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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김부식의 '막말' 퍼레이드, '암탉이 울면'

잠용(潛蓉) 2019. 12. 22. 21:07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김부식의 '막말' 퍼레이드, '암탉이 울면'

경향신문ㅣ2013.02.13 09:52 수정 : 2013.02.13 20:52  

▲ 상상으로 그려본 무측천 모습. /도서출판 책과함께 제공  


“‘여치(여태후)와 무조(무측천)는 유약한 임금을 만나 천자행세를 했다.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 어찌 늙은 할멈이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선덕여왕>편을 쓴 뒤 맨 끝에 해괴한 평론을 달았다. 전형적인 남존여비 사상을 풀어놓은 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한 것이다. 김부식은 한 술 더 뜬다.


선덕여왕을 두고 “<서경>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빈계지신·牝鷄之晨)’고 했다.”고 표현하면서…. 요즘 같으면 큰 일 날 ‘막말’이다.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 다음은?”

기원전 195년, 한나라를 건국한 고조(유방)가 병석에 눕는다. 부인인 여후(여태후)가 죽음을 앞둔 남편과 대화를 나눈다.
“폐하 이후 100년 뒤에는 누구에게 상국(相國·국무총리)의 직분을 맡기면 좋겠나이까.”(여후)

“조참이면 좋을 것이요.”(고조)

“그렇다면 그 다음엔요?”(여후)

“글쎄요. 왕릉? 진평? 단독으로는 안되오. 고지식한 왕릉을 진평이 돕도록 하면 좋을 것이요.”(고조)

“그러면 그 다음은요?”(여후)

“….”(고조)

고조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뜸을 들인 뒤 대꾸했다.

“그 다음까지? 그 다음은 당신이 알 바가 아니요.”


이 역사기록은 여태후(呂太后)의 끊없는 안방정치의 욕심을 드러낸 대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얼마나 오래 정치를 농단하려고 100년 뒤, 아니 그것도 모자라 그 다음, 그 다음을 논하는 것인가. 그것도 죽음을 앞둔 남편이자 황제 곁에서….


모든 정치가 안방에서 이뤄졌지만…

사실 여후는 ‘새벽에 울기만 하는 암탉’이 아니었다. 한나라 창업의 일등공신인 한신을 유인하는 계책을 써 그의 목을 베고 삼족을 멸한 여걸이었다. 한신은 죽어가면서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내 아녀자(여후)에게 속았구나. 이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랴.(乃爲兒女子所詐 豈非天哉)”(<사기> ‘회음후열전’)


사마천은 여후를 이렇게 중간평가했다.

“여후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굳세어 일찍이 고조를 도와 천하를 평정했다. 대신들을 주살할 때도 여후의 힘이 컸다.”(<사기> ‘여태후 본기’)


남편(고조·재위 기원전 202~195)이 죽자 여후의 아들인 효혜제(재위 기원전 195~188)가 등극했다. 아들 대신 정권을 틀어쥔 여후의 야심은 노골화했다. 우선 남편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척부인과 그의 아들 여의(如意)를 척살했다. 여의에게는 독주를 먹였다. 다음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눈을 뽑고, 귀를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여 돼지우리에서 살도록 했다. 그러면서 ‘사람돼지(人체)’라 했다. 이후 여후는 여씨 일족을 제후로 봉하고, 황제를 수시로 갈아치웠다. 한나라는 기원전 180년, 여후가 죽을 때까지 15년간이나 ‘여씨의 나라’였다.

 

그렇다면 여후는 극악무도한 여인일까. 당대의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의 평가는 흥미롭기만 하다. 우선 여후의 사적을 ‘여태후 본기’로 처리하는 파격을 보여준다. ‘본기’는 황제의 사적을 기록한 역사서이다. 사마천은 정식으로 등극하지 않고 여태후에게 황제의 예우를 해준 것이다. 그러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백성들은 전국시대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모든 정치가 안방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천하는 태평하고 안락했다. 형벌을 가하는 일도 드물었다. 백성들의 의식은 나날이 풍족해졌다.”



▲ 무측천 시대의 미인상. ‘네모 반듯한 이마와 넓은 턱’을 가진 미인이었던 무측천은 14살의 나이에 ‘재인’으로 선발됐다.


“두 계집의 뼈가 취(醉)하도록 담가라.”

