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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남북통일

[랭면과 철조망 2] 이유미씨의 좌충우돌 남한 성공기

잠용(潛蓉) 2021. 7. 4. 20:48

[랭면과 철조망 ②] 이유미씨의 좌충우돌 남한 성공기
9전10기 탈북 후 ‘믿고 사는’ 여성 중고차 딜러로 변신
시사저널ㅣ승인 2021.03.22 11:00 호수 1640

□ 분단 후 76년이 흘렀다. 한 사람이 태어나 노년에 이르는 기간이다. 앞서 숱한 위기 혹은 기회를 지났지만, 한반도 문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일각에선 “이제 변화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갈 통일에 더 이상 목맬 필요 없다”는 회의론까지 제기한다. 정말 그럴까.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권력구조가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 사이 북한 사람들은 참 많이 변했다. 시장 원리를 체득한 가운데 체제에 불만을 느끼는 이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런 각성에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현실적인 문제와 더불어 남한으로부터 전해진 소식, 문화 등도 적잖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증언해 주고 있는 탈북민들은 “남한이 변하고 있는 북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고 입을 모은다. 결코 통일불가론을 주장할 만큼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사저널은 남한에 정착한 뒤 남북 간 가교 역할에 앞장서온 탈북민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2021년 현재 북한 사람들의 삶과 문화, 추구하는 가치 등을 면밀히 파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편집자 주> 

(정리=오종탁 기자) 

오늘도 새벽 어스름을 뚫고 출근해 중고차 매물, 고객과의 거래 상황, 영업전략 등을 면밀히 확인합니다. 탈북 후 중고차 판매업에 도전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9년이 흘렀네요. 1명이었던 회사 직원은 현재 12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저희가 해마다 판매하는 중고차는 350~400대에 이릅니다. 신뢰를 쌓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수치예요. 입점해 있는 중고차 매매단지에서 ‘인증 딜러’(매매단지가 자체 검증 절차를 거쳐 선발하고 추천하는 딜러)는 저를 포함해 10명 정도입니다. 전체 딜러 3000여 명의 0.3%에 불과하죠. 처음 남한 땅을 밟았을 때를 생각하면 감개무량해요. 서울에 살면서 식당 종업원 일부터 시작했죠. 남한 정착 7년 차인 2012년, 삶의 경로가 바뀝니다. 지인의 권유로 한 자동차회사 대리점에 취직해 보니 ‘이거다’ 싶었어요. 차를 판매하는 일이 적성에 맞았습니다. 북한에서 터득한 장사 수완이 빛을 발하더라고요. 다양한 브랜드 차량을 팔아보고 싶어 인천의 중고차 매매단지로 서둘러 내려왔어요. 무작정 10만㎡ 규모 매매단지의 한 귀퉁이에 깃발을 꽂았습니다. 

