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깊어가는 가을밤에 고향 그리워 맑은 하늘 쳐다보며 눈물집니다. 시냇물은 소리 높혀 좔좔 흐르고 처량하게 기러기는 울며 나는데 깊어가는 가을밤에 고향 그리워 맑은 하늘 쳐다보며 눈물집니다. <2> 어린 몸이 자라나던 고향 그리워 서쪽 하늘 쳐다보며 눈물집니다. 단풍잎은 바람결에 펄펄 날리고 애달프게 벌레들은 울어 쌓는데 어린몸이 자라나던 고향 그리워 서쪽 하늘 쳐다보며 눈물집니다.” --------------------------------- □ 울어 쌓다 - 보조동사 ‘쌓다’는 본동사가 뜻하는 행동을 반복하거나 그 행동의 정도가 심함을 나타낸다.(사투리 아님) 보조동사 ‘쌓다’는 ‘울어 쌓다, 놀아 쌓다’에서와 같이 ‘-어 쌓다’의 구성으로 주로 쓰인다. ‘울어 쌌는데’는 잘못임. (www.sdt.or.kr/)
77세에 다시 무대로… 영원한 ‘한국의 디바’ 황영금 [조선닷컴] 2007.10.01 00:04 /가곡 ‘비목’ 등 초연 名 소프라노 황영금씨, 은퇴 15년만에 컴백 음악회 “여고시절엔 노래 콤플렉스 합창시험 낙제하기도 했죠”/
◁ [사진] 원로 소프라노 황영금씨 한번 소프라노는 영원한 소프라노다. 올해 희수(喜壽·77세)를 맞은 소프라노 황영금씨는 지금도 매주 일요일마다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에서 성가대원 자격으로 노래를 부른다. 성가대 1·2부 단원 100여 명을 합쳐도 최고령에 속한다. 그는 “한 번이라도 빠지면 ‘어디 다녀오셨느냐’ ‘편찮으신 데는 없느냐’고 주위에서 묻기 때문에 노래를 그만둘 수도 없다”며 웃었다.
이 원로 성악가가 은퇴 15년 만에 다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무대에 선다. 오는 5일 세종체임버홀에서 열리는 ‘원로 성악가 황영금과 함께하는 예술가곡과 중창의 밤’이다. 그는 1992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던 아카데미 심포니 초청 독창회를 끝으로 공식 은퇴했었다. 보통 원로 성악가들은 1~2곡만 맡아서 부르고 나머지 곡은 제자들이 소화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황씨는 이날 16곡 가운데 13곡을 직접 부른다. 토스티·포레·슈베르트의 가곡과 함께 일본 유학 시절 불렀던 일본 곡과 조병화 시인의 작품에 직접 곡을 붙인 우리 가곡 ‘샘터’도 들려준다.
황씨는 ‘그리운 금강산’ ‘비목’ ‘님이 오시는지’ 등의 주옥 같은 가곡들을 초연하고, 1960년대부터 오페라 ‘아이다’ ‘투란도트’ ‘돈 조반니’의 주역으로 한국 초연 무대에 섰던 대표적인 소프라노다.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만 10여 차례 부르는 바람에 ‘황스카’ ‘황토스카’라는 별명도 얻었다. “오페라 ‘돈 조반니’에서 돈나 안나를 맡았을 때는 둘째 아이를 가져서 임신 7개월째였어요. 1막에서 돈나 안나가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쓰러지는 대목이 있어서 사양했는데도, ‘요령껏 넘어지면 된다’고 연출가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그래도 전 실감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제대로 넘어졌는데, 넘어지면서도 아이 걱정만 했던 일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함북 무산에서 태어난 소녀 황영금은 뜻밖에 청진여고 재학 시절까지도 “노래가 내 콤플렉스였다”고 했다. 학교 운동회 때는 아이들 앞에 불려나가 체조 시범도 보였고, 무용 시간엔 학생들 가운데 다리를 가장 높이 올릴 수 있었지만 정작 노래만큼은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고교 1학년 때는 합창 시험에서 떨어지기도 했어요.”
매일 방과 후, 집에 피아노가 있는 친구 집에 놀러가 노래하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1947년에는 도내 중·고교를 대표하는 합창단원으로 김일성 전 북한 주석 앞에서도 노래했다. 그해 10월 월남했고 서울대 음대 재학 중에 일본으로 건너가 성악을 수학했다. 황씨는 “영문학을 공부하던 친구가 먼저 일본으로 가서 ‘너도 함께 와서 밥도 먹고 죽도 같이 먹으며 노래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보내는 바람에 밀항선을 탔다”고 말했다.
황씨는 지금도 매일 아침 30~40분씩 산책하고, 1주일에 5번씩 1시간 이상 수영하면서 건강 관리를 한다. 일본 유학 시절 스승으로부터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었던 말은 지금도 기억한다고 했다. “하루 연습을 거르면 자신이 알고, 이틀 거르면 선생님과 주변 사람들이 알고, 사흘 거르면 청중이 아는 거예요.” 황씨는 “내일 모레면 여든이지만, 지금도 무대를 생각하면 기쁘면서 동시에 두렵고 떨린다”고 말했다.
