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요절한 어린왕자의 곁엔 정체모를 고분들... 혀내민 말토기는?
경향신문ㅣ2022.03.22 05:00 수정 : 2022.03.22 09:26
▲ 1924년 발굴된 금령총의 나무곽 내부 상황. 무덤주인공의 착장상태와 출토유물의 사이즈 등을 검토했을 때 신장이 1m 가량의 요절한 어린 왕자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금관과 족옥을 양끝 기준으로 해서 허리띠가 있는 부분을 토대로 신체비율을 따졌을 때 3세 아이(5등신) 비율에 맞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키가 1m로 추정할 경우 목관의 길이(1.5m)가 지나치게 큰 감이 있다. 추정 나이와 키는 좀더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나 성인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신광철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제공
일제강점기인 1924년 5월 10일부터 경주 노동동의 폐고분 2기가 조사되기 시작된다.
126호와 127호라는 번호가 붙은 두 고분은 경주에서 가장 거대한 단독분인 봉황대(지름 82m, 높이 22m)에 딸린 돌무지 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었다. 조선총독부가 두 고분을 조사한 까닭이 있었다. 3년 전(1921년) 인근의 주막집 확장을 위해 터파기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된 고분에서 금관을 비롯하여 엄청난 금제유물이 쏟아진 바 있었다. 그 고분이 유명한 금관총이다.
때마침(1921년) 총독부 산하에 고적조사과가 신설된 터였다.
총독부 소속 일본학자들은 126호와 127호 돌무지덧널무덤에서도 금관총에서처럼 금빛 유물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엄청난 양의 돌과 흙을 쌓은 돌무지덧널무덤의 특성상 도굴의 화를 피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 조사는 조선총독(3·5대, 1919~1927, 1929~1931)이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1858~1936)의 자금지원까지 받은, 명색이 학술발굴이었다.
▲ 금령총에서 출토된 온갖 금제 유물들. 굽은옥(곡옥)이 없는 금관이 금제 허리띠와 금방울(금령) 등이과 함께 쏟아졌다. 1921년 첫번째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과 구별하기 위해 금령총이라 이름붙였다. 이곳에서 출토된 금방울(금령)을 특이한 유물로 꼽았기 때문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 금방울이 아니라 기마인물토기
일본 학자들의 짐작이 맞았다. 2기 중 좀더 파괴된 고분(127호분)을 먼저 파내려가자 금빛 유물이 눈에 띄었다.
3년 전의 금관총 금관과 달리 곡옥(굽은옥)이 달려있지 않은 금관이 노출되었고, 허리띠와 귀고리, 목걸이, 팔찌 등 각종 금제장신구가 쏟아졌다. 그 중에서도 금관총에서는 보이지 않은 특이한 형태의 금방울(금령)이 출토됐다.
그래서 127호 고분의 이름을 금관총과 구별해서 ‘금령총’이라 했다. 하지만 금령총의 대표유물은 금방울이 아니다.
발굴 19일 만인 5월 29일 무덤 주인공의 머리맡을 조사하던 조사원의 호미에 범상치 않은 형태의 유물이 걸렸다. 그것은 옆으로 넘어진채 발견된 기마인물형토기 2점(국보)이었다. 일제의 발굴보고서는 “기대하지 않은 유물의 발견에 조사단이 쾌재를 불렀다”고 표현했다. 말을 탄 인물은 주인(높이 26.8㎝)과 그 주인을 따르는 하인(높이 23.4cm)인 듯 하다.
▲ 기마인물형 토기는 금령총의 부장품 공간에서 옆으로 쓰러진채 발견됐다.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의 CT촬영 결과 물과 술을 따르는 주전자로 제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국립중앙박물관·신광철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제공
주인은 고깔 형상의 띠와 장식을 두른 삼각모를 쓰고, 다리 위에 갑옷으로 보이는 것을 늘어뜨렸다.
