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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민속·역사

[대동여지도] 누가 대동여지도 목판을 일본 총독부에 헐값으로 팔아먹었나?

잠용(潛蓉) 2021. 10. 31. 09:01

[유석재의 돌발史전] 누가 대동여지도 목판을 총독부에 헐값으로 팔았나?
조선일보ㅣ유석재 기자 입력 2021. 10. 30. 10:01 수정 2021. 10. 30. 11:53 댓글 4개

 

▲ '대동여지도' 22첩을 펼친 모습. /조선일보 DB


조선 최고의 지리학자이자 조선 고지도 최대의 걸작인 ‘대동여지도’를 만든 사람이 누군지는 초등학생들도 안다. 19세기 인물인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다. 그런데 그에 대한 일반인의 상식 중 잘못된 것이 많다. ①당시 지도의 정확성이 너무나 떨어졌기 때문에 직접 정확한 지도를 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②지도 제작을 위해 백두산을 일곱 번 올라가는 등 전국 곳곳을 답사했다. ③나라에 지도를 바쳤으나 흥선대원군은 그를 외국의 첩자로 의심해 옥에 가둬 죽게 했고, 대동여지도 목판은 불태워졌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근거가 없는 얘기라는 게 최근 학계의 설명이다. ①은 당시의 지도 제작 수준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말로, 조선 후기에 이미 ‘동국대지도’나 ‘팔도분도’처럼 뛰어난 수준의 지도가 나왔고, ‘대동여지도’는 그 성과 위에서 나온 지도라는 것이다. ②는 고지도가 실측에 의한 지도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데서 나온 속설인데, ‘대동여지도’는 당대 지리서와 지도의 성과를 집대성한 지도이지 실측으로 얻어낸 성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백두산에 올라가 봐야 산만 보일 뿐이지 주변 지형을 제대로 알 수는 없다는 얘기다. 그럼 ③은? 김정호를 감옥에 가뒀다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과 ‘추안급국안’을 비롯한 당대 어느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결정적인 사실이 등장한다. 불태워졌다던 ‘대동여지도’ 목판 11장이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멀쩡히 남아 있다.

 

▲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 목판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전국 답사설’과 ‘옥사설’이 처음 나온 것은 1925년 10월 8일과 9일자 국내 한 신문에 실린 ‘고산자를 생각함’이란 기사였다. “그는 정확한 정황을 알기 위하여 팔도의 산천을 샅샅이 답사함을 사양하지 아니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백두산만을 일곱 번 올라갔으며 이를 위하여 수십 년 나그네 길을 하였다”는 말이 이 기사에 처음 나온다. 이어 “필경 국가의 중요 정보를 외국인에게 알릴 주동자가 되겠다는 죄목으로 얽어매서 반평생의 정성과 한 집안의 희생으로서 고심하여 만들어졌던 조선에서 특별하고 뛰어나게 만들어진 보배탑인 ‘대동여지도’는 그만 몰이해한 관헌에게 그 판본을 몰수당하고”라고 썼다.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글 중에 ‘근자에 조선광문회가 지도 도판을 발행하고 남대문 밖 약현 유허에 기념비를 건립하려고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글의 문체나 1910년에 설립된 한국 고전 간행단체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의 내용을 자세히 알고 있는 것으로 봐서 이 글을 쓴 사람은 육당 최남선(崔南善·1890~1957)이었을 것이라는 유력한 추정이 있다.

▲ 고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1890~1957)


이광수·홍명희와 함께 ‘조선 3대 천재’로 불리던 최남선은 한마디로 국학의 대가였다. 잡지 ‘소년’을 발행하고 최초의 근대시로 분류되기도 하는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쓴 문인이자, 조선광문회 설립을 주도한 학자였다. ‘오등은 자에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3·1운동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한민족의 문화적 독창성을 강조하는 ‘불함문화론’을 제창한 민족사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다른 얼굴도 있다. 1927년 조선총독부의 어용단체인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이듬해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1943년엔 도쿄에서 학병 권유 강연을 했다. 이런 행적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인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됐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기사 ‘고산자를 생각함’이 후대에 미친 영향은 컸다. 총독부가 1934년 간행한 교과서 ‘조선어독본’에는 ‘전국 답사설’과 ‘옥사설’을 그대로 실었고 ‘당시 조선 시도가 엉성해 정확한 지도 작성에 나서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추가했다. 이 이야기는 광복 후 국민학교 국어 교과서에 계승됐고 ‘목판을 압수했다’는 부분은 ‘목판을 불살랐다’는 얘기로 발전됐다. 이 얘기들은 훗날 각종 어린이 전기류는 물론 드라마와 영화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2016)의 한 장면. 학계에서 이미 폐기된 '전국답사설'이 그대로 나오는 영화다. /CJ ENM


