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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갯벌 속 고려선박 건졌더니 ‘800년 된 붉은색 곶감 꾸러미’가 올라왔다

잠용(潛蓉) 2023. 6. 25. 08:43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갯벌 속 고려선박 건졌더니 ‘800년 된 붉은색 곶감 꾸러미’가 올라왔다
경향신문ㅣ2023.06.20 05:00  수정 : 2023.06.20 20:30

 

▲ 12~13세기 고려시대 선박인 대부도2호선 발굴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곶감꾸러미. 감씨와 붉은 색의 과육이 800년전의 모습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나뭇가지 뭉치와 함께 나뭇가지를 묶은 것으로 보이는 초본류가 확인됐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이거, 배 같은데?’ 2014년 11월23일 경기 안산 대부도의 방아머리 해수욕장 인근 갯벌에서 맨손어업(낙지) 중이던 어민이 옛 선박(배) 한 척을 발견했다. 육지에서 530m 정도 떨어진 갯벌이었다.
2006년 여기서 3.5㎞ 정도 떨어진 갯벌에서도 고려시대(12~14세기) 선박(대부도선)의 조각이 확인된 바 있었다.
시화호 및 주변의 해변도로 건설로 깎여나간 갯벌에서 옛 선박이 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듬해(2015) 6월부터 시작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정식발굴에서 고려시대 선박 1척이 노출됐다. 이것이 ‘대부도 2호선’이다. 선체에서는 접시와 주발 등 청자 21점과 청동숫가락 및 그릇 등 선상용기가 확인됐다.

 

▲ 곶감이 출수된 대부도2호선의 발굴모습. 곶감은 선체의 외판 밑에 깔려있었기 때문에 800년간 붉은 색의 과육 상태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800년전 곶감의 향이 났다
6월26일이었다. 갯벌에 박힌 선체를 인양하려고 배의 바닥판을 들어올릴 때 ‘붉은 색’의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체의 외판 밑에 깔려있던 ‘붉은 색의 무언가’가 노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감 씨와, 빨간 색 과육(씨를 둘러싼 과일의 살)이 나뭇가지 뭉치와 함께 나왔습니다. 한눈에 봐도 곶감 꾸러미가 틀림없었습니다.”(양순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유물과학팀장)

발굴단원이 과육에 코를 갖다댔더니 아! 글쎄, 감의 향이 풍겼다. 곶감 사이에서 몇 개의 나뭇가지를 묶은 흔적이 확인됐다. 곶감을 나뭇가지에 여러개 꽂고 몇 다발 단위로 줄로 묶은 것이 확실했다.
곶감 씨앗과 선박의 받침목을 대상으로 한 탄소연대측정 결과 1151~1224년으로 추정됐다. 출토된 청자음각연판무늬 그릇 등의 유행시기(12세기 후반)과도 맞는 연대다.

 

▲ 공기 중에 노출되어 검게 변한 곶감.  감(柑) 씨와, 빨간 색 과육(열매에서 씨를 둘러싸고 있는 살)이 나뭇가지 뭉치와 함께 나왔다.과육 사이에서는 나뭇가지를 묶은 것으로 보이는 초본류가 확인됐다. 곶감을 나뭇가지에 여러개 꽂고 몇 다발 단위로 줄로 묶어 운반한 흔적이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렇다면 대부도 2호선에서 발견된 곶감은 자그만치 800년 전의 과일이라는 얘기가 된다. 가능한 일인가?
어떻게 800년의 장구한 세월이 지났는데, 오늘 나뭇가지에 꽂은 곶감처럼 붉은 빛을 발산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수중발굴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동·식물 등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유기물은 공기중에 노출되면 썩어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공기가 통하지 않는 수중의 개흙(갯벌)에서는 훨씬 오래 간다. 곶감도 그렇게 800년 가까이 처음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배의 침몰과 함께 유실되었다면 금방 물고기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침몰선의 선체바닥 밑에 눌려 있었던 덕분에, 진공상태가 된 곶감 꾸러미가 온전할 수가 있었다.

