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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불교·죽음

[불교설화] 양 무제(梁 武帝)와 원숭이의 악연(惡緣)

잠용(潛蓉) 2013. 5. 17. 21:51

양무제(梁 武帝)와 원숭이의 악연(惡緣)

 

 

옛날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초대 황제이자 최후의 황제(재위 502∼549)였던 무제(武帝)는 본명이 소연(蕭衍)이고 묘호는 고조(高祖)였다. 막장 황제들의 릴레이였던 남조시대의 몇 안되는 명군으로 48년이라는 긴 치세 동안 천감(天監), 보통(普通), 대통(大通), 중대통(中大通), 대동(大同), 중대동(中大同), 태청(太淸)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제나라 말기 황제 동혼후는 폭거를 저질러 많은 대신들을 살해하고, 같은 종친(宗親)인 소의(蕭懿)을 살해했다. 옹주자사로써 양양에 주둔하고 있던 동생 소연(蕭衍)이 폭군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동혼후를 죽이고, 화제(和帝)을 옹립한 뒤 502년 화제로부터 왕위를 선양받아 건국하였다. 그가 바로 남조 최고의 명군으로 칭송받은 무제(武帝)이다.

 

무제의 치세는 48년이란 긴 세월이었고, 그동안 내정을 정비하여 구품관인법을 개선하고, 불교를 장려하여 국내를 다스리고 불교문화를 번성시켰다. 대외관계도 비교적 평온하여 약 50년간 태평성대를 유지하여 남조 최 전성기를 보냈다. 또한 31살의 젊은 나이에 죽은 무제의 장남 황태자 소통(蕭統; 소명태자(昭明太子)이 편찬한 《문선 文選)》은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세계적 훌륭한 문헌유산이었다.

 

그러나 전생에 부처님과의 인연 때문이었을까? 무제의 50년에 걸친 치세 후반에는 불교에 너무도 심취하여 5리마다 암자(庵子)요, 10리마다 절을 지었다. 그것도 모자라  스스로 아예 불제자(佛弟子)가 되어 동태사(同太寺)에 귀의(歸依)하는 무모한 행동을 여러 번 일으켰다. 그럴 때마다 신하들은 막대한 돈을 써서 무제를 되찾아 왔기에 국고가 크게 궁핍해졌다. 퇴위후 법황의 신분이라면 모를까 재임중에 황제를 잃어버리는 일은 중국 역사상 없었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위키백과)

 

[양무제의 업적]

여담이지만 동북아시아 불교의 승려들이 고기를 못 먹게 한 주인공이자 지금의 콩고기 탄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이전에는 동북아 불교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고기를 먹었고, 초기 불교는 물론이고, 현재의 남방 불교에서는 어지간한 육식은 허용했었다. 그런데 양무제가 종묘 제사에도 고기와 술을 쓰지 않고, 술과 육식을 금하는 <단주육문 斷酒肉文>을 공포하면서 승려들이 황제의 뜻에 거스르지 않으려고 채소만으로 만들면서 고기와 비슷한 맛이 나는 정진요리를 개발했고, 이 과정에서 콩고기가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고착화된 승려의 육식금지가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주욱 유지되면서, 결국 동북아 불교에서 육식은 사라졌다. 일본 승려들은 대처승에다 먹을 거 다 먹었다지만... 사실 이것도 지금처럼 매우 당연시된 것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시기 신토를 부흥시키고 불교를 억제하던 정책 하에서 나온 부산물이니 논외다.

 


양(梁) 나라의 위치

 

[사저(私邸)를 희사해 광택사로 만들다]
양나라 무제(武帝)가 아직 황제의 위에 오르기 전의 일이다. 어느 때 그의 집이 이레 낮 이레 밤 동안 밝은 광명을 발하며 사방을 비추었다. 그러자 그는, ‘이 집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하고 자기 사저를 내어놓아 절로 쓰도록 하고 절 이름도 ‘광택사’(光宅寺)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법운법사(法雲法師)에게 명하여 이 절을 맡아보게 하였다. 법운법사는 의흥(義興) 양선(陽羨) 사람으로. 그가 태어날 때 방 안에 서운(瑞雲)이 가득했으므로 이름을 운(雲)이라 하였는데, 일곱 살 때 출가하고 법명을 법운(法雲)으로 고쳤다. 차차 자라면서 성품이 인자 우아하고, 경서 연구하기를 숭상하였다.

