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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남북통일

[랭면과 철조망 ⑫] 남유럽에서 4년간 외화벌이하다 체제 등지고 탈출

잠용(潛蓉) 2021. 10. 1. 04:56

[랭면과 철조망 ⑫] 남유럽에서 4년간 외화벌이하다 체제 등지고 탈출
北 수중발레 국대 출신 류희진씨, 다시 영그는 ‘거위의 꿈’
시사저널ㅣ2021.09.26 12:00 호수 1667

보통 ‘탈북(脫北)’ 하면 북한 주민이 압록강·두만강이나 휴전선을 넘는 장면부터 떠오른다. 그러나 해외에서 북한을 등지고 대한민국 또는 제3국으로 망명하는 탈북민도 상당수다. 북한 아티스틱 스위밍(수중발레) 국가대표 출신인 류희진씨(30)는 유럽에서 4년여간 외화벌이 일꾼으로 일하다가 2015년 탈북했다. 이어 2016년 한국에 정착한 류씨가 국내 언론과 인터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급박한 탈북 과정 내내 류씨는 가수 인순이가 부른 《거위의 꿈》을 들었다고 했다. 류씨의 톡톡 튀는 개성과 재능, 그리고 꿈은 폐쇄되고 억압적인 북한 체제에서 버려지고 찢겼다. 그는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는 대신 거스르기로 했다. ‘난 꿈이 있어요. 저 차갑게 서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라는 노래가사는 류씨를 위로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 ⓒ시사저널 박정훈


‘해외 근무’ 열망에 국가대표 타이틀 내려놔  
탈북 후 6년여가 지났다. 9월16일 서울 강남 코엑스 인근에서 만난 류씨는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며 눈을 반짝였다. 체제, 운명 따위를 넘어선 그의 꿈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북한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탈북했다고?  
“한 남유럽 국가에서 북한 체제를 피해 도망쳤다.” 
탈출 이유는?  
“체제에 대한 불신은 남유럽으로 오면서부터 조금씩 싹튼 것 같다. 북한과 너무도 다른 세상에서 자유롭고 평화롭게 사는 다양한 사람들을 난생처음 만났다. 나서 자라고 충성해 왔던 북한에 대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탈북해야겠다’는 마음이 곧장 든 건 아니었다. 부모님이 평양에 계셨기에 열심히 일하다가 (해외 근무의) 만기가 되면 조용히 귀국하려 했다. 잔잔히 타오르던 불꽃에 기름을 부은 것은 북한 당국의 감시와 통제였다.” 


류씨는 스무 살에 북한을 떠나 남유럽으로 왔다. 수중발레 국가대표 선수 생활을 접고 외국행 비행기를 탄 건 순전히 새로운 세상을 향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앞서 수중발레 국가대표를 그만둔 선배 한 명이 몇 년 만에 선수촌 수영장에 얼굴을 비쳤다. 선배는 중국에서 북한식당 종업원으로 일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국가대표로서 매일같이 연습에만 매진해 오던 류씨는 확 달라진 선배의 외모에 깜짝 놀랐다. 그는 “웨이브 머리에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우아하게 인사하는 선배를 보고 충격받았다”며 “선배가 ‘외국물을 먹으면 다 이렇게 된다’기에 나도 북한식당 종업원으로 나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고 했다. 

북한에선 웬만한 고위층 자제가 아니고서는 류씨 같은 청년, 특히 여성이 해외 체류를 하기 힘들다. 심지어 수중발레 국가대표들도 국제대회 참가나 교류 등 경험을 하기 어렵고, 간혹 하더라도 아시아권 대회 기간 잠시 개최국에 머무는 데 그친다고 류씨는 전했다. 외화벌이 일꾼으로 나가는 게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류씨는 한 외화벌이 회사가 유럽에 진출할 계획이란 소식을 듣고 지원했다. 수십 명의 지원자 가운데 당당히 최종 3인에 뽑혀 교육 과정을 거쳐 남유럽으로 떠나게 됐다. 

