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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태의 국경일기] ⑮ 라오스 1428고지 ~ 타이 롬끌라오

잠용(潛蓉) 2018. 5. 19. 16:24

"국경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전쟁 없이 살 수 있다면"
한겨레ㅣ2018.05.19. 13:16 수정 2018.05.19. 14:46 댓글 33개


[토요판] 정문태의 국경일기⑮
라오스 1428고지~타이 롬끌라오


▲ 라오스 쪽 1428고지 뒷마을에서 태어나 타이 쪽 롬끌라오에서 살아온 경계인 첼로 세일리. 그이 뒤쪽에 보이는 산이 1428고지다. /정문태 제공  


1428고지와 롬끌라오 사이는 라오스-타이 영토분쟁 격전지
 양국 1천명 희생자 낸 전쟁 비무장 무인지대 설치해 대결
 식민주의가 남긴 전형적 유산  타이공산당 무장투쟁 참전한
 롬끌라오 토박이 첼로 세일리 "좋은 세상 못 물려줘 미안"
국경 주민들에겐 국적보다 생존  비무장지대, 평화지대로 바꿀 때

[한겨레] 밤하늘이 천정쯤으로 내려온다. 달려가면 한 걸음거리나 될까 싶다. 북두칠성도 카시오페아도 잘 있다. 큰곰, 목동, 사자, 처녀도 다들 그 자리 그대로다. 은하수도 참 오랜만이다. 롬끌라오 국경초계경찰(BPP)이 소개해준 1천m 산상 수언 펏사삭(식물원)에 짐을 풀면서 쳐다본 밤하늘은 그야말로 별 천지다. 근데 오랜만에 느낀 우주의 감동은 이내 시들었다. 제법 깨끗하고 예닐곱이 잘 수 있을 만큼 널찍한 방을 얻어 놓고 마을로 내려가 저녁을 먹고 온 사이 난리가 났다. 이 방 토박이로 보이는 개미, 돈벌레, 거미, 찌깨벌레에다 불빛을 쫓아온 모기, 하루살이, 나방, 딱정벌레, 귀뚜라미가 날뛴다. 이름 모르는 놈들만도 여남은 될 듯. 한마디로 벌레박물관이다. 수로 보나 종류로 보나 결투는 허튼 짓. 불을 끄고 누웠다. 놈들이 이내 얼굴로 목덜미로 달려들더니 머잖아 이불 속 옆구리로 허벅지로도 기어든다. 20~30분마다 자다 깨다를 되풀이 한다. 동틀 무렵이나 돼서야 놈들이 물러간다.


흐릿하게 보이는 국경분쟁 격전지

밤새 잠을 설치고 맞은 롬끌라오의 아침은 반쯤 절망이다. 1428고지를 보겠다며 12시간을 달려왔는데 만만치 않다. “수언 펏사삭 꼭대기에서만 볼 수 있다.” 롬끌라오에서 10㎞ 후방지역인 반텃찻에서 만난 군인도, 롬끌라오 국경초계경찰도 똑같은 말을 한다. 수언 펏사팍에서 직선거리로 10㎞쯤 떨어진 1428고지는 산과 나무에 가려 맨눈으론 그저 20㎝ 남짓 꼭대기만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성이 차지 않는다.


현재 라오스 점령지역인 1428고지와 타이 점령지역인 롬끌라오 사이는 영토주권 분쟁지역으로 1987년 12월부터 1988년 2월19일까지 이른바 타이-라오스 국경전쟁을 벌인 격전지다.그 시절 타이는 제3군사령부 소속 4개 대대와 타한 프란(준군사 자원병) 10개 중대를 포함한 병력 3천을 투입하면서 155㎜포와 F-4 전투기까지 동원했다. 병력 1천을 투입한 라오스는 사거리 35㎞짜리 130㎜포로 롬끌라오를 넘어 민간지대까지 두들겼다. 두 나라는 하루 밤 사이 롬끌라오에 타이와 라오스 국기를 번갈아 올릴 만큼 고강도전쟁을 치르면서 1천명 웃도는 전사자를 냈다.


전쟁 뒤 두 나라는 롬끌라오와 1428고지 사이에 각각 3㎞씩 비무장 무인지대를 차렸다. 그렇게 해서 오늘까지 폭 6㎞ 넓이 44㎢ 지대가 영토주권 분쟁지역으로 남아있다. 1810㎞에 이르는 타이-라오스 국경선은 1907년 인도차이나를 식민 통치한 프랑스가 만든 지도를 따라 그었고, 이 분쟁지역은 매남흥(흥강)을 경계로 삼았다. 문제는 그 지도에 없는 매남흥의 두 지류다. 건기에는 말라버리는 물길 하나가 롬끌라오 쪽으로, 다른 하나가 1428고지 쪽으로 흐른다. 1996년 두 나라가 타이-라오스합동경계위원회(JBC)를 만들어 지루한 협상을 벌여왔지만 여태 또렷한 해결책을 못 찾는 까닭이다. 이건 식민주의자들이 남긴 질긴 유산으로 제2차 세계대전 뒤 독립한 거의 모든 나라들이 겪어온 전형적인 국경 영토분쟁이다.