 
그는 <법화경 法華經>을 자세히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뜻과 이치에 대해 환히 통달하여 양나라 때에 이름을 크게 떨쳤다. 일찍이 그가 어느 절에서 법화경을 강설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꽃이 날리듯 쏟아져 내렸다. 하늘 꽃은 법당 안에까지 날려 들어와서 다시 공중으로 올라가 떨어지지 아니하다가, 법사의 강설이 끝나자 밖으로 날아갔다.

 

늘 법운스님을 공양하던 스님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도 밤낮으로 자기의 지혜로 이치를 깊이 해득하게 되기를 소원했는데, 하루는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
“법운스님은 등명불(燈明佛)께서 이 세상에 나투셨을 때 이미 법화경을 강설하였는데 네가 어떻게 갑자기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느냐?” 하였다.

 
또 이릉현(夷陵縣)의 한 어부가 그물을 쳤다가 물 속에서 <법화경> 한 권을 얻었는데 그것은 <법화경> 중에서 이원사법품(泥洹四法品)이었다. 그 책 끝에, 이런 글이 있었다.
“송(宋) 나라 영휘(永微) 3년에 왕보승(王賣勝)이 광택사(光宅寺)를 세우고 법운사로 하여금 절을 맡아보게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원휘 3년이면 법운법사의 나이 겨우 10살 때이고, 또 그때는 아직 광택사란 절도 이 세상에 없었으니, 이는 신령스러운 상서(祥瑞)가 앞질러 나타난 것이었다.

 

[합두스님의 억울한 죽음]                                    
중국 남북조시대의 양나라 무제(武帝, 502~549)는 불심(佛心)이 뛰어나고 불사(佛事)도 많이 하여 '불심천자(佛心天子)'라는 호를 얻은 황제다. 그는 중국 제일의 신승(神僧)으로 전해지는 지공(誌公)화상을 지극히 존중하여 귀의하였고, 달마대사(達磨大師)와는 인연이 맞지 않아 헤어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양무제가 스승으로 지극히 존경하는 승려 중에 합두(榼頭)스님이라는 분이 있었다. 어느 날 양무제는 정사에 자문을 구할 일이 있어 합두스님을 모셔 오도록 하였다. 신하가 합두스님을 모시러 간 사이, 양무제는 다른 신하와 같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황제와 두는 바둑이라 하여 일부러 져 주면 아첨배라 하여 감점을 당하고, 소신껏 두는 신하에게는 칭찬과 함께 상을 내리는 양무제의 성품을 잘 아는 신하들이었으므로 자신의 실력을 다하여 최선을 다해 승부를 가리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상대의 바둑 실력이 만만치 않아 양무제는 열이 오를대로 올랐다. 한 판을 두고 두 판째 들어간 양무제는 자기 바둑알이 자꾸만 죽게 되자 열이 올라 소리쳤다.

"에잇, 죽여라."

자신의 바둑알이 죽는 것이 아까웠으므로 화가 나서 "에잇, 죽여라!" 하고 크게 외쳤던 것이다. 그런데 양무제는 이 한 마디가 엄청난 참화를 불러온 저주의 고함소리가 될 줄은 황제 스스로도 미처 알지 못했다. 그 고함소리로 인해 양무제 자신이 그렇게 존경해 마지 않던 합두스님의 목이 끊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 참혹한 사연은 이러했다.
합두스님을 모시고 온 신하가 막 대궐에 도착해서 황제가 있는 방문 밖에서 국궁배례하고,

"폐하, 합두스님을 모셔왔습니다"

 

라고 아뢰자마자 안에서 "에잇, 죽여라" 하는 양무제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신하는 속으로 ‘합두스님께 무슨 잘못이 있을 리는 없고, 누군가 모함을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폐하의 목소리가 저다지 진노한 터에 시간을 지체하여 명을 거행하게 되면 되려 나에게까지 무서운 벌이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미친 신하는 다시 진언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백배 사죄하면서 합두스님을 형장으로 데리고 갔다.

