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프랑스서 돌아온 외규장각 도서,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될 수 없다… 예외는 딱 한점
경행신문ㅣ2022.02.08 05:00 수정 : 2022.02.08 10:11
ㅁ 강화도 외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었던 <효명세자빈 죽책>. 1819년(순조 19) 풍은 부원군 조만영(1776~1846)의 딸인 풍양 조씨(1808~1890)를 효명세자(1909~1930)의 부인으로 책봉하면서 제작한 것이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불탄 것으로 알려졌지만 2017년 프랑스 경매에 출품된 것이 확인되어 구입환수됐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74434’라는 숫자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2006년 방영된 MBC의 ‘느낌표-위대한 유산 74434’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숫자이다. ‘74434’는 당시 국외에 흩어진 한국문화재가 엄청났음을 알리는 상징숫자였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2022년 1월 현재 그 숫자는 어떻게 변했을까. ‘214,208’점(25개국)이 됐으니 외려 2.88배나 늘었다. 일본(9만4341점)이 절반 가깝고(44%) 미국(5만4185점·25.3%)과 독일 1만5402점(7.2%) 등이 뒤를 잇고 있다.
늘어난 이유가 있다. 해외 소재 문화재 관련 조사가 본격 이뤄졌고, 2012년부터는 해외에 흩어진 한국문화재를 조사·연구·환수·활용 등을 담당하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발족한 덕분이다.
ㅁ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은 각종 문헌자료에 보인다. 효명세자의 가례(혼인)를 기록한 1819년 의궤에도 죽책의 그림과 함께 제작방법 관련 설명문이 실려있다. 또 강화도에 설치된 외규장각의 봉안물품 목록에도 첫번째 쪽에 ‘효명세자빈의 죽책’이 보관되어 있다고 분명히 실려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 여전히 프랑스 국적인 외규장각 도서
필자가 국외소재문화재단 설립 10주년을 맞아 받아본 국외소재 한국문화재의 환수실적은 2011년부터 2341점(7개국 61건)에 달했다. 그중 기증 685점(20건), 구입 103점(21건), 수사공조 12점(4건), 협상 1541점(13건) 등이었다.
궁금증이 생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발족한 것이 2012년인데, 왜 2011년부터 통계를 잡았을까?
그 해 일본 궁내청이 소장한 조선 왕실 의궤 167책(81종)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반출 도서 938책(66종) 등 1205책(150종)이 ‘인도’ 형식으로 반환됐다. 당시 일본의 민주당 소속 간 나오토 총리(菅直人·재임 2010년 6~2011년 8월) 시절이어서 한·일 관계가 ‘반짝’했던 때였다.
ㅁ 2011년 145년 만에 귀국한 외규장각 도서 297책. 그러나 297책은 반환이 아니라 5년 단위의 대여 형식으로 돌아온 것이다.
2011년은 또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외규장각 도서(의궤) 297책이 돌아온 해이기도 했다. 외규장각 도서는 1866년 병인양요(고종 3년)를 일으킨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문화유산이다. 1975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였던 박병선 박사(1928~2011)가 찾아낸 이후 수십년간 한국-프랑스 관계를 가로막는 ‘뜨거운 감자’였다가 145년 만에 돌아왔다.
이렇게 2011년에 이뤄진 두 문화재의 귀국이 계기가 되어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발족됐다.
국새와 어보, 의궤처럼 대한민국 소유가 분명한 해외소재 문화재의 경우 정부기관인 문화재청 등이 직접 나선다.
그러나 국외소재 문화재 중 민간 소유품의 관리를 두고는 정부가 나서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때 정부를 대신해 국외소재 개인소유 문화재를 담당할 전문 기관의 필요성이 있다. 이것이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신설 근거다. 국외소재 문화재는 이렇게 정부기관(문화재청 등)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이른바 ‘투 트랙’으로 담당하고 있다.
ㅁ 2022년 1월 현재 국외소재 한국문화재는 25개국에 21만4208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 중 일본에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9만4000여점(44%)의 한국문화재가 흩어져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자료 제공
이 대목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지금 이 순간 ‘문화재청 지정문화재(국보·보물) 목록’에서 ‘외규장각 도서(의궤)’를 검색해보면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당연히 대한민국 국보·보물이어야 할 외규장각 도서가 검색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일까?
