독교인보다 무신론자가 낫다고 밝혔다. 교황은 23일(현지시간) 교황청 내 교황 처소인 산타마르타 게스트하우스에서 집전한 미사에서 말과 행동이 다른 천주교 신자를 비판했다. 그는 “만약 당신이 기독교도인데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이중생활을 하거나 더러운 사업을 운영하면 자신을 기됵교도라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밝혔다. 교황이 지난 22일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주례 일반알현 중 성호를 긋는 모습. /2017.02.24
【서울=뉴시스】이수지 기자 = 프란치스코 교황이 "위선적 신자보다는 무신론자가 낫다"고 밝혔다고 CNN, 교황청 라디오방송 등 외신들이 2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교황은 이날 교황청 내 교황 처소 산타마르타 게스트하우스에서 집전한 미사에서 말과 행동이 다른 천주교 신자를 비판했다. 그는 “만약 당신이 신자인데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이중생활을 하거나 더러운 사업을 운영하면 자신을 신자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밝혔다. 교황은 이어 “주변 여러 곳에서 ‘신자인데 저렇다면 무신론자가 더 낫다’는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듣는지 모른다”며 “이것이 바로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다. 물의가 무엇이냐?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이다”이라 비난했다.
교황은 돈세탁 범죄자, 자신의 직원들을 착취하면서 자신은 해변에서 휴가를 즐기는 기업가를 죄인의 한 예로 들었다.
이 교황의 발언은 목요미사 중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성경구절을 읽다가 나왔다. 이 구절에는 예수가 다른 사람들을 죄를 짓게 하느니 물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말한 내용이 있다. 이 구절에 대한 천주교 교리는 스캔들을 저지르는 죄인에 대해 사기를 조장하는 사업가, 학생들을 선동하는 교사, 사람들이 도덕적 가치에서 벗어나게 하는 조장자 등이 해당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교회는 직접 또는 간접으로 다른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는 사람은 조장된 죄악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가르친다.
이에 교황은 이날 무신론자가 위선적 신자보다는 낫다고 역설한 것이다. 교황이 이전에도 무신론자를 언급한 바 있다. 지난 2013년 그는 즉위 직후 모두에게 천국이 열려 있다고 설교하면서 “神은 信者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했다”며 “무신론자도 구원했는지를 묻는다면 심지어 무신론자까지 포함한 모두”라고 주장했었다. 교황은 이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선을 행해야 한다‘며 "신부님, 저는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선을 행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천국)에서 서로 만날 것“이라고 말했었다. 교황청은 이후 성명에서 교황이 단지 신의 은총이 모두에게, 심지어 무신론자에도 내려진다는 점과 신자와 비신자에게 함께 선을 행하자라고 촉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suejeeq@newsis.com]
[생활 속의 전통사상 (39)] 생사(生死)와 기독교사상
"인간의 죽음은 끝이 아닌 새로운 생명의 시작"
경상일보ㅣ2016.10.24
죽음은 자연적 현상이 아닌 원죄로 인한 징벌로 해석
육신은 사라지지만 영혼은 사후세계에서 영원히 살아
기독교는 유일신 사상, 조상신 모시는 祭祀조차 용납되지 않아
인류사를 통틀어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삶과 죽음의 문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 속 망각의 시각에서는 삶은 영원하고 죽음은 멀리 있는 것으로 눈앞의 득실에 사소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이다. 시작은 끝을 전제로 하고 있듯이 어머니의 품에서 세상으로의 탄생이 있었다면 다시 세상의 품에서 죽음으로의 재탄생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인가?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종교가 어떤 것이든 아니면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든 생사에 대한 각자의 견해는 다양할 것이다.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거대한 물음이 없었다면 과연 종교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 종교가 없다고 할지라도 인간으로서는 죽음이라는 절대적 진실의 영향은 벗어나기가 어려울 것이다. 각각의 종교가 다양하듯 인간의 삶도 천차만별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과 죽음 또한 여러 형태로 정의하고 있으며 사람마다 믿고 있는 방식 또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종교사에서 기독교는 1600년의 불교나 유교에 비하면 아주 최근(130여년 전)에 전래된 신종교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기독교가 한국 근현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기독교는 한국의 전통종교(유교, 불교, 천도교 등)와 비교할 때 사생관(死生觀)에서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기독교는 유일신 사상을 표방하고 있으며 불교가 각자의 깨달음의 종교인 반면에 기독교는 신에 대한 절대 복종, 의존적이며 그 가르침의 본질은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역사에서 기원전 4세기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인생이란 고귀한 영혼이 비천한 육신 안에서 옥살이하는 질곡(桎梏)이요, 죽음은 고귀한 영혼이 비천한 육신감옥에서 풀려나는 경사’라고 하였다. 이 것은 죽음은 단지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뜻하고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은 오히려 육체의 속박을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것이 바로 그리스 철학자들이 믿었던 영혼불멸설(靈魂不滅設)로서, 바울은 기독교에서 고유의 영혼불멸설을 확립하였다.
