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屈原·首露王·남북 단일팀…'한 배를 탄 운명'
경향신문ㅣ2018.08.16 10:24 수정 : 2018.08.19 10:45
스포츠 종목 중에 카누 용선(龍船·드래곤 보트)이 있다. 중국을 비롯, 동남아시아에서 성행하다보니 18일 개막하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의 정식종목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별 관심 없는 종목이었지만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것 같다. 남북한이 단일팀을 구성해서 출전하는 덕분이다. 용선은 특히 10명의 패들러(사공)와 키잡이, 드러머(북 치는 선수) 등 12명의 선수가 한 팀을 이뤄 경쟁하는 종목이다. 남녀별로 8명씩(예비 2명씩 포함)의 남북한 선수들이 선발됐다. 단일팀은 남녀 1000m에서 메달을 바라보고 있다.
▲ 중국 후난성(胡南省) 웨양(岳陽) 미뤄(汨羅)의 취쯔츠(屈子祠)에 붙어있는 굴원의 초상화. /경향신문 자료사진
애국시인 屈原의 절망
용선은 스포츠로서는 매우 생소한 종목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그 뿌리를 더듬으면 2300년 전까지 올라간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애국시인으로 꼽히는 굴원(屈原, 기원전 343~278년 추정), 그리고 그 굴원에서 비롯된 명절인 중국 단오절(端午節)에서 유래한다. 약육강식의 전국시대(기원전 403~기원전 221)에서 살아남은 7대 강국을 ‘전국 7웅’(진·초·제·조·위·한·연)이라 한다. 그 중 요즘의 G2라 할 수 있는 초강대국이 있었으니 바로 서북의 진나라와 동남의 초나라였다.
그러나 초나라는 회왕(재위 기원전 329~기원전 299) 시대에 급격하게 몰락하고 만다. 굴원과 같은 인재의 말을 듣지않고 간신들의 말을 가까이 했기 때문이다. 당시 굴원은 회왕의 좌도(左徒)였다. 좌도는 안으로는 군주와 정사를 논하고, 밖으로는 외교문서의 초안을 잡고 다른 나라 제후들을 상대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그러나 굴원은 군주의 신임을 다투던 간신 근상의 참소로 좌도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굴원이 떠나자 어리석은 군주가 다스리던 초나라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회왕은 진나라 재상이자 ‘레전드급 유세가’인 장의의 세치혀에 농락되어 우방이던 제나라와의 국교(합종)를 끊어버렸다.
“제나라와의 국교를 끊으면 600리 땅을 주겠다”는 장의의 약속에 속은 것이다. 장의는 초가 제와의 국교를 끊자 “언제 600리를 준다고 했냐. 6리를 준다고 했을 뿐이다”라는 강변으로 약속을 깼다.
진나라는 어리석은 초나라 회왕을 가지고 놀았다. 진나라는 초 회왕을 초청했다. 진나라를 방문하는 회왕을 억류해서 초나라 땅을 떼어달라고 요구한다는 꿍꿍이였다. 진나라의 시커먼 속을 간파하지 못한 회왕이 진나라의 초청에 응했다. 이 꼴을 보다못한 굴원이 나서 “진나라는 호랑이와 이리 같은 나라니 절대 가서는 안된다”고 매달렸다. 하지만 회왕은 “진나라의 호의를 무시하느냐”는 간신들의 주장을 믿고 진나라를 방문한다.
▲ 애국 시인 굴원이 투신했다는 멱라강. 굴원을 구하려고 배들이 다투어 달려갔다는 전설에서 단오절과 용선의 전통이 생겼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나홀로 깨끗하다’고 절규한 굴원
그러나 회왕은 이번에도 속았다. 진나라는 회왕을 억류하고는 “땅을 떼어주면 풀어주겠다”고 협박했다. 초 회왕은 결국 귀국하지 못한채 진나라 땅에서 죽었다. 객사였다. 굴원은 망국의 위기에 빠진 조국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굴원은 절망했다. 어떤 어부가 강가에서 꾀죄죄한 몰골로 거닐던 굴원을 알아보고 “예서 무엇을 하고 계시냐”고 물었다. 굴원은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어서 쫓겨났다”고 답했다. 굴원은 곧바로 절명시인 ‘회사(懷沙)’를 지었다.
