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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남북통일

[랭면과 철조망 3] 북한 음식 전문점 ‘동무밥상’ 운영하는 옥류관 출신 셰프 윤종철씨

잠용(潛蓉) 2021. 7. 5. 09:58

[랭면과 철조망 ③] 북한 음식 전문점 ‘동무밥상’ 운영하는 옥류관 출신 셰프 윤종철씨

“평냉의 계절 돌아오면 남북도…”
시사저널ㅣ승인 2021.04.05 15:00 호수 1642

 

□ 분단 후 76년이 흘렀다. 한 사람이 태어나 노년에 이르는 기간이다. 앞서 숱한 위기 혹은 기회를 지났지만, 한반도 문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일각에선 "이제 변화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갈 통일에 더 이상 목맬 필요 없다"는 회의론까지 제기한다. 정말 그럴까.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권력구조가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 사이 북한 사람들은 참 많이 변했다. 시장 원리를 체득한 가운데 체제에 불만을 느끼는 이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런 각성에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현실적인 문제와 더불어 남한으로부터 전해진 소식, 문화 등도 적잖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증언해 주고 있는 탈북민들은 "남한이 변하고 있는 북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고 입을 모은다. 결코 통일불가론을 주장할 만큼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사저널은 남한에 정착한 뒤 남북 간 가교 역할에 앞장서온 탈북민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2021년 현재 북한 사람들의 삶과 문화, 추구하는 가치 등을 면밀히 파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편집자 주>


문을 열고 들어서니 면 삶는 냄새와 온기가 먼저 반긴다. 손님들의 식탁엔 여지없이 냉면이 올라와 있다. 그릇을 손에 쥐고 면을 들이켜는 자세가 사뭇 정성스럽다. 찹쌀순대, 소고기 초무침, 명태식해 등 곁들인 음식도 예사롭지 않다. 이곳은 탈북민 윤종철 셰프(65)가 운영하는 식당 ‘동무밥상’이다. 서울 마포구에서 6년째 정통 북한 음식을 선보여왔다. 

북한의 대표 음식점 옥류관에서 냉면 만드는 법을 배워 온 윤 셰프는 특출난 이력과 손맛 외에 각종 방송 출연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장사가 잘될 수밖에 없었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엔 매출이 2~3배로 급증했다. 그러나 지난해 들이닥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윤 셰프는 “평균 200만원대를 웃돌던 하루 매출이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뒤 한때 15만원까지 떨어졌다”면서 “가만히 있다간 죽겠다 싶어 신메뉴로 준비하던 북한 개성식 들깨죽을 서비스로 제공하고 중국산 김치는 일절 쓰지 않는다고 홍보하는 등 안간힘을 쓰는 중”이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박정훈

 

북한 장군 16명 입맛 맞추며 요리 섭렵 
매출보다 더 큰 걱정거리는 건강이다. 윤 셰프는 뇌종양·관절·디스크 수술을 거치며 부쩍 쇠약해졌다. 그는 “일할 몸 상태가 아닌데, 주방에서 요리해야 사는 보람이 있기에 힘들어도 참는다”고 했다. 이런 윤 셰프의 모습에 많은 손님이 지지를 보냈다. 특히 강한 공감대를 형성한 셰프들이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왔다. 윤 셰프와 SNS에서 수시로 소통하는 것을 넘어 정기적으로 만나 서로의 흉금을 터놓고 있다. 출신 지역이나 나이를 초월한 우정이다. 윤 셰프는 “많은 친구를 얻어서 너무 행복하다”며 “탈북민의 대한민국 정착에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바로 남한 사람들과 서로 대화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3월17일 윤 셰프는 페이스북을 통해 하루 매출이 170만원대로 회복됐다고 알렸다. 그러면서 “몸과 마음이 아프지만 사는 동안 힘을 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게시글엔 73개의 응원 댓글이 달렸다. 윤 셰프는 일일이 답글로 고마움을 전했다. 남한 생활 22년 차인 그가 더불어 사는 행복을 느끼게 된 것은 불과 8년 전이다. 다시 음식을 만들면서였다. 1998년 탈북해 2000년 남한으로 온 윤 셰프는 10년 넘게 요리칼을 잡지 않았다. 윤 셰프는 “북한에선 요리하는 남자를 경시하는 풍조가 있다”며 “남한 정착 후에도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요리와 상관없는 일만 닥치는 대로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진짜 배운 건 요리밖에 없었는데…”라며 공백기에 대한 짙은 아쉬움을 표했다. 

