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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신라 명품族의 못말리는 사치 행각

잠용(潛蓉) 2019. 12. 19. 07:37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신라 명품族의 못말리는 사치 행각

경향신문ㅣ2012.03.28 14:29 수정 : 2012.03.28 14:40

▲ 신라 명품족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명품빗. 장식용으로 머리에 꽂았다.보르네오 등에서 잡히는 거북등껍질인 대모로 만들었다. 청옥을 감입한 꽃무늬 금장식을 매달았다. 손잡이 부분은 금사로 각종 꽃무늬를 새겼다. /호암미술관 소장


“백성들이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즐긴다. 오로지 외국산 물건의 진기함을 숭상하고 국산은 수준이 낮다고 혐오한다(民競奢華 只尙異物之珍寄 却嫌土産之鄙野). 예의가 무시됐고, 풍속이 쇠퇴하여 없어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843년, 왕(신라 흥덕왕)이 단단히 화가 났다. 해외 명품만을 좇고 국산을 무시하는 등 사치향락이 빠진 세태를 한탄한 것이다. 그러면서 서슬퍼런 법령을 내린다.

“옛 법에 따라 다시 교시를 내린다. 만약 죄를 저지르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을 것이다.”(<삼국사기> ‘잡지’)


비취모, 공작미, 슬슬전… 신라 명품 패션의 끝은?

흥덕왕이 신분에 따라 정해놓은 규제는 촘촘하기만 하다. 우선 지금의 패션에 해당하는 <색복> 규정을 보자.

“~진골 여자의 목도리(표)와 6두품 여인들의 허리띠는 ~금은실(金銀絲)·공작미(孔雀尾)·비취모(翡翠毛)을 쓰지마라. 빗(梳)과 관은 슬슬전(瑟瑟鈿)과 대모(玳瑁)로 장식하지 마라.” 목도리는 어깨에 걸치는 천이다. 요즘으로 치면 숄(shawl) 같은 것이다. 신라의 귀족여인들이 이런 ‘명품 숄’(진골)과 ‘명품 허리띠’(6두품 이상)에 열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흥덕왕이 혀를 끌끌 차며 엄금한 것이다.


‘비취모’는 캄보디아(진랍국·眞臘國) 등에서나 겨우 잡히는 비취조, 즉 물총새(Kingfisher)의 털이었다. 남송대(13세기)의 지리서인 <제번지(諸蕃志)>의 ‘비취조’를 보자.

“지극히 사치스러운 자들은 진귀한 비취털로 색을 맞추어 무늬를 넣고 두툼하게 짠 부드러운 요로 만들어 사용했다. 해마다 조정에서 엄격히 사용을 금했지만 귀족들은 몰래 사용했다. 상인들은 옷소매나 사타구니 속에 넣어 밀수했다.”



▲ 불국사에서 나온 명품 원목 ‘침향’의 조각들. 수마트라 등에서 난 것이었다. 요즘의 인도네시아산 고급 원목의 원조이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13세기 대 중국에서 ‘호화·사치품’으로 규정돼 밀수로 통용될만큼 중국 명품족의 사랑을 받았던 비취모…. 그것이 400년 전에 신라 ‘명품족’의 넋을 빼앗았다는 것이 된다. ‘공작미’는 인도와 아프리카, 동남아 일대에서 서생하는 공작새의 꼬리를 뜻한다. ‘슬슬전’도 마찬가지였다. ‘슬슬’은 이란어계인 ‘세세(Se-se)’이며 에메랄드를 일컫는다. <신당서> ‘고선지전’은 “고선지 장군이 석국(石國·타슈겐트)에서 슬슬 10여석을 획득했다”고 기록했다. ‘전(鈿)’은 꽃 모양의 금이나 광채나는 자개 조각을 박아서 장식하는 것이다. 결국 슬슬전은 수많은 에메랄드를 알알이 상감해서 장식한 명품이었다. ‘대모’는 거북등껍질이다. 보르네오(渤泥)와 필리핀 군도, 자바(도婆) 등에서 포획한 사치품이었다.  