반면 하인은 수건을 동여맨 상투머리에 웃옷을 벗은 맨몸이다. 등에는 봇짐을 메고 오른손에는 방울 같은 것을 들고 있다. 마치 길 안내를 맡고 있는 듯하다. 말도 다르다. 주인의 말에는 이마의 귀 사이에 뿔 같은 장식이 튀어나오고 각종 말갖춤새가 표현돼있다. 반면 하인의 말에는 장식이 그다지 많지 않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의 컴퓨터 단층(CT)촬영 결과 이 기마인물형 토기의 특별한 구조가 확인됐다. 즉 인물 뒤에 있는 깔대기 모양의 구멍 안에 물이나 술을 넣고, 다시 말 가슴에 있는 대롱을 통해 물을 따를 수 있는 주전자로 제작되었음을 밝혀낸 것이다. 지금 와서야 하는 얘기지만 기마인물형 토기가 금령총을 대표하는 유물이라면 어떤가?
고분의 이름 또한 처음부터 잘못 지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객쩍은 생각이 든다. 무덤의 주인공을 찾아 이름을 지으면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백제 무령왕릉처럼 ‘내가 주인공이요’ 하고 나타나지 않는 이상 그 또한 쉽지 않다.
▲ 그러나 금령총의 대표유물은 뭐니뭐니해도 기마인물형 토기 2점(국보)이다. 주인과 하인이 말을 타고 가는 모습을 빚었다. 이 기마인물형 토기는 말에 탄 무덤 주인공의 영혼을 뭍길(말)과 물길(배)을 통하여 내세로 인도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 주인공을 모신 하인과 함께….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 요절한 어린 왕자
다만 금령총의 주인공은 요절한 신라의 어린 왕자라는 견해가 정설이다. 왜냐면 금관의 지름(15㎝)이 다른 고분의 출토품(천마총 20㎝, 금관총 19㎝, 서봉총 18.4㎝)보다 작고, 또 ‘굽은 옥(곡옥)’ 장식이 없다는 것이 우선 눈에 띈다. 또한 허리띠(74㎝)도 다른 고분의 출토품(110~120㎝)보다 작다.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 등도 소형이다.
무엇보다 무덤 주인공이 착장한 각 장신구 간의 간격이 짧다. 금관과 허리띠의 간격이 30㎝ 내외이고, 정수리와 족옥(足玉) 사이도 1m를 넘지 않는다. 다만 금관과 금허리띠, 둥근고리큰칼 등 왕에 버금가는 위계의 유물을 묻어주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발굴 후 100년 가까이 이 무덤의 주인공은 왕의 사랑을 듬뿍 받다가 요절한 신라의 어린 왕자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어떤 연구자들은 기마인물형 토기 가운데 주인상과 무덤 주인공을 연결시키기도 한다.
신라인들은 현세의 삶이 내세에까지 이어진다고 믿었다. 그랬기에 금령총이 조성된 5세기말~6세기초에는 수많은 인력을 투입하여 거대한 고분(돌무지덧널무덤)을 만들고 그 속에 다량의 물품을 부장했다. 심지어는 산사람까지 죽여서 함께 껴묻었다. 그런데 금령총의 기마인물형 토기는 인물과 말의 표현이 너무도 세밀하여 누군가를 모델로 제작한 느낌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 토기는 배(舟) 모양 토기와 함께 출토됐다. 그렇다면 말에 탄 무덤 주인공의 영혼을 뭍길(말)과 물길(배)을 통하여 내세로 인도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 주인공을 모신 하인과 함께…. 그 주인공은 요절한 어린 왕자가 아닐까. 물론 이것은 순전히 고고학적인 상상력이다.
▲ 국립경주박물관은 1924년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경주 금령총을 94년만인 2018년부터 3년간 재발굴했다. 그 결과 금령총은 지금까지 알려진 규모(지름 20m)보다 10m 정도 컸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또 무덤 주변에 2단의 호석을 두르고 곳곳에서 제사행위를 펼쳤다는 증거도 확보했다. 특히 제사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높이 56㎝ 가량의 대형 말모양토기가 발견됐다. 말모양 토기는 혓바닥을 내밀어 놀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 ‘메롱’하고 혀를 내민 말모양 토기
국립경주박물관은 일제강점기에 조사한 금령총을 2018년부터 2020년까지 3차에 걸쳐 재발굴했다.