1428고지를 코앞에 두고 되돌아갈 수 없어 마을을 들쑤시고 다니다 보니 롬끌라오는 세 마을로 이뤄져 있다. 하나는 들머리에 전쟁 뒤 새로 만든 마을인 반마이를 품고 165가구에 1100명 주민을 지닌 롬끌라오고, 다른 하나는 좀 더 안쪽으로 123가구에 800명 주민을 지닌 성옥숩이다. 이 셋을 통틀어 흔히들 롬끌라오라 불러왔다.

여기저기 기웃거리지만 마을 촌장들을 비롯해 말이 통할만한 이들은 모두 새벽부터 밭으로 나가버렸다. 마을엔 늙은이와 아이들만 남았다. 1428고지를 포기한 점심 나절, 밭에서 돌아온 성옥숩 촌장 틴나꼰 롯쩨나살리슈파(47)를 만났다. “경운기로만 갈 수 있는 길인데 비가 안 오면 내가 태워줄 테니 좀 기다리시오.” 먹구름이 걷히기만 바라며 30분쯤 기다렸다. “갈 땐 괜찮을 것 같은데 돌아온 땐 비가 올 것 같아.” 그래서 결국 1428고지를 접고 국경전쟁 경험담이나 듣고 가겠다는 말에 틴나꼰이 한 주민을 소개했다.


▲ 타이-라오스 영토주권 분쟁의 핵심지인 반롬끌라오. 정문태 제공  


예순다섯의 옛 타이공산당 ‘동지’

곧장 그이 집을 찾아간다. 한 중늙은이가 생강을 내다 팔고 오는 길이라며 웃는 얼굴로 맞지만 안경 너머로 휙 바라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맹수가 먹잇감을 꿰뚫어보는 것 같다. “이 동네 사람이니 혹 무장투쟁,” 지나가듯 묻는데 그이가 말을 자르고 든다. “그렇지. 타이공산당에서.” 이 한마디로 서로 말문이 트였다. 동무 따지기는 어디가나 첫인사 단골메뉴다. 그이가 전선의사로 이름 날린 사하이 모댕(붉은 의사 동지)과 함께 일했다는 걸로 탐색전은 끝. 동무의 동무는 동무다. 올해 예순 다섯인 그이는 무장투쟁 시절 사하이 사완(사완 동지)으로 불렸던 첼로 세일리다.


1965년부터 달아오른 타이공산당 무장투쟁은 1970년대를 통틀어 타이 전역을 내전 상태로 몰아갔다. 그즈음 타이공산당은 빠텟 라오(라오스공산당) 도움을 받으며 라오스 국경을 넘나들었다. 1428고지와 직선거리로 8㎞ 떨어진 롬끌라오도 타이공산당 작전지역이었다. 그러다 1980년 들어 쁘렘 띤나술라논 총리가 내건 사면·보상안에 따라 1982~1983년 사이 공산당원들이 대거 투항하면서 실질적인 무장투쟁이 끝났다. 첼로는 1982년 투항한 600여명 동지와 함께 여기 롬끌라오에 마을을 세웠고 초대 촌장 겸 지도자 노릇을 해왔다.


1428고지 뒷마을에서 소수민족 몽(Hmong) 핏줄을 받고 태어난 첼로는 열다섯 되던 1953년 온 가족과 함께 타이공산당에 뛰어든 뒤, 곧장 중국 쿤밍으로 가서 1년 동안 정치와 의료 교육을 받고 타이로 되돌아왔다. “그 시절 우리한텐 길이 둘 뿐이었지. 정부 아니면 공산당인데, 군과 경찰이 짐승이든 사람이든 맘대로 잡아가고 죽이는 판에 누가 정부를 택하겠어.” 첼로는 그동안 귀담아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는 옛날이야기를 쏟아내며 신났다. “주로 어디 전선에서?” “케엣 577.” 공산당 제577구는 핏사눌록주 북부 작전지역이었다. 바로 이 지역이다. 첼로는 여기서 나고 자라고 싸우면서 살아온 그야말로 토박이다.


30분쯤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첼로가 묻는다. “참, 1428 보고 싶다고 했지?”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다. “전쟁 끝나고는 비무장지대에 들어간 기자가 아무도 없었지. 가만 있어봐. 4시쯤 아들놈이 밭에서 돌아오면 데려갈 수 있을 텐데. 먹구름도 걷혔고.” 꺼졌던 희망이 되살아났다. 반텃찻에서 점심을 먹고 있던 3시 무렵 아들이 돌아왔다는 전화를 받았다. 부리나케 롬끌라오로 달려왔다. 듬직한 넷째 아들 피탁(25)이 경운기 시동을 건 채 기다린다. 이어 첼로가 배낭을 메고 나온다. “오, 같이 가시려고?” “혼자 보낼 수야 없지.” 짧은 한 마디에 동지애를 느낀다. 1428만 보는 게 아니라 역사를 모시고 가는 대행운을 얻었다.