“…세상이 어지러워 날 알지 못하니(世혼濁莫吾知) 내 마음 말하지 않겠네.(心不可謂兮) 죽음 피할 길 없음을 알기에(知死不可讓) 부디 슬퍼하지 말자.(願勿愛兮) 세상의 군자들에게 분명히 알려(明告君子) 내 그대들의 표상이 되리라.(吾將以爲類兮).”(<사기> ‘굴원가생열전’)
그야말로 우국충정으로 무장한 애국시인의 유언이라 할 수 있다.
굴원은 이 시를 읊은 뒤 돌을 품에 안고 멱라수(湘江)에 몸을 던져 죽었다.
멱라수는 호남성(湖南省) 북쪽의 동정호(洞庭湖)에 흘러 들어가는 상수(湘水)를 가리킨다.
▲ 전국시대 초나라의 영역. 초나라는 전국 7웅 중 진나라와 함께 최강국으로 꼽혔지만 혼군의 대명사인 회왕 때 급전직하했다. 회왕은 굴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진나라의 초청에 응해 진나라를 방문했다가 억류되었고. 결국 객사하고 말았다. 이후 초나라 사람들은 진나라라고 하면 이를 갈았다. 진나라가 6국을 통일한 뒤에도 ‘초나라 사람 3명만 모이면 반란을 획책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두산백과 지도
“굴원을 구하라!”에서 유래한 용선젓기
굴원의 위대한 우국시와 비극적인 투신은 중국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로 승화되었다.
굴원이 투신한 음력 5월5일은 단오절로 전승되었고, 이것이 용선젓기의 유래가 되었다.
당나라 때인 636년에 편찬된 <수서> ‘지리지’와 <수당가화> 등을 보면 단오절 용선(배젓기)대회가 탄생한 결정적인 이유를 밝힌다. “굴원이 투신하자 사람들이 구해내려고 앞다퉈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달려갔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굴원을 구할 수 없어 안타깝게 여겼던 사람들이 해마다 5월5일이 되면 이른바 ‘굴원 추모 용선대회’를 열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단오절에 용선 대회를 열고 종자(종子·쫑쯔)라는 밥을 먹는 풍습도 굴원과 연관된다.
양나라 오균(469~520)의 <속제해기>는 “초나라 사람들이 굴원을 애도하여 이날이 되면 대나무 통에 밥을 담아서 제사 지낸다”고 기록했다. 굴원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물고기들에게 “이 음식을 먹고 굴원의 시신은 건들지 말라”고 빌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비단 중국뿐이 아니다. 화교가 많은데다가 벼농사를 짓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도 용선젓기는 여러 형태로 전승되었다. 중국은 물론이고,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인도네시이가 용선의 강국인 이유다.
▲ 가락국 수로왕과의 혼인을 위해 이역만리 아유타국에서 건너온 허황후가 거센 풍랑을 잠재우려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
가락국에도 용선젓기가 있었다
그러나 좀체 드러나지 않은 한가지 비밀이 있다. 용선 젓기와 흡사한 배젓기 대회가 2000년전 한반도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수로왕을 사모하는 놀이’라는 역사서에 등장한다.
“이중에 수로왕을 사모하는 놀이(戱樂思慕之事)가 있었다.…7월29일 건장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뉘어서 망산도에서 말발굽을 급히 육지를 향해 달린다. 또 뱃머리를 둥둥 띄워 물 위로 서로 밀면서 북쪽 고포(古浦)를 향해서 다투어 달린다. 이것은 옛날에 유천과 신귀 등이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수로왕에게 아뢰던 옛 자취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가야에서 김수로왕(재위 42~199?)을 기념하는 놀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수로왕이 보낸 신하들(유천·신귀·구간)이 야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오던 부인 허황후를 맞이하려 다투어 배를 저어간 장면을 기린 것이다.
허황후의 도착 장면은 자못 극적이다.
“수로왕이 (허황후의 도착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수로왕은 구간 등을 보내 목련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노를 저어 맞이했다. 그러나 왕후는 ‘당신들이 누구인데 내가 따라가겠느냐’고 거부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수로왕은 ‘그 말이 옳다’하고 손수 행차해서 대궐 아래 서남쪽으로 60보 쯤 되는 산 주변에 장막을 쳐서 임시궁전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신랑신부는 2박3일간 꿀같은 신방을 꾸민 뒤 한 수레를 타고 대궐로 돌아왔다.”
허황후는 처음에는 신부를 직접 영접하지 않고 신하들만 보낸 수로왕을 꾸짖었다. 그러자 수로왕은 “내가 잘못했다”고 후회하며 별도의 신방을 꾸리고 신부를 직접 맞았다. 아마도 가락국에서는 이날(7월29일로 추정)을 명절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수로왕이 허황후를 영접하기까지의 과정을 연례행사로 치렀을 것이다.
