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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추억의 가요] '고향초'(故鄕草 1952) - 장세정 노래

잠용(潛蓉) 2012. 11. 4. 18:20

고향초(故鄕草 1952) 
金茶人 작사/  朴是春 작곡/ 張世貞 노래

< 1 >
南쪽 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
뒷 東山에 冬柏꽃도
곱게 피는데

뽕을 따는 아가씨들
서울로 가네
情든 故鄕 情든 사람
잊었단 말이냐?

< 2 >
찔레꽃이 한잎두잎
물 위에 내리면
내 고향에 봄은 가고
서리도 찬데

이 바닥에 情든 사람
어디로 가나?
傳해 오는 흙 냄새를
잊었단 말이냐?

< 3 >
기러기가 울고 가는
고요한 밤에
이슬 맞은 들菊花가
고이 잠들 때

별을 따는 아가씨들
서울로 가네
情든 山川 情든 땅을
잊었단 말이냐?

(출처: 가사집 http://gasazip.com/3155)

 

‘고향초’ - 장세정(1921~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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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정-고향초 원곡 (영상출연 가수김수진 스타365)

 

'고향초'- 송민도/ 백설희(1948)

 

'고향초'- 이미자 (1980.02.16 토요일 토요일 밤에)

 

홍민- '고향초'(1986)

 

이혜리-'고향초' (2012.3.19.가요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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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세정(張世貞 1921~2003)

가수. 1921년 5월 28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하리모토 세이테이(張田世貞)이다. 아버지 장한무(張漢武)는 일찍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것으로 전하는데, 삼일동지회(三一同志會) 조직부 부원 장한무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으나, 여부는 확실치 않다. 선교리에서 유정(柳町)으로 이사한 뒤 평양 남산(南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기록에 따라서는 경림(敬臨)심상소학교를 졸업했다고 하기도 한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고등여자보통학교를 다니다 중퇴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실치 않다. 이후 평양 화신(和信)백화점에서 근무하다가 오케(Okeh)레코드를 운영하던 이철(李哲)의 눈에 띄어 가수로 발탁되었다.

1936년 11월 평양방송국 개국방송에 출연하여 가수로 이름을 알렸고, 1937년 2월에 공식적 데뷔곡인 <연락선은 떠난다>를 발표했다. 이후 1943년까지 약 100여 곡을 발표했으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아시나요>, <불망의 글자>, <백만 원이 생긴다면>(이상 1937년), <토라진 눈물>, <남장미인>(이상 1938년), <항구의 무명초>(1939년), <잘있거라 단발령>(1940년), <역마차>(1941년), <목화를 따며>(1942년) 등이 있다. 발표한 곡 가운데 <하누님 맙쇼>(1938년)와 <편지와 전화>(1939년)는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가두 연주 금지 등의 처분을 받기도 했다. 음반을 내는 동시에 오케레코드 전속 공연단체인 조선악극단에서도 주연으로 활동했고, 여성중창단 저고리시스터즈의 일원으로도 인기를 모았다.

1940년을 전후해 이철과 사실상 부부로 생활하기 시작했고, 그 무렵 일시 일본에 거주하며 성악가 하라 노부코(原信子)에게 발성 지도를 받았다. 1944년 6월에 이철이 사망한 이후에는 신협(新協)악극대 소속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는 백두(白頭)악극단, 악단 제일선(第一線), 강남(江南)악극단 등 여러 단체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으나, 주로 김해송이 이끈 K.P.K악단 무대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1948년부터 다시 음반도 발표하기 시작하여 <울어라 은방울>(1948년), <백팔염주>, <여인애가>(이상 1949년), <고향초>(1952년), <샌프란시스코>(1953년) 등으로 인기를 모았다. 196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가수 활동을 했고, 1973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미국으로 간 지 몇 해 되지 않아 지병이 악화되어, 제대로 거동을 하지 못하고 실어증까지 겹쳐 오래 투병을 하다가 2003년 2월 17일에 타계했다. (문화콘텐츠닷컴)

◇ 가수 장세정(張世貞 1921~2003) 약력
장세정(張世貞, 일본식 이름: 張田世貞, 1921년 ~ 2003년 2월 16일[1])은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이다. 이북 평양에서 출생하여 일찍 어머니를 잃고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평양 화신백화점의 악기점에서 근무하던 중, 만 15세 무렵이던 1936년에 평양방송국 개국 기념 가요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을 계기로 오케레코드의 이철에게 발탁되어 가수가 되었다.  오케레코드에서는 '평양이 낳은 가희(歌姬)'로 홍보하며 장세정을 데뷔시켰는데, 1937년 초에 발표한 박영호 작사, 김해송 작곡의 〈연락선은 떠난다〉가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항구에서의 이별을 다룬 이 노래에는 일제 강점기의 민족적 한이 표출되어 크게 사랑받았다는 평이 있다. 가볍지 않고 중후한 듯하면서도 시원함이 느껴지는 장세정의 창법에는 '청초한 색기'로 불리는 묘한 매력이 있었고,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까지 최고 인기 가수의 한 사람이자 오케레코드의 간판 스타로서 많은 노래를 유행시켰다. 대표곡으로는 데뷔곡인 <연락선은 떠난다> 외에 김정구와 함께 부른 만요 <만약에 백만원이 생긴다면은>을 비롯하여,  <아시나요>  <처녀야곡> <불망의 글자> <토라진 눈물> <항구의 무명초> <잘 있거라 단발령> <역마차> 등이 있다.