귀국할 때나 지금 이 순간이나 외규장각 도서 297책의 국적이 ‘프랑스’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소유 문화재는 임의로 다른 나라에 양도할 수 없다”는 프랑스 국내법에 따라 완전 반환할 수 없었다. 때문에 양국간 협의를 통해 ‘5년 단위로 갱신되는 대여 형식’으로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대한민국의 문화재보호법상으로도 외규장각 도서는 국보나 보물로 지정할 수는 있다. 문화재보호법 23조는 ‘유형문화재 중 중요한 것을 보물로 지정할 수 있고, 그 보물 가운데 인류 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국보로 지정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국적 관련 조항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프랑스 국적인 ‘외규장각도서’를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하면 외교적인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 게다가 지정문화재가 되면 ‘프랑스 국적의 문화재’를 대한민국의 문화재보호법으로 관리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외규장각 도서를 섣불리 대한민국 보물 혹은 국보로 지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ㅁ 2011~2021년 사이 반환, 구입, 압수, 기증 등의 방법으로 국내에 환수된 국외소재 문화재는 7개국 61건 2341점에 달한다. /문화재청 자료
■ 약탈목록에서 빠진 외규장각 자료의 출현
그런데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자료 중에 현재 대한민국 국보·보물로 지정 추진되고 있는 특별한 예가 있다.
<효명세자빈 죽책>이다. 효명세자빈은 1819년(순조 19) 효명세자(1809~1830)의 부인인 된 신정왕후 조씨(1808~1890)를 가리킨다. <효명세자빈 죽책>은 조씨를 세자빈으로 책봉할 때 대나무를 엮어 제작한 왕실문서이다.
이 죽책은 우연한 기회에 찾게 된다. 2017년 6월 7일 밤 해외경매에 출품된 한국문화재가 있는지를 검색하던 김동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기획조정부장의 눈에 심상치않은 경매물건이 걸렸다. 죽책이었다.
유물의 고화질 사진을 살펴보니 ‘기묘년(1819년) 조씨를 세자빈으로 책봉한다’는 글귀가 선명했다. <순조실록>과 <효명세자가례도감의궤> 등 문헌기록과 일치했다. 병인양요가 발발하기 9년 전인 1857년(철종 8) 왕실이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한 봉안물 장부(<형지안>)에도 죽책의 목록이 실려있었다.
ㅁ 호조태환권(인쇄원판). 1893년 구화폐를 신화폐로 교환하기 위해 발행한 교환권의 인쇄 원판이다. 이 호조태환권 원판인 한국전쟁 와중에 미군이 덕수궁에서 미국으로 무단반출했다. 2010년 이 유물이 경매에 출품되자 한미 당국의 공조수사를 통해 압수됐고, 2013년 9월 3일 원소유자인 대한민국 정부의 품에 반환됐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왕대비전(신정왕후 조씨)이 기묘년(1819년) 세자빈으로 책봉 될 때의 죽책 1책.(王大妃己卯年世子嬪冊封時竹冊一)’
그렇다면 이 죽책도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자료가 분명하지 않은가. 왜 이런 자료가 경매에 출품됐을까?
프랑스군은 1866년 강화행궁에 있는 외규장각에서 의궤 등 각종 왕실자료를 약탈한 뒤 불을 지르고 철수했다. 프랑스군은 약탈품들의 목록과 수량을 기록한 보고서를 올렸다. 그런데 이 약탈목록에 이 <효명세자빈 죽책>은 빠져 있었다.
조선왕실의 장부에는 남아있지만, 프랑스군의 약탈목록에는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 <효명세자빈 죽책>은 강화도 외규장각에 봉안되어 있다가 병인양요 때 불에 탄 자료가 아닐까.
그것이 어느날 갑자기 경매에 등장한 것이다. 이 죽책은 미술품 수집가인 소장자의 할아버지가 1930년대에 파리 골동품상에서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1866년 병인양요 약탈품에서 누군가 슬쩍 해서 팔아넘긴 문화재 속에 이 죽책이 끼어있었을 것이다.
이 죽책은 온라인게임회사(라이엇게임즈)의 후원으로 2018년 구입환수됐다. <효명세자빈 죽책>은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자료 중 대한민국 소유의 국보·보물이 되는 유일한 사례가 될 것 같다.
