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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함께 즐겨보자” 흉노왕의 연애편지

잠용(潛蓉) 2019. 12. 19. 17:24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함께 즐겨보자” 흉노왕의 연애편지

경향신문ㅣ2012.04.04 15:20 수정 : 2012.04.04 15:32



▲ 흉노의 귀족무덤인 골모드 고분에서 출토된 황금장식들. 흉노인은 예로부터 문화교류의 전달자로 그 역할이 컸다. /강인욱 교수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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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홀로 됐고, 나도 혼자이고…. 뭐 둘 다 즐거운 일도 없고…. 어떠신가요. 있는 걸로 없는 것을 바꿔보심이….”(陛下獨立 孤분獨居 兩主不樂 無以自娛 願以所有 易其所無)

한나라의 ‘사실상’ 황제인 여태후(?~기원전 180)가 한 통의 외교서한을 받는다. 흉노의 묵돌 선우(鮮于·왕)가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서신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당신도, 나도 홀로 됐으니 함께 만나 즐겨보자”는 것이었다.


‘함께 즐겨보자’ 흉노왕의 연애편지

도저히 외교서한이라 볼 수 없는 사적인 연애편지였다. 아니 지금으로 치면 성적 모욕감을 한껏 준 스토커의 쪽지에 불과했다. 사실 여태후가 누구인가. 한나라를 세운 유방(고조)의 부인이다. 남편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여걸이었다.
기원전 195년에 남편이 죽자, 아들(효혜제·기원전 195~188)을 대신해 사실상의 황제 노릇을 했다. 오죽했으면 사마천이 역대 황제의 전기인 <사기> ‘본기’에 ‘여태후’를 올렸을까. 사마천은 여태후를 황제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사실 그런 대접을 받을 만 했다.

“모든 정치가 안방에서 이뤄졌지만 천하가 태평하고 안락했다. 또 백성들이 농삿일에 힘쓰니 의식이 나날이 풍족해졌다.”(<사기> ‘여태후 본기’)


 

▲ 흉노 무덤에서 발굴된 마차의 부속품들. 기마전략은 흉노를 강대국으로 키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강인욱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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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여태후에게 흉노의 선우(왕)인 묵돌이 연애편지나 다름없는 서한을 보낸 것이다. 여태후는 부들부들 떨었다.

‘묵돌이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여태후는 장수들을 총동원, 비상회의를 열었다. 상장군 번쾌가 나섰다.

“저에게 10만 병사만 주면 저 흉노를 가로·세로로 짓밟아 쓸어버리겠나이다.”


서슬퍼런 여태후의 기세에 편승한 발언이었다. 다른 장수들도 동의했다. 그러나 중랑장 계포가 나섰다.

“저, 번쾌의 목을 당장 쳐야 합니다. 고조(유방)께서도 군사 40만명을 동원하고도 ‘평성의 치(恥)’를 당했는데 어떻게 10만명으로 흉노의 한복판을 짓밟는다는 말입니까.”


계포의 직소(直訴)가 이어진다.

“진나라 시황제도 흉노 정벌을 일삼았기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 망했습니다. 지금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 번쾌가 아부를 떨어 천하를 흔들려 하고 있습니다.”

 

▲ 골모드 고분에서 출토된 로만 글라스. 동서교역품이다. /강인욱 교수 제공


회의의 분위기는 계포의 한마디로 급반전된다. 여태후도 모욕감을 애써 감춘채 흉노정벌의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아니 굴욕적인 답장까지 써서 묵돌의 기분을 맞췄다.

“제가 나이가 들어 기력도 없고, 걸음걸이도 시원치 않네요. 감히 선우님을 뵐 수 없어요. 대신 공물을 보낼게요.” 계포와 여태후의 판단은 어쩔 수 없었다. 당대 흉노는 진과 한나라를 능가하는 대국이었으니까…. 그렇게 능욕을 당해도 어쩌지 못했던 것이다.

