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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민속·역사

[新 禮記] 2. 어느 대기업 신입 사원의 눈물

잠용(潛蓉) 2018. 9. 17. 08:38

[새로 쓰는 우리 예절 新禮記(예기)]<2>어느 대기업 신입사원의 눈물
“외할머니가 키워주셨는데… 친할머니 발인만 지키라고요?”

동아일보ㅣ이지훈 기자ㅣ2018-04-02 03:00수정 2018-04-02 15:43



▲ 일하는 딸들을 위해 손주 육아에 나선 외할머니가 많아졌지만 여전히 기업들의 상조지원은 외가에 인색하다. /동아일보 DB


사장님께 한 말씀 드립니다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외할머니 손에 자라신 분들 많으시죠? 저도 그렇습니다. 올해 31세인 전 네 살 때부터 14세 때까지 10년을 대구 외할머니 댁에서 살았습니다. 외할머니는 엄마였습니다. 수저통을 두고 학교에 간 저를 위해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교문 앞까지 달려오시던 모습, 외할머니표 간식인 조청 찍은 찐 떡을 제 입에 넣어주시며 환히 웃으시던 모습…. 제가 기억하는 유년 시절의 모든 추억엔 늘 외할머니가 계십니다. 군대에 갔을 때도 여자친구에게 전화할 카드를 조금씩 아껴 매주 할머니께 전화했죠. 엄마보다 외할머니가 더 애틋한 존재였으니까요.


지난해 취업 삼수 끝에 지금의 회사에 입사했을 때 외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누구보다 기뻐하셨습니다. 아이고 우리 민석이, 맘고생 많았지!” 전 외할머니께 효도할 수 있게 해준 회사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 마음이 한순간에 푹 내려앉더군요. 회사가 ‘외조부모상은 상으로 치지 않는다’며 상조휴가를 줄 수 없다는 겁니다. 친조부모상에는 유급휴가 3일에 화환과 장례용품, 상조 인력과 조의금이 지원되지만 외할머니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친가는 큰아버지, 큰어머니 장례에조차 유급휴가가 나온다던데 외조부모 장례는 가볼 수조차 없다니 대체 말이 되나요. 전 간신히 이틀의 연차를 내 장례식장에 갔지만, 셋째 날 업무 때문에 복귀하란 연락을 받고 발인도 보지 못한 채 출근해야 했습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런 일은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 10대 그룹 중 6곳이 상조복지 제도에서 친가와 외가를 차별하고 있다.


현실과 동떨어진 상조정책

어린이집 등원 시간인 오전 8, 9시 무렵 전국의 주택가 인근 거리에는 직장에 간 엄마를 대신해 손자 손녀의 유모차를 미는 ‘할마’ ‘할빠’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지난해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 동향’에 따르면 매일 아침 손주의 유모차를 미는 전국의 할마 할빠 셋 중 둘이 ‘외조부모’다. ‘친정으로부터 육아 도움을 받는다’고 응답한 비율이 시댁보다 두 배나 많다.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 사는 5세 꼬마 영훈이에게도 ‘할머니’는 외할머니다. 직장에 다니는 엄마를 대신해 내내 영훈이를 키워준 사람이 외할머니이기 때문이다. 친할머니는? 그냥 ‘분당 할머니’다. 경기 성남시 분당에 사는 ‘그냥’ 할머니.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을 둔 직장맘 윤지영(가명·39) 씨네 집도 마찬가지다. 윤 씨는 “아이를 낳고 시댁에 육아 도움을 요청했더니 ‘육아는 네 몫이니 친정 부모에게 여쭤봐라’라고 말하더라”며 “시부모님이 늘 ‘우리 새끼 승준이(가명)’라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상 승준이를 지금까지 키운 건 친정 부모님”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외가를 더 가까운 가족으로 느끼는 한국 사회의 문화가 생긴 지 오래지만 기업들의 상조 정책은 여전히 친가 위주를 못 벗어나고 있다. 동아일보가 국내 10대 그룹의 상조 지원 현황을 알아본 결과 이 중 6곳이 휴가일수, 조의금, 지원 물품 등에서 친가와 외가를 차별하고 있었다. 현대자동차는 친조부모상에는 5일의 상조휴가와 장례용품을 지원했지만 외조부모상에는 2일의 휴가만 지원했다. SK이노베이션과 GS는 친조부모상에 3일의 휴가와 조의금을 지급하는 반면, 외조부모상에는 딱 하루의 휴가만 줬다. LG화학과 롯데제과는 친조부모상에 상조휴가 3일, 조의금, 장례용품을 지급하면서도 외조부모상에는 아무것도 지원하지 않았다.