ㅁ 역시 한국전쟁 당시 참전미군이 덕수궁에서 무단 반출해간 대한제국 국새인 ‘황제지보’와 ‘유서지보’, ‘준명지보’. 한미간 수사공조 끝에 이 3점을 포함해서 9점의 인장이 압수됐고, 2014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방한 때 정식 반환됐다. 이 ‘황제지보’와 ‘유서지보’, ‘준명지보’는 보물로 지정됐다.
■ 줄줄이 돌아오는 국새와 어보
환수된 문화재 가운데 2014년 버락 오바마 미국대통령의 방한 때 가져온 ‘황제지보’, ‘유서지보’, ‘준명지보’ 등과 ‘대군주보’(2019년), ‘이선제 묘지’(2017년), ‘앙부일구’(2020년), ‘일본 궁내청 조선왕조 의궤’(2016년) 등이 보물로 지정됐다. 앞으로도 가치평가 후 반환문화재의 문화재 지정이 줄을 이을 것이다. 이 중 ‘황제지보’ 등 최근들어 한미간 수사공조로 심심찮게 환수되고 있는 왕실유물이 눈에 띈다.
그 첫번째 단추는 2013년 9월 미국 내에서 몰수·환수된 호조태환권(인쇄원판)이었다.
호조태환권(인쇄원판)은 1893년 근대적 화폐제도를 도입하려던 고종이 구화폐를 신화폐로 교환하기 위해 발행한 교환권의 인쇄 원판을 말한다. 덕수중에 소장되어 있든 호조태환권은 1951년 한국전쟁 당시 미군(라이오넬 헤이즈)이 미국으로 무단반출했다. 2010년 10월 이 유물이 미국 경매에 출품된다는 정보가 미국 수사당국인 국토안보국(HSI)를 통해 주미한국대사관측에 전달된다.
미국 내에서는 불법 거래된 문화재의 반입·유통을 형사처벌하는 엄격한 법규정이 존재해왔다. 관세법(1930년)에 따라 미국 반입 때 미신고물품에 대해서는 밀수죄가 적용되고, 연방도난품법(1943년)에 따라 도난·도굴품에 대해서는 몰수·인적처벌 등 형사적 제재가 가해진다. 이후 2년 여의 한미 수사공조를 통해 덕수궁에서 훔쳐간 이 호조태환권은 압수됐고, 2013년 9월 3일 원소유자인 대한민국 정부의 품에 반환됐다.
ㅁ 역시 도난품임이 확인되어 압수반환된 문정왕후 어보와 현종어보. 이중 문정왕후 어보는 LA카운티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었다. 현종어보는 미국 소장자가 한국의 방송사 기자에게 소장경위와 함께 실물을 공개함으로써 덜미가 잡혔다. 방송을 본 문화재청 관계자가 미국 당국에 수사를 의뢰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 ‘도난품인지 확인해달라’는 한통의 이메일
호조태환권 문제가 마무리된 직후인 2013년 9월 23일이었다. 김병연 문화재청 국제협력과 사무관에게 이메일이 발송된다.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 한국지부가 보낸 사진첨부 메일이었다.
“한국전쟁 참전 해병대 장교의 사위가 고인이 된 장인의 유품을 처분하려 한다. 이 도장들이 도난품인지 알아봐달라.”
전문가 검토에서 이 유물이 대한제국 국새(‘황제지보’) 등을 포함한 9개의 인장임을 확인한다. 문화재청은 미국의 연방도난품법(1943년)에 따라 미국 HSI에 수사를 의뢰했다.(10월21일)
참전 미군은 평소 “중공군과 북한군이 철수하면서 덕수궁 내의 웬만한 문화재는 모두 약탈해갔으며, 이 인장들은 구덩이에 묻혀있던 것을 가져왔을 뿐”이라고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수사과정에서 이 물품은 명백한 도난품임이 밝혀졌다.
ㅁ 2019년 반환된 ‘대군주보’. 수난사를 상징하듯 이 국새에는 미국인인 듯한 W B. Tom의 서명이 선명하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미국 HSI는 11월18일 대한제국 선포(1897년)를 계기로 제작한 국새(‘황제지보’) 등 9점을 전격 압수했다. 압수한 유물은 이듬해 4월25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재임 2009~2017)의 한국 방문 때 정식 반환됐다.