“산길 14㎞인데, 이 경운기로 한 30분 걸려. 도시 사람들 걸음으론 세 시간쯤. 나야 늘 다니는 길이니 두 시간이면 되지만.” 첼로 말을 들으며 경운기 꽁무니에 매달렸다. 지금껏 40여개 넘는 전선을 취재하면서 20시간 걸어도 보았고, 비행기니 헬리콥터니 탱크니 배니 자동차니 말이니 낙타까지 타고 들락거렸지만 경운기는 처음이다. 땡볕이 쪼아댄다. 시꺼먼 매연이 얼굴로 달려든다. 엔진 소리가 귀를 때린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바로 등산이다. 경사 30~40도는 될법한 산길, 그것도 빗물에 30~50㎝나 파인 골을 피해 달리는 경운기 여행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5분 뒤 온 몸이 뒤틀리고, 10분이 지나자 밧줄을 잡은 손바닥엔 물집이 잡힌다. 비무장지대가 주는 긴장감 따위는 느낄 새도 없다. 바람은 딱 하나다. 부디 이 길이 빨리 끝나기만을. 다짐도 딱 하나다. 다시는 경운기를 타고 이 산을 오르지 않겠노라.


▲ 가운데 나무 오른쪽 산이 1987~1988년 타이-라오스 국경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던 1428고지다. 사진에 보이는 지역이 모두 비무장지대다. 이 사진은 타이 쪽 비무장지대 105고지에서 찍었다. /정문태 제공  


한반도 DMZ는 안녕하신가?

마침내 산꼭대기 바로 밑에 경운기가 섰다. “여기는 105고지야. 저 앞이 1428고지고.” 첼로는 2㎞쯤 떨어진 앞산을 가리킨다. “1970년대 공산당 무장투쟁 시절 이 산악을 타고 다녔지. 다 지난 이야기지만, 세상은 아무도 몰라. 짓누르면 또 일어날 수도 있어. 미안해. 후손들한테 좋은 세상을 못 물려줘서.” 옛날을 돌아보는 그이 얼굴에 회한이 묻어난다. 한참 말이 없던 첼로는 해묵은 참호로 이끈다. “이게 1988년 두 나라 국경전쟁 때 타이군 요새였지. 여기 105와 1428 사이가 최대 격전지였어. 라오스군이 여기를 치고 롬끌라오까지 점령했던 거야. 마을 사람들은 9㎞ 후방으로 피난 가서 여섯 달 동안 지냈고.” 첼로 입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현대사가 줄줄 흘러나온다. “1428 꼭대기 왼쪽에 나무 없는 황토가 보이지? 타이 전투기 F-4 두 대가 격추당한 곳이야.” 역사의 현장에 서서 살아있는 역사를 배운다. 더할 수 없는 기쁨이다.


“오다 보니 타이 쪽 비무장지대 곳곳에 밭을 일궈 놓았던데?” “마을 사람들이 먹고 살아야 하니 조금씩 안쪽으로 들어온 거지. 두 나라 법이야 어떻든, 본디 땅은 농민들 권리니까.” 첼로는 호탕하게 웃었다. “라오스에서 나고 타이에서 사는 국경 사람들은 두 나라 다툼에 심사가 복잡할 텐데?” “우린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전쟁 안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으면.” 듣고 보니 그렇다. 국경에 걸쳐 사는 사람들한테 국적이니 국제법 따위는 생존 다음 문제일 뿐이다. 여기 영토주권 문제를 풀어갈 실마리가 보인다. 그동안 두 나라가 롬끌라오를 놓고 전쟁도 해봤고, 수십 년 동안 숱한 협상도 해봤지만 결론은 늘 똑 같았다. ‘죽어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었다. 어차피 국가가 풀 수 없다면 이젠 비무장지대를 사람 중심의 평화지대로 바꿀 때가 됐다. 지금껏 두 나라 전략이란 것도 사실은 현상유지 정책이니 손해 볼 일도 없다. 평화지대로 바꾸면 두 나라 체면도 서고 국경 사람들도 자유롭게 오가면서 먹고 살 수 있다. 분쟁지에 세계 최초 평화지대 창설은 두 나라가 목매는 관광산업에도 그만이다.


105고지에 바람이 인다. 비가 오기 전에 산을 내려가야 한다. 105를 거쳐 1428로 갈 수 있는 날을 상상하며 발길을 돌린다. 휑한 가슴으로 쓸쓸함이 몰려든다. 남의 땅을 놓고 흥분한 내 꼴이 열없기만 하다. 한반도 비무장지대는 안녕하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