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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불교·죽음

[불교상식] '부처님 마지막 말씀' (내가 깨달은 것)

잠용(潛蓉) 2013. 5. 15. 05:48

Gautama Buddha passed away on the first full moon day of May.(WFB)

(부처님은 5월달 첫번째 만월날 열반에 드셨다)

 

“Decay is inherent in all compounded things,
Work o
ut your salvation with diligence.”

“소멸(消滅)은 이미 만물에 내재된 것, 그러니 부지런히 네자신의 해탈(解脫)을 성취하라.”


 

◇ 부처님, 육신을 버리고 열반(涅槃)에 드시다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 육신을 버리고 열반에 드시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께서 ‘진리의 수레바퀴’(法輪)를 굴리신 지 45년. 그동안 부처님께서는 항상 중생 속에서 동고동락(同苦同樂)하셨다. 그러나 80세가 되신 해에 부처님은 아난존자(阿難尊者)에게 “나는 이미 모든 법을 설하였다. 내게 이제 비밀은 없으며 육신은 가죽 끈에 매여 간신히 움직이고 있는 낡은 수레와 같다”고 말씀하시고 “너희들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自身)을 의지처로 삼고, 법(法)을 등불로 삼아 정진(精進)하라”고 이르셨다. 이것이 유명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전법의 길을 떠나 쿠시나가라의 사라 쌍수(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은 열반에 드시기 전 제자들에게 의심 나는 것이 있는가를 세번 물으신 후 마직막으로 제자들에게 최후의 당부를 하셨다.


“모든 만물은 변하니 부지런히 정진하라”

 

‘길 위에서 나서, 길에서 살다, 길에서 돌아가’시니 이 날이 음력 2월 15일 열반절(涅槃節)이다.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ana)에서 온 말로 ‘불어서 끈다’는 뜻이다. 무엇을 끄는 것인가? 바로 욕망과 번뇌의 불을 끄는 것이다.“지혜 제일”이라 불리는 사리불(舍利佛)은, 열반이란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을 영원히 없앰으로써 모든 번뇌를 소멸시킨 것이며, 열반에 이르는 방법은 바로 팔정도(八正道)를 행함이라고 하였다.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성도(成道)를 이루신 그 순간부터 이미 열반에 드신 것이다. 세상에서 인연으로 생긴 것은 반드시 소멸하는데 부처님께서는 이 “무상(無上)의 진리”를 스스로 따르셨다. 원래 부처님은 업(業)의 굴레에 매인 분이 아니었다.

 

깨달으신 부처님은 영원하여 다시는 인간으로 태어난다거나 죽는 일이 없다. 부처님께서는 “나의 육신은 설사 죽더라도 제자들이 법과 계율을 잘 지키고 행하면 나의 법신(法身)은 영원히 상주하여 멸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부처님의 생애는 누구든지 부처님의 말씀대로 따르고 수행하면 성불(成佛)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길이다. 이는 모든 중생은 스스로 지닌 불성으로써 충분히 가능하며 열반은 그 최고의 경지를 나타낸 것이다. (Buddha TV) 

 

◇ <대반열반경>의 부처님 마지막 말씀

부처님 생전 마지막 직계 제자가 된 이교도 수밧다가 부처님께 귀의하고 나서 세존께서는 아난존자(阿難尊者)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그런데 아마 그대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나버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 라는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아난다여. 그러나 그렇게 보아서는 안된다. 아난다여, 내가 가고 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法)과 율(律)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어느 한 비구라도 부처나 법이나 승가나 불도(佛道)나 도 닦음에 대해서 의심이 있거나 혼란이 있으면 지금 물어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우리의 스승은 면전(面前)에 계셨다. 그러나 우리는 세존의 면전에서 제대로 여쭈어 보지 못했다.’ 라고 나중에 자책하는 자가 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비구들은 역시 침묵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세 번째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 비구들이여, 어느 한 비구라도 부처나 법이나 승가나 불도(佛道)나 도 닦음에 대해서 의심이 있거나 혼란이 있으면 지금 물어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 우리의 스승은 면전에 계셨다. 그러나 우리는 세존의 면전에서 제대로 여쭈어 보지 못했다.’ 라고 나중에 자책하는 자가 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비구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자 아난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비구 승가에는 부처님이나 법이나 승가나 불도(佛道)나 도 닦음에 대해서 의심이 있거나 혼란이 있는 비구는 단 한명도 없다고 제게는 청정한 믿음이 있습니다.”