2013~14년 호조태환과 국새의 압수 반환 과정에서 한미간 의미심장한 양해각서(MOU)가 교환된다.
문화재 수사의 효율성을 위해서는 신속하고도 지속가능한 한미공조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양해각서 체결로 대한민국 정부의 재산이 분명한 국새·어보 등의 환수가 이어지고 있다.
2017년 한·미 공조수사로 한국전쟁 때 미국으로 불법 반출이 된 ‘문정왕후 어보’(LA카운티박물관 소장)와 ‘현종어보’(개인소장)가 환수됐다. 2019년 반환된 국새(‘대군주보’)와 어보(‘효종어보’)의 경우 재미교포가 1990년대 경매를 통해 구입했지만 역시 도난품이었다.
ㅁ 도굴당한지도 모른채 일본으로 밀반출됐다가 소장자의 기증으로 반환된 <이선제 묘지>. 무덤 안에 있어야 할 묘지(墓誌)가 도굴된 뒤 김포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밀반출됐다. 훗날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일본내 한국문화재의 유통을 조사하던 중 <이선제 묘지>의 존재를 알게됐다. 이후 끈질긴 환수노력 끝에 소장자의 자발적인 기증에 따라 반환됐다.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 도굴된지도 모르고 밀반출된 문화재의 귀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환수품 중 백미로 꼽는 사례가 있다. 일본으로 밀반출됐다가 극적으로 환수된 ‘이선제 묘지’(보물)이다. ‘묘지(墓誌)’는 죽은 사람의 행적 등을 돌이나 자기 등에 기록한 글을 가리킨다. ‘이선제(1390~1453)묘지’는 광산 이씨 상서공파의 5세손으로 세종~단종 등 세 임금을 모신 이선제의 행적을 분청사기에 기록한 글이다.
1998년 9월2일 각 언론에 깜짝 놀랄만한 기사가 실렸다. 이선제의 무덤 속에 안장돼 있어야 할 묘지가 감쪽같이 사라져 일본으로 밀반출됐다는 내용이었다. 어찌된 일이었을까?
ㅁ 2017년 미국 경매사이트에 매물로 나온 강노의 초상화. 구입환수됐다. 강노의 증조할아버지는 18세기 최고의 문인화가이자 평론가인 표암 강세황(1713~1791)이다. 마침 국립중앙박물관은 강세황과, 강현(1650~1733·강세황의 아버지), 강인(1729~1791·강세황의 장남), 강이오(1788~1857·강세황의 손자) 등 이미 ‘강씨 4대의 초상화’를 소장하고 있었다. 구입한 ‘강노의 초상화’와 이 4명의 초상화를 비교해보니 놀랍도록 닮은 모습이었다. 수십년 아니 수백년간 이역만리에 흩어져 있다 해도 여전히 피는 못속이는 것이 조상의 흔적이 아닌가 싶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난된 이선제 묘지는 그해(1998년) 김해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밀반출되려 했지만 실패했다. 당시 공항에 파견된 문화재감정관이 “문화재가 분명한 이런 유물은 절대 해외로 반출할 수 없다”고 버텼기 때문이다.
도난신고가 없었기에 압수도, 수사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한달 뒤 일이 터졌다. 밀매단이 김포공항의 세관원을 뇌물로 매수한 뒤 문화재감정절차를 생략한채 ‘이선제 묘지’를 여행용 가방에 넣어 일본으로 밀반출해버린 것이다. 광산 이씨 문중은 신문에 도난-밀반출 기사가 날 때까지 ‘이선제 묘지’의 존재 자체도 알 수 못했다. 무덤 안에 있던 묘지를 어떻게 알았겠는가. 이 유물은 사라진지 16년 만(2014년)에 모습을 드러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도쿄(東京) 내 한국문화재 유통조사를 실시하던 중 ‘이선제 묘지’의 존재를 알게됐다. 이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끈질긴 환수노력, 뒤늦게 불법반출 사실을 확인한 일본측 소장자의 조건없는 기증으로 환수됐다.