▲ 경북 칠곡 송림사 전탑 사리기의 페르시아계 유리잔. 서역에서 수입된 제품이다. /이한상 교수 제공

명품으로 도배한 신라의 마차
신라인들은 지금으로 치면 자가용에 속하는 <거기(車騎)>의 치장에도 열을 올렸다.
“진골은 수레의 재목(車材)은 자단(紫檀)과 침향(침香)을 쓰지 못한다. 대모(玳瑁)를 붙일 수 없다. 6두품 여자는 물론 5·4두품, 아니 백성여자들까지 자단과 침향을 말안장틀로 사용하지 못한다. 금·은으로 장식하지도 못한다.”


당시의 수레는 두가지 종류가 있었다. 덮개가 없는 무개차와, 양쪽 벽면을 나무판으로 막고, 앞 뒤에 휘장을, 지붕을 천으로 덮는 밀페형의 유개차였다. 흥덕왕이 규제한 수레는 아마도 후자인 유개차였던 것 같다. 당시 진골들은 경쟁적으로 외국산 자재로 수레를 꾸민 것이다. 진골들 뿐이 아니었다. 6·5·4두품은 물론 가장 하층민인 백성여자들도 ‘말안장틀’을 명품으로 장식했다.

 


▲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 나온 토용. 턱수염을 한 전형적인 서역인의 모습이다. 경주에는 이런 서역인 상인들이 무시로 드나들었다. /국립경주박물관


자단은 유향목재이다. 인도와 스리랑카 원산의 상록활엽교목이다. 재목이 향기롭고 견고하며 속은 암홍자색을 띠어 아름다워 건축 및 가구 등에 쓰인다. 침향의 주산지는 베트남(점성국·占城國)과 수마트라였다. 나무를 베어 몇 년 후 껍질을 썩여 없앤다. 그러면 견고하고 검은 심재가 남아 물에 가라앉는데 이를 목재로 쓴다. 이것이 침향이다.


흥덕왕의 규제내용을 종합해보면 신라인들의 ‘가없는 마차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귀족들은 물론 일반백성, 아니 백성여자들까지…. 흡사 고급승용차를 선호하고, 차의 치장에 열을 올리는 요즘 사람들의 심리와 같은 것이 아닐까? 평민 여자들까지 다투어 말안장만큼은 금은옥을 장식하고, 고급외제목재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자 보다못한 왕이 나서서 ‘외제명품에만 혈안이 돼있다’고 호통을 치면서 규제법을 만든 것이다.


신라 때도 유행한 인도네시아산 원목가구
지금으로 치면 주택인 <옥사(屋舍)>와 생활용품인 <기용(器用)>도 사치향락의 상징이었다.
“진골의 집은 길이·너비가 24자를 넘지 못한다. 당와(唐瓦)를 덮지 않고 금·은 등으로 장식하지 않는다. 진골은 물론 6두품까지 침대를 대모·침향으로 장식하지 않는다.”

침대까지 외제 ‘대모와 침향’으로 장식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침향은 지금으로 치면 동남아산 티크재 원목 정도로 볼 수 있다. 최고급 원목가구에 대한 신라인들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는 풍조가 아닌가?

또 진골과 6두품은 물론 일반백성들까지 ‘집을 금은으로 장식하지 마라’고 규정했다. 12세기 아랍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신라에서는 개(犬)의 목걸이도 황금이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황금이 흔했다는 얘기다.

 

▲ 당나라제 삼채 뼈단지. 경주 조양동에서 나왔다. /국립경주박물관


생활용품(기용)도 외제품으로 가득했다.
“6두품에서 일반백성들까지 금·은 도금한 그릇과, 호랑이 가죽과 구수와 탑등을 쓰지마라.”

