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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경주 월성벽 바닥에서 발견된 최소 27구 인골의 정체는?

잠용(潛蓉) 2022. 6. 14. 18:49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주 월성벽 바닥에서 발견된 최소 27구 인골의 정체는?
경향신문ㅣ2022.04.19 05:00 수정 : 2022.04.19 06:58

 

▲ 101년(파사왕 22년) 쌓은 이래 신라의 천년 사직을 지킨 경주 월성. 2014년부터 성 내부와 성벽, 해자 구간을 전면 발굴해왔으며, 지난 15일부터 해자구간 550m는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됐다. /국립경주문화재 연구소 제공

지난주 금요일(15일)부터 신라의 천년 사직을 지킨 경주 월성의 해자(垓子)가 일반에 공개됐다.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으려고 성 주변을 둘러 판 물도랑이나 못을 가리킨다. 필자는 일반 공개 1주일 전 장기명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의 설명을 들으며 물을 가득 담은 폭 30m, 길이 550m 가량의 해자를 답사했다.

“4~7세기까지는 땅을 파서 물을 흘려보냈다가 삼국 통일 후(대략 8세기 후)에는 해자 윗부분에 돌을 쌓고(석축) 연못처럼 물을 가둔 것으로 추정됩니다. 방어와 배수 기능에 조경의 의미가 덧붙여졌을 겁니다.”
삼국통일 후 외국의 침략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리라. 그러다보니 해자의 폭도 좁아졌고, 주변에 관청을 세운 흔적도 보인다. 이곳 관리들은 깔끔한 인공 연못을 조성한 공원 속에서 근무하는 듯한 아취를 느꼈을 것이다.
쾌적한 환경에서 업무를 보았을 신라인들을 떠올려본다. 필자는 해자 공개를 계기로 신라 천년사직을 지킨 월성 및 해자의 역사와 함께 40여 년 발굴 스토리를 요약해본다.

 

▲ 이번에 일반에 공개된 월성 해자 구간. 4~7세기까지는 땅을 파서 물을 흘려보냈다가 삼국 통일 후(대략 8세기 후)에는 해자 윗부분에 돌을 쌓고(석축) 연못처럼 물을 가둔 것으로 추정된다. 방어와 배수 기능에 조경의 의미가 덧붙여졌다. /신라왕경핵심유적복원정비추진단 제공

■ 탈해가 사기극으로 빼앗은 집터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월성을 둘러싼 재미있는 일화를 전한다.
4대 임금인 탈해왕(재위 57~80)이 어릴 적에 초승달 모양의 봉우리를 보고 흠뻑 빠졌다. 그런데 그 봉우리에 터를 잡고 산 이는 왜국 출신인 호공이라는 인물이었다. 어린 탈해는 앙큼한 계략을 썼다.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옆에 묻어 두고 “조상 때부터 우리 집이었는데 (호공이) 빼앗았다”고 주장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맞은 호공이 “무슨 소리냐”고 기막혀 했지만 탈해는 계속 생떼를 썼다. 결국 법정소송으로 이어졌다. 관리가 “당신 집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묻자 탈해는 “우리는 대장장 가문인데, 땅을 파보면 그 증거가 나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자 호공은 꼼짝없이 집을 내주고 말았다.

<삼국사기>는 “101년 탈해왕의 뒤를 이은 파사왕(80~112)이 이곳에 성을 쌓고 옮겨 살았다”고 기록했다. 월성은 경주 시내 남쪽을 흐르는 ‘남천(문천)’을 끼고 축조됐다. 성의 모양이 반달을 닮아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일컬어졌다.

 

▲ 2017년 월성의 서성벽에서 발견된 50대 남녀 인골은 성벽을 높이 쌓기 전에 땅을 다진 바닥층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두 인골은 초본류를 덮고 있었다. 남성은 똑바로, 여성은 얼굴을 돌려 남성 인골을 바라본 채 누워 있었다. 머리 부분에서는 나무껍질의 흔적이 관찰됐다. 인골의 발끝에서는 토기 4점이 놓여있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 <삼국사기>와 고고학조사의 간극
월성에 대한 고고학 조사는 1979년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 의해 시작된 이후 꾸준히 이뤄졌다.
몇가지 흥미로운 포인트가 있다. 그중 한가지는 4세기 이전에는 거대한 토목 구조물을 축조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월성의 축조시기(101년)와는 200년 이상 차이가 난다. 4세기라면 내물왕(마립간·재위 356~402)이 먼저 떠오른다. 흔히 김씨의 독점적인 왕위 세습이 시작된 내물왕 연간을 왕권을 강화하고 고대국가 체제로 정비하는 시기로 여긴다.