 

"스님,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무슨 영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스님을 모시고 왔다는 말씀을 아뢰자 폐하께서 크게 진노하시면서 '죽여라'고 하셨습니다. 어찌해야 하옵니까?"하고 간신히 말을 꺼내자, 스님은,

"걱정 말고 어서 가세. 어느 영이라고 거역하시겠는가?"

합두스님은 ‘허허’ 웃으면서 단두대에 스스로 올라가 가부좌를 하고 앉으신 다음 게송을 읊었다.

 

四大本來空 (사대본래공) 사대는 본래가 공이요
五蘊本非我 (오온본비아) 오온은 본래의 내가 아닐세
以首前春風 (이수전춘풍) 머리 들어 봄바람에 나아가니
猶如斷春風 (유여단춘풍) 내 머리가 봄바람을 베는 것 같구나.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4대요소로 이루어진 인간의 육신은 본래가 공한 것이요,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정신적 작용과 물질적 요소를 다섯가지로 분류한 오온 또한 본래 내가 아니다. 내 이제 이 머리를 가지고 칼날 앞에 임하니, 날카로운 칼이 머리를 베는 것은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내 몸뚱이랄 것도 없고 살고 죽는다고 할 것도 없으니 조금도 괘념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 게송을 외운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태연한 자세로 웃으면서 업부를 이야기했다.


"내가 먼 전생에 조그만 동자승으로 있었을 때였네, 산골 밭을 매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괭이로 두꺼비 한 마리를 찍어 죽인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죽은 두꺼비가 오늘의 양무제가 된 것이라네. 그 때 내가 일부러 죽일려고 해서 두꺼비를 죽인 것이 아니듯이, 오늘의 양무제도 자신조차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를 죽이는 것일세. 이 모두가 전생의 과보를 받는 것일 뿐……"

 

이 말을 마치고 합두스님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바둑을 다 두고 난 양무제는 다시 합두스님 생각이 나서 승지에게 물었다.


"스님을 모셔 오라 하였거늘 어째 아직 소식이 없느냐? 스님께서 어디 출타하셨다더냐?"

"아니옵니다. 폐하께서 '죽여라'는 하명을 내리시와 분부대로 시행했습니다."
"무엇이! 처형을? 짐이 언제 그런 명을 내렸단 말이더냐?"
"아까, 바둑을 두시면서 '죽여라'고 크게 엄명하셨나이다."

 

양무제는 그 소리를 듣고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존경하던 스님이기에 더더욱 정신을 잃고 끝없이 뉘우쳤다. 그러나 이미 한번 가신 스님을 다시 살려낼 수는 없는 일, 땅이 꺼져라 한숨과 함께 양무제는 한탄조로 다시 물었다.

 

"그래 스님께서 마지막으로 무슨 하신 말씀이 없었더냐?"

 

자세한 사연을 다 듣고 난 양무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깊이 참회하였다. 그리고 그뒤부터는 다시는 바둑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달마대사와의 악연]
생전에 인도에서 '선(禪)'을 전파하러온 고승 달마대사(達磨大師)도 그를 만난 적이 있으나, 자신을 중국의 아육왕(인도의 아소카 왕)이라며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며 얼마만큼의 공덕이 되겠느냐고 달마대사에게 질문하였으나 달마대사는 한마디로 "無"라고 하였다. 선업선과 악업악과의 유위적이고 외적인 공덕이 아니라, 실제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에 도달하는 무위적이고 내적인 공덕에 비할 바 없다는 의미라고 한다. 도올 김용옥은 이를 실화가 아니라 맹자와 양혜왕의 이야기 구조를 그대로 따와서 만든 은유라고 풀었다.


한 야사에 따르면 이에 열을 받은 무제는 자객을 보내 달마를 암살(혹은 독살)하고는 위선적으로 장례를 치러주었는데, 탑에서 짚신 한짝만 두고 살아나와 서쪽으로 내빼 영영 사라졌다고 전한다. 이 때 추격하는 군사들을 큰 강에서 갈대 하나를 꺾어 수상스키 타듯 따돌렸다고 한다. 짚신 나머지 한짝은 막대에 꿴 체였다. 물론 실제 역사기록에 따르면 달마는 양무제 치세에 죽었으니 그의 때 맞춘 죽음에 보태어 만든 이야기로 보인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야사로, 애당초 달마에 대한 기록들이 하나같이 전설 수준인데다, 불교에 그토록 심취한 대인배 황제가 불교에서 죄악시하는 살생을 열폭때문에 저질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는 선종의 달마 띄워주기 과정에서 황제가 비교열위로 낮잡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게다가 양무제가 달마대사의 열반 이후 그의 깨우침을 기리며 친히 추모비를 세워줬다는 기록도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見之不見 (견지불견)

逢之不逢 (봉지불봉)

古之今之 (고지금지)

悔之恨之 (회지한지).