그로부터 800여 년이 지난 서기 637년, 14살의 어린 소녀가 당나라 궁중에 들어간다. 무씨 소녀였다.

고종의 애첩이 된 무씨 소녀는 흉계를 낸다. 자신이 낳은 핏덩이 딸의 목을 졸라 죽이고, 그 죄를 황후 왕씨에게 뒤집어 씌었다.(654년) 황후에 오른 무측천은 고종의 사랑을 받았던 전(前) 황후 왕씨와 소 숙비를 무참하게 죽인다.

“무씨는 왕씨와 소씨에게 곤장 100대씩 때렸다. 손발을 잘라 술독에 넣고는 ‘두 계집의 뼈까지 취(醉)하도록 내버려 두어라’고 명령했다. 두 사람이 죽자 시신을 참하도록 했다.”(<자치통감>)


무측천의 아들은 곧 황태자가 된다.(656년)

“천하의 대권이 모두 중궁전(무측천)에 귀속됐다. 관직의 승진과 강등, 생사여탈이 그녀의 말 한마디로 결정됐다. 천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들을 이성(二聖)이라 했다.”(<자치통감>)


무측천은 소름끼치도록 비정했다. 먼저 675년 태자 이홍이 죽었는데, 일부 역사서(<신당서>)는 “천후(무측천)가 태자를 독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기록했다. 딸에 이어 아들까지 독살했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남편(고종)이 683년 죽자 역시 무측천의 자식이자 고종의 7번째 아들인 중종이 즉위한다. 그러나 중종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황제였다. 황위에 오르자마자 처음 한 일이 자신의 장인인 위현정에게 시중자리를, 유모의 아들에게 5품의 고위 관직을 각각 제수하는 것이었다. 대신들이 반대하자 중종은 “난 장인에게 천하도 내줄 수 있는데 시중 자리가 대수냐”고 소리친다.


이 말을 전해들은 무측천은 중종을 강제 폐위시킨다.(684년) 중종이 강력하게 항의하자 무측천은 단칼에 잘라버린다.

“네가 그랬지않냐. ‘천하를 위현정에게 내준다’고….”


무측천은 또 내준신, 주홍 등 혹리(酷吏)를 기용, 갖가지 고문으로 고관대작들을 숙청했다. 거꾸로 매달거나 목에 무거운 돌을 달거나, 콧구멍에 식초를 붓거나 철띠를 목에 둘러 옥죄는 등 고문방법도 다양했다. “비밀감옥에서 칼·몽둥이가 난무하고 모진 고문을 자행, 없는 죄도 자백”(<자치통감>)했으며, “고관대작들이 목이 잘린채 도륙당해 길바닥에 너저분하게” 널렸다.(<문원영화>)


“제 성기가 큽니다. 여황제를 만족시킬 수 있으니….” .

모든 걸림돌을 하나하나 제거한 무측천은 690년, 67살의 나이로 스스로 황위에 오른다. 그러면서 국호를 주나라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대주(大周)라 칭한다. 중국대륙을 통치한 240여 명의 황제 가운데 유일한 여황제가 된 것이다. 여태후는 ‘황제대우’를 받았지만 황제는 아니었으니까….


무측천은 일흔살이 넘어서도 늙지 않았다고 한다. 기묘한 화장술 덕분이었다. 그녀는 ‘남총(男寵)’, 즉 신체건강한 미남자들을 노리개로 삼았다. ‘일과 남자’ 없이는 단 한순간도 견딜 수 없다고 한다. 많은 미소년들을 선발해서 봉신부(奉宸府)에 두었다. 봉신부는 무측천의 환락을 위한 일종의 고급클럽이었다. 우보궐 주경측의 간언을 보면 무측천의 남성편력을 짐작할 수 있다.

“최근 우감문위장사 후상 등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신의 성기가 크다고 자랑하며 폐하를 받들고자 했답니다.”


신하가 여황제의 사랑을 받으려 ‘큰 성기’를 공공연히 자랑하고 다녔다니 참….


 

▲ 무측천의 둘째아들 이현 무덤안에 그려진 벽화. 무측천 시대 궁중 여인네들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가운데 여인은 남장을 했다. 무측천 시대엔 여성의 지위가 무척 높았다.