 

▲ 2021년에는 2017년 확인된 50대 남녀 인골에서 불과 50㎝ 떨어진 곳에서 인골이 확인됐다.  왜소한 체구(키 135㎝ 정도)의 주인공은 막 성장을 끝낸 20대 여성으로 추정됐다. 여성은 굽은옥 모양의 유리구슬을 엮은 목걸이와 팔찌를 착용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동물뼈가 갈비뼈 위주로 묻혀있었다. 왼손 부근에서 복숭아씨가 확인됐고, 머리맡에는 토기 2점이 포개진채 똑바로 놓여있었다. 액체류를 담는 큰 토기 안에 작은 토기가 들어가 있는 점이 특이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따라서 4세기부터 시작되는 월성의 고고학 편년은 ‘내물왕 즈음의 본격적인 축성’을 알리는 증거일까. 그렇다면 <삼국사기> 등의 101년 축성 기록은 대체 무엇인가. 혹자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불신 혹은 과장론까지 개진한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축성의 개념이 다른 것이 아닐까. 석성은 물론이지만 토성도 만만치 않은 축성 기술을 요한다.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파사왕이 쌓았다는 성은 토성이나 석성이 아니라 목책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나무를 엮어 둘러쌓은 성이었다면 지금의 고고학 조사로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 2016년과  2017년, 2021년 인골이 출토된 곳과 10m 정도 떨어진 곳에서는 1984~85년(3구)과 1990년(최소 20곳) 등에서 인골들이 쏟아져 나온 바 있다.

■ 신라멸망후에는 금단의 땅
또 하나 포인트가 있다. 2014년 이후 월성 내부의 발굴 결과 땅을 30㎝만 파도 통일신라시대 유구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다. 신라 유적이니까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법 하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만약 신라 멸망 후 고려가 이 땅을 사용했다면 어떨까. 당연히 고려의 흔적이 확인됐어야 한다. 하지만 월성 내부에서 확인된 17개동의 건물터와 11만 여 점의 유물을 분류하고 정리했지만 고려시대의 것은 보이지 않았다.

조선시대 문화층도 ‘석빙고’ 등 극히 일부만 보일 뿐이다.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1000년 왕궁터는 신라 멸망 후 금단의 땅으로 터부시 되었거나, 신성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월성 내부의 조사 결과 한 건물터에서 출토된 120여 점의 벼루가 눈에 띈다. 공을 상당히 들여 제작한 벼루도 더러 보이지만 별다른 장식이 없는 실용적인 벼루가 대다수다. 이 건물은 궁궐 내에서도 공무를 수행한 관청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 경주 월성에서 확인되는 사람제사의 정황.  1980년대 이후 월성의 서벽에서만 최소한 27구의 인골이 확인됐다. 성벽을 쌓기 전 땅을 고르게 다진 다음 사람을 죽여 제사를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축성 과정에서 안전을 기원하고, 견고한 성의 완성을 바라면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 틀림없다. 성벽의 중심라인을 따라 사람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그런 다음 그 라인에 따라 본격적인 축성이 이뤄졌을 것이다. /장기명 국립경주문화재 연구소 학예연구사 제공

■ 터번 쓴 이란계 흙인형
월성 해자 역시 2014년부터 본격조사되었다. 해자의 남쪽은 자연하천인 남천을, 동·서·북쪽은 성벽기저부를 따라 도랑을 파고 물을 채워 사용했다. 해자의 최대폭은 45m, 최대깊이는 1.8m 정도 된다.

그렇게 조성한 해자는 1500~1100년이 지난 지금 매우 중요한 의미를 던진 발굴현장으로 거듭났다.
습한 뻘층 덕분에 신라~통일신라 시대 유물과 유구가 썩지 않고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토기뚜껑이나 항아리에 붙인 ‘토우’(흙을 구워 만든 장식인형)가 눈에 띈다. 특히 터번 쓴 토우가 이채롭다.

 

▲ 2014년부터 이뤄지고 있는 월성 내부 발굴. 지금까지 17개동의 건물터와 11만 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지만 고려시대의 것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1000년 왕궁터는 신라 멸망 후 금단의 땅으로 터부시 되었거나, 신성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눈이 유난히 깊은 이 토우는 오른쪽 팔뚝까지 내려오는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있다. 팔 부분의 소매가 좁은 카프탄을 입고 있으며 허리가 꼭 맞아 신체 윤곽선이 드러나며 무릎이 살짝 덮이는 길이다.
당나라에서 호복(胡服)으로 통하던 소그드인의 옷과 유사하다. 소그드인은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계 유목민을 가리킨다.

