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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남북통일

[랭면과 철조망 1] 탈북녀 서른 살 김가영씨가 전하는 2021년 북한 이야기

잠용(潛蓉) 2021. 7. 4. 12:26

[랭면과 철조망 ①] 서른 살 김가영씨가 전하는 2021년 북한 이야기

“아시나요? 남한 사람들을 구세주로 여긴다는 사실을”
 시사저널ㅣ2021.03.15 10:05 호수 1639

 

ⓒ 시사저널 임준선 

 

분단 후 76년이 흘렀다. 한 사람이 태어나 노년에 이르는 기간이다. 앞서 숱한 위기 혹은 기회를 지났지만, 한반도 문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일각에선 “이제 변화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갈 통일에 더 이상 목맬 필요 없다”는 회의론까지 제기한다. 정말 그럴까.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권력구조가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 사이 북한 사람들은 참 많이 변했다. 시장 원리를 체득한 가운데 체제에 불만을 느끼는 이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런 각성에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현실적인 문제와 더불어 남한으로부터 전해진 소식, 문화 등도 적잖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증언해 주고 있는 탈북민들은 “남한이 변하고 있는 북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고 입을 모은다. 결코 통일불가론을 주장할 만큼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사저널은 남한에 정착한 뒤 남북 간 가교 역할에 앞장서온 탈북민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2021년 현재 북한 사람들의 삶과 문화, 추구하는 가치 등을 면밀히 파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편집자 주> 


(정리=오종탁 기자) 
스물두 살이던 2013년 탈북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직후 여성들이 크롭티를 입은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윽고 찢어진 청바지 차림의 남성을 보고는 너무 신기해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어요. 이제는 그런 패션에 익숙한 9년 차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사실 아직도 남성들이 머리를 길러 묶는 것만큼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문화, 경험은 물론 쓰는 언어 표현도 다른 게 많아 주변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정착이 덜 된 것 같다”는 푸념을 하곤 해요. 남한에서 태어나 오래 사신 분들도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 따라가기 힘들다고 하시는데, 우리 같은 탈북민이야 오죽할까요? 제 고향은 북한 양강도 북부에 있는 혜산시입니다. 압록강을 끼고 중국과 접해 있죠. 겨울에는 영하 38도까지 내려가는 추운 곳이라 어릴 때 얼었던 두 볼에 아직도 홍조가 남아 있습니다. 

‘상위 1%’ 집안에 유치원 교사로 일하다 탈북 
남한에 와서는 조용히 지내다가 2016년 TV조선 《모란봉클럽》 출연을 계기로 대중과 소통해 왔습니다. 평탄치 않았던 제 과거를 꺼내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조금이나마 털어놓고 보니 탈북 후 몇 년 동안 쌓인 응어리가 한 번에 확 풀리는 듯했어요. 4개월 전부터는 유튜브 ‘김가영의 내로남불’ 채널도 개설했어요. 주제 선정, 게스트 섭외, 촬영, 편집 등을 도맡으며 유튜브 세상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TV 프로그램, 유튜브 영상 등에서 못다 한 제 이야기를 시사저널 지면으로 전하게 돼 더욱 기쁩니다. 
 
탈북 전 직업은 유치원 교양원(교사)이었어요. 아이들에게 김 부자(김일성·김정일·김정은)와 주체사상에 관해 가르쳤습니다. 세뇌교육을 한 거죠.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이들에게 미안합니다. 직업인으로서 책임을 다하느라 열심히 일했지만, 북한 사회의 모순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거든요. 북한에서 저희 집안은 비교적 좋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양강도에서 알아주는 집안이었습니다. 남한 표현으로 하면 ‘상위 1%’라고 할까요. 친가와 외가 모두 당과 수령을 위해 열심히 일한 덕이었죠. 부족함 없이 살다가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 자연스레 제 가치관에 균열이 생기게 됩니다. 

그 시작은 13세 때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시면서였습니다. 어머니가 국가검열(북한 당국이 반체제 행위 등을 조사해 처벌하는 활동)로 감옥에 다녀오신 뒤 후두암을 얻었어요. 평소 지병이 있는 분도 아니었습니다. 열악한 감옥에서 검열을 받다가 쇠약해진 탓이었어요.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용한 것으로 유명한 평양 봉화진료소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한 달도 안 돼 숨을 거두셨어요. 충격과 상심이 컸던 아버지도 몇 개월 뒤 돌아가셨습니다. 당시에는 부모님을 앗아간 체제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커가면서 서서히 진실과 모순 등에 눈을 뜨게 됐어요. 어린 시절 공개처형 장면을 목격했을 때 그저 두려움에 떨었다면, 성인이 되어선 불신, 반항심 등도 함께 드는 식이었죠. 유치원 교양원으로 일하면서도 각 아이 집안의 빈부격차가 심한 것을 확인하고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 북한 양강도 혜산시 주민들이 압록강변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정은이 왜 우리 아버지인가요?” 
그러다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기업인이셨던 이모가 북한 당국으로부터 열한 번 검열을 받으며 피폐해진 겁니다. 어머니를 허망하게 떠나보낸 기억이 있기에 그냥 넘길 수 없었어요.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집안이었음에도 북한에서 더 살다간 지속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결백을 호소해도 당이 ‘그렇다’고 하면 끝이니까요. 결국 이모, 사촌언니와 함께 북한을 떠나자고 결심했어요. 떠나서 향할 곳은 남한밖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가야만 우리가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사례 외에도 최근 북한에선 주민들의 심경 변화를 짐작할 만한 요소가 차고 넘칩니다. 당국을 상대로 드러내진 못해도 다들 불만에 가득 차 있었던 걸 눈치나 직감으로 알 수 있었어요. 경제도 사실상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북한 장마당에선 사람들끼리 “우리가 이렇게 살려고 태어났냐” “살라는 거야, 죽으란 거야”라는 말도 서슴없이 합니다. 배급이 아닌 시장경제로 먹고산 지 오래인데, 이마저 북한 정권이 단속하고 막으려 하기 때문이에요. 여기에 이동식 메모리 저장장치(USB)로 남한 드라마, 노래 등을 공유하는 수준이니 남한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알 만큼 압니다. 
 