 

▲ 코엑스 아쿠아리움에서 수중발레 공연 중인 류희진씨(오른쪽) /ⓒ류희진씨 인스타그램

 

국가대표 타이틀 포기하고 외화벌이 일꾼을 선택했다. 아쉽진 않았나?  
“여덟 살에 수중발레를 처음 접한 뒤 10년 넘게 한 우물만 팠다. 16세부터는 3년여 동안 국가대표 선수 생활도 해오고 있었다. 다 내려놓고 해외로 떠난다는 결심을 당연히 쉽게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남달랐던 호기심과 도전정신이 안주하려는 마음을 이겼다. 마침내 북한이 아닌 다른 나라, 그것도 머나먼 유럽에 가기로 결정됐을 땐 성취감이 느껴졌다. ‘어린 나이에 성공을 이뤘다’는 자부심마저 들었다.” 
당시 부모의 반응은?  
“아버지가 굉장히 우울해하시던 게 떠오른다. 음악인인 아버지는 외동딸을 끔찍이 아끼셨다. 평양 백화점에서 옷, 신발 등을 사 오셨기에 ‘유럽에 가면 더 좋은 상품이 있을 텐데 왜 사 오셨냐’ ‘내가 많이 사다 드리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네가 무슨 돈이 있어’ 하면서 묵묵히 사 온 물건들을 싸주셨다. 떠나는 날엔 ‘가지 말고 여기 있으면 안 되겠니’라고도 물으셨다. 그땐 구름 위를 걷듯 들떠있어서 아버지의 슬픔을 헤아리지 못했다.” 

남유럽 국가에서 류씨는 북한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는 동시에 현지인들에게 수중발레를 가르쳤다. 북한의 외화벌이 일꾼들은 번 돈의 80%를 당국에 상납해야 한다. 류씨도 월급 1000유로 중 200유로만 가질 수 있었다. 이마저도 회사 사장이 체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류씨는 식당 손님이 건넨 팁을 한두 푼 모아 생활비를 조달했다. 불합리한 환경이었으나, 류씨는 해외에서 살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뻤다고 회상했다. 아파트에 따로 지내며 근무시간 외엔 여가와 인터넷을 맘껏 즐길 수 있어서다. 회사에서는 항상 밝고 최선을 다하는 류씨를 핵심 자원으로 인정했다. 

보위성 요원에게 찍혀 집중 감시당해 
얼마 후 함께 온 동료 2명이 북한으로 돌아갔다. 운 좋게 남아 해외 근무를 이어가게 된 류씨는 추가로 돈을 벌 방법을 모색했다. 퍼뜩 스친 아이디어가 만두를 빚어 판매·배달하는 것이었다. 타깃 고객층은 평소 친하게 지낸 한국인 유학생들로 설정했다. 물론 북한 보위성 요원 몰래 진행했다. ‘비밀 장사’는 순항하는 듯했다. 어느 날은 만두 200개를 한꺼번에 주문받았다. 너무 신난 류씨는 밤을 새워 만두를 만들었다. 고이 만두를 싸 들고 버스에 타서 주문한 한국인 유학생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빠, 지금 버스 타고 가고 있어요.’ 몇 분 뒤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보위성 요원이었다. 알고 보니 문자가 한국인 유학생이 아닌 보위성 요원에게 간 것이었다. 류씨의 운명을 뒤흔드는 ‘실수’였다. 
 