일단 이런 이야기들을 걷어내더라도 ‘대동여지도’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짚어야 한다. 고지도는 자세한 지리 정보를 담은 지리서를 바탕으로 제작하는 것인데 김정호는 ‘동여편고’에서 ‘대동지지’에 이르는 5종의 방대한 지리서를 편찬했고, 네 차례 ‘청구도’와 두 차례 ‘동여도’ 제작을 거쳐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 ‘대동여지도’는 조선의 뛰어난 지도 제작 기술을 집대성한 위에 서양 과학을 가미한 불후의 명작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동여지도 목판은 원래 60여장이었을 것으로 보아지만 현존하는 것은 숭실대 박물관 소장본까지 모두 12장이다. 목펀으로 인쇄한 지도는 서울대 규장각, 서울역사박물관, 성신여대 박물관 등에 온전히 남아 있다. 대동여지도가 탄압 받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남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도대체 언제 어떤 경로로 ‘대동여지도’ 목판을 입수하게 된 것일까? 압수됐거나 불태워졌다는 그 목판을 말이다.

 

▲ 28일 저서 '김정호 연구' 펴낸 이상태 한국고지도연구학회 회장이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것을 최근 고지도 전문가인 이상태 한국고지도연구학회장(전 국사편찬위원회 연구편찬실장)이 밝혀내 연구서 ‘김정호 연구’(경인문화사)에 실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던 ‘대동여지도 목판 대금 청구서’와 ‘대동여지도 목판 대금 지출결의서’를 찾아낸 것이다. 박물관이 그것을 입수한 해는 1924년이었는데, 유물을 입수한 기관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인 조선총독부 박물관이었다. 이 사실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다.

 

▲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대동여지도 목판 대금 청구서'. /이상태 제공

 

▲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대동여지도 목판 대금 지출결의서'. 왼쪽 아래 최한웅(崔漢雄)이라는 판매자의 이름이 보인다. /이상태 제공

총독부 박물관에 목판을 판매한 사람은 누구인가? 문서에 기록된 대금 청구인은 최한웅(崔漢雄·1917~2002)이었다. 훗날 소아과 의사, 시인, 출판사 사장으로 활동했지만 그의 이력은 여기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대동여지도’ 목판을 총독부에 팔았던 시점에서 그의 나이는 만 7세였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엔 누구나 진짜 판매인은 이 어린이가 아니라 그의 부모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최한웅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최남선이었다.
그는 어느 시점에 알 수 없는 경로로 ‘대동여지도’ 목판을 입수해 1924년까지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목판이 압수됐다’는 등 김정호에 대한 잘못된 이야기를 담은 ‘고산자를 생각함’이란 기사가 나온 것은 그 이듬해인 1925년이었다. 최남선이 중심 인물이었던 조선광문회가 ‘대동여지도’ 도판을 발행하고 기념비를 세우려는 운동을 펼치던 그 무렵을 전후해 최남선은 어린 아들의 이름으로 ‘대동여지도’ 목판을 총독부에 팔아넘겼던 것이다. 최남선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지 5년 뒤의 일이었다. 육하원칙 중에서 다섯 가지는 밝혀졌으나 늘 그렇듯이 가장 드러나기 어려운 ‘왜(Why)’는 아직 알 수 없다.

목판을 판 대금을 받을 때 최한웅의 대리인으로 나선 사람은 야마우치 히로에(山內廣衛)라는 일본인이었는데, 기자가 검색해 보니 그는 당시 조선총독부 학무국 소속으로 박물관 고적조사과의 촉탁직 직원이었다. 문서에도 ‘경복궁 내 고적조사과’라 적혀 있다. 목판 11장의 총 판매 가격은 60원. 종종 쓰는 방법대로 당시 1원을 현재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12만원이라고 볼 때 대략 720만원 정도에 해당한다. 얼마 뒤 화신백화점에서 팔던 영국제 양복 한 벌(70원) 가격에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일제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뒤 서울의 총독부 박물관 유물을 미처 챙겨가지 못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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