오죽하면 제가 가르치던 유치원생들조차 “우리 아버지가 왜 김정은(국무위원장)이에요?” “원수님(김 위원장)은 우리를 위해 고생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 드신다면서 왜 저렇게 뚱뚱해요?”라고 물어봅니다. 과거처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거죠. 이런 북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세요. 제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입니다. 저는 카메라 밖에서도 늘 “대한민국이 천국 같고, 여기서 사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고 강조합니다. 북한에 있었을 때의 삶을 통째로 잊고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 저를 포함한 탈북민 3만5000여 명이 잊으면 통일의 길, 북한 사람들이 이 좋은 세상을 누릴 수 있는 길이 멀어질 것 같아서입니다. 

북한 사람들은 ‘남한 사람들은 우리의 구세주’라고 여깁니다. 저도 북한에 있을 때 그랬고요. 남한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 있고, 남한 드라마를 봤고 안 봤고, 남한이 잘살고 못살고와는 관계없습니다. 그냥 남한 사람들만이 자신들을 지옥에서 구해 줄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요. 유일한 방법은 통일이고요. 북한 지도부가 아닌 일반 주민이라면 대부분 통일이 되어 자유롭게 살기를 희망한다고 저는 감히 확신합니다. 남한 사람들은 어떤가요. 남한에 와서 보니 통일을 원치 않는 분도 많았어요. 잃는 게 더 크다고 생각하시더라고요. 경제적인 측면을 봐서라도 꼭 통일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북한 사람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다면 투자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요. 긴 분단 세월로 인해 여러 어려움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같은 민족인 북한 사람들이 우리 경제에 편입되면 다른 나라의 노동력을 쓰는 것보다 훨씬 더 나라와 기업에 이익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 2013년 함께 탈북한 사촌언니 김지영씨(오른쪽)와 함께 유튜브 영상을 촬영하고 있는 김가영씨 ⓒ유튜브 채널 ‘김가영의 내로남불’ ‘마음의 병’ 억누르고 사는 탈북민들 

“지원도 중요하지만 인식 개선 선행돼야” 
김가영씨는 탈북 방송인·유튜버, 통일·안보 강사 등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심리상담사로도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지난해 11월 에니어그램 일반 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전문 강사 자격증도 따기 위해 공부 중이라고 전했다. 김씨가 심리상담을 공부하게 된 것은 바로 자신 때문이었다. 2019년 몸에서 종양이 발견된 후 김씨는 우울감, 무기력증에 빠졌다. 그는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난 기억이 커서 (종양 발견 진단에) 너무 겁났다”며 “하늘을 향해 ‘어릴 때 아버지, 어머니를 데려가서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제 겨우 이 좋은 남한에 정착한 나한테 왜 또다시 불행을 안겨주느냐’고 원망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다행히 수술이 잘 이뤄져 김씨의 건강은 완연히 회복된 상태다. 탈북 전부터 쌓여 임계점에 이른 마음의 상처는 심리상담으로 치료받았다. 김씨는 “처음엔 내키지 않았지만, 주변 분들의 권유로 심리상담에 응했다”면서 “내 마음 상태를 적나라하게 확인하고, 앞으로 어떻게 관리해 나가야 하는지를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김씨의 유튜브 채널 이름인 ‘내로남불’(남이 할 때는 비난하던 행위를 자신이 할 땐 합리화하는 태도)도 심리상담 교육 과정에서 착안해 정해졌다. 그는 “심리상담을 배우면서 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내로남불로 사는 게 보이더라”며 “유튜브나 오프라인 활동을 통해 탈북민 등 마음의 문제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러면서 “이런 활동을 바탕으로 통일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 심리상담사로서 많은 사람에게 상담해 주며 좋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탈북민 상당수는 탈북과 남한 정착 등의 과정에서 마음의 병을 앓아도 김씨처럼 털어놓고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김씨는 “북한 사람들이 심리, 정신건강 등의 키워드에 대해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다. 다 뭉뚱그려 ‘정신병’이라고 부정적으로 여기는 탓”이라며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드러내기 싫어하고, 심적으로 힘들거나 아플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이런 분위기에도 탈북민의 정신과 이용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2010년 1664명에서 2019년 3696명으로 2배 넘게 늘어났다. 또 2019년 기준 탈북민의 정신과 이용률은 24.0%로 전체 의료수급권자(4.6%)의 6배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심리상담이나 치료를 외면하는 탈북민이 많음을 감안하면 향후 더 큰 문제와 비용을 초래할 수 있는 사안이다. 대책 마련을 위해 보건복지부 국립정신건강센터와 남북하나재단, 통일부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는 최근 업무협약을 맺었다. 이에 대해 김씨는 “고무적인 움직이지만, 일단 탈북민들의 성향상 적극적으로 정부 지원에 제대로 응할지 우려스럽다”면서 “먼저 탈북민들이 마음의 문제도 당연히 치료받아야 할 하나의 병이라는 사실을 알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인식 개선 작업부터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가영/ 탈북 방송인·심리상담사 sisa@sisa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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