일제 강점기 조사(1924년)는 금관 등 유물 수집에 초점을 맞췄고, 또 그 발굴성과물이 식민지 조선경영을 대내외에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된 측면이 컸다. 단 22일간의 조사에 그칠만큼 졸속이었다. 따라서 금령총의 정확한 규모와 축조 방식, 그리고 성격 규명은 간과하고 넘어갔다. 94년 만의 재발굴 결과 그동안 몰랐던 사실이 속속 밝혀졌다.
우선 고분의 규모가 새롭게 규명됐다. 지금까지는 금령총이 어린 왕자의 무덤답게 작은 규모(지름 20m)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재발굴 결과 금령총은 2단의 호석(護石·무덤 보호하려고 만든 돌시설물)을 갖춘 직경 30m 가량의 대형고분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2019년 7월15일 아침 10시 50분쯤 재발굴에서 가장 흥미로운 유물이 나왔다.
호석 외곽에서 수십점의 대형 제사용 토기가 발견됐는데 그중 잔고가 56㎝에 달하는 압도적인 크기의 말모양 토기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반쯤 잘린채 머리와 앞다리 쪽만 발견된 이 말은 ‘메롱’하고 놀리듯 혀를 쑥 내밀고 있다. 등과 배 부분은 깔끔하게 절단된 듯한 흔적이 있다. 얼굴·목·발굽 등 각 부분을 정밀하게 표현한 점이 특징이고, 신체 비율도 실제 말과 흡사한 편이다.
▲ 1924년 금령총에서 발견된 기마인물형 토기의 주인 말(맨 왼쪽)과 하인말(가운데). 2018년 금령총 재발굴 결과 무덤을 두른 호석의 제사유구에서 확인된 말모양 토기와 흡사하다. 쪽 찢어진 눈매와 도드라진 코, 두껍게 처리한 다리, 그리고 말갖춤새를 연결하고 있는 가죽끈의 표현이 그렇다. 다만 혓바닥을 쑥 내밀어 마치 ‘메롱’하고 놀리는 듯한 말모양 토기의 표정이 압권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신광철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 토기를 본 순간 1924년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기의 ‘말’을 떠올렸다”고 밝혔다.
쭉 찢어진 눈매와 도드라진 코, 두껍게 처리한 다리, 그리고 말갖춤새를 연결하고 있는 가죽끈의 표현이 흡사하다는 것이다. “‘같은 장인이 만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물론 두 말의 부장 양상은 다르다. 기마인물형 토기는 무덤 주인공을 내세로 인도하는 주술적 목적이라면 이번에 발견된 말모양 토기는 제사용으로 제작됐다. 기마인물형 토기의 2배가 넘는 크기이다.
또 무덤 밖에서, 다른 제사용 유물과 함께 깔끔하게 절단된 채 머리와 앞다리 쪽만 확인됐다는 것도 특이하다.
조사단은 남은 뒷다리와 꼬리 부위를 찾으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어떤 곳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제사에 쓰인 제기나 제수용품들을 의도적으로 깨뜨려 묻었다는 뜻이다.
이한상 대전대교수(역사학과)는 “제수용품 등을 깨뜨리는 행위는 사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벽사의 의미”라면서 “크기(56㎝)로 보아 일본 고훈시대(古墳·3~8세기)에 유행한 하니와(埴輪·흙으로 빚어 만든 토기의 일종)와 비슷하다”고 전했다.
금령총 조성자는 무덤 안에는 기마인물형토기를, 무덤 밖에는 깨뜨린 말모양 토기를 차례로 부장함으로써 무덤 주인공의 영생을 빌었을 것이다. 아직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재발굴 결과 출토된 말모양 토기가 왜 ‘메롱’하듯 혀를 내밀고 있는지 수수께끼다. 입을 앙 다물었지만 다소 웃는 상인 기마인물형 토기와 사뭇 다른 표정이다.
▲ 94년만의 재발굴결과 금령총과 맞댄 곳에서 무려 5기의 새로운 고분이 확인됐다. 이중 127-1호과 127-2호는 금령총보다 먼저 조성된 고분이다. 그런데 금령총 조성자들이 127-1호와 127-2호를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랐다. 금령총이 127-1호분(지름 10m 추정)의 일부는 침범한 반면, 127-2호분(지름 13m)은 살짝 피했다. 그러다보니 금령총의 127-2호분 쪽이 약 1.6m 가량 찌그러졌다. 또 금령총 보다 나중에 조성된 127-3~5호분 가운데 127-5호분(옹관묘)는 127-1호 위에 조성됐다.<br />금령총 때문에 일부 파괴된 127-1호는 훗날 다시 127-5호에 의해 훼손되는 이중고를 겪었다.