 


▲ 기원후 1세기 북흉노 귀족무덤인 골모드에서 확인된 한나라제 옥장식. 적대적인 관계속에서도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강인욱 교수 제공

통일진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다

원래 흉노의 선조들은 외몽골에서 떠돌던 유목인들이었다. 그러다 기원전 7세기부터 재빨리 스키타이의 기마전법을 습득한다. 주변의 종족들을 병합시키면서 정치세력을 결집시킨다. 흉노의 기마전법은 중원의 나라인 진·조·연나라를 충격에 빠뜨린다.
세나라는 변방에 장성을 쌓아 흉노의 침입을 막으려 한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천하를 통일한(기원전 221) 시황제가 어느 날 점을 쳤다. 그런데 “‘호(胡)’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점궤가 나왔다. 시황제는 ‘호(胡)를 흉노’라 여겼다. 그러나 실은 시황제의 아들인 ‘호해(胡亥)’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진나라는 2세 황제인 호해 때문에 단 15년 만에 나라를 잃었으니까….


▲ 흉노인들이 들고다니면서 음식을 해먹던 청동솥(동복). /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호(胡)=흉노’로 철석같이 믿은 시황제는 몽염에게 30만 대군을 주어 흉노정벌에 나섰다. 그런 뒤 수십만명을 동원해 만리장성 수축에 나섰다. 변방수비에도 백성들을 괴롭혔다. 민심이 시황제를 떠났다. 결국 국경수비대로 끌려가던 진섭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켰다. 천하는 다시 어지러워졌다. “진나라가 흉노정벌에 힘쓰는 바람에 나라가 망했다”는 계포의 언급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한나라 유방이 항우와의 건곤일척에서 승리를 거두고 천하를 얻는다.(기원전 202) 그 사이 북방의 흉노는 중원이 어지러운 틈을 타 강력한 힘을 키웠다. 두만 선우(?~기원전 209)에 이어 정권을 잡은 묵돌 선우(기원전 209~174)가 흉노를 강대국으로 키웠다.


무릎 꿇은 중국, ‘동생이 되겠나이다.’ 

기원전 202년 한 겨울. 묵돌 선우가 파죽지세로 남하한다. 역시 천하통일로 기세가 오른 한 고조는 40만 병력을 동원, 친정에 나선다. 하지만 맹추위와 눈보라에 한나라군의 20~30%가 동상에 걸린다. 여기에 묵돌 선우의 계략이 빛났다. 묵돌은 정예부대를 숨겨놓고는 약졸들을 내세워 한나라군을 계속 유인했다. 묵돌의 전략에 속은 한나라군은 32만 보병으로 맹추격전을 벌인다. 한 고조는 전군의 선두에 섰다. 한나라군이 평성(산시성 다둥시 동북쪽)에 이르렀다.



▲ 흉노에서 발견된 ㄱ자형 고구려 혹은 옥저계의 온돌. 남흉노와의 대립을 위해 정착집단을 건설하기 위해 고구려 혹은 옥저의 온돌기술을 도입했다. /강인욱 교수 제공


그때서야 묵돌이 반격에 나섰다, 40만 정예기병을 동원, 고조가 이끄는 한나라군을 백등산 위로 몰아넣고 포위했다. 포위는 일주일간이나 계속됐다. 보급이 끊겨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다. 그 때 기사회생의 묘책이 나왔다. 묵돌의 연지(閼氏·왕비)에게 밀사를 파견한 것이다. 후한 선물과 함께…. 밀사가 속삭였다.

“한나라엔 미인들이 많아요. 만일 당신 남편(묵돌)이 한나라를 정복한다면 아마 한나라 여자들에게 흠뻑 빠질 겁니다. 그럼 당신은 폐비가 될 것 같은데요.”

그 말에 위기감을 느낀 연지는 남편을 조르기 시작했다.