태평성대의 제국을 이끈 여인

무측천은 28년을 황후로, 6년을 태후로, 15년간을 여황제로 산 뒤 81살의 나이로 새상을 떠난다.(705년) 성리학자들은 “혹리를 임용하여 종실과 고관대작을 주살한 화가 끔찍했다”고 악평했다.(<통감강목(通鑑綱目)>) 심지어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가장 흉악한 사람”이라는 평도 나왔다.(<강감합편(綱鑒合編)>, <소실산방필총(少室山房筆叢)>)

하지만 긍정적인 평론도 만만치 않다. 명나라 사상가 이지(李贄)는 “무측천이 아끼고 사랑했던 이들은 모두 현인군자였다”고 호평했다.(<당회요>)


우선 무측천은 과거제도를 개혁하여 참신한 인재를 발굴했다. 해마다 과거시험을 치렀다. 685~688년 사이에는 해마다 5만 여 명이 지원하는 등 성황을 이뤘다. 과거를 통해 적인걸·요숭·송경·소량사 등 당나라 전성기를 이끈 재상들이 배출됐다. 그랬으니 <자치통감>의 저자인 사마광은 “태후는 상벌을 평행하면서 천하를 다스렸기 때문에 유능한 인재가 잘 쓰였다”고 평가했다.이것도 모자라 만백성의 상소를 받았으며, 모든 백성들이 스스로를 천거할 수 있다는 조서를 발표했다.


또한 무측천 시기에 당나라의 경제는 괄목상대했고, 국고가 가득찼다. 652년 380만 가구였던 인구가 무측천 말기인 705년에는 615만 가구(3713만명)로 급증했다. 국력 또한 강성해졌다. 무측천 시기에 당나라 영토는 ‘정관지치(貞觀之治·627~649)’ 시대보다 더 넓었다. 이 뿐이 아니었다. 695년, 무측천은 “3000여 가지의 죄목을 없애라”는 조서를 내린다.


무측천 시대에 여성들의 지위도 높아졌다. 아버지 생전에 어머니가 상을 당해도 똑같이 3년상을 치르도록 했다. 또한 부녀자 외출 때 멱리(冪罹·여인들이 외출 때 썼던 쓰개) 대신 휘장 달린 모자를 써도 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부녀자들에게 승마와 활쏘기, 남장 공차기 등을 허용했다. 그야말로 대단한 지도자라 할 수 있다.


무측천이 혹리를 동원해서 무자비한 숙청을 가했다지만 그 대상은 종실과 고관대작들이었다. 백성들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무측천은 “짐이 선제를 30년 넘게 보좌하면서 천하를 근심하며 애썼다”고 말했다. 그 말 그대로였다. 무측천의 업적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 상하이 시절인 1935년 연극 <인형의 집>에서 ‘노라’를 연기한 장칭. 이 시절엔 란핑(藍빈)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 장칭은 여배우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마오쩌둥 사상의 해석자”

무측천이 죽은 지 꼭 1269년 지난 1974년, 중국의 여러 매체들이 흥미로운 기사를 쏟아낸다. ‘여황제 대우’인 여태후와 명실상부한 ‘여황제’ 무측천을 다룬 기사들이었다.
여태후는 ‘뚜렷한 목적으로 남편의 유지를 계승한 인물’로 칭송됐다. 무측천은 <자치통감>의 평론대로 ‘삶과 죽음, 상과 벌, 이 모든 것을 결정한, 남편 고조와 함께 이성(二聖)으로 일컬어진 인물’로 평가됐다. 이 즈음에 <자치통감>의 기록대로 ‘이성(二聖)’으로 표현될만큼 성인 대접을 받은 여인이 있었다. 무측천처럼…. 바로 마오쩌둥(毛澤東)의 부인 장칭(江靑)이었다.


<인민일보>는 경극개혁 10주년을 기념하는 기사에서 장칭을 ‘마오쩌둥 사상의 해석자’로 표현했다. 이것은 류사오치(劉少奇)와 린뱌오(林彪) 등 마오 주석의 후계자들에게 붙이는 어마어마한 호칭이었다.

요양차 중국 남부의 산중에 머물던 마오 주석이 “경거망동하지 마라”는 경고를 수없이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이는 측천무후의 국정운영을 공식허가한 당나라 고종과는 사뭇 달랐다.


장칭은 황제의 조서와 같은 ‘지시(指示)’를 내려보냈고, 국가지도자 신분으로 키프로스 대통령, 토고 대통령, 모리타니아 대통령 등을 접견했다.