■ 금령총 옆에 속속 드러나는 무덤들
금령총 재발굴 결과 몇가지 의미심장한 성과가 나왔다.
원래 이 금령총은 인접한 식리총(126호 고분)과 함께 인근에서 가장 큰 고분인 봉황대에 딸린 고분으로 추정됐다.
1924년 금령총 조사 후 곧바로 이어진 식리총 발굴에서는 금관은 보이지 않았고, 금동신발이 확인된 바 있다.
‘식리총’(금동신발 무덤)이라는 범상치않은 이름이 붙은 이유다.
그런데 94년 만의 금령총 재발굴 결과 금령총과 맞물린 고분이 5기나 새롭게 확인됐다.
그 중 두 기의 고분(127-1호와 127-2호)은 금령총보다 먼저 조성된 무덤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더욱이 금령총은 봉황대와 두 기의 돌무지덧널 무덤(127-1, 127-2호) 사이를 비집고 조성된 것으로 파악됐다. 의문점이 생긴다. 지름 30m에 이르는 고분(금령총)을 왜 그 사이에 밀어넣었을까. 하긴 그래서 무덤의 규모가 줄어든 것일 수도 있다.
재미있는 착안점이 또 있다. 금령총이 127-1호분(지름 10m 추정)의 일부는 침범한 반면, 127-2호분(지름 13m)은 살짝 피해서 조성했다는 것이다. 127-2호분을 훼손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금령총의 그 부분 지름이 1.6m가량 찌그러졌다. 반면 127-1호분의 일부를 파괴하고 그 위에 금령총 봉분을 덮었다.
▲ 금령총은 먼저 조성된 127-2호는 애써 피했지만 127-1호는 일부 파괴하고 들어섰다. 그래서 금령총과 127-2호 사이에는 약간의 간격이 생겼다. 이 때문에 금령총은 일부가 찌그러진 타원형이 됐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금령총 주변에서는 이 두 기(127-1, 127-2호)외에도 더 나중에 조성된 3기의 고분(127-3, 4, 5호)이 추가로 드러났다.
더욱 이상한 것은 훗날 조성된 127-5호(옹관묘)가 이미 금령총에 의해 훼손된 127-1호의 위를 파괴하고 들어섰다는 점이다.
정리해보면 127-1호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금령총은 물론이고, 더 훗날에 죽은 127-5호(옹관묘)까지 그 무덤(127-1호)를 훼손하고 그 위에 조성했을 것이다. 그래도 위계가 낮은 것으로 알려진 옹관묘가 최소한 왕족이 묻혔을 가능성이 높은 돌무지덧널무덤을 훼손하고 들어선 이유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의문점이 또하나 남는다. 왕자 무덤으로 추정되는 금령총은 왜 규모가 크지 않은 127-2호를 애써 피해서 조성됐을까. 왕자보다 지위가 높은 인물의 무덤이라 그랬을까. 아니면 지위는 낮아도 그 왕자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람의 고분이라 그랬을까?
▲ 금령총은 경주에서 가장 큰 단독고분인 봉황대(지름 82m, 높이 22m)와 이미 조성된 127-1, 127-2호 사이에 조성됐다. 왜 굳이 고분 사이에 조성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마립간(왕)의 무덤이 분명한 봉황대 주인과 금령총의 요절한 어린 왕자는 어떤 관계였을까. 그리고 금령총을 조성하면서 어떤 무덤은 일부 파괴하고, 또 어떤 무덤은 그냥 남겨두었을까. 새로운 수수께끼가 생겼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 돌무지덧널무덤은 왕의 전유물?
이번에 금령총과 맞물려 발견된 5기의 고분(돌무지덧널무덤 3기, 옹관묘 2기)은 1500년 전 신라 왕가의 장례문화를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흔히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은 마립간 시대(417~503년)의 산물로 알려져 있다.