장세정이 데뷔한 1937년은 중일 전쟁이 발발한 해였다. 이후 차츰 전쟁이 확대되면서 가수들은 군국가요 보급에 동원되었다. <역마차>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장세정도 번안곡인 <지원병의 어머니> 동명의 군국영화 주제곡인 <그대와 나>를 포함해 여러 편의 친일가요를 오케레코드사를 통해 발표했다.[2][3]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분야에 선정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의 여자 가수로는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과 쌍벽을 이룬다는 평이 있을 만큼 꾸준한 인기를 유지했다.[4] 이난영이 데뷔한 뒤 등장한 장세정은 이난영이 확립한 창법을 이어받는 가운데 비성의 꾸밈음을 더하는 등 좀 더 화려한 기교를 추가하였다.

광복 후에는 김해송이 조직한 KPK악극단에서 악극 배우로 활동했고, 1948년 봄에 조명암과 김해송 콤비가 해방의 기쁨을 표현해 만든 <울어라 은방울>을 불러 히트시켰다. 이 노래는 장세정 불후의 명곡이라는 평이 있을 만큼 높이 평가받는다. 한국 전쟁 때는 대구로 피난을 내려와 오리엔트레코드에서 <고향초>  <즐거운 목장> <샨프란시스코> 등의 노래가 담긴 음반을 발매했다. <고향초>는 본래 1948년에 나온 송민도의 노래였으나 장세정이 재 취입해 널리 크게 히트시켰다. 그러나 한국 전쟁 이후 장세정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장세정의 노래 중에는 월북 작사가인 조명암과 박영호의 작품이 많았고, 김해송 역시 전쟁 중 행방불명되어 월북했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월북 작가의 노래는 금지곡이 되거나, 작가의 이름을 바꾸고 가사도 고쳐서 편법으로 불러야 했다. 말년에는 미국으로 이민하여 1978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은퇴공연을 갖고 2003년에 사망할 때까지 거주했다.

출생/ 1921년 평양
사망/ 2003년 2월 16일 캘리포니아 주 LA
장르/ 트로트
직업/ 가수
활동시기/ 1937년 ~ 1960년대
대표작/
〈연락선은 떠난다〉 1937년
〈아시나요〉 1937년
〈항구의 무명초〉 1939년
〈잘 있거라 단발령〉 1940년
〈역마차〉 1941년
〈울어라 은방울〉 1948년
〈고향초〉 1952년 (이상 위키백과)-

◇ `연락선은 떠난다’ ’고향초’ 의 가수 장세정씨 별세
[연합뉴스] 2003.02.17 08:39
 
(서울=연합뉴스) 홍제성 기자 = <`연락선은 떠난다>를 부른 원로가수 장세정(張世貞)씨가 어제 16일 오후 5시 31분(현지시간) 미국 LA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 1921년 이북 평양에서 출생한 고인은 1936년 평양 가요콩쿠르에서 우승컵을 받은 것을 계기로 가수의 길로 들어선 뒤 1946년부터 KPK 악극단 전속배우로 뮤지컬 <샤로매> <카르멘> <춘희> 등에 출연했다. 고인은 1937년에 발표한 김해송 작곡ㆍ박남포 작사의 < 연락선은 떠난다>를 비롯해 김정구씨와 듀엣으로 부른 <만약에 백만원이 생긴다면>  <처녀야곡> <눈물> <항구의 무명초> <역마차> <울어라 은방울> <고향초> 등 800여 곡을 주옥같은 가요를 남겼다.

1973년에 도미(渡美)한 이후에도 현지에서 해외교포 위문공연에 여러 차례 나서기도 했다. 지난 1996년 8월 신나라레코드는 일제시대 SP판을 집대성 <유성기로 듣던 불멸의 명가수>란 타이틀의 CD전집을 펴내면서 13편의 독집편 가운데 장세정 편을 독집으로 선보였다. 유족으로는 한영(62)ㆍ한웅(59)ㆍ한세란(56), 한성(54)씨 등 3남 1녀가 있다. 고인의 유해는 미국 헐리우드 포레스트 론 공원묘지에 안장된다.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는 서울 마포구 도화동 사무실에 빈소를 마련했으며 오는 21일 낮 12시에 추모식을 개최할 예정이다. 연락처: ☎(02)3445-6031〜3   [jsa@yna.co.kr]

[추가자료] 가수 장세정 추모의 글(권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