금은 그릇과 호랑이 가죽은 물론 구수와 탑등까지…. 구수와 탑등은 양모를 둘다 주성분으로 잡모를 섞어짠 페르시아(波斯)산 직물이다.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평상·榻)에 깐다. 구수 보다는 탑등이 좀더 섬세한 것이 특징이다. 신라의 일반백성들이 페르시아의 직물(구수와 탑등)을 깐 걸상까지 수입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1966년 불국사 다보탑에서 발견된 유향(乳香)도 아랍산이다. 아라비아 반도 남단의 하드라마우트(Hahdramaut) 연해에서 생산되는 향료이다. <제번지>는 “유황은 수마트라 파램방(Palembang)에 집화되어 중국으로 수출됐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을 신라가 수입한 것이다.

다만 이같은 통일신라시대 화려한 유물들이 드문 것이 유감이다.

이한상 교수(대전대)는 “신라인들은 금관 등 부장품을 한껏 넣은 5세기와 달리 6세기부터는 무덤형태도 작아지고, 부장품의 양도 줄어든다”면서 “국력이 절정기였던 통일신라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9년만에 무너진 태평성대?

각설하고 흥덕왕이 신라의 사치향락풍조를 개탄하던 8세기 이후 신라는 외형상 최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해외 명품이 당나라를 통해 서역 상인들과 함께 경주로 들어왔다. 경주는 완전한 국제도시가 되었다. 경주의 귀족들은 앞다퉈 명품을 사들였다. 차츰 일반백성들에게까지 사치향락의 풍조가 번졌다.

경주 괘릉(원성왕릉?)의 외호석물인 무인상과 흥덕왕릉의 외호석상은 서역인이 분명하다. 메부리코에 턱수염을 한 소그드인이…. 경주 용강동 고분의 도용과 서악동 고분의 신장상도 마찬가지이다.


880년 9월9일, 헌강왕이 월상루(月上樓)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민공에게 말했다.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인가.(覆屋以瓦 不以茅 炊飯以炭 不以薪 有是耶)”(헌강왕)


“이를 말이겠사옵니까. 모두 성덕의 소치이십니다.”(민공)

“하하! 모두 경들이 도와준 결과이지 짐(朕)이 무슨 덕이 있겠는가?”(헌강왕)

<삼국사기> ‘헌강왕조’에 생생하게 묘사된 9세기 말 경주의 풍경이다. 왕은 태평성대임을 자화자찬하고…. 신하들은 ‘지당하신 말씀’이라며 화답한다. <삼국유사> ‘진한조’를 본다.


“신라의 전성기에는 경중(京中)에 17만8936호가 있고, ~35개(실제는 39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대목이 있다. ‘신라의 전성기’와 ‘금입택’이라는 대목이다. 880년 월상루에 올라 태평성대를 자랑한 헌강왕은 불과 6년 뒤 죽는다. 그런데 2년 뒤 왕위에 오른 진성여왕(887~897) 때 천하에 난리가 난다. 원종과 애노가 난을 일으킨다. 신라는 그때부터 후삼국시대로 접어든다. 헌강왕이 치세를 자랑한지 불과 9년만의 일이다.


흥덕왕의 헛된 몸부림
그렇다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신라가 단 9년만에 급전직하한 것일까. 아니었다. 망조를 느끼지 못했을 뿐…. 이미 100여년 전인 혜공왕(재위 765~780)부터 진골귀족 사이에 치열한 왕위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후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등장했다. 그 사이 귀족들은 저마다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삼국유사>에 나온 ‘금입택’은 ’금을 입힌 집’ 혹은 ‘금이 들어가는 집’이 39곳이나 됐다는 이야기이다. 39곳에는 김유신의 종갓집도 포함돼 있다.


오죽했으면 흥덕왕이 “진골·6두품은 물론 일반백성들의 집까지 금·은으로 장식하지 마라”는 법령을 공표했을까. ‘금테 두른 집이 많았다’는 뜻일 수 있다. 아니면 명문귀족들의 집에 금이 수없이 들어갔다는 것, 즉 금 뇌물이 엄청났음을 말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 흥덕왕의 시대부터 이미 250여년 전 기록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사람들이 공의 집을 수망택이라 했다. 금이 마치 홍수처럼 들어갔다.(謂基金入望如洪水也)”(<화랑세기> ‘17세 염장공조’)

‘수망택’은 바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39개 금입택 가운데 하나이다. <신당서> ‘동이열전·신라조’를 보자.

