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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교도소 유골] "대퇴부뼈 세니 261구"... DNA 시료 채취중

잠용(潛蓉) 2020. 6. 13. 19:10

"대퇴부뼈 세었더니 261구"... 광주교도소 유골, DNA 시료 채취중

조선일보ㅣ권경안 기자 입력 2020.06.13. 15:45 댓글 610개


광주광역시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대형공사가 벌어져 포크레인이 덤프트럭에 흙을 퍼올리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작업자들이 철근을 잘라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었다. 법무부가 추진하는 법 관련 교육기관 ‘솔로몬 로(law)파크’를 시설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다. 수감자들이 생활했던 수감동(건물)은 사각 콘크리트벽에 아직 갇혀 있지만, 벽외부 완충지대에선 진입로 공사가 지난 2월부터 시작되었다. 지난 1~2월초까지만 해도 ‘교도소 분묘(墳墓)’와 그 주위에서 유골(遺骨)발굴조사를 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골들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감식하고 있다. 국과수가 신원미상으로 분류된 유골 더미에서 탄두(彈頭)로 추정되는 물체를 발견했다고 5·18기념재단이 지난 3일 밝혔다. 발굴 당시 유골을 41개 상자에 담아 국과수로 옮겼는데, 30번째 상자에서 유골과 다른 물질이 나와 X선 검사를 한 결과, 탄두로 확인된 것이다. 국과수는 “카빈총에서 발사된 탄두로 보인다”며 “정확한 생산 시기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또 탄두가 유골 더미에 들어있는 경위는 알 수 없고, 유골들에서 총격(탄두)으로 인한 흔적은 확인하지 못했다고 국과수는 밝혔다. 당시 5·18 단체 관계자도 “탄두와 유골이 5·18과 관련되었는지 예단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들은 일제히 보도했다. 광주에서는 여전히 행불자들이 규명되지 않고, 암매장(暗埋葬)주장이 속시원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화성’이 강한 쟁점이다.

 

‘신원 미상 40여구’ 발단

광주교도소 ‘유골’이 주목받게 된 발단은 지난 해 12월 19일 광주교도소 무연고자(無緣故者) 묘지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유골 40여구가 발견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법무부는 교도소 부지에 ‘솔로몬 로파크’를 조성하기로 하고, 무연고자 묘지 이장(移葬)작업을 벌였다. 하지만, 이곳 무연고자 합장묘 1기에서 80여구의 유골이 나왔다. 40여구는 땅 속에 보관된 상자 형태의 콘크리트 구조물에서, 40여구는 콘크리트 구조물 위 흙더미에 섞여 발견됐다. 교도소는 기록상 합장묘에 있던 40여구 신원이 관리된 경우(41구)로 파악했고, 추가로 나온 40여구는 신원 미상의 유골로 분류헸다.

 

당시 ‘신원미상의 유골발굴’ 보고를 받은 김오수 법무부차관이 당일 현지를 방문, “5·18과 관련이 있다고 속단하기는 어렵다”면서도 “어떤 연유로 유골이 묻히게 됐는지 확인하겠다”고 밝혔다. 주목을 받게 된 순간이었다. 기록상 신원이 확인돼온 또 다른 1기의 합장분묘에서 나온 유골 20여구는 화장 처리되었다.(교도소에는 합장분묘가 신원이 파악된 분묘, 파악되지 않은 무연고자 분묘 등 두 곳이 있었다.) 그렇게 발언하게 된 배경이 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주둔했던 광주교도소는 그동안 5·18 당시 행방불명자의 암매장 의심 장소로 지목돼 왔다. 이 때문에 이곳에서 발굴된 신원 미상 유골들과 5·18과의 연관성에 관심이 모아졌다. 그에 따라, 경찰과 검찰 등은 이들 유골 80여기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보내 감식을 의뢰했다.

 

▲ 광주시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부지에 '솔로몬 로파크'를 조성하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교도소 북쪽 언덕부근(사진)에서 다량의 유골들이 발굴되었다. /권경안 기자

 

▲ 광주시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북쪽 네모난 형태의 표시구역에서 유골이 발굴되었다. /5·18기념재단 제공

당초 80여 구가 대퇴부 뼈 기준 261구로 늘어나

국과수가 1차 유골 분류작업한 결과, 발견된 유골은 당초 알려진 80여 기가 아니라 261기로 확인됐다. 유골 가운데 개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대퇴부뼈를 기준으로 분류한 결과, 모두 261구의 유골이 함께 묻힌 것으로 추정되었다. 국과수는 “유골들의 연령대는 어린 아이부터 60~70대의 남녀까지 다양했다”며 “유골이 묻힌 지 오래 지나 사인(死因)은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발견 당시 두개골에 구멍이 발견된 유골은 인위적인 힘이 가해져 생긴 것이 아니라 부패 등 자연적 요인에 의해 생긴 것으로 분석했다. 경찰과 검찰 등에 따르면, 현재 국과수는 유골 261기를 놓고 DNA 분석을 위한 시료(試料)채취 작업을 벌이고 있다. 시료채취 작업은 현재 25% 가량 진행되었다. 시료채취와 분석이 끝나려면 앞으로도 6~10개월 가량 더 걸릴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유골에서 DNA 추출이 끝나면, 5·18 당시 행방불명자로 신고한 가족들에게서 채취해 보관 중인 유전자와 대조 작업을 벌이게 된다. 현재, 광주광역시는 행방불명으로 신고된 171명의 가족 356명의 혈액을 채취해 유전자를 보관하고 있다.