이 일련의 상황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현대 중국의 황제지만 병석에 누운 마오쩌둥의 후계자는 바로 ‘황후’인 장칭이라는 것이었다. 한고조 유방의 부인인 여태후와 당 고종의 부인인 측천무후처럼….


장칭은 때때로 아랫사람에게 말했다고 한다.

“여자도 황제가 될 수 있어. 영국이 중국처럼 봉건적이지 않은 이유는 여왕의 통치를 받기 때문이야.”


마오쩌둥-장칭의 ‘결혼의 조건’

장칭…. 그녀는 현대판 여태후, 아니 측천무후를 꿈꿨던 여걸이었다.

상하이에서 유명한 배우로 활약했던 장칭은 1937년 공산당 지도부가 있던 옌안(延安)에 도착한다.

이미 2번의 결혼경력이 있던 24살 여인은 그 곳에서 45살의 지도자 마오쩌둥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마오에게는 4번째 부인인 허쯔전(賀子珍)이 있었다. 당시 공산당 지도부의 아내들은 그 힘겨운 장정(長征)의 과정을 뚫고 옌안까지 온 혁명여전사들이었다. 그랬으니 멋을 부릴 줄 몰랐다. 허쯔전도 전형적인 혁명전사의 모습이었다.


마오 주석은 상하이에서 금방 도착한 젊고, 매혹적인 장칭에게 금방 빠졌다. 본부인인 허쯔전은 마오가 어린 여배우와 사귄다는 소문을 듣고 칼을 들고 달려와 난리를 피웠다. 결국 정신병 증세에 시달린 허쯔전은 옌안을 떠났다. 그러자 옌안에서는 마오쩌둥을 두고 “혁명가 아내를 버리고 형편없는 여배우와 잠자리를 가진 섹스중독자”라는 비난이 터져나왔다.


 

▲ 1937년 옌안 시절 사랑을 나누던 마오쩌둥과 장칭. 중국 공산당은 당대회까지 열어 두 사람의 결혼여부를 심사했다. 당대회는 “장칭은 30년간 정치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승락한다.


류사오치(劉少奇),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당 지도자들도 둘의 결혼을 반대했다. 산시성(陝西省)의 공립학교 학생들은 집단수업거부에 돌입했다.
마침내 마오쩌둥·장칭의 결혼문제를 다루는 당대회가 열렸다. 마오는 “결혼을 승인해주지 않으면 장칭과 고향으로 돌아가 농부가 되겠다”고 버텼다. 장칭도 “이미 난 마오주석과 살고 있다”고 호소했다.


결국 당대회는 숙고 끝에 타협안을 내놨다.
“장칭은 앞으로 모든 힘을 마오쩌둥을 내조하는데 힘써야 한다. 향후 30년간 어떤 정치활동도 해서는 안된다.”

혼인을 허락하는 대신 참으로 무서운 조건을 내건 것이다. 장칭이 혁명전사가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인 역할’을 불허한 것이다.


남편과 손잡고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다

이 조건 때문인지, 장칭은 오랫동안 마오쩌둥의 아내로 살았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실패로 일선에서 물러난 뒤(1959년) 아내 장칭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류사오치·덩샤오핑 등과 권력을 분점한 마오쩌둥은 장칭을 최측근 그룹으로 삼아 세력을 규합한다. 장칭은 경극(京劇)을 이념투쟁과 권력상승의 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같은 산둥(山東) 출신인 장춘차오(張春橋)와 야오원위안(姚文元) 같은 신흥 지식인들을 등용한다.


1965년 11월10일, 상하이의 <문회보>에 희한한 연극비평이 실렸다. 1961년 베이징 부시장인 우한(오함)이 쓴 희곡 <해서파관(海瑞罷官)>을 비판한 것이다. 줄거리는 명나라 시대 관헌인 해서가 황제를 비판하다가 파면당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1959년 마오쩌둥은 황제를 비판한 해서를 칭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6년 뒤에는 정치적 문제로 비화됐다. 1959년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가 마오쩌둥이 주도한 대약진운동을 비판했다가 실각한 사건을 비유했다고 몰아붙인 것이다.