윤 셰프가 북한에서 쌓은 요리 경력을 돌아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함경북도 온성 출신인 윤 셰프는 18세 때 조선인민군에 입대하면서 요리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훈련하고 총도 좀 쏴보고 싶어 군대에 갔더니 갑자기 평양 옥류관으로 배치됐다”며 “4개월간 냉면 등 기초 요리를 배웠다. 신병 훈련을 옥류관에서 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출신성분이 괜찮아 나름대로 덜 위험하고 편한 보직을 받은 것 같다고 윤 셰프는 추정했다. 윤 셰프의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항일 투쟁 경력이 있어 북한 정권으로부터 국가유공자 대우를 받았다. 그 덕에 아버지는 노동당 간부로 일했다. ‘옥류관 훈련’을 수료한 윤 셰프는 부직간부식당에서 10년간 복무했다. 부직간부식당은 장성급 장교들이 식사하는 곳이다. 계획경제 체제인 북한에서는 식당이 많지 않고 ‘맛집’ 개념도 희박하다.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 식재료 생산과 유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지 오래다. 일반 주민들은 식당 방문은커녕 양질의 식사를 챙기기도 여전히 쉽지 않다. 장성급 장교들이 식사하는 곳은 전혀 달랐다. 윤 셰프는 “최고급 요리만 다뤘다”면서 “담당했던 장성 16명의 고향이 제각각이라 입맛과 취향에 맞게 만들어주느라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1980년대 중반 군문을 떠난 윤 셰프는 부대 안과 딴판인 북한 현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군 시절 내내 좋은 음식과 환경에 둘러싸여 ‘우리(북한) 사회가 이렇게 발전했구나’라고 착각했다”며 “집에 돌아와 보니 10년 전보다 더 낙후됐더라. 강산이 거꾸로 변한 것”이라고 개탄했다. 이는 탈북의 발단이 됐다. 

▲ 북한 평양 대동강변에 있는 옥류관 /ⓒ연합뉴스

 