 

아직 본격적인 DNA분석과 대조작업이 진행되지 않아, 예단하기 어렵다. 감식기관이나 관련단체, 학계 등에서는 유골감식과 관련하여 갖가지 얘기들이 나오고 있으나, 어떤 것도 정답일 수 없는 단계이다. 1980년 당시 계엄군은 M16 소총을 사용하였다. M1카빈(carbine)소총은 6·25전쟁기부터 100만정 가량이 보급되었다. 흔히 ‘에망총’으로 부르던 M1카빈소총은 1970년대 현역에서 은퇴, 예비군들이 사용해왔다. 지난 3일 발견사실이 알려진 탄두는 M1카빈소총의 탄환이었다. 이에 따라 계엄군에 의한 ‘탄환사용’ 가능성은 크게 줄어들게 된다. 그렇다면, 광주교도소 무연고묘지에서 수습된 유골들은 어떤 사람들의 것일까?

 

▲ 2017년 광주교도소(문흥동)내 암매장지로 추정된 교도소담장밑 등을 발굴하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일보 DB

 

▲ 5·18기념재단이 지난 1~2월 광주교도소 유골발굴지 주변을 추가 시굴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DNA분석후 행불자와 대조해야

당초 신원미상의 유골이 발굴되자, 일각에서는 두개골에 구멍이 난 것을 총상(銃傷)에 의한 것 아니냐고 성급하게 추정하기도 했다. 아직까지는 총상에 의한 구멍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국과수의 견해가 유력하다. 추정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그동안 유골을 둘러싼 ‘억측’보도가 없지 않았다. 유골들이 얽혀 있는 것으로 보아 급하게 암매장한 것 아니냐는 것도 있었다. 공사중인 광주시 북구 문흥동 소재 옛 광주교도소가 있었던 기간은 1971~2015년이었다. 교도소는 2015년 외곽지인 북구 삼각동으로 이전했다. 광주교도소(광주형무소)는 1908년 광주시 동구 동명동에 세워졌다. 수감자들이 노역했던 곳을 농장이라 했는데, 부근에 세워진 다리를 지금도 농장다리라 부른다. 1908년 이전에는 광주시 동구 충장로에 형옥(刑獄)이 있었다. 교도소가 동명동에 있었던 때는 1907~1971년이었다.

 

신원미상으로 규정되는 유골들은 대부분 조각 조각 바스라진 상태이다. 그에 따라 대퇴부뼈를 기준으로 인원수를 추정했다. 발굴 당시 한꺼번에 많은 유골들이 뒤섞여 있었다. 뼈들도 검게 변색된 것이 많아, 매장시점이 오래전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교도소기록에 의해 신원이 관리된 유골들의 경우는 5·18과 관련된 경우는 없었다. 신원미상의 유골들은 뼈의 색깔 등 상태와 매장경위추정 등에 따라 경우의 수가 어느 정도 짐작되고 있다. 광주형무소를 처음 세웠을 때 교도소부지 일부는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기 등을 지나며 동명동 형무소에 시신들이 매장되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무연고자로 분류되었을 수도 있다. 전쟁기에는 교도소 수감자들이 피살되는 경우가 있었다는 증언기록이 있다.

 

좌익 등 사상(思想)관련자들을 대상으로 했던 보도연맹 가입자들과 제주4·3사건 관련자 등이 광주형무소에 수감돼 있었다. 전쟁기에 이들은 광주시내 외곽지(5곳)로 옮겨져 처형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교도소안에서는 얼마나 어떤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 “3년 이상 수형자들은 모두 다 죽였다”는 증언도 남아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교도소안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시신매장이 이뤄졌겠다는 추정은 가능하다. 동명동에서 문흥동으로 이전하면서 동명동 부지에서 나온 신원미상의 유골들을 폐기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합하여 가져온 다음 재매장했다고 보여진다.

 

광주교도소는 1980년 이후 진상규명차원에서 주목을 받아온 곳중의 하나이다.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은 교도소옆 도로 등지에서 지나는 주민들에게 총격,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계엄군은 인근 야산에 일시 매장하기도 했고, 발굴되기도 했다. 이와는 별도로 교도소내 암매장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돼왔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5·18기념재단은 2017년 1월 암매장지로 지목된 교도소안 교도소장 관사부근, 서쪽 도로 부근, 북쪽 중앙부근 등을 발굴했으나 시신이나 유골을 발굴하지는 못했다.

 

무연고자 분묘 자리나 부근에서 1980년 5월 당시 5·18당사자로 희생된 이들의 시신들을 이곳에 묻었는지는 아직까지는 객관적인 증거로 드러난 것은 없다. 유골의 상태, 분묘조성경위 등 여러 정황으로 미뤄, 광주교도소에서 발굴된 유골들과 5·18과의 관련 가능성은 아직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관련단체나 기관, 전문가들은 말한다. 유골에 대한 국과수의 DNA 분석 작업과 행불자 가족과의 대조 작업이 모두 끝난 이후에라야, 이를 둘러싼 논란은 최종 정리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빨라도 분석과 대조에 시간이 필요하므로, 올해 결론이 나기는 어렵다. 내년까지는 기다려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