ⓒ시사저널 이종현


연 400대 판매, 남한 고객이 80%  
물론 처음엔 힘들었습니다. 거저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탈북민과 여성 딜러에 대한 편견, 중고차 시장의 불신 풍조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았습니다. 일단 중고차 성능점검장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자동차 용어, 성능·품질 구별법 등을 자세히 배워나갔어요. 차를 제대로 알아 자신 있게 팔고 싶었습니다. 영업은 더 험난했죠. 지연·학연·혈연이 없는 ‘3무(無) 인맥’이니 발로 뛸 수밖에 없었어요. 저보다 2년 늦게 탈북해 오신 어머니와 함께 동네방네 쉴 새 없이 돌아다녔습니다. 매일 자정까지 주차된 차량 와이퍼에 전단지를 끼우고 명함과 카탈로그 수만 개를 우편으로 부쳤어요. 각종 모임에도 얼마나 많이 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3개월쯤 지나자 노력의 결실이 서서히 드러났습니다. 먼저 탈북민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어요. 탈북민 상당수는 남한 정착 후 자동차를 제일 사고 싶어 합니다. 북한에 살 때 비싼 가격과 당국의 규제로 인해 엄두도 못 냈기 때문이에요. 믿고 구매하는 남한분들도 하나둘 늘어나다가 어느덧 탈북민 비중을 넘어섰어요. 요즘은 남한 고객이 80% 정도로 다수를 차지합니다. 재구매, 소개 등이 이어질 때 그렇게 뿌듯할 수 없습니다. 고객과의 거래 과정에서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기면 신속하게 해결했어요. 덕분에 사업을 하면서 단 한 건의 클레임(품질 등에 문제가 있으면 항의하고 책임을 묻는 것) 기록도 없습니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맛보게 된 성공이에요. 여전히 고생스럽지만, 하루하루 감사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제겐 대한민국에서 당당히 경제활동을 하는 상황 자체가 선물과도 같거든요. 사업이 자리 잡혀갈 무렵인 2016년 방송 출연을 시작했고 2019년엔 유튜브 채널도 열었어요. 북한과 중고차 관련 이슈를 두루 다루는 채널입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에요. 일이 몰릴 땐 1~2시간밖에 못 자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허투루 살지 않겠다’는 저만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왔어요. 아직 주말에 쉬거나 휴가를 가본 적도 없네요. 

▲ 중국 지린성 투먼시에서 바라본 두만강변 북한 마을 전경. 이유미씨는 이 두만강을 수차례 넘어 탈북했다. /ⓒ연합뉴스


“자유 맛보면 죽는 한 있어도 계속 탈북” 
그거 아세요? 북한 양강도 혜산시 출신들이 원래 좀 악착같습니다. 농업도 어업도 안되는 지역이라 생활력이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어요. 저도 2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나 일찍부터 밀수 등 이런저런 장사를 했습니다. 북한, 특히 중국 접경지에서 밀수는 보편적인 생계 수단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는 본격적으로 밀수에 뛰어들었어요. 양강도에서 고위층에 속했던 아버지는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다가 돌연 보위부에 붙잡혀 가셨어요. 김일성 혁명 업적 구호나무(김일성 주석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하기 위해 각종 구호를 새겨 놓은 나무)가 화재로 전소했다는 이유였죠. 황당했습니다. 자연재해의 책임을 묻다니요. 
 
보위부 감옥에 갇혔다가 한참 뒤 나온 아버지의 몰골은 처참했습니다. 배는 복수로 가득 차 산달을 앞둔 임신부 같더군요. 당을 향한 아버지의 충성심은 와르르 무너져내렸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불러 “나는 오래 못 살 듯하니 넌 꼭 엄마, 오빠, 동생과 함께 남한으로 가라”고 말하곤 한 달여 만에 돌아가셨어요. 그때가 1999년입니다. 저에게 온갖 악재가 한꺼번에 터져 잊을 수 없는 연도예요. ‘복은 외골수로 오고 화는 쌍으로 온다’는 북한 속담이 딱 들어맞았죠. 아버지가 죄인 취급을 받고 돌아가시자 당은 저희를 북한에서 가장 척박하다는 삼수갑산(함경남도에 있는 삼수와 갑산 지방)으로 추방했어요. 도저히 살 수 없어 다시 혜산시로 도망쳐온 저희 가족은 삼촌 댁에서 더부살이했습니다. 보탬이 되려고 닥치는 대로 중국 보따리상들과 거래했습니다. 좀 먹고살 만하니 이번엔 검열(북한 당국이 반체제 행위 등을 조사해 처벌하는 활동)의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검열을 피해 함경남도 함흥시로 장사하러 가던 중 차량 전복 사고를 당했어요. 6개월간 하반신 마비를 겪다가 스스로 재활에 매진한 끝에 겨우 다시 일어섰습니다.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자 밀수를 재개했어요. 어느 날 함경북도 경성군 산삼을 사기로 했던 중국 보따리상이 시간이 꽤 지나도 오지 않더라고요. 더 기다릴 수 없어 직접 국경을 넘었습니다. 제 첫 번째 탈북이었어요. 이후 중국 공안국에 잡혀 북송되고, 다시 탈북하는 과정을 거듭했습니다. 중국 체류 중엔 지린성 옌지시의 식당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유일한 목표는 남한으로 들어갈 기회를 잡는 것이었어요. 중국에서 잠깐이나마 자유의 맛을 본 북한 사람들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또 국경을 넘습니다. 그런데 옌지시에서 비행기로 2시간여밖에 걸리지 않는 남한에 가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던지요. 번번이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되기를 반복했습니다. 북한에서 보위부 조사를 받을 때는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 목적으로 간 거였다’고 진술하거나 간부에게 뇌물을 주며 풀려나왔죠. 탈북에 나선 사람이 워낙 많아 당도 강하게 통제하지 못했어요. 탈북 과정에서 인신매매로 팔려갈 위기까지 겪는 등 산전수전 끝에 2006년 12월 드디어 남한에 들어옵니다. 저의 권유로 2008년 어머니와 남동생도 대한민국 품에 안겼습니다.  
  