 

▲ 곶감이 출수된 대부도 2호선이 확인된 경기 안산 대부도 갯벌. 시화호와 해변도로 조성으로 갯벌이 깎여나가면서 800년전 선박이 노출되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누런 생선살의 흔적도’
곶감과 같은 예가 또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고려시대 난파선에서는 도기 항아리가 120여점 확인됐다.
그중 마도 3호선에서는 청어, 전어, 밴댕이, 조기와 같은 소형 어류 뼈들이 뒤섞여 담겨있는 항아리가 보였다.
즉 전어, 밴댕이와 같이 쉽게 부패되는 소형 어종을 뒤섞어 염장하고 발효시켜 만든 ‘잡젓’을 넣은 항아리였다.
항아리 안에 된장 같은 장류가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심심치않게 보인다.
또 말려서 포로 만든 것으로 짐작되는 생선의 뼈에는 누런 생선살이 고스란히 붙어 있었다.

 

▲ 동·식물 등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유기물은 공기중에 노출되면 썩어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공기가 통하지 않는 수중의 개흙(갯벌)에서는 훨씬 오래 간다. 바닷속에서 발견된 800~900년 전 고려시대 유물들도 마치 지금 묻힌 것처럼 새것 같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이 배(마도3호선)에서 발견된 나무빗은 지금 사용해도 될 만큼 생생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만약에 공기중에 노출되는 유기물이라면 형체를 온전히 보전할 가능성은 ‘0’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예가 바로 붉은색의 과육이 그대로 드러난채 확인된 곶감이다. 발굴단은 주변의 흙까지 그대로 떠서 이 곶감꾸러미를 인양했다. 그러나 공기 중에 노출된 곶감 부위는 몇시간도 되지 않아 까맣게 변색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당시 수장고에 들어간 곶감꾸러미 중 개흙 속에 남아있는 부위는 붉은 색을 유지하고 있을까. 발굴 유물은 보존처리를 통해 말끔하게 복원되곤 하는데, 800년전의 곶감이 붉은 과육, 그대로의 모습을 되찾게 될 지 기대가 된다.

 

▲ 마도 3호선에서는 청어, 전어, 밴댕이, 조기와 같은 소형 어류 뼈들이 뒤섞여 담겨있는 항아리가 보였다. 즉 전어, 밴댕이와 같이 쉽게 부패되는 소형 어종을 뒤섞어 염장하고 발효시켜 만든 ‘잡젓’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갯벌에서 속속 드러나는 고선박
며칠전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해변에서 고선박으로 추정되는 선체가 발견·신고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모 대학원생이 논문준비를 위해 드론촬영을 하다가 마침 썰물 때문에 갯벌에 노출된 선체를 발견한 것이다.
국립해양연구소의 현지조사 결과 길이 14m, 폭은 5m 정도되는 ‘한선(韓船·한국 전통 배)’로 추정됐다. 맞다면 국내 바다에서 확인된 17번째 고선박으로 기록될 것이다. 연구소측은 오는 26일부터 정식 발굴조사 작업을 벌일 예정이다.

국내 해역에서 처음 확인된 난파선은 1976~1984년까지 8년간 조사된 신안선이었다.
총 11차례의 인양결과 도자기와 자단목, 선체조각 등 유물은 2만3502점에 달했고, 동전도 800만개(28톤)가 쏟아져 나왔다. 2007년 주꾸미 한마리가 청자 접시를 발로 끌어안은채 잡히는 덕분에 찾아낸 난파선이 있으니, 그것이 ‘태안선’이다.

 

▲ 마도 3호선에서 출수된 항아리는 초본류로 밀봉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된장으로 추정되는 내용물이 들어 있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인양된 유물 2만3815점 중 절대 다수(2만3771점)가 고려자기였다. ‘보물선’이라 이름 붙여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후 태안 앞바다에서는 고려시대 침몰선 3척(마도 1·2·3호)이 잇달아 인양됐다. 세 척의 화물 대부분은 쌀·콩·메밀 등 곡물과 건어물, 젓갈류 등이었다. 태안선이 ‘청자운반선’이라면 마도 1·2·3호선은 먹을거리를 개경으로 옮기던 ‘식량운반선’이었다.
1991~92년 진도의 갯벌에서 확인된 ‘진주선’은 13~14세기 중국 배일 수도 있고, 왜구의 약탈선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2010년 인천에서 확인된 ‘영흥도선’은 통일신라시대(8세기 후반)의 선박으로 추정된다.