“두 나라 임금이 서로 괴롭히면 안돼요. 그리고 한나라 땅을 차지해도 거기서 살 수는 없잖아요?”


마음이 약해진 묵돌은 포위망 일부를 풀었고, 한고조는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중국역사가 ‘평성의 치(恥)’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 엄청난 치욕이 이어졌다. 한나라가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3가지 조항을 보면 굴욕 그 자체다.

“(1)한나라 공주를 선우의 연지로 보내고, (2)해마다 일정량의 무명과 비단, 술, 쌀 등을 바치며, (3)형제의 맹약을 맺는다.”


다만 자존심 때문에 차마 공주를 보낼 수는 없었다. 종실 여인을 공주라 하여 속여 보냈다.

천하의 한나라가 오랑캐인 흉노 왕에게 종실여인과 조공을 바치는 것도 모자라 형제의 연, 아니 사실상 동생이 되기를 약속한 것이다. 묵돌이 여태후에게 ‘우리 같이 살아볼까나’하는 어투의 연애편지를 보낼 정도로….

 


▲ 당나라로 이주한 뒤 사망한(864년) 신라인 김씨부인의 묘비명. 조상이 흉노인 김일제였음을 분명하게 기록했다. /권덕영 교수(부산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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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불면 확 쓸어버린다”

흉노는 이후 누란과 오손, 호계 등 26개 인접국까지 모조리 병합하면서 더욱 기세를 떨쳤다. 묵돌의 뒤를 이은 노상계죽 선우(재위 기원전 174~160)때의 일이다. 한나라가 흉노에 보내는 국서는 1척1촌의 목간을 사용했다. 그런데 흉노는 1척2촌의 목간을 썼다. 도장과 봉투도 더 크게 했다. 목간에는 이렇게 썼다.
“나는 하늘이 세운 흉노 대선우(天所立匈奴大單于)다. 천지가 생겨난 곳, 해와 달이 머무는 곳의 흉노 대선우(天地所生日月所置匈奴大單于)가 삼가 한 황제에게 묻노니 안녕하신가?”


거만하기 이를 때가 없었다. 흉노의 위상이 한나라보다 한 수위라고 한 것이다. 이같은 도발에도 한나라는 꿈쩍도 못했다. 언젠가는 한나라 사신이 흉노의 풍습을 비아냥댄 일이 있었다.

“흉노에서는 노인을 천대한다지요? 또 아비와 아들이 같은 천막에 살며, 아버지가 죽으면 자식이 계모를 아내로 하고, 형제가 죽으면 남은 형과 동생이 죽은 형제의 아내를 취한다지요? 조정에 예절도 없다지요?”


그러자 흉노의 충신 중항열(한나라 망명객)이 반박한다.
“흉노는 알다시피 전투를 큰 일로 하는 나라이다. 그래서 건장한 이들을 우대하는 것이다. 그래야 나라를 보전할 수 있으니까. 또 부자형제가 죽으면 남은 사람이 그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대가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중항열이 더 쏘아붙인다.
“중국은 겉치레가 심하다. 충성이나 믿음없이 예의를 강요하기 때문에 위아래가 원한으로 맺어있기 일쑤다. 궁실의 아름다움만 좇기에 헛된 노력들을 쏟는다. 겉만 화려하고 실속도 없는데 예의는 무슨 말라 비틀어진 예의냐.”


중국 사신이 더 대꾸를 하려 하자 중항열은 쐐기를 박는다.
“사신은 듣거라. 너희 한나라는 해마다 보내기로 한 비단, 무명, 쌀, 술을 차질없이 보내주기만 해라. 쓸데없는 말 지껄이지 말고…. 만약 나쁜 물건을 보낸다면 각오해라. 곡식이 익는 가을을 기다렸다가 기마병으로 농작물을 확 짓밟아 놓을테니….”


훈족=흉노족?