전화를 받고 보위성 요원의 거처로 달려간 류씨는 숨 막히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요원은 류씨가 방에 들어오자 문을 잠가버렸다. 류씨는 요원에게 사정하다시피 둘러댔다. 그는 “‘평양에 있는 사장이 매출을 올리라고 강요해서 어쩔 수 없이 한국인 유학생 대상으로 그림, 북한 약품 등 다양한 제품을 팔아왔다. 그냥 팔긴 좀 그래서 서비스로 만두를 빚어 갖고 간 것’이라고 소명했다”며 “엄청난 모욕과 경고를 받고 다행히 숙소로 돌아오긴 했지만, 이후 나를 보는 보위성 요원의 눈빛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어떤 변화가 있었나? 
“근처에 중국인이 운영하는 봉제공장이 있었다. 그곳에도 북한 외화벌이 일꾼들이 대거 배치됐다. 우리 회사와 달리 봉제공장은 북한과 다를 바 없는 감옥 같은 분위기였다. 대표적인 게 ‘생활총화’(북한 노동자들이 공개 석상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동료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의식)다. 보위성 요원이 나한테 이 봉제공장 생활총화에 참석하라고 명령했다. 이전까진 해외에서 생활총화를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북한에 있을 때 생활총화를 많이 경험해 봤을 텐데... 
“수중발레 국가대표 생활 등을 하면서는 누구보다 철저하게 생활총화에 참여했다. 북한 정권에 대한 충성심도 남달랐다. 그런데 몇 년 만에 생활총화를 하니 극심한 이질감이 엄습했다. 내 또래 직원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서로 비판하고 북한 정권을 찬양하는 장면이 도무지 현실 같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의 내 모습이었는데도 말이다. 해외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인간다운 삶을 누리니 어느새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과거의 내가 떠올라 슬퍼지기까지 하더라.” 

‘자유로운 영혼’ ‘자본주의 날라리’가 되었다는 자각은 류씨에게 묘하게 다가왔다. 분명히 싫진 않았다. 류씨는 한국 드라마 등 방송 프로그램과 탈북민들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영상을 시청하며 가치관을 가다듬었다. 특유의 유쾌하고 솔직한 성품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휴일을 맞아 모처럼 봉제공장 직원 몇 명과 바닷가로 놀러 간 류씨는 흥겨운 음악 소리에 이끌렸다. 누구나 춤추고 노래할 수 있는 작은 주점이었다. 류씨는 주저하는 봉제공장 직원들을 데리고 주점으로 들어갔다. 꼬깃꼬깃 챙긴 돈을 꺼내 칵테일 한 잔씩을 주문하고 분위기를 즐겼다. 긴장이 풀어지고 딱딱하게 굳었던 몸도 들썩들썩 움직였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화들짝 놀라 시계를 보니 봉제공장 숙소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날 봉제공장 숙소에선 통금 시간을 어긴 직원들을 비판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청년 비서 활동을 하는 직원이 소집한 회의였다. 류씨는 “봉제공장 소속이 아닌 나에겐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못했다. 그래도 친구들이 바닷가에서 머리를 식히다 조금 늦게 왔다고 저렇게까지 혼내다니, 분노감이 들었다”며 “왜 해외에 나와 돈을 벌면서까지 맹목적인 충성과 비인간적인 자세를 버리지 못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고 말했다. 

▲ 류희진씨가 신세계백화점 대전점 아쿠아리움에서 인어로 분장해 공연하고 있다. ⓒ류희진씨 인스타그램


북송 조짐에 탈출… 독일 거쳐 한국으로  
해당 사건은 보위성 요원에게 보고됐다. 요원은 류씨에게 “앞으로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봉제공장 숙소에만 있으라”고 윽박질렀다. 며칠간 숙소에 머무르던 류씨는 크게 잘못한 일도 없이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한 현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결국 수중발레 레슨을 하기 위해 숙소를 벗어나 수영장으로 향했다. 수중발레 코치 동료·학생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레슨을 시작한 지 몇 분이 지났을까. 수영장 관람석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보위성 요원이었다. 그렇게 류씨는 보위성 요원에게 끌려갔다. 