“(신라의) 재상가는 녹이 끊이지 않는다. 노동(奴童)이 3000명이다. 갑병(甲兵)과 소·말·돼지의 숫자도 그 수와 비슷하다.”

세상에! 노복이 3000명이 됐고, 갑옷을 입은 사병과 가축의 숫자가 각각 3000명과 3000마리나 됐다는 소리다.


그랬다. 헌강왕이 흐뭇하게 바라본 경주의 화려한 외형은 이미 망조의 기운으로 치장되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는 사치향락의 풍조에 푹 젖어들었다. 스스로를 통제할 힘이 없었다. 1000년 사직…. 하기야 무얼 깨닫고 새출발하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가 아닌가?

“백성들이 앞다퉈 사치·호화를 즐긴다. 외국산 물건을 숭상하고 국산은 수준이 낮다고 혐오한다.”(<삼국사기> ‘잡지’)


843년, 흥덕왕이 ‘버럭’ 화를 냈다. 해외 명품만을 좇는 사치·향락의 세태를 한탄하면서 서슬퍼런 법령을 공표한다. 패션, 즉 ‘색복’ 규정을 보자.

“~진골 여자의 목도리와 6두품 여인의 허리띠는 금은실·공작미(孔雀尾)·비취모(翡翠毛)를 쓰지 마라. 빗과 관은 슬슬전(瑟瑟鈿)과 대모(玳瑁)로 하지 마라.”


목도리는 ‘숄(shawl)’이다. ‘명품 숄’(진골)과 ‘명품 허리띠’(6두품 이상)가 귀족 여인들 사이에서 만연한 것이다. ‘비취모’는 캄보디아(眞臘國)에서도 진귀한 물총새(Kingfisher)의 털이었다. 중국에서도 옷소매나 사타구니 속에 넣어 밀수한 금수품이었다. ‘공작미’는 인도와 아프리카산인 공작새의 꼬리다. ‘슬슬전’은 이란산 에메랄드를 빗과 관에 알알이 상감한 명품이다. ‘대모’는 보르네오와 필리핀 군도 등에서 포획한 거북등껍데기다.(사진은 대모에 보석을 박은 통일신라 상감빗)


요즘의 자가용인 ‘거기(車騎)’와 주택인 ‘옥사(屋舍)’도 명품으로 도배했다. 흥덕왕은 “침대와 수레, 말안장틀 등을 자단(紫檀)과 침향(침香) 등으로 장식하지 마라”고 명했다. 자단은 인도와 스리랑카(실론)산의 원목이었다. 향기롭고 견고한 게 특징이다. 침향의 주산지는 베트남(占城國)과 수마트라였다. 단단한 심재가 유명하다. 지금으로 치면 인도네시아산 티크재 원목?


생활용품도 외제와 사치품으로 가득했다. 오죽했으면 흥덕왕이 “금·은 그릇과 구수·탑등(페르시아산 고급 직물을 깐 평상)을 쓰지 마라”는 명을 내렸을까. 문제는 이것이 귀족이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 내린 명령이었다는 점이다. 사치·향락풍조가 평민들에게까지 뿌리깊게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헌강왕은 880년 “백성들이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짓는다(覆屋以瓦 不以茅 炊飯以炭 不以薪)”고 자랑했다(<삼국사기> ‘헌강왕조’). 불과 55년 후 1000년 사직을 잃는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그 사이 귀족들은 저마다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재상가에 노동(奴童)이 3000명이다. 갑옷 입은 사병(私兵)과 가축들의 숫자도 그 수와 비슷하다.”(<신당서> ‘신라전’)

그랬다. 헌강왕이 바라본 경주는 이미 사치·향락에 젖어 망조의 기운으로 한껏 치장되고 있었다. 하기야 무얼 깨닫고 새출발하기에 1000년은 너무 늙은 나이였을까.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lk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