발견된 17척 중 바닷속 아닌 갯벌에서 확인된 고선박은 8척에 이른다. 방파제 및 해안도로 조성과 같은 외부요인으로 지형이 바뀌면서 수백년 동안 갯벌 안에 숨어있던 고선박이 노출되는 것이다. 이번에 확인된 ‘해남 송호리선(가칭)’ 역시 방파제 공사로 조류의 흐름이 바뀌면서 갯벌 속에 있다가 노출됐다.

 

▲ 최근 드론촬영으로 발견 신고한 ‘해남 송호리선(가칭)’.  17번째로 발견된 고선박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도자기에 깔려 몸부림 치다가 그만…
지금까지는 중국자기 및 고려청자가 수만점 쏟아져나온 ‘보물선’(신안선·태안선)에 초점을 맞춰온 감이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식량운반선’인 마도 1·2·3호선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 중 고급 청자가 참기름병과 꿀단지로 쓰였음을 알 수 있는 명문 죽찰(대나무 조각)이 인상적이다.
필자가 요즘 난파선과 관련해서 ‘꽂힌’ 분야는 바로 ‘선원과 선상 생활’이다.
그런 점에서 마도 3호선에서 발견된 장기알 46개가 눈에 띄는 유물이다.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 최근들어 갯벌에서 고선박이 자주 노출되고 있다. 방파제와 해변도로 등의 건설에 따라 조수의 흐림이 바뀌면서 갯벌의 모양이 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무료함을 달래려고 장기를 두고 있던 선원들이 갑작스런 풍랑에 배가 난파되고 침몰하는 바람에 속절없이 수장되었을테니까?...  2008년 태안선에서 인양된 인골이 뇌리를 스친다.
수심 15m 바닥에서 발견된 인골은 왼쪽·오른쪽 어깨뼈와 왼쪽 위팔뼈, 왼쪽·오른쪽 아래팔뼈 및 척추였다.
키 160㎝ 정도의 30대 남성으로 추정된 주인공의 팔뼈와 척추에는 육체노동에 의한 발달 양상이 현저히 나타났다.

골절이나 질병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매우 건장한 신체를 가진 뱃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인골은 발견 당시 오른쪽 팔은 길게 펼친 것처럼 옆으로 폈고, 어깨뼈와 척추도 정면이 약간 들려 왼쪽으로 틀어져 있었다.
무슨 뜻일까. 배가 갑자기 침몰하자 선원은 5겹으로 선적되어 있던 도자기에 깔렸고, 탈출을 위해 왼쪽으로 비틀어 상반신을 일으키려고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안타까운 사투는 침몰하는 배와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 ‘한국판 버뮤다 삼각지대’라는 이름과 함께 ‘바닷속 경주’라는 별명까지 얻고 있는 태안 앞바다(안흥량).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하고 암초가 많아 해난사고가 빈발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조선시대 세금 운반선의 비밀
마도 1·2·3호선에 비해 조명받지 못한 마도 4호선에는 매우 중요한 코드가 숨겨져 있다.
‘마도 4호선’은 마도 해역의 확장 조사 중에 확인된 ‘조선시대 조운선’이다. 선체 내부에서 분청사기 150여 점 확인됐다. 제작기법이나 문양 등으로 보아 15세기 초의 작품으로 판단됐다.

그 중에는 구체적인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 유물이 보였다. 우선 ‘내섬(內贍)’명 사기가 3점 눈에 띄었다.
1403년(태종 3) 6월 29일 설치된 ‘내섬(시)’은 궁궐의 물품을 관리하는 호조 산하의 관청이다. 그런데 10년 후인 <태종실록> 1413년 7월16일자는 “전라도 관찰사에게 해마다 사기그릇을 진상하도록 명했다”고 기록했다.