자고 일어나면 굶어 죽던 곳에서 탈출 
윤 셰프는 제대 후 회령경공업단과대학에서 발효를 공부해 한동안 발효식품을 만들거나 강의하며 지냈다. 종종 평양에 큰 행사가 있으면 불려가 칼을 잡기도 했으나, 전업 요리사로 사는 길은 피했다. 그 사이 북한 경제는 갈수록 더 악화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불어닥친 이른바 ‘고난의 행군’(식량난)은 생존마저 위태롭게 했다. 윤 셰프는 “자고 일어나면 옆집에서 또 앞집에서 죽어 나갔다.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르겠단 걱정이 들었다”며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 여유롭게 살고 싶어서 1998년 탈북했다”고 전했다. 2년간 중국에서 지내며 바라본 북한은 너무나 안타까웠다. 더 많은 사람이 아사하거나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돌파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북한 당국은 북중 접경지에 철조망을 세우며 주민들을 억압하기 바빴다. 동시에 남한은 중국이 부러워할 정도로 잘살고 있었다. 윤 셰프는 수만 가지 생각을 하다가 ‘일단 같은 민족이 사는 남한으로 가 있자’고 결단했다. 말이 통하고 일한 만큼 보상받는 남한 사회에서 그는 살아남으려 고군분투했다. 건설현장 일용직, 각종 허드렛일 등 안 해 본 게 없다. 다단계 업체의 꼬임에 빠지거나 사기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북한과는 다른 차원의 쓴맛을 경험하며 가라앉던 윤 셰프를 붙잡아준 것은 다름 아닌 요리다. 윤 셰프는 2013년 사회적 기업 ‘호야쿡스’를 이끄는 이호경 대표의 제안에 따라 북한 요리 강의를 시작했다. 물 만난 고기나 다름없었다. 군 복무 중 고향의 맛을 그리워하는 장성들을 위해 요리하느라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 양강도 등 북한 대부분 지역 요리를 두루 섭렵한 윤 셰프였다. 말로 하든 시범을 보이든 몸에 온전히 녹아 있던 ‘요리 DNA’가 십분 발휘됐다. 그러다 이 대표와 손잡고 2015년 연 북한 요리 팝업스토어는 새로운 계기가 됐다. 윤 셰프는 “당초 일주일에 하루만 문을 열었다가 수요가 많으니 이틀, 사흘로 늘렸다”며 “주 3회 열거면 그냥 식당을 운영하자는 생각이 들어 정식으로 동무밥상을 개업하기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메밀 40에 전분·밀가루 각각 20의 비율로 섞어 만든 면, 소·닭고기로 뽑은 육수, 동치미, 특제 간장 등이 어우러진 동무밥상 평양냉면은 남한에서 옥류관 맛과 가장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윤 셰프는 “손님 중에 다른 (서울 시내) 평양냉면 맛집 이름을 알려주며 ‘가서 먹어보라’고 권하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 냉면이 입에 맞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며 “그러면 ‘그 식당 사람들에게 여기 와서 먹어보라고 해라. 여기가 진짜’라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외식도 하지 않는다. 북한 음식 고유의 맛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덧붙였다. 요리를 향한 그의 집념과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열심히 돈 벌어 세금 냈을때 큰 보람 느껴” 
윤 셰프가 가장 큰 보람을 느낀 순간은 언제였을까. 그는 “열심히 장사해서 대한민국 정부에 세금을 당당히 냈을 때 비로소 ‘내가 정착했구나’ ‘당당하게 남한 사람들과 같은 줄에 서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면서 “이후로는 매일매일 보람스럽다. 특히 손님들이 냉면 국물까지 맛있게 다 먹는 것을 보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며 활짝 웃었다. 그의 남은 소망은 북한 음식을 최대한 알리고 보전하는 일이다. 앞서 방송에 적극적으로 출연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윤 셰프는 “2016년 요리 경연 TV 프로그램인 《한식대첩》에 출연했을 땐 스튜디오가 있는 경기도 여주와 가게를 오가며 살인적인 일정을 감당해야 했다”며 “당시만 생각하면 아직도 등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나 아니면 누가 북한 음식을 알리겠나 싶어 이 악물고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윤 셰프를 버틸 수 있게 한 또 다른 동력은 바로 아내 송혜옥씨다. 송씨는 윤 셰프를 도와 가게를 꾸려나가면서 매니저, 운전기사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송씨는 윤 셰프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윤 셰프가 중국에 있을 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어른이 바로 송씨의 아버지다. 동무밥상 주방에선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제자가 윤 셰프로부터 요리 비법을 배우고 있다. 윤 셰프는 “3년 동안 혹독하게 가르쳤는데, 제자가 잘 버텨줬다”며 “생전에 이 맛을 더 전수해 주고 끝까지 살려가는 게 내 마지막 임무인 듯하다”고 말했다. 뒤돌아보면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요리가 윤 셰프에겐 운명이었다. 더없이 값진 경험을 안겼고 막다른 길에서 빠져나오게 했고 많은 인연을 만들어줬다. 윤 셰프는 남북관계도 자신의 인생처럼 좋은 결과로 이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그는 “우리네 삶을 봐라. 두 갈래로 나뉘어 싸우거나 서먹서먹했다가도 밥 먹으러 식탁에 앉으면 금세 풀리고 친해진다”면서 “남북 동포가 서로 활발히 왕래하고 대화, 음식 등을 나누며 닮아감으로써 통일을 앞당길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평양 옥류관, 2200명 동시 수용 능력에 하루 2000kg 고기 소비 
윤종철 셰프가 근무했던 옥류관은 남한 사람들이 통일 후 꼭 가보고 싶어 하는 북한 명소 중 하나다. 평양 중구역 대동강변에 있으며 본관 1000명, 별관 1200명 등 총 22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1961년 8월 개관한 뒤 전통적인 서북 지방 한식을 제공해 왔는데, 대표 메뉴는 역시 평양냉면이다. 윤종철 셰프는 “하루 1만 명 이상의 손님이 다녀간다. 점심, 저녁 타임에 소비되는 고기만 2000kg 이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옥류관은 북한 주민들이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냉면 맛집이 아니다. 당국의 행사나 외국인 관광객 수요 등을 빼고 일반 주민들이 맛볼 수 있는 양은 제한적이다. 북한 양강도 혜산 출신 탈북민 허영희씨는 “옥류관 냉면을 먹을 수 있는 표 대부분을 권력자들이 나눠 가지듯이 하는데, 북한 당국이 군중의 눈을 의식해 중심구역(평양시 주변) 주민들에 한해 겨우 한두 장씩 나눠준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심구역 사람들도 형편이 넉넉한 게 아니라서, 배급받은 표를 전문 매매꾼(옥류관 냉면 암표상)들에게 팔아버리기 일쑤”라고 덧붙였다. 평양에 쉽게 접근하지도 못하는 지방 사람들은 옥류관 냉면 구경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북한에서 옥류관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사람은 권력층뿐이라고 탈북민들은 전한다. 윤 셰프는 “권력층이나 그 가족이 아니라도 줄(백)이 좋으면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을 수 있지만, 드문 경우”라고 설명했다.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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