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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지하 만리장성과 유엔데이

잠용(潛蓉) 2019. 12. 18. 09:23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지하 만리장성과 유엔데이

경향신문ㅣ2011.10.19 21:01


▲ 지하만리장성과 유엔데이


‘승냥이와 이리가 침략해오면(若是那豺狼來了),엽총으로 맞이할 것이네(迎接的有獵槍).’
지난 1월19일 백악관. 미국을 방문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 주석을 위한 국빈 만찬이 열렸다. 중국의 천

재 피아니스트 랑랑(郞朗·28)의 손끝에서 웅장한 서사시가 연주됐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하지만 이

곡의 정체를 알았다면…. 만찬장 분위기는 싸늘했을 것이다. 1956년 중국에서 개봉된 영화 <상감령(上甘嶺)>

의 주제가(‘나의 조국·我的祖國’)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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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감령은 강원 철원의 오성산(해발 1062m) 동북방에 이어진 고지군(群)을 일컫는 지명이다. 영화 <상감령>

은 59년 전 이맘때인 1952년 10월14일부터 42일간의 싸움에서 중국군이 거둔 승리를 그린 영화이다. ‘나의 조

국’ 가사의 ‘승냥이와 이리(豺狼)’는 ‘미군’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데 랑랑이 ‘미제’의 심장부인 백악관에서

이 곡을 연주한 것이다. 중국인들은 ‘표정관리’에 나섰다. “랑랑이 ‘피아노 외교’로 미국을 한방 먹였대’ ”라고

속삭이면서…. 중국은 ‘상감령 전투’를 “지원군이 조선전쟁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라고 선전한다. 항일투쟁과

국공내전을 막 끝낸 신생국으로서는 더할 수 없는 승전보였다. 

  
그런데 이 ‘상감령’ 전투의 승패는 ‘지하만리장성’이 갈랐다. 중국군은 1951년 8월부터 기막힌 전법을 펼친다.

임진강 하구부터 강원도 동쪽 끝 간성까지…. 전체길이 250~287㎞(폭 20~30㎞)에 이르는 갱도를 지하에 건설

한 것이다. 갱도(9519개)와 엄·채·교통호(3683㎞) 등을 합하면 총연장 4000㎞에 이르는 거대한 단일요새였다.

중국은 ‘지하만리장성’이라 했다. 2층 구조인 지하장성은 식당과 강당, 병원까지 갖추었다. 마오쩌둥(毛澤東)

은 “어떤 사단도 3개월의 식량을 보급할 지하공간을 갖췄다”고 자랑했다.


특히 상감령 일대에는 총연장 8.8㎞에 이르는 갱도를 구축했다. 미국 군사전문가들도 “원자폭탄을 터뜨렸다 해도 점령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유엔군은 이 지하장성 때문에 모든 전선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경기 연천 미산면 동이리에는 유엔군의 시신을 처리한 화장장 터가 남아 있다(사진). 1952년엔 하루가 멀다하고 시신이 밀려들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유엔데이(10월24일)’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산 지 오래됐다. 공휴일에서 제외된 탓일까. 유엔군만이 아니다. 이 가을에 아군이든 적군이든 이역만리에서 낙엽처럼 진 젊은 넋을 기려본다.


<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