마립간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눌지(417~458)·자비(458~479)·소지(479~500)·지증(500~514) 등 4명이다. <삼국유사>는 내물(356~402)·실성(402~417)까지 포함해서 6명이라 했다. 그것도 500~503년 사이 딱 3년간 마립간을 칭한 지증까지 합한 숫자다.
경주의 초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은 봉황대(지름 82m), 서봉황대(130호·지름 약 80m), 황남대총(동서 80m, 남북 120m) 등이다. 미추왕릉(지름 56.7m)으로 전해지는 고분의 주인공도 미추왕(재위 262~283)이 아니라 마립간 시대의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계산하면 대형 고분의 수(4기)가 이미 마립간의 수(4~6명)를 채웠거나 육박하고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금관총(지름 45m)과 천마총(지름 47m) 등도 마립간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 경주시내에는 마립간 시대(417~503)에 조성된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이 즐비하다. 봉황대와 서봉황대, 황남대총, 전 미추왕릉 등 초대형 고분들의 임자는 마립간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다른 대형 고분들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또한 속속 드러나는 고분들의 임자는 또 누구인가. 94년만의 재발굴 결과 금령총과 맞물려 발견된 5기의 고분(돌무지덧널무덤 3기, 옹관묘 2기)은 1500년 전 신라 왕가의 장례문화를 원점에서 생각하게 만든다. /신광철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제공
이번 재발굴 결과에 금령총과 맞닿은 5기의 고분이 새롭게 확인되었다면 무슨 뜻인가?
향후 다른 고분들을 조사해도 그 주변에서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돌무지덧널무덤 등의 새로운 고분이 속속 노출될 가능성이 짙다는 뜻이다. 그럴 경우 돌무지덧널무덤의 주인공은 마립간이나 왕자, 왕비 및 공주 뿐 아니라 왕실과 가까운 친인척들로까지 그 범위가 계속 확대될 수도 있다.
경주에서 단독고분 중 가장 크다는 봉황대만 따져보자. 이번 재발굴로 딸린 식구가 금령총과 식리총 뿐 아니라 127-1~5호까지 5기가 더 늘었다. 이중 127-1~4호분 등 4기는 아직 발굴하지도 않았다.
이 가운데 2중 호석을 두른 127-2호분(지름 13m)이 특히 주목된다. 신광철 학예연구사는 “이 고분을 발굴하면 금동신발이 출토된 식리총에 비견될만한 발굴성과를 얻을 수도 있다”고 기대했다. 처음엔 금령총, 나중엔 옹관묘(127-5호)에 침범당한 127-1호분(지름 10m)의 정체도 밝혀질 수 있다.
그리고 학계 일부에서는 1921년 사상 처음으로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까지도 봉황대에 딸린 고분으로 보기도 한다.
그럼 어떤가. 봉황대가 마립간의 무덤이라면 그에 딸린 고분이라는 금관총, 금령총, 식리총, 127-1~5호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따지고보면 금령총의 주인공도 유물의 위계는 높지만 그 크기가 전반적으로 작다는 점에서 ‘요절한 어린 왕자’로 추정한 것에 불과하다. 마립간 시대에 일찍 죽은 왕자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꼭 왕자로 특정할 수도 없다.
신라에서는 ‘갈문왕’이나 ‘차칠왕등’처럼 왕(마립간)이 아닌 왕족에게도 왕의 칭호를 붙였다. 따라서 금령총의 주인공은 유력한 갈문왕이나 차칠왕등의 자제일 수도 있다. 그들이라고 해서 금관과 같은 황금유물로 무덤을 장식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또 곰곰이 생각해보면 금령총과 같은 무덤을 봉황대 같은 초대형 무덤에 딸린 고분이라고 규정할 수도 없다.
일정한 패턴이 있다면 몰라도 속속 드러나는 경주의 돌무지덧널무덤을 두고 임금 무덤에 부속된 배총(딸린 무덤) 정도로 모두 규정할 수 없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금령총 재발굴 결과 새롭게 드러난 5기의 고분이 또다른 숙제를 안긴 것 같다.
이 순간 혀를 쑥 내민 말 모양 토기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피식 터져 나온다. 마치 ‘내가 누구게’ 하고 알아 맞혀보라는 듯 ‘메롱’하고 혀를 내미는 것 같아서….(이 기사를 위해 신광철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와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배경음악/ 산절로 수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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