기독교의 궁극적 목표가 천국인 구원으로서 천국은 ‘하나님이 천국천사와 함께 성도를 기다리시는 곳, 부활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곳, 기쁨과 영광 그리고 빛이 충만한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류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하신 일)신앙을 수용하고 따라서 믿는 자는 심판받지 않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시록 21:4) 즉 천국은 저주가 없는 곳이며(계시록22:3) 마귀 사탄의 유혹도 없는 곳(계시록20:10), 목마름과 상함의 고통이 없는 곳(계시록7:16)이다. 또한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죽음을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지 않는다. 즉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창조하였을 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였는데 아담과 하와에 의한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죽음이라는 징벌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 5:12) 그리고 영생과 부활을 믿는 종교로 ‘나는 진리(眞理)요, 부활(復活)이요 생명(生命)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요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25, 26)라고 하였다. 믿음이 바로 구원으로서 하나님을 믿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살다가 죽으면 육신은 자연으로 사라지지만 영혼은 신의 심판을 받아 사후세계에서 영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천당이나 지옥은 시간적 개념을 초월한 영원한 생명의 영역으로 영원히 산다고 믿는다. 즉 죽음은 생명의 끝남이 아니고 새로운 생명의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시신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하나님 곁으로 보내기 위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한다. 또한 우주 공간에 오직 한 분인 유일신(唯一神)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신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 전통인 조상신을 모시는 제사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하늘나라에서 영화를 누리고 있을 조상의 영혼을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 초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영혼만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종말(終末)이 오고 예수가 다시 내려오는(再臨) 날, 이 세상의 모든 산자와 죽은 자는 그의 앞에서 심판을 받고 그 결과에 따라 구원을 받는데 산자는 산대로, 죽은 자는 부활해서 들림을 받아 하늘나라로 올라간다고 한다. 이것이 재림이요 휴거(携擧)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예배할 때마다 주기도문과 함께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使徒信經, 사도신경) 하고 기도한다.
인간에게 삶은 누구에게나 한번으로서 유한하다. 그래서 무한을 동경하고 영원을 갈망한다. 인간으로서 경험 밖의 영역인 죽음을 비롯하여 한계를 넘어선 일들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으며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래서 무신론자도 어려움이나 슬픔에 직면하면 본능적으로 신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종교를 믿든 아니면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든 종교에 대한 바른 이해와 일상의 윤리관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믿는 자들을 하나님이 사랑하듯 서로 사랑할 것을 권하고 불교에서는 자비를 권하고 있다. 이미 태어난 이상 누구나 번민과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서 비단 기독교뿐만 아니라 어떤 종교든 좋은 교리와 훌륭한 종교인들이 많은 종교에 번민의 답을 맡기는 것도 삶의 한 방편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글] 김진/ 김진명리학회장 울산대 평생교육원 외래교수
神은 惡을 막으려고 하지만 능력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全能하지 못합니다.
그는 능력은 있지만 기꺼이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惡意的입니다.
그는 능력도 있고 기꺼이 하려고 합니까?
그러면 어디에서 惡이 올까요?
그는 능력도 없고 기꺼이 하지도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그를 神이라고 부릅니까?
▶ 에피쿠로스 (고대 그리스 철학자, 무신론자 BC 34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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