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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민속·역사

[제사가 달라진다 3] '장남이 책임' 이제는 옛말

잠용(潛蓉) 2013. 3. 31. 07:48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676호(12.09.26~10.09 일자) 기사입니다]

 

[제사가 달라진다]

달라진 제사 트렌드… ‘장남이 책임’ 이제는 옛말 
[매경이코노미] 2012.10.04 09:12:58 | 최종수정 2012.10.04 09:17:48 

 

제사문화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 제사문화의 원형은 조선시대 유교가 주류문화로 자리 잡으면서 비롯됐다. 장자 우선주의, 대가족 문화가 근간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핵가족화, 개인주의 확산 등으로 제사문화 역시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됐다. 최근 트렌드를 짚어봤다.

 

 

트렌드 1
제사비용은 적립식, 제주는 돌아가며

 

2남 2녀 중 장남인 P씨(45)는 이번 추석부터 제사비용을 공동으로 부담하기로 했다. P씨는 15년 동안 장남이라는 이유로 제사비용을 전액 부담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은 데다 장남이 꼭 전액을 부담할 필요는 없다는 주변 조언에 힘입어 형제들에게 제사비 공동 부담을 제안했다. P씨 집안의 제사는 연간 총 12회. 증조부, 증조모, 조부, 조모, 아버지의 기일 제사 5회와 생일 제사 5회, 추석과 설날 지내는 차례를 합친 횟수다. 제사를 한 번 지내는 데 드는 비용은 25만~30만원. 연간으로 따지면 300만원이 훌쩍 넘는다.

 

P씨의 제안에 형제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제사비용은 원칙적으로 장남이 부담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오랜 설득 끝에 매달 10만원을 여동생 명의 통장에 적립하기로 결정했다. P씨는 “상속법도 차등상속에서 균등상속으로 바뀌었으니 제사에 대한 부담도 당연히 나뉘어야 한다. 똑같이 분배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형편에 따라 자기 몫은 조금씩 내야 맞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직장인 C씨(39)는 장남이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홀로 제주(祭主) 역할을 해 왔다. 비록 제사비용은 형제들과 공동으로 부담했지만, 매번 제사음식을 준비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C씨는 고민 끝에 5년마다 제주를 돌아가면서 맡자고 형제들에게 제안했다. 맞벌이 가정의 형편을 고려해 앞으로는 제물도 공동으로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둘째 며느리인 H씨(41)는 제사가 별로 두렵지 않다. 삼형제가 시부모님 합제사, 추석, 설 제사를 돌아가면서 준비하는 때문이다. H씨는 “몇 년 전 큰아주버님이 이렇게 제안한 후 삼형제가 제사 때마다 큰 부담 없이 모여 즐긴다”고 얘기한다. 매번 설에 제사상을 준비했던 H씨는 올해부턴 추석 제사상을 준비하기로 했다. “교사인 막내 동서가 설은 보통 방학 때 돌아오니 자기가 설에 하고 싶다고 해서 바꿔줬어요. 저도 맞벌이지만 저야 뭐 설에 준비하나 추석에 준비하나 상관없으니까요. 제사 갖고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으니 부모님이 안 계셔도 삼형제가 자주 만나게 되고, 여러모로 좋은 듯하네요.”

 

트렌드 2
역귀성의 진화 ‘시댁 호텔’

 

명절 때마다 도로가 꽉꽉 막히자 아예 지방에 사는 부모님이 수도권에 사는 자식들 보러 올라오는 건 이제 흔하게 보는 풍경이다. 최근엔 부모님들이 자녀들의 집에 기거하기보다 호텔에 머무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제주도에 사는 K씨는 서울에서 자영업을 하는 큰아들, 직장생활을 하는 작은아들 집을 번갈아 오가며 제사며 차례를 지내왔다. 차례 전후 3~4일이라지만 K씨는 며느리는 물론 나중에는 아들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를 느꼈다. K씨는 아들들에게 ‘너희들이 불편한 듯하니 제3의 장소에서 보자’고 제안했다.

 

두 아들은 상의 끝에 시내 호텔에 추석패키지를 구해 K씨를 모시며 호텔 뷔페식당에서 가족 모임 겸 제사를 해결하고 있다. 시중 한 호텔 관계자는 “명절 때면 지방에서 올라온 50∼60대 노년층이 상당수 눈에 띈다. 특히 연휴가 짧을 경우 교통 체증도 이와 비례해 더욱 극심해지기 때문에 이런 역귀성행렬도 늘어난다. 며느리로 추정되는 여성이 ‘시댁 호텔’로 간다는 표현을 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고 전했다.