ㅁ 2020년 경매를 통해 구입한 앙부일구와, 나전국화넝쿨무늬합. 해시계인 앙부일구는 은입사를 포함한 세부문양이 정교하다는 평을 받아 단박에 보물이 됐다. 전세계에 단 3점 밖에 없는 나전국화넝쿨무늬합의 구입환수도 화제를 뿌렸다. 이 역시 보물 지정은 시간문제다. /국립고궁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피는 속일 수 없는 초상화 5대
2017년 10월 미국 경매사이트에 출품된 초상화가 있었다. 큰 코와 양다문 입, 눈동자 주위를 동심원처럼 맴돈 눈….
초상화의 화면 오른쪽에 ‘강판부사 정은(姜判府事 貞隱)…’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정은(貞隱)’은 조선 후기 좌의정을 지낸 강노(1809~1889)의 호였다. 강노의 증조할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이자 평론가인 표암 강세황(1713~1791)이었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은 강세황과, 강현(1650~1733·강세황의 아버지), 강인(1729~1791·강세황의 장남), 강이오(1788~1857·강세황의 손자) 등 이미 ‘강씨 4대의 초상화’를 소장하고 있었다. 경매를 통해 구입환수된 강노 초상화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강씨 4대 초상’과 비교해본 사람들의 반응은 이구동성이었다. ‘누가 같은 집안 사람들 아니랄까봐 어찌 이렇게 닮았을까?’
수십년 아니 수백년간 이역만리에 흩어져 있다 해도 여전히 피는 못속이는 것이 조상의 흔적이 아닌가 싶다.
이밖에 2020년 미국경매를 통해 구입 환수된 앙부일구는 은입사를 포함한 세부문양이 정교하다는 평을 받아 단박에 보물이 됐다. 전세계에 단 3점 밖에 없는 나전국화넝쿨무늬합의 구입환수도 화제를 뿌렸다. 이 역시 보물 지정은 시간문제다.
ㅁ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구입, 기증, 압수, 협상 등을 통해 환수한 국외소재 한국문화재들. /국외소재문화재 재단 제공
■ 사진 속 사진에서 발견한 140년 전의 세시풍속
환수문화재 목록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국외소재 한국문화재를 쫓는 유물 추적자들의 열정이 돋보이는 사례가 있다.
‘황금갑옷을 입은 장군의 문배도’ 사진의 확보이다. 뻑적지근한 유물도 아닌 사진 한 장의 확보가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그러나 그렇게 띄엄띄엄 볼 것이 아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013년 주미대한제국공사관(미국 워싱턴 D.C. 소재) 복원·재현 사업을 벌인다. 그 때 미국 캘리포니아 산 마리노의 헌팅턴도서관이 소장한 ‘1893년판 공사관 사진’을 참고하게 된다.
그런데 평소 광화문에 관심이 많았던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지원활용부장은 그 사진 속에서 ‘공사관 1층 사무실 문 옆에 걸어둔 태극기 위의 광화문 사진’을 주목했다. ‘사진 속 사진’을 주의깊게 살핀 것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공사관 복원팀은 그후 1년 여 간 그 광화문 사진의 원본을 찾아 백방으로 뛰어 마침내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1882년 경 촬영된 원본 사진을 찾아냈다. 이때 강임산 부장은 140여 년 전의 많은 정보를 담고 있으리라 생각해 원본 사진을 확대해봤다. 그 결과 흥미로운 부분을 찾아냈다. 그것은 광화문에 붙어있던 ‘‘문배도’ 그림이었다.
‘문배도’는 정월 초하루에 나뿐 기운을 몰아내고 복을 기원하며 궁궐 정문에 붙였던 그림이다. 사진 속 광화문에 붙은 문배도는 ‘황금갑옷을 입은 장군’, 즉 ‘금갑장군’이었다. 그렇게 찾아낸 1881~82년 찍힌 사진속 그림을 토대로 복원된 ‘금갑장군 문배도’를 지난해 설날부터 광화문에 내걸고 있다. 140년 전의 사진 한 장으로 그 시대 세시풍속을 완벽하게 복원해낸 것이다.