일찍이 동서교역에 종사하여 상술에 능한 사람들로 알려져 왔다.
실크로드의 동쪽 끝인 경주에서는 상당수 페르시아계 유물들이 출토된 바 있다. 황남대총 남북분에서 출토된 봉수형 유리병(남분)과 은제잔·커트글라스(이상 북분)와 경북 칠곡 송림사 전탑 사리기의 유리잔 등이 있다.

경주 구정동 고분의 네 모서리에 부조된 무인상은 영락없는 서역인의 모습이다. 페르시아 스포츠인 폴로경기용 스틱을 두 손에 쥐고 있다. 월성 해자의 터번 쓴 토우는 용강동 고분과 괘릉(전 원성왕릉) 호인상들과도 맥이 닿는다.
이외에도 긴모자를 쓴 토우는 양팔을 옆으로 쫙 펴고 있다. 뭔가 의례 행위를 하고 있는 듯 하다. 또 성기가 강조된 남성, 말을 탄 사람, 춤추는 사람 등의 토우 등도 출토됐다

 

▲ 월성해자에서 발견된 터번 쓴 토우. 페르시아계 유목민인 소그드인으로 추정된다. 경주 구정동 고분의 네 모서리에 부조된 무인상과  용강동 고분 및 괘릉(전 원성왕릉) 호인상들과도 맥이 닿는다.

■ ‘주공’과 ‘김후직’ 이름의 비밀
당대의 서사자료인 명문 목간도 주목을 끈다. 그중 ‘전중대등(典中大等)’이라는 <삼국사기> 등에서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관직명과 함께 ‘주공(周公)’이라는 이름을 새긴 목간이 있다.
‘주공’은 중국 상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기원전 1046~1043)의 동생이다. 형(무왕)이 죽자 강보에 싸인 어린 조카(무왕의 아들인 성왕·기원전 1042~1021)를 왕위에 올리고 7년간 섭정한 뒤 미련없이 정권을 물려준 인물이다.

동양에서는 왕위를 탐하지 않고 조카를 도와 주나라를 반석 위에 올린 주공을 성인(聖人)으로 받들었다. 그런데 6~7세기 신라인이 중국의 성인을 따라 자기 이름(‘주공’)으로 삼은 것이다.

 

▲ 터번 쓴 토우 뿐 아니라 긴모자를 쓰고 양팔을 옆으로 쫙 편채 의례 행위를 하고 있는 듯 한 토우도 있다. 또 성기가 강조된 남성, 말을 탄 사람, 춤추는 사람 등의 토우 등도 출토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삼국사기> ‘열전’에는 ‘김후직(金后稷)’이라는 인물이 보인다. 지증왕(500~514)의 증손자인 김후직은 진평왕(579~632) 연간에 활약했다. 김후직은 “무덤에 묻힌 뒤에도 사냥에 빠진 진평왕 앞을 가로막고 ‘제발 정사를 돌보라’고 간언함으로써 임금의 마음을 돌렸다”(<삼국사기>)는 전설적인 충신이다.

이 ‘후직’이라는 이름도 심상치않다. 중국 역사에서 농경의 신이자 주나라를 세운 전설상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6~7세기 신라에서 중국의 전설적인 인물이나 성인을 따라 이름을 지었다는 얘기다.
아닌게 아니라 신라인 ‘주공’과 ‘김후직’이 살았던 그 시대는 유학이 점차 확산되던 때였다. 그 직전까지는 신라의 고유말인 ‘이사부(異斯夫)’ 혹은 ‘거칠부(居柒夫)’ 등의 이름이 보였는데, 어느새 트렌드가 바뀐 것일까?

월성해자에서 발견된 ‘주공’ 명문 목간 덕분에 흥미로운 고고학적 상상을 할 수 있게 됐다.
목간 중에는 ‘백견(白遣)’이라는 이두(吏讀)가 보인다. ‘백견’은 ‘삷고(사뢰고)’ 혹은 ‘아뢰고’의 뜻이란다. ‘신라~조선시대’까지 활용된 이두의 흔적이 6세기, 즉 삼국 통일 이전의 신라목간에서 확인됐다는 의미가 있다.