훗날 중국공산당은 <해서파관> 비평글이 <문회보>에 실린 경위를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다. 즉 마오쩌둥이 <해서파관>을 비판하라고 요청했고, 아내인 장칭이 ‘직접 지도’ 했으며, 장칭의 심복인 장춘차오가 협조한 속에 야오원위안이 글을 썼다는 것이다. 장칭은 남편과 손잡고 이렇게 중국대륙을 10년간 암흑기로 몰아넣은 문화대혁명의 주역이 됐다.

장칭은 어린 홍위병들을 향해 <마오쩌둥 어록>을 흔들며 광란의 폭동을 부추겼다. 홍위병들은 그런 장칭을 보고는 “장여사님 우린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외쳤다.


 

▲ 마오쩌둥과 장칭의 라이벌였던 류사오치와 부인 왕광메이.


왕광메이에게 ‘제트비행기’ 모욕

“왕광메이(王光美)를 끌고와 자신의 죄를 자백하도록 해야 합니다.”

1966년 말, 장칭은 군중집회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왕광메이는 ‘주자파(走資派)의 수괴’이며 ‘중국의 흐루시초프’로 낙인 찍힌 류사오치(劉少奇)의 부인이다. 장칭의 외침을 들은 여성홍위병 3명이 왕광메이를 붙잡았다.


그들은 왕광메이에게 강제로 비단드레스를 입히고 하이힐을 신긴 뒤 영국귀족처럼 챙 넓은 밀짚모자를 씌었다. 이어 탁구공으로 만든 진주목걸이를 왕광메이의 목에 걸었다. 그런 뒤 야외집회무대로 끌고와 하루종일 모욕을 주었다. 2시간동안 악명높은 ‘제트비행기’ 형벌을 당하기도 했다. 두 팔을 뒤로 잡아 젖히고 머리를 아래로 처박는…. 홍위병들은 그 처참한 광경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왕광메이는 왜 이런 험한 꼴을 당했을까. 1963년 어느 날이었다. 당시 국가주석인 남편 류사오치와 서남아시아를 방문할 예정이었던 왕광메이가 장칭에게 전화를 걸었다. 방문기간 중 어떤 옷과 장신구를 걸칠지 코디 좀 해달라는 전화였다. 이 때 장칭은 ‘검은색의 단순한 벨벳 드레스’를 권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장신구는 하지 않는게 좋겠어요.”


하지만 왕광메이는 장칭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여러 벌의 의상을 준비했다. 또 버마 방문길에 네윈 버마 대통령이 진주목걸이를 선물하자 이것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주최한 연회에 걸고 나타났다. 장칭은 그 모습을 텔레비젼을 통해 지켜보았다. 이후 멀어진 마오쩌둥과 류사오치 관계만큼이나 장칭과 왕광메이의 관계 역시 차갑게 식어갔다.


그런 가운데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장칭이 통쾌한 복수극을 연출한 것이다. 장칭은 양광메이에게 ‘미국 스파이, 일본스파이. 국민당 스파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씌었다. 이 죄목이라면 처형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형량선고문건의 비망기에 사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도하유인(刀下留人)’. 이것은 칼 아래 사람을 살려두라는 뜻이었다. 참수형의 주관자나 집행자에게 이 말을 긴급하게 전해 형집행을 급히 면하게 한 것을 뜻한다. 이로써 목숨을 간신히 건진 왕광메이는 12년형을 받았다. 여태후에 의해 ‘사람돼지’가 된 척부인이나, 무측천에 의해 ‘팔다리가 잘려 뼈 속까지 취하며 죽은’ 왕황후와 소숙비의 비참한 운명은 피한 것이다. 
 


▲ 1966년 문화대혁명 때 탁구공으로 만든 진주목걸이를 강제로 매달고 홍위병들에게 ‘돌림빵’의 수모를 당하고 있다. 장칭은 라이벌인 왕광메이를 죽음 일보직전까지 몰고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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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마음을 읽지 못한 한계

하지만 장칭은 결코 여태후나 무측천이 될 수 없었다.

우선 죽어가는 황제(마오쩌둥)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황제는 황후(장칭)의 전횡을 우려하면서 ‘4인방을 결성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황제는 또한 정치국 전원회의 석상에서 ‘음모적 방법과 극좌적 견해’를 거론하면서 아내를 직접 비판했다. 근본적인 한계는 중국은 더 이상 왕조시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저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인 마오쩌둥의 부인이었을 뿐이다.