(2007년 9월 28일 소프라노 황영금씨가 자신의 고별 콘서트를 앞두고 인터뷰하고 있다. /정경열 기자)
성악가 황영금 약력 성악가 황영금(黃英金 1931~)은 1931년 5월 28일 함경북도 청진에서 출생하였다. 오로지 ‘성악공부를 위해서는 이남으로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열 여섯 어린 나이에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었고, 풍랑이 너무 심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는 밀항선을 두 번씩이나 타고 일본 유학을 감행했다.
그에게 한국전쟁은 지금도 진저리쳐지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가족들이 뿔뿔이 헤어져 청진을 떠난 일, 청진에서 철원까지 ‘오징어 장사’로 위장해 간 일이며 초조하게 38선 넘는 날을 기다리던 일, 아슬아슬한 위기를 몇 번이고 넘기며 초겨울의 임진강을 건너던 일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같은 고비를 넘기고 피난민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그는 생존에 대한 안도감에 앞서 ‘이제 음악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기쁨에 더욱 설레었다고 한다.
황영금은 그러나 이런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리 ‘노래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청진여자중학교 시절에는 연거푸 합창부 테스트에서 떨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혼자 열심히 연습한 결과 합창부 테스트에서 떨어뜨린 음악 선생님에 의해 함경북도 중·고등학교 대표 솔리스트로 뽑혀 공회당에서 이흥렬 작곡 <고향 그리워>를 부르기에 이른다.
이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재학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마친 그는 오페라 전문 가수로 활동하며 다수의 오페라 무대에서 그 기량을 과시했다. 특히 <토스카>에서 토스카 역을 잘 소화해내어 ‘황 토스카’라는 별명을얻을 정도로멋진 목소리를 지녔다. 1959년부터는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시에 오페라 가수로서, 교육자로서 많은 후배들을 길러냈다.
[경력] 1951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2년 중퇴 1956년 일본 동경예술대학 음악학부 성악과 졸업 1958년 동경 이기회(二期會)오페라연수과 수료 1959년~1996년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1973년 독일 베를린음대 수학 1962년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명예교수 2003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기타 88올림픽음악자문위원, 한국슈베르트가곡연구회 회장, (사)한국음악협회 이사, 한국바그너협회 이사, (재)한국문화협회 이사 등 역임 (상훈) 1987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88년 문교부장관 표창 1996년 국민훈장 목련장 2001년 대한민국예술원상
[활동] 1959년 조선일보 주최 독주회 1975년 동아일보 주최 독주회 1992년 아카데미심포니 초청 귀국독창회 국내외 주요음악회 출연 200여회 1962년 <왕자호동> 1973년 <아이다> 등 오페라 주연 35회 [저서] <벨칸토 창법 연구>(1965)
[리뷰] “저는 새 학기에 신입생들이 들어오면 ‘아름다운 욕망을 가지라’는 얘기를 꼭 해줍니다. 욕심을 갖는다는 것은 성취를 위한 동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 요즘 학생들은 예전에 비해 공부를 덜 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너무 평이한 얘기 같지만 ‘첫째도 노력, 둘째도 노력, 셋째도 노력이 비결’이라는 것, 그리고 ‘전공에 반쯤 미쳐보라’고 얘기해 주고 싶습니다.
그 자신도 평생 공부하는 자세로 살려고 애써왔다. 1990년 안식년 휴가로 시간적 여유가 생겼을 때는 1년간 이탈리아 시에나에 가 이탈리아어 공부를 했다. 흔히 이탈리아 사람들은 상냥하다고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프레토상구에’(피가 냉정하다는 뜻)라고 할만큼 냉정하기 이를 데 없다. 외로움을 잊기 위해서도 하루 네 시간씩만 자고 공부했다. 아름다운 관광지는 돌아오기 전날 단 하루 돌아보는 데 그쳤다.
그는 그처럼 노력하면서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변화하는 목소리만은 어쩔 수가 없다’며 웃고 만다. “남들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고 위로하지만, 제 자신은 느끼지요. 어디선가 좋은 노래 소리가 들려오면 마음으로는 그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안되거든요. 그럴 때는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1960년~1970년대 한국 오페라계의 프리마돈나로 활약하던 소프라노 황영금 교수. 그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단어 하나에도 신경 써가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는데 이런 그를 두고 인터뷰 자리에 동석한 장일남 씨는 ‘끔찍한 완벽주의자’라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완벽주의야말로 62세의 프리마돈나를 건강하게 지켜온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출처: ‘무대은퇴 선언한 한국 오페라계의 프리마돈나 황영금’- 하유미기자 <음악동아>, 1992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