 

트렌드 3
제사상 주문 “콘도로 배달해주세요”

 

부산에 사는 자영업자 B씨(50)는 3년 전부터 명절 때 가족여행을 떠난다. 추석과 선친의 기일이 3일밖에 차이 나지 않아 이전만 해도 3일 차를 두고 각각 따로 차례와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형제들의 참석률은 점점 떨어지고 가까운 시일 내에 두 번이나 제사상을 준비해야 하는 아내의 푸념도 해를 넘길수록 심해졌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B씨는 “어차피 조상에 대한 추모의 마음이 중요하지 형식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해운대에 있는 콘도를 잡아두고 제사음식은 주문하는 식으로 바꿨다. 그랬더니 온 가족이 좋아하고 특히 아이들은 명절을 기다리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제사음식배달업체 전순옥제사음식전문점의 전순옥 대표는 “주문량도 늘었지만 최근에는 이처럼 집이 아니라 콘도로 배달해 달라는 주문도 점점 늘어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이 회사의 경우 5년 전 연간 600상에 불과했던 주문량이 지난해 1800상으로 3배가량 늘었다. 올해 추석 200상 예약도 일찌감치 마감됐다. 전 대표는 “사업 초창기에는 동네 사람 중심으로 주문이 들어왔는데 요즘은 지역도 다양해지고 받는 주소도 일반 가정집이 아닌 경우가 많다”라고 전했다.

 

제사대행업체에서 제사음식을 주문하는 가격은 10만~30만원 전후다. 경상도, 전라도 등 지역별로 제사음식이 전문화돼 있으며 가족 수에 맞게끔 주문할 수 있다. 3일 전에 주문하면 원하는 날짜와 시간에 배달해준다. 초기에는 20~30대 맞벌이 부부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맞벌이 며느리를 둔 시어머니들의 관심이 부쩍 늘었다. 이상진 제례마을 대표는 “최근 인식이 많이 바뀌면서 맞벌이 며느리를 둔 시어머니들이 적극적으로 문의를 해온다. 1년에 3~5회 이상 주문하는 단골고객도 많다”고 귀띔했다.  

트렌드 4
인터넷 생중계 보며 제사 참여

 

해외 출장이나 유학 등 부득이한 사정으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할 경우 IT기기를 활용해 가족들이 지내는 제사에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할 수 있다. 캐나다에서 유학중인 J군(19)은 지난해부터 한국에서 진행되는 제사를 인터넷 생중계로 보면서 고인을 추모한다. J군은 “인터넷 영상통화 프로그램을 PC에 설치해 가족들이 제사를 지내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본다. 모니터를 통해 보이는 제사상을 향해 절도 한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중요한 행사에 함께 참여할 수 있어서 좋다”고 밝혔다.

 

온라인에 ‘가상 제사상’을 차려 화면을 보면서 제사나 차례를 지내는 방법도 있다. 대전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사이버영락원은 대전시립묘지와 구봉산 영락원(납골당)에 고인을 모신 가족이면 누구든지 인터넷을 통해 영정을 두고 제사를 지내도록 사이버 공간을 마련했다. 여기서 가상으로 제사상을 차리고 분향할 수 있으며 고인의 사진과 동영상도 볼 수 있다. 사이버영락원 관계자는 “2005년에 처음 시작됐는데 이용자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주로 수도권에 거주하는 가족들이 멀리 찾아오기 어려울 때 사이버 공간에서 고인을 추모한다”고 전했다.

 

서울시설공단 서울시립승화원 홈페이지상에 있는 ‘사이버 추모의 집’ 방문자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서울시립 장사시설을 이용한 고인의 유가족 또는 단체가 이용할 수 있다. ‘사이버 추모의 집’ 관계자는 “홈페이지에 접속한 후 인터넷상에서 헌화를 하거나 추모의 글을 남길 수 있고, 고인에 대한 애틋한 사연을 올리면 네티즌들이 답글을 달아주기도 한다”며 “명절 때 특히 방문자들이 늘어난다”고 전했다.

 

트렌드 5
조상 여섯 분 제사 연 2회로 줄여

 

통상 기제사는 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돌아가신 날에 지낸다. 최근에는 여러 조상의 제사를 한 날짜로 합한 합제(합동제사)를 지내는 게 일반화되고 있다. L씨는 그간 연간 6회의 제사를 지내왔다. 조부모부터 고조부모까지 3대의 조상 여섯 분에 대해서 돌아가신 날마다 제사를 지낸 때문이다. L씨는 연간 6회였던 제사 횟수를 최근 2회로 줄였다.

 

자녀들이 시간을 맞춰 한자리에 모이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합제를 결정한 것. L씨 집안은 추석 전까지의 제사는 설날에, 설날 전까지의 제사는 추석에 지내기로 결정했다. L씨는 “연간 제사 횟수를 2회로 줄이고, 모든 자녀가 의무적으로 참여하기로 원칙을 정했다. 조상님의 제사를 통합제사일로 정하면 선대 조상님들이 같이 자리하기를 꺼려 집안에 우환이 생길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시대가 바뀌었다는 데 모두 동의했기 때문에 합제 결정이 어렵지 않았다”고 전했다.

 

묘사(산소에 가서 하는 제사) 문화도 변화가 감지된다.경북 안동의 한 종갓집은 선산을 관리할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자 산소를 자연 그대로 두도록 했다. 대신 종갓집 앞에 조상들을 기리는 표석을 세우고 1년에 한 번 단체로 제사를 지내는 식으로 정리했다. 이세준 안동 진성이씨 대종손은 “관은 이장하면 선조에게 해가 있다고 해서 그대로 놔두고 합동 묘사를 지내는 집안이 많아졌다”고 전했다.

 

[박수호 기자 suhoz@mk.co.kr ,임혜린 기자 lynn@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