한국 단오와 중국 단오는 다르다
2300년 전 굴원의 고사에서 기원했다는 중국의 용선젓기 대회와, 가야국 수로왕과 허황후의 사랑이야기에서 유래한 한국의 배젓기 놀이는 근본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단오와 한국 단오 역시 다르다.
조선 후기의 문인 윤기(1741~1826)의 문집인 <무명자집>은 “조선과 중국의 단오가 다르다”고 밝혔다.
“(중국의) 단오는…예부터 이어온 풍속 우리와 다르다네.(古昔相循俗異同)… 옷을 하사하고 거울을 진상하는 것은 당나라 유풍(賜衣進鏡傳唐制) 떡 던지기 배 타기는 초나라 풍속이지(投종競舟想楚風)….”(<5월5일 고사>)
▲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카누 용선 남북단일팀 진수식 및 안전기원제에서 공개된 대동(1번, 남자)과 한강(2번, 여자)호. /경향신문 자료사진
윤기는 단오와 관련된 중국고사를 죄다 읊어놓고는 중국과는 다른 조선의 단오 풍속을 열거한다.
“그네는 (중국에서는) 예부터 한식에 탔는데, 우리 풍속엔 단오에 타지. 괴이하다 나라 다르면 풍속도 달라… 아이는 창포 뜯어 잎을 달여 머리 감고 뿌리 잘라 머리에 꽂네…”
윤기가 나열한 조선과 중국의 단오절 풍습 중 가장 다른 것은 아마도 그네타기와 용선 젓기일 것이다. 중국에서는 그네를 한식에 타는데, 조선에서는 단오에 탄다는 것이다. 또 ‘떡던지기와 배타기’는 굴원의 고사에서 유래한 중국의 전통적인 풍습인 용선 젓기를 일컫는다. 가야국 수로왕과 허황후의 만남 고사와는 다르다. 무엇보다 가야국의 배젓기는 단오절의 풍습이 아니다. 또 한반도에서는 이 배젓기 풍습이 성행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가야국의 조기멸망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한 배를 탄 운명’이 된 남북한 선수들
위에서 살펴보았듯 한·중 양국의 용선 유래는 다르다.
그러나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의 운명을 절망하며 강물에 뛰어든 굴원을 구하려 다투어 달려간 초나라 사람들이나, 이역만리에서 온갖 풍파를 견디고 찾아온 허황후를 맞이하러 경쟁하듯 노를 저어간 가야국 사람들이나 그 심정이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한마음으로 노를 저어 갔을 것이다.
▲ 카누 용선 남북 단일팀 선수들이 합동훈련을 벌이고 있다.
아시안게임 카누 용선 종목에 출전하는 남북한 단일팀 선수들이 탈 배 이름이 한강호(여자)와 대동호(남자)로 명명됐다. 남의 한강과 북의 대동강에서 따온 이름이다. 두 배를 합치면 ‘통일호’가 아니겠냐는 농담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배와 관련된 속담이나 고사성어가 꽤 된다. 단순히 용선 남북한 단일팀 뿐 아니라 전반적인 남북관계에도 통용될 수 있는 말이다. 오랫동안 으르렁댔지만 어려움에 빠졌을 때는 서로 힘을 합한다는 오월동주(吳越同舟) 고사가 눈에 띈다. 그러나 오월동주 고사로는 부족하다. 어려움을 극복한 뒤에는 다시 적대관계로 되돌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공들이 합심하지 않는다면 배(용선)는 산으로 올라갈 것’이라는 속담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아니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지금은 ‘한 배를 탄 운명’이라는 속담이 제격이라 할 수 있다. “물은 배를 띄울 수 있지만 배를 뒤집을 수 있다(水則載舟 水則覆舟)”(<순자> ‘왕제’)는 고사도 더오른다. 원래는 물(水)인 백성이 배(舟)인 임금을 띄울 수도,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무시무시한 혁명론을 설파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용선 남북단일팀은 물론이고, 남북관계 전반에서 원용할 수 있는 고사성어가 아닌가. 사람들의 변함없는 응원이 평화와 화합의 배를 순항하게 만들 수 있는 든든한 원천이 될 수 있으니까…. 한강호, 대동호의 ‘드러머’ 북소리에 한마음으로 노를 저을 남북한 선수들을 성원해본다.
(※ 이 기사는 김광언의 ‘용배(龍船) 젓기 고(考)’, <문화재> 27권, 국립문화재연구소, 1994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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