 

▲ 월성 해자 출토 목간 중에는 중국의 성인(주공·周公)을 따라 지은 이름이 보인다. 6~7세기 신라에서 중국의 전설적인 인물이나 성인을 따라 이름을 지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 1500년전 어느 봄날의 월성 해자
월성해자에서는 궁궐 사람들이 식용으로 키웠거나 관상용으로 길렀던 동식물의 흔적이 다수 확인됐다.
동물의 경우 소·말·개·멧돼지 등과 함께 곰·강치·사슴류·상어 등의 뼈가 확인됐다. 동물뼈 가운데는 고기를 얻기 위해 해체한 부위가 보였다. 어린 돼지의 경우 골절된 후 뼈가 붙어가는 모습도 역력했다. 사람의 치료를 받았음이 틀림없다.

식물의 경우에는 벼, 밀, 콩 등의 곡식류, 박, 외류 등의 채소류, 복숭아, 자두와 같은 과실류 등이 발견됐다.
연구자들은 이를 통해 1500년 전 봄의 월성을 복원했다. 신라 월성에는 봄에 화사하게 꽃을 피우는 복사나무, 자두나무가 있었고, 해자에는 가시연꽃, 마름과 같은 수생식물이 자라던 경관을 상상할 수 있다.

 

▲ 월성해자에서 출토된 명문 목간 중에는 ‘백견(白遣)’이라는 이두(吏讀)가 보인다. ‘백견’은 ‘삷고(사뢰고)’ 혹은 ‘아뢰고’의 뜻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 성벽 밑바닥에 누운 사람들
그러나 2014년 이후 월성 조사에서 가장 극적인 발굴성과는 ‘인신공희’(사람제사)의 사례가 처음으로 확인됐다는 것이다.
서막은 2016년 월성의 서문터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열렸다. 트렌치(발굴용 구덩이)를 파는 과정에서 5살 전후의 유아 인골이 수습됐다. 그러나 그때 발굴의 목적이 서문터 확인이었기 때문에 일단 넘겼다.

그런데 본격발굴이 진행되던 1년 뒤(2017년)였다. 유아 인골이 수습된 곳과 인접한 지점에서 나란히 누운 남녀 인골 2구가 노출되었다. 심상치 않은 발굴양상이었다. 발굴지점은 성벽을 쌓기 위해 맨밑바닥층을 단단히 다진 기초부였다.
남녀는 시신을 안치하기 위한 별도의 시설물없이 초본류(풀)만 덮고 있었다. 남성은 누운 자리에서 정면을 향해 가지런히 배치됐고, 여성은 얼굴을 돌려 남성 인골을 바라본 채 바르게 누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두 인골의 머리 부분에서 나무껍질의 흔적이 관찰됐다.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는 뜻이다. 또 남성 인골의 발치에서는 토기 4점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남성은 신장 165.9cm 의 건장한 체격을 가진 50대로 추정됐다. 위턱에서 이빨을 뽑은 흔적이 관찰됐다. 치아에는 에나멜 질감형성(영양 상태가 좋지 않은 지표)이 검출됐다.

여성은 신장 153.6cm 정도로 측정됐고, 역시 50대로 추정됐다. 3~4회 출산한 흔적이 보였고, 치아상태로 분석하니 역시 영양상태는 좋지 않았다. 출토 유물의 위계도 높지 않았다. 따라서 남녀는 50대까지 장수했지만, 상위계층은 아니었던 것으로 분석됐다.

 

▲ 월성 내부의 3호건물지에서 확인된 120여점의 벼루. 별다른 장식이 없는 실용적인 벼루가 대다수다. 이 건물은 궁궐 내에서도 공무를 수행한 관청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 모종의 의식은 사람제사였다
그 뿐이 아니었다. 4년 뒤인 2021년 남녀 인골에서 북동쪽으로 50㎝ 정도 떨어진 곳에서 또 1구의 인골이 노출됐다. 왜소한 체구(키 135㎝ 정도)의 주인공은 막 성장을 끝낸 20대 여성으로 추정됐다. 여성은 굽은옥 모양의 유리구슬을 엮은 목걸이와 팔찌를 착용하고 있었다. 여성의 머리맡에는 곁에 묻힌 50대 남녀와 비슷하게 나무 덮개의 흔적이 보였다.

이 여성의 주변에는 말, 소 등 대형 포유류로 추정되는 동물뼈가 갈비뼈 위주로 묻혀있었다. 뼈는 예리한 도구로 잘린 흔적이 보였다. 왼손 부근에서 복숭아씨가 확인됐고, 머리맡에는 토기 2점이 포개진채 똑바로 놓여있었다. 액체류를 담는 큰 토기 안에 작은 토기가 들어가 있는 점이 특이했다.