이렇게 욱일승천하던 흉노의 기세는 한 무제(기원전 141~87)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꺾이고 만다. 한나라는 기원전 115~73년 사이 무위, 장액, 주천, 돈황에 이르는 이른바 하서 4군을 획득한다. 흉노는 고비사막 북쪽으로 후퇴한다.
“우리는 기련산을 잃었네. 이제 가축을 먹일 수 없네. 우리는 연지산을 잃었네. 여인들의 얼굴을 물들일 수 없네.”(失我祁連山 使我六畜不蕃息 失我燕支山 使我嫁婦無顔色)

사기>의 주석서인 ‘색은(索隱)’에 실린 흉노 민요이다. 흉노가 요충지인 기련산(祁連山)과 연지산(燕支山·감숙성 하서주랑)을 잃은 슬픔을 노래한 것이다. 여인들이 얼굴에 찍는 ‘연지’가 바로 여기서 나왔다.


이후 부침을 계속하던 흉노는 한나라의 공격과. 천재지변, 그리고 내분이 이어지면서 쇠퇴일로를 겪는다.

흉노의 서쪽 지방을 지배한 일축왕이 한나라에 투항(기원전 60)한 뒤 동서로 분열된다. 기원후 48년에는 지금의 내몽골과 화북 일부에 사는 남흉노와 외몽골에서 패권을 잡은 북흉노로 나뉜다. 남흉노는 중국의 속국이 됐다. 북흉노는 151년 이후 선비족의 추격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다.


학계에서는 북흉노를 4~5세기 동유럽 석권하고 로마제국의 쇠망에 영향을 끼친 훈족과 결부시키고 있다. 훈족은 375년 발라미르의 지휘 아래 동유럽으로 침입했던 유목민이다. 유럽인들은 공포에 떨었다.

결국 동유럽에 거주하던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야기시켰고, 로마제국을 흔들었다. 훈족의 침략은 유럽세계를 형성시킨 민족대이동의 발단이 됐다. 볼가강과 판노니아(헝가리) 평원에서 발견되는 흉노식 유물들이 증거자료로 거론된다. 특히 삶고 끓이는 조리용기인 동복(구리로 만든 솥)은 대표적인 흉노식 유물이다.


신라 김씨=흉노족?

흉노족을 우리 민족과도 결부시키기도 한다.
지난 1954년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궈자탄(郭家灘) 마을에서 흥미로운 비석하나가 나왔다. 864년 5월29일 향년 32살로 사망한 재당 신라인 ‘대당고김씨부인(大唐故金氏夫人)’의 묘지명이었다.

“먼 조상 김일제가 흉노의 조정에 몸담고 있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중략) 투정후라는 제후에 봉해졌다. 이런 김일제의 후손이 가문을 빛내다가 7대를 지나 한나라가 쇠망함을 보이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신라)에 숨어 살게 되었다.”

이것은 신라 김씨가 스스로의 뿌리를 ‘흉노’에서 찾고자 했음을 알리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의 단편이 신라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비문에도 남아있다. 1769년과 2009년에 발견된 이 비문 조각편의 내용을 더듬어 보자.


“문무왕의 선조는~ 투후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했다.”

여기에 나오는 ‘투후 제천지윤’은 <한서(漢書)> ‘열전’에 나오는 김일제를 뜻한다. 김일제(기원전 134~86)는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다. 한무제 때 한나라에 투항했다.(기원전 102) 한무제는 김일제를 ‘투후’에 봉한 뒤 김씨성을 하사했다. 그런데 문무왕릉비와 재당 김씨부인 묘비문을 비교해서 살펴보자. 문무왕릉비에 나오는 ‘투후’는 재당 김씨 부인묘의 ‘투정후’와 연결된다.

그렇다고 ‘김씨’를 흉노족의 후예로 단정할 수는 없다. 이 자료를 발굴한 권덕영 교수(부산외대)는 공개당시 “당나라에 살던 신라 김씨의 이같은 뿌리의식은 관념상일 뿐, 실제 흉노인 김일제로부터 비롯됐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라 한 바 있다.