어머니는 남한에서 10여 년간 아파트 청소 일을 하셨어요. 지금은 쉬며 가끔 제 유튜브 방송에도 출연하십니다. 북한에서 어머니는 약사셨습니다. 일반 노동자보다 2.5배가량 높은 월급을 받으셨죠. 그럼에도 30년 약사 생활보다 탈북 후 청소부로 일한 10년이 단연코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북한에서 항상 동원되고 감시·통제당하는 통에 느꼈던 환멸이 남한에선 싹 사라졌다고 하세요. 어머니가 제 곁에 계셔서 다행 또 다행입니다. 남한에 가족 없이 혼자 있었을 때는 어떤 음식을 먹어도 맛있는지 모르겠고 개그 프로그램을 봐도 하나도 재미있지 않더라고요. 북한에 남아 있는 동포들에 대한 감정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통일이 되어 북한 사람들도 꼭 자유를 맛보면 좋겠어요. 그들에게 멋들어지고 품질 좋은 중고차를 소개할 날이 얼른 오기를 소원합니다.  

▲ 이유미씨가 어머니와 함께 유튜브 영상을 촬영하는 모습 /ⓒ유튜브 채널 ‘중고차는유미카’

“탈북민들, 뼈 깎는 노력으로 바닥부터 일어서야” 
경제활동 참가율 62%, 월평균 소득은 204만원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들은 어떻게 경제활동을 하고 있을까. 통일부 조사에 따르면, 최근 데이터(2019년) 기준 탈북민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62.1%, 고용률은 58.2%였다. 일반 국민의 경제활동 참가율(63.3%)과 고용률(61.4%)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탈북민의 월평균 소득(204만7000원)은 일반 국민(264만3000원)보다 60만원가량 낮았다. 탈북민의 절반 이상이 단순 노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데 따른 영향이다. 사상 유례없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탈북민에 관한 고용·소득 지표는 더욱 나빠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정부는 지난해 말부터 탈북민 생계 지원 정책을 강화해 왔다. 탈북민들의 직업 역량을 키우고 맞춤형 일자리를 찾아주는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이유미씨는 정부 지원책에 더해 탈북민들도 뼈를 깎는 자구 노력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씨는 “3만5000여 명에 달하는 탈북민 중 진짜 열심히 사는 사람은 40~50%밖에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다른 체제와 문화 속에서 경제활동에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극복하기 위해 애써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도 취직이나 밥벌이가 어렵긴 매한가지다. 공짜나 요행만 바라선 안 된다”며 “탈북 초기 정부 도움을 받아 정착했으면 열심히 일하고 기회를 찾아 다른 탈북민 등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북한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중요치 않다. 다 내려놓고 바닥부터 다져나간다는 생각을 품으면 좋겠다”며 “대부분은 대충 밥이나 먹는 데 만족하자고 목숨 걸고 탈출한 게 아닐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유미/ 한솔모터스 이사·탈북 방송인 sisa@sisa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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