 

▲ ‘태안선’에서 확인된 인골의 모습. 이 선원은 겹겹이 쌓인 청자 꾸러미 아래 깔려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탈출을 위해 팔을 뻗어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청자더미 때문에 실패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또 출토된 63점의 목간 중에는 ‘나주(羅州) 광흥창(廣興倉)’명 목간이 도드라졌다. 나주에는 전라도 27개 고을에서 거둔 조세를 보관하던 ‘영산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광흥창은 관리들의 녹봉을 관리하던 서울의 중앙관청이었다.
마도 4호선에서는 상당량의 벼와 보리, 새끼줄에 묶인 숫돌 15개가 다발상태로 확인됐다. 숫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전라도 나주의 특산물로 기록되어 있다.
결국 마도 4호선은 나주(영산포)에 거둬둔 전라도 세곡 및 특산물을 서울의 광흥창으로 옮기는 ‘조운선’이었던 것이다.
이 조운선은 1403~1413년 이후 15세기 초 사이에 마도 해역에서 침몰했을 것이다.

 

▲ 태안 앞바다에서 확인된 마도 4호선. 처음에는 고려시대 선박인줄 알았지만 조사결과 15세기초 세금으로 거둔 곡식과 특산물을 서울로 실어나르는 조운선으로 확인됐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태안 앞바다에서 빈발했던 침몰사고
어떤 해난사고였을까. <태종실록>에는 “전라도 조운선이 여러척 침몰했다”(1404년 7월3일)는 기사와 “전라도 조운선이 바람을 만나 침몰해서 6명이 사망했다”(1412년 10월11일)는 기록이 잇달아 등장한다.

또 1414년(태종 14) 8월4일에는 대형참사가 일어났다. “전라도 조운선 66척이 태풍으로 파선, 200여명이 익사하고 미두 5800여석이 침몰됐다”(<태종실록>)는 것이다. 당초 태종은 “태풍이 빈발하는 7~8월에는 조운선을 띄우지 말라”는 교지를 내린 바 있다. 그런데 이 영을 따르지 않아 이와같은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인재(人災)였다. <태종실록>은 “반드시 안흥량(태안 앞바다)를 통과해야 하는 전라도 조운선은 늘 위험에 노출된다”고 지적했다.

 

▲ 마도 4호선에서 출수된 ‘내섬’명 분청사기와 ‘나주 광흥창’명 목간. 마도 4호선은 15세기초 궁중의 물품을 관장하는 내섬시의 주도 아래 나주(영산창)에서 서울의 광흥창으로  세금으로 거둔 곡식과 공물을 싣고가는 조운선이었음을 증거해준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세종실록> 1448년 4월6일자는 “전라도 조운선 1척이 안흥량(태안 앞바다)에서 전복됐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문종실록> 1451년 5월26일자는 “영산성(나주)에서 출발한 조운선이 안흥량에서 풍랑에 휩쓸려 7척이 표몰(漂沒)하고, 4척은 실종됐고, 선원들은 겨우 생존했다”고 전했다. <세조실록> 1455년 9월10일자는 “전라도 조운선 54척이 안흥량에서 파손되어 침몰했거나 실종됐다”(<세조실록>)고 했다.
정리해보자. 1395~1455년 사이 안흥량에서 발생한 해난사고의 통계를 보면 파선 및 침몰된 선박이 200여척, 인명피해 1200명, 미곡손실 1만5800석 이상이었다. 이 중 전라도 조운선인 마도 4호선의 침몰사고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 고려와 조선선원들이 선상에서 쓴 식기들. 출수된 숟가락과 젓가락 수를 세어보면 배에 탔던 선원들의 수를 추정할 수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숟가락·젓가락으로 추정한 선원수
마도 4호선 출토 유물 가운데 선상생활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127점 확인됐다.
금속유물은 철제솥과 솥뚜껑, 청동숟가락 1점이 나왔다. 나무젓가락 38점과 함께 참빗과 목제빗, 뜰채, 그리고 수선용 바늘형 목제품 등 목제유물도 다수 확인됐다. 초립, 짚신 등도 나왔다. 선원들의 땀내가 물씬 풍기는 생활용품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난파선에서 출토되는 숟가락과 젓가락은 배에 탑승한 인원들의 숫자를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고려시대 선박인 마도 1·2·3호선에서 확인된 청동숟가락은 13점(1호선)과 12점(2호선), 9점(3호선)이었다.