참담했을 것 같다. 다시 보위성 요원 방으로 갔나. 어떤 처분을 내리던가?  
“또 방문을 잠그고 이번엔 자아비판서를 쓰게 했다. ‘보위원 동지가 금지했음에도 학생들을 보고 싶고 레슨도 하고 싶어 수영장에 갔습니다’라고 솔직하게 쓴 비판서를 제출하니 찢어서 내 얼굴에 뿌려버리더라. 그러면서 부르는 대로 쓰라고 했다. ‘당의 신임과 배려에 보답은 못 할지언정 배신하는 짓을 저질렀습니다’란 내용이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끔찍한 비판서를 쓰게 한 데서 그치지 않고 열 손가락 지장도 찍으라고 했다. 인생이 끝난 것 같았다. 요원에게 무릎 꿇고 빌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넌 이제 늦었어’였다. 그때 남은 미련이 싹 가셨다. 충성심 때문에 자기 딸뻘 되는 사람의 꿈과 미래를 아무렇지 않게 짓밟아버리는 요원의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비판서가 북한 당국으로 제출됐나?  
“요원이 다른 나라에 있는 보위성 상부 조직에 내 문제를 포함한 여러 가지를 보고하러 간 정황을 파악했다. 그 직전엔 평양에서 전화가 왔다. ‘네가 회사의 희망이다. 유럽에 계속 있어 달라’고 늘 독려하던 회사 사장이 별다른 설명 없이 평양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말로만 듣던 강제 북송(北送) 조짐이었다. 황급히 짐을 싸 도망쳤다.” 
원래 한국으로 올 생각이었나?  
“아니다. 탈출 후 유럽의 여러 나라를 지나 독일로 들어갔다. 독일에 완전히 정착할 예정이었다. 그러다 북한 당국의 감시망이 좁혀오는 것을 느껴 급하게 독일 정부에 난민 신청을 하려 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독일에서 시리아 난민 사태가 터졌다. 시리아 난민이 대거 몰리면서 난민 신청이 아주 많이 어려워졌다. 밖에서 한없이 기다려야 했고 신청 수용 여부도 불투명했다. 무작정 줄을 섰는데, 너무 춥더라. 따뜻한 나라에서 얇은 옷가지만 챙겨 나온 터라 오들오들 떨면서 10월의 독일 추위를 버텼다. 이틀 정도 지나자 인내심이 바닥났다. 멍하니 서 있다가 언제 북한 보위성 요원들에게 발각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까스로 휴대전화를 빌려 한국대사관으로 전화했다.” 

한국에 대한 편견과 두려움은 대사관 직원들은 만나는 순간 눈 녹듯 사라졌다. 류씨는 “대사관의 모든 분이 크게 환영해 줬다”면서 “한 분이 내 손을 꽉 잡고 ‘한국에 가서 잘 지낼 수 있을 거다. 한국은 좋은 생각을 하면서 열심히 살면 보상이 꼭 따르는 나라다. 두려워하지 말고 씩씩하고 당당하게 나아가라’고 독려하는데, 아빠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서 교육받은 것과 달리 한국은 따뜻한 나라고, 그곳에 가면 내가 다시 일어나 꿈을 이룰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고 덧붙였다. 

5년 전 처음 한국 사회에 나왔을 때는 현실이 녹록지 않았다. 류씨는 “혼자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막막했다. 주변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해 수영장 인명구조요원, 수영강사 등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했다”며 “좋은 인연이 쌓여 가면서 수중발레 레슨과 공연도 하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 류씨는 서울에서 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수중발레를 가르치고 있다. 가끔은 아쿠아리움 수중발레 공연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준다. 경영학도(동국대 경영학과 4학년)로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힘든 점은 없나?  
“즐기면서 한다. 남유럽에 있을 때처럼 하고 싶은 일이 아주 많다. 우선 수중발레 레슨을 더 활발히 할 계획이다. 대학원에서 스포츠경영을 전공하고픈 욕심도 생긴다. 요가·필라테스 관련 자격증도 5개나 땄다. 나중엔 수중발레와 요가·필라테스를 모두 배울 수 있는 종합 스포츠학원을 내 이름으로 여는 게 목표다.” 
통일에 관한 생각은?  
“북한 사람들도 인터넷 사용과 해외여행을 맘껏 할 수 있는, 진정한 통일이 되면 좋겠다.” 

북한 체제에서 류씨는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거위 같았다. 이젠 날개를 활짝 펴고 드넓은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가고 있다.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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