조사 범위를 넓혀도 상황은 비슷했다. 국내 100여 개 대·중견기업의 상조 지원 대행업체 A사에 따르면 고객사인 사업장 1005곳 중 조부모상과 외조부모상을 ‘차별 없이’ 모두 지원하는 곳은 10%도 안 된다. “친가는 할머니 할아버지 구분 없이 공평하게 지원하는데 유독 외가 쪽을 지원할 때는 할머니랑 할아버지를 다시 구분해서 차별을 두는 기업도 있어요. 외조부상은 지원해도 외조모상은 지원하지 않는 거죠. 요즘 사람들 마음속에는 외할머니가 최고인데 기업 상조 지원에서는 외할머니가 맨 꼴찌예요.”


이유가 뭘까. B사 인사팀 관계자는 “외손주는 상주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차등을 둔 걸로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관계자조차 “요즘같이 비혼자가 많고 자녀가 한둘인 시대에는 외손주가 상주가 되는 경우도 많다. 고칠 필요가 있는 제도”라고 말했다.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업들이 친가와 외가를 차별하는 건 친족 제도의 잔재를 그대로 유지해 왔기 때문”이라며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된 만큼 기업들의 문화적 사고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친-외가 제도적 차별 안될 말… 이번 기회에 바로잡자”
동아일보ㅣ이지훈 기자ㅣ2018-04-04 03:00수정 2018-04-04 14:29



4월 2일자 A3면.


[새로 쓰는 우리 예절 新禮記(예기)] 동아일보 시리즈에 뜨거운 호응 쏟아져

동아일보 창간기획으로 2일자 A3면에 보도된 ‘새로 쓰는 우리 예절 신예기(新禮記) 2회―어느 대기업 신입사원의 눈물’은 온·오프라인에서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이 기사의 조회수는 105만 건(3일 오후 3시 현재), 네이버에서 95만 건에 달했다. 댓글도 수천 건이 달렸다. 기사 내용처럼 기업의 상조복지 제도 등 우리 사회에서 친가와 외가를 차별하는 행태를 지적하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경기 고양시에 사는 자영업자 한모 씨(49)는 기자에게 이메일을 보내왔다. 한 씨는 “우리 아들도 장모님이 5년 넘게 키워주셨다. 인터넷에서 남녀차별이 심하다는 내용을 볼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 기사를 보고 우리 사회의 남녀차별이 정말 뿌리 깊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기사에 달린 댓글에는 “7년째 네 살, 일곱 살 손주를 키우는 외할머니인데 기사를 보니 씁쓸하다. 호주제 폐지가 10년도 넘었는데 아직도 이런 차별이 존재하는지 몰랐다(kimy****)”거나 “외가가 가까운 건 50년, 100년도 더 된 일이다. 대한민국은 아직 갈 길이 멀다(qotk****)”는 지적이 쏟아졌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는 친가와 외가의 차별적 관행을 시정해 달라는 청원이 3일까지 6건 올라왔다. 청원을 올린 한 시민은 “전부터 부조리하다고 느꼈다. 이번 기회에 잘못된 관습을 바로잡았으면 한다”고 밝혔다.
 
초중고에서도 친조부모와 외조부모가 상을 당하면 출석 인정 일수를 차별한다는 댓글이 달렸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전국 초중고는 공통적으로 친가와 외가를 가리지 않고 조부모상 시 5일간 결석해도 출석으로 인정한다. 현재 친조부모상과 외조부모상의 휴가 일수를 차별하는 기업들은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제도 개선에는 시간이 걸린다고 밝혔다. 외조부모상 시 휴가를 주지 않는 A사 관계자는 “내부에서 논의가 있었다. 향후 개정해야 하는 규정이지만 당장 바꾸려면 절차상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임금 외 복리후생에서 남녀를 차별한 사업주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기업의 상조복지 제도가 여기에 해당하는지를 두고 유권해석을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당신이 제안하는 이 시대의 ‘신예기’는 무엇인가요. newmanner@donga.com으로 여러분이 느낀 불합리한 예법을 제보해 주세요.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