마오 주석의 뒤를 이을 사람들은 마오씨나 장씨가 아니라 덩샤오핑 같은 혁명지도자였다. 아무리 장칭이 “중국에는 덩샤오핑이라는 국제자본주의 첩자가 있다”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소용없었다. 어찌보면 공산혁명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던 그녀에게는 어차피 설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더 핵심이 있다. 남성이냐 여성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여태후나 측천무후가 가졌던 미덕을 그녀는 갖지 못했다. 바로 ‘민심’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랬으니 4인방 재판을 받으며 백성의 마음을 얻지못한 스스로를 탓하지 않고 마오쩌둥의 이야기만 했던 것이다. “내가 한 모든 일은 마오쩌둥이 시킨 것이다. 난 마오쩌둥의 개였다. 그가 물라면 물었다.”


“여치(여태후)와 무조(무측천)는 유약한 임금을 만나 천자처럼 행하였다.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 어찌 늙은 할멈이 정사를 처리하는가.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선덕여왕’ 편을 쓴 뒤 요즘 같으면 탄핵받을 ‘막말’을 해댄다. 그것도 역사서에…. 김부식의 말처럼 여치와 무조는 얼핏 보면 질투심에 사로잡힌 ‘극악무도한 여인네’일 뿐이다. 여치는 남편(한고조 유방)의 애첩(척부인)을 ‘사람돼지(人체)’로 만드는 패악을 부렸다.(기원전 195년) 척부인의 눈과 귀를 파고 팔다리와 혀를 자른 뒤 돼지우리에 처넣은 것이다. 남편 사후에는 여씨(인척)를 대거 기용하고 황제를 수시로 갈아 치웠다. 무조는 더했다. 핏덩이 친딸을 죽인 뒤 왕 황후에게 뒤집어씌웠다. 천신만고 끝에 황후에 오른 뒤 여치의 길을 걷는다.


전 황후 왕씨 등을 곤장 100대씩으로 다스린 뒤 손발을 자른다. 그런 뒤 술독에 ‘뼈가 취(醉)하도록’ 담근 뒤 시신을 참(斬)한다. 아들들을 잇달아 퇴위시킨 뒤 690년 스스로 황위에 오른다. 무조는 ‘남자’ 없이는 단 한순간도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신하는 “내 성기가 크니 폐하(무조)를 받들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니…. 하지만 여태후(여치)와 무측천(무조)의 시대는 ‘태평성대’였다. 사마천은 여태후를 ‘황제대우’로 높이면서 호평했다.

“천하는 태평했다. 형벌을 가하는 일도 드물었다. 백성들의 의식은 나날이 풍족해졌다.”(<사기> ‘여태후 본기’)

 
무측천(그림·책과함께 제공)도 ‘백성들을 귀히 여기며 천하를 근심했던’ 황제로 평가됐다. 과거를 개혁하여 참신한 인물을 발굴하고, 만백성의 상소를 받아 언로를 뚫었다. 3000여가지의 형벌을 없애기도 했다. 국고가 가득 찼다. 1966년 말, 류사오치(劉少奇)의 아내 왕광메이(王光美)가 홍위병 앞에 끌려 나온다. 탁구공으로 만든 목걸이를 두른 채 악명 높은 ‘제트비행기’ 고문을 받는다. ‘미국의 스파이’라는 엄청난 죄목을 뒤집어쓴 채…. 마오쩌둥(毛澤東)이 “살려두라”는 명을 내리지 않았던들 척부인이나 왕 황후·소숙비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제2의 여태후, 제2의 무측천을 꿈꿨던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이 꾸민 일이었다. 권력을 향한 야망은 두 사람과 같았다. 하지만 장칭은 두 사람의 덕목인 ‘민심을 얻지’ 못했다. 그녀는 4인방 재판을 받으며 민심을 얻지 못한 스스로를 책하기보다 남편에게 책임을 돌렸다. “난 마오쩌둥의 개였다. 그가 물라면 물었다”고….



<참고자료>

러스 테릴, <장칭 정치적 마녀의 초상>, 양현수 옮김, 교양인, 2013

조문윤·왕쌍희, <무측천평전>, 책과함께, 2004

에드가 스노우, <중국의 붉은 별>, 신홍범 역, 두레신서,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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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본기>, 정범진 외 옮김, 까치, 1994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lkh@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