다만 9세기대 김씨들이 스스로의 뿌리의식을 흉노에서 찾고자 했음은 알 수 있다. 최근 강인욱 교수(부경대) 주도로 ‘흉노와 그 동쪽의 이웃들’이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이 열렸다. 흉노 고분 가운데 가장 대형이라는 골모드 유적의 발굴성과가 발표됐다. 또 북흉노의 국가구조가 부여와 고구려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도 규명했다. 또 흉노가 고구려와 옥저의 발명품인 온돌의 기술을 도입했음을 알렸다. 흉노계 기마문화가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 지도 알아내려 했다. 몽골에서만 10여개국 조사단이 흉노유적을 발굴하고 있단다. 2000년 전 시대를 풍미한 뒤 홀연히 사라진 흉노제국은 참 매력적인 연구대상임이 분명하다.

“당신도, 나도 홀로 됐는데…. 어떠신가? 우리 함께 만나 즐겨보심이….”(<한서> ‘흉노전’)
기원전 195년, 한나라 여태후(?~기원전 180)가 한 통의 국서를 받는다. 흉노의 묵돌선우(왕·기원전 209~174)가 보낸 것이었다. 말이 국서이지, 성적 모욕이 가득한 스토커의 연애편지였다. 여태후, 즉 여치(呂稚)는 한 고조(유방)의 부인이다. 남편 사후 한나라를 통치한 ‘사실상의 여황제’였다. 그런 그가 ‘오랑캐’로부터 유치한 연애쪽지를 받은 것이다. 부들부들 떨었다.


‘묵돌이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장수들을 총동원,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도리어 ‘굴욕의 편지’를 보냈다.

“너무 늙어…감히 선우를 뵐 수가 없네요. 대신 (조)공물을 보내니 받아주세요.”

5년 전(기원전 200) ‘평성의 치욕’이 여태후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유방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묵돌을 공격했다. 하지만 교묘한 유인작전에 평성(平成·산시성 다둥시)에서 7일간이나 포위됐다.(사진은 흉노족 청동솥) 겨우 목숨만은 건졌지만 한나라는 ‘흉노의 동생’임을 인정하는 치욕의 불평등 조약까지 맺는다.

“한나라 공주를 선우에게 바친다. 해마다 무명과 비단, 술, 쌀 등을 바친다. 형제의 맹약을 맺는다.”


한때 한나라 사신이 ‘형사취수(兄死娶嫂)’ 같은 흉노의 풍습을 ‘오랑캐’라면서 비꼰 적이 있다. 그러자 흉노는 “기마병으로 확 짓밟아 놓을 테니 까불지 마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랬던 흉노가 한나라의 끊임없는 공격과 천재지변, 내분이 겹쳐 쇠락한다. 결국 기원후 2세기 무렵 흉노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 민족과 결부시키기도 한다.

      
864년 재당 신라인 ‘대당고김씨부인(大唐故金氏夫人)’의 묘지명은 수상쩍다. “(김씨의) 먼 조상 김일제는 흉노의 조정에 있다가 한나라에 투항했다”는 것이다. 김일제(기원전 134~86)는 흉노국 제후(휴도왕)의 태자였다. 그렇다고 ‘김씨’를 흉노족의 후예로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9세기대 김씨들이 스스로의 뿌리의식을 흉노에서 찾고자 했음은 알 수 있다. 최근 ‘흉노와 그 동쪽의 이웃들’이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이 열렸다. 강인욱 교수(부경대)가 “흉노가 고구려와 옥저의 발명품인 온돌을 도입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몽골에서만 10여개국 조사단이 흉노 유적을 발굴하고 있단다. 2000년 전 시대를 풍미한 뒤 홀연히 사라진 흉노제국은 참 매력적인 연구 대상인가 보다.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lk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