 

“ 아난다여, 그대는 청정한 믿음으로 말을 하는구나. 아난다여, 참으로 여기에 대해서 여래에게는 ‘ 이 비구 승가에는 부처님이나 법이나 승가는 불도나 도 닦음에 대해서 의심이 있거나 혼란이 있는 비구는 단 한명도 없다.’ 는 지혜가 있느니라. 아난다여, 이들 500명의 비구들 가운데 최하인 비구가 예류자이니 (주: 최하인 자란 덕에 의해서 최하인 자이다. 아난존자를 두고 한 말이다. 아난존자는 아직 예류자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지고 [해탈이] 확실하며 정등각으로 나아가는 자이다.” 그리고 나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제 그대들에게 당부하노니,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방일하지 말고 [해야 할 바를 모두] 성취하라!”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유훈이었다. (주: 불방일(不放逸)

 

paranirvana

◇ 부처님의 임종 게송
[부처님 오도송(悟道頌)]

(법구경 153~154장)

 

다생윤회중(多生輪廻中) 여러 생을 윤회하며 찾아서 헤매었네
탐심조옥자(探尋造屋者) [내 마음의] 집짓는 자 누군인지 알려고
이미득견지(而未得見之) 찾아 헤매다 헤매다 찾지 못하고
재생실시고(再生實是苦) 거듭되는 재생은 참으로 고통이었네.

 

조옥자이견(造屋者已見) 오, 집 짓는 자여! 이제 너의 모든 것이 보인다!
불재조신옥(不再造新屋)-(色身) 너는 이제 더이상 집을 짓지 못하리라.
연주균단절(椽柱均斷折)-(煩惱) 네가 사용하는 모든 서까래는 부서지고
동량역최훼(棟樑亦摧毀)-(無明) 대들보도 무너져 조각이 났다.

 

아심증무위(我心證無爲)-(涅槃) 나는 이제 체득했다. 지음 없는 마음과
일체애욕멸(一切愛欲滅)  욕망의 완전한 소멸을...
(法僧比丘 漢譯,)

 

[영역)
Through many a birth in samsara(윤회)

Have I wondered in vain,
Seeking in the builder of this house(of life)
Repeated birth is indeed suffering!(고통)

 

O house builder, you are seen!
You will not build this house again.
For your rafters(서까래) are broken and your ridgepole(대들보) shattered.
My mind has reached the unconditioned(절대):


I have attained the destruction of craving(갈망).  
(Buddharakkhita)

 

[부처님의 오도송(悟道頌)에 대한 해설]

부처님의 오도송에 대한 해석은 일반적으로 서까래는 모든 ‘번뇌’와 ‘오염원’을 말하고, 대들보는 ‘무명’을 의미한다. 마치 대들보가 모든 서까래를 받치고 있듯이 무명이 모든 번뇌를 지탱해 주고 있는 오염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혜에 의하여 갈애라는 ‘집짓는 이’를 발견하고 서까래라는 모든 오염원을 부수었을 뿐만 아니라 무명(無明)이라는 대들보도 제거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의 형성작용이 멈추어서 ‘니르바나(Nirvana, 열반)’를 성취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윤회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집’이라는 몸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분명히 갈애(渴愛 tanha, 딴하)와 무지(無知 avijja, 아윗자)가 윤회의 원인이라고 밝히셨다. 따라서 갈애와 무지가 있는 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수레바퀴는 계속 굴러간다. 하지만 갈애를 위시한 모든 번뇌를 쳐부순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의 윤회가 없다는 것이다.

 

윤회는 갈애와 무명에 휩싸여 치달리고 흘러가는 중생들의 생생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윤회(苦)’를 설하셨고, 윤회의 원인(集)인 ‘갈애’를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滅)인 ‘열반’을 설하셨고, 다한 경지를 실현하는 방법(道)인 ‘팔정도(八正道)’를  설하셨다. [진흙속의연꽃]



부처님 오도송(빠알리어 챈팅) - Visarad Srima Ratnayaka(스리랑카)

(전체 화면으로 크게 보세요)

◇ Date of Buddha's Death

[Question]
Dear Sir,
I happened to learn that the exact date of Buddha's death is not known even though we commemorate it on a certain fixed date of the year. Why is there a debate on this one? Is it because people in the past were not that intelligent to keep track of events and modern scientists are more advanced? I want to know the date that is mostly accepted and any shortcomings of the scientific researches performed on this, if any. Thanks in advance

 

[Answer]
Hi Chaminda,
Thank you for asking me. The day is called "Wesak Day" or "Buddha Day".  It is the thrice sacred day of the birth, enlightenment and passing away (parinibbana) of the Buddha.  At the sixth World Conference of the World Fellowship of Buddhists (WFB) held in Phnom Pehn, Cambodia, in 1961, the conference resolved: "That the first full moon day of May be recognized as the 'Buddha Day' and celebrated accordingly."  The month of May corresponds with the month of Visaka of the Indian calender.  It was in the full moon day of Visaka that the thrise blessed events took place.

[http://en.allexperts.com/q/Buddhists-948/Date-Buddha-Death.htm]


 


Bodhi Khalid : The River is Flowing

 

The river is flowing, flowing and growing

The river is flowing, back to the sea

Mother earth carry me, child I will always be

Mother earth carry me, back to the sea.

강물은 흐르네, 흐르고 커지네

강물은 흐르네, 흘러서 바다로 돌아가네.

어머니 대지여, 보내주세요, 저는 언제나 어린아이

어머니 대지여, 저도 바다로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