ㅁ 미국 헌팅턴 도서관이 소장한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사진(1893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측은 이 사진을 토대로 대한제국공사관을 복원한 뒤 그 사진 속에서 보인 ‘광화문 사진’을 추적한 결과 ‘금갑장군 문배도’를 찾았다. 재단측은 1893년 당시의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실내를 찍은 사진 중 1층에 걸려있던 ‘광화문’ 사진의 원본 사진을 찾았고, 1년여만에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1881~82년 무렵 찍은 문제의 원본사진을 찾았다. 광화문 사진을 확대하자 문배도가 어렴풋 보였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 부동산도 환수대상
동산문화재 뿐이 아니다. 부동산도 환수대상이다.
한때 대한제국의 부동산이었던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을 102년만(2012년)에 구입했다. 이 공관은 1889년부터 조선(대한제국) 외교활동의 중심 무대로 쓰였다. 1910년 6월 주미일본대사 우치다 고사이(內田康哉)가 단돈 5달러를 주고 강제로 빼앗다시피 했다. 우치다는 한일병합 직후인 9월 미국인(호레이스 풀턴)에게 1만 달러(계약서에는 10달러로 표기)에 팔아넘겼다.
그후 102년 뒤인 2012년 문화재청이 이 공관의 재구입을 위해 쓴 비용은 350만 달러(40억원 가량)이었다.
이를 두고 국회에서 ‘너무 많은 돈을 쓴 것이 아니냐’ ‘제대로 절차를 밟았느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그러나 당시 “40억원이면 타워팰리스 한채 값도 안되는데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을 사는데 그만한 돈도 못쓰느냐”는 반론이 매입과 관련된 부정적인 여론을 잠재웠다. 이렇게 재구입한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은 5년간 원형 복원 및 전시조성 사업을 거쳐 2018년 5월 정식 개관했다.
ㅁ 지난해 설날 광화문에 걸린 문배도. 황금빛 갑옷을 입은 ‘금갑장군’의 모습이다. 정월 초하루에 나뿐 기운을 몰아내고 복을 기원하며 궁궐 정문에 붙였던 그림 문배도는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찾아낸 1882년경 촬영된 광화문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됐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환수 어려우면 고쳐줄 수도 있다”
이제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소속 유물추적자들의 임무는 문화재 환수만이 아니다.
물론 불법 유출되었거나, 미술시장에 나온 유물 중 우수한 것은 환수 추진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적법·합법적으로 반출되어 기관이나 개인이 소장 중인 문화재의 경우 제대로 관리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도 벌이고 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국외소재 한국문화재의 위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중국이나 일본 작품에 비해 수도 적고, 그만큼 연구자도 부족하다. 보존처리가 시급한데 수장고에 방치된 경우가 많다. 그나마 보존처리를 한다고 해도 일본이나 중국식으로 복원되는 경우가 적지않다. 그렇다고 무작정 반환을 추진하면 소장국과 소장자의 반감을 불러 일으키기 십상이다.
ㅁ 1900년대 미주 한인 사이에서 유통된 엽서. 전면에 주미대한제국공사관 건물이 인쇄되었다. 옥상 국기게양대가 있는 부분에 태극기 그림을 그려넣었다. 미주 한인 사이에서 공사관은 태극기와 마찬가지로 대한제국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공관은 1910년 6월 주미일본대사관이 대한제국으로부터 단돈 5달러에 사서, 한일병합 직후인 9월 1만달러를 받고 미국인에게 팔았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그럴 바엔 우리 돈으로 들여서라도 국외소재 문화재의 보존·복원사업을 지원하는게 낫다. 2013년부터는 아예 공모사업을 벌이고 있다. 2013년부터 2021년까지 9개국 44건(25개 기관)의 한국문화재가 혜택을 입었다.
보존처리도 웬만하면 국내에 들여와 국내 전문가와 국내 재료를 활용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복원이 된다.
그렇게 국내에서 보존·복원처리를 끝낸 국외소재 문화재는 한국에서 특별전 등을 통해 공개된 뒤 다시 소장처로 돌아간다.
새롭게 탈바꿈한 문화재를 현지에서 제대로 대접받게 해주는 것 또한 214,208점에 이르는 국외소재 문화재를 아우르는 방법일 수 있다.(이 기사를 쓰는데 김병연 문화재청 국제협력과 사무관과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단 지원활용부장, 김동현 기획조정부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배경음악/ 산절로 수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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