 

▲ 마도 1호선에서 출토된 철제솥과 시루. 9ℓ들이 철세솥은 요즘 사람 기준으로 45인분의 밥을 해먹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시루도 확인됐다. 솥과 시루가 한 세트가 되어 밥을 쪄서 먹었음을 시사해준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침몰과정에서의 유실 가능성을 고려하더라도 15점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선박의 승선인원은 10~15명 사이였을 것이다. 반면 조선전기의 선박인 마도 4호선에서 청동숟가락 1점, 나무젓가락 38점이 확인되었다.
탑승인원은 19~20명 정도로 계산할 수 있다. 19세기 전라도 조세책임자였던 조희백(1825~1900)의 항해일기인 <을해조행록>은 “12척에 승선원 인원이 228명”이라 전했다. 1척당 평균 19명이 탔다는 얘기다.

 

▲ 화물선에 탑승하는 인원은 고려시대엔 10~15명, 조선시대엔 19~2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힙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밥심으로 버틴 대식가
그렇다면 뱃사람들은 숙식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조운선이든 식량 및 청자운반선이든 기본적으로 화물적재가 우선이었다. 따라서 선창 안은 태반이 화물을 적재하거나 선상용 생활물품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사용됐다.
승선자들은 주로 선박의 상부 갑판에서 먹고 자며 생활했을 것이다. 뱃사람들은 좁고 흔들리는 선체에서 힘들게 불을 피우며, 선체에 불똥이 튀지 않도록 조심조심 음식을 만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십이동파도선이나 안좌선, 마도1·2·3·4호선에서는 뱃사람들의 취사공간에서 화덕으로 사용한 돌들이 그을린 채 발견됐다. 또 마도 1·4호선에서는 땔감으로 사용된 솔방울과 불에 탄 나뭇가지가 나왔다.
난파선에서는 주로 화덕 주변에서 철제솥과 시루 등이 발견된다. 밥을 쪄먹던 것으로 짐작된다. 다리가 달린 솥으로는 국이나 찌개, 반찬을 조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각선도본>(조선 후기 조운선과 군선을 그린 도본)에 나타난 조운선. 선수(뱃머리)가 선미보다 넓고 깊이가 깊다. 세금으로 거둔 곡식의 적재량을 늘리기 위해 배의 구조를 바꾼 것이다. 이 때문에 선박사고의 위험성도 커졌으리라.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또하나 선원들은 대식가였다. 오늘날의 밥솥은 대체로 1ℓ에 5인분(0.2ℓ=1인분)정도이다. 반면 마도1호선에서 인양된 시루의 용량은 대략 9ℓ 가량이나 되었다. 지금 용량이라면 약 45인분에 해당하는 밥을 한 번에 지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어른이 하루에 두번, 한 끼에 7홉(1홉=0.18ℓ)을 먹는다”(<오주연문장전산고>)는 기록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하루에 현대인들의 4배 가량 많이 먹은 대식가였다. 달리 말하면 ‘밥심’으로 버텼다는 이야기다.

선체에서 확인된 각종 육식류로 선원들의 식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마도 2·3호선의 경우 돼지·사슴·개·고라니·오리·닭뼈들이 다수 확인됐다. 이들 뼈에서는 절단의 흔적이 관찰되고 있다. 식료품으로 사용되었다는 뜻이다.

 

▲ 1795년(정조 19) 정조의 명으로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의  ‘권수 도설’에 그려진 거북선 그림.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거북선 찾기는 수중고고학의 숙원사업
또하나 한국 수중고고학의 ‘꿈의 숙원사업’이 있다.
바로 임진왜란 때 활약한 조선 수군의 돌격선인 거북선을 발견하는 것이다. 1970년대 이후 50여 년 간 끈질기에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임진왜란 시기에 활약한 거북선이 3~5척 정도로 알려져 있으니 그것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만약 남해 바다 어디엔가 묻혀있을 수 있는 거북선을 찾는다면 이것은 희대의 ‘발굴유물’이 될 것이다.
요즘 지형변화에 따라 갯벌에서 심심찮게 고선박이 발견된다니 한번 기대해보면 어떨까. 독자여러분도 여름 휴가철에 남해 앞바다의 갯벌을 찾아가 보시길….

 

(☆ 이 기사를 위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양순석 유물과학팀장, 이규훈 수중발굴과장, 신종국 전시교육과장, 박상준 수중발굴과 학예연구사가 도움말 및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명상음악/ 홀로 앉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