 

▲ 월성해자에서는 소·말·개·멧돼지 등과 함께 곰·강치·사슴류·상어 등의 뼈가 확인됐다. 동물뼈 가운데는 고기를 얻기 위해 해체한 부위가 보였다. 어린 돼지의 경우 골절된 후 뼈가 붙어가는 모습도 역력했다. 사람의 치료를 받았음이 틀림없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발굴단이 하나하나 검토해나갔다. 5세 전후의 유아와, 20대 여성, 50대 남녀를 가지런히 배치하고…. 초본류로 시신을 덮고, 나무덮개를 얼굴에 씌우고, 특정 부위의 동물뼈를 뿌리고, 심상치않은 토기까지 정연하게 묻고….
결정적인 착안점이 있었다. 노출된 인골들이 성벽을 높이 쌓기 전에 땅을 다진 바닥층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 인골들은 성벽의 진행 방향을 따라 중심토루의 가장자리에 맞쳐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무슨 뜻일까. 성벽 축조와 관련된 ‘모종의 의식’을 펼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모종의 의식’이란 성을 쌓기 전에 땅을 다진 뒤 사람을 죽여 제사를 지낸 인신공희가 아닐까. 축성 과정에서 안전을 기원하고, 견고한 성의 완성을 바라면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 틀림없다. 그런 다음 본격적인 축성이 이뤄졌을 것이다.

 

▲ 해자에서 출토된 주요 씨와 열매류. 1㎜ 이하의 체를 이용한 체질로 식물유체를 선별해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 이미 1980~90년대에도 인골 23구가 쏟아졌다
이렇게 해석의 얼개를 잡은 발굴단(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은 과거의 시·발굴자료를 들춰보았다.
과연 심상치않은 자료가 보였다. 1984~85년(3구)과 1990년(최소 20구)에도 이 부근에서 23구 가량의 인골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었다. 특히 1990년 발굴에서 확인된 인골은 영아 1구, 미성년 9구, 성년 8구, 4~50대 2구 등으로 분석됐다. 그러나 당시에는 발굴에서 출토되는 인골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연구로 이어지지 않았다.

2016년 이후 인골 4구가 노출된 곳은 1984~5년 및 1990년의 시·발굴 지점에서 불과 10m 떨어진 지점이었다. 그렇다면 이 부근의 성벽을 쌓을 때 최소한 27명의 사람제사가 자행되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성을 쌓기 위한 다짐층을 조성하고 사람제사를 지낸 뒤 본격적인 축성공사가 이뤄졌을 겁니다. 성을 높고 크게 만들기 위해 중심 토루를 세운 뒤 4차례 정도에 걸쳐 흙을 쌓아 간 것으로 보입니다.”(장기명 학예연구사)

 

▲ 출토된 씨앗과 열매, 고배율의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미세한 꽃가루와 규조 등의 식물자료를 토대로 5세기 어느 여름날의 월성 해자 주변의 복원도(왼쪽). 가시연꽃 같은 갖가지 수생식물이 꽃을 피우고 있는 해자 내부도 복원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아직 사람제사가 본격공사 직전에만 자행됐는지, 혹은 단계별로 흙을 쌓을 때마다 이뤄졌는지는 알 수 없다. 장기명 학예연구사는 “성벽의 중심부 라인을 따라 제사의 희생물이 된 인골이 축조 진행 방향에 맞춰 좀 더 묻혀있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월성벽은 언제 쌓았을까. 축조 공정별 출토 토기와 목탄 등의 연대측정을 고려하면 4세기 중엽 쯤 성벽을 쌓기 위한 다짐층이 조성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 다음 4세기 중엽~후엽에 걸쳐 인신공희(사람제사)와 함께 본격적인 축성공사가 펼쳐졌을 것이다. 앞서도 밝혔듯 그 무렵은 신라가 고대국가 체계를 갖춰가던 내물왕(356~402) 시대였다.

신라의 경우 사람을 죽여 무덤에 묻는 순장제도는 502년(지증왕 3년) 공식 폐지된다. 잔인무도한 ‘사람제사’도 이때 사라졌을 것이다. 멀쩡한 목숨을 던져야 했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관습이라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필자는 사람제사가 자행된 서성벽의 발굴현장을 바라보며 1600년 전 힘없이 죽어간 백성들의 통곡을 듣는다.

(이 기사를 위해 장기명·민경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와 조민아 신라왕경핵심유적복원정비추진단 학예연구사,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배경음악/ 산절로 수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