눈으로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고

맞이해서 만나고도 뜻을 받지 못했으니
옛날이고 지금이고

후회되고 한스럽구나 (古今悔恨에서)

 

또 다른 야사가 있는데, 살생을 금지했던 불교의 교리에 따라서 양무제는 기존의 사형제도를 폐지했다. 대신 새로운 형벌을 만들어 냈는데, 누각을 하나 짓고 중죄인에게 새의 깃털로 만든 날개를 달아준 다음에 누각 위에서 스스로 줄없는 번지점프를 하게 하는 형벌이었다. 어쨌든 자기손으로 죽인건 아니니까 누각에서 뛰어내렸을때 살아남은 죄인은 용서를 해주기로 했으나, 현실은 그런 경우는 없었다. 단, 이 야사는 버전이 워낙 다양해서 양무제가 아닌 다른 황제의 일화로 소개되기도 한다

 

[양무제와 원숭이의 인과업보]

양 무제(梁武帝)는 위 무제(魏武帝)와 함께 중국 불교에 많은 위업을 남긴 사람이다. 그런데 말년에는 그의 부하였던 재상에게 쫓겨나 유폐생활을 하다가 비참하게 죽었는데, 그는 그 유폐생활 중에도 좌선일관(坐禪一貫)하여 숙명통(宿命通)을 얻고 자신의 전생을 모두 꿰뚫어보고 깨달은 바 있어서 자신이 죽은 뒤 자손들에게 털끝만큼도 복수도 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전생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원래 양 무제는 전생에 가난한 포수장이였다고 한다. 매일매일 사냥을 하여 그것으로 연명을 해가고 있었다. 하루는 산에 올라 산천을 뒤지고 다니는데 날이 저물도록 짐승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몸만 지쳐 있었다. 잠깐 쉬면서 목도 축일겸 개울이 있는 쪽을 향하여 가다가 옛 절터인 듯한 곳에서 고개 부러진 부처님 한 분이 땅에 뒹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무의식중에 발로 한번 툭 차 보았으나 얼굴이 드러나자 죄송함을 느끼고 곧 부처님을 안아 모시고 목을 맞추어 보니 아주 거룩한 부처님이었다. 무제는 얼른 물을 떠다가 깨끗이 씻고 부처님을 안아 가까운 동굴 속에 모셨다. 그리고 산에 핀 꽃들을 꺾어 부처님 앞에 올리고 엎드려 고했다.

 
“거룩하신 부처님, 오랫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동안 배가 얼마나 고프실텐데 가난한 이 사람은 먹을 것이 없으니 꽃이나 올려 드립니다. 이 인연으로 내생에는 훌륭한 왕가에 태어나 많은 불승(佛僧)들을 마음껏 공양하여도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원하고 일어서서 돌아오는데 기분이 좋았다. 생전 처음 부처님을 뵙고 또 공양을 올렸으니 마음이 흐뭇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집에 와서 잠을 자려 하니 그 부처님의 모습이 무지개 빛처럼 환하게 들어나 영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튿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목욕재계하고 그 부처님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가? 깊은 산속 사람이라고는 전혀 구경할 수 없는 그 곳, 부처님이 계신 동굴 속에 기이한 현상이 생겼다. 어제 자기가 올린 꽃이 동굴밖에 나와 있고 나무 열매가 부처님 팔위에 올려 있지 않는가?


“이게 누구의 짓일까? 이상도 하구나...”


생각하며 사냥꾼은 밖에 나가서 탐스러운 꽃 몇 송이를 끊어 또 부처님께 올리고 어제와 같이 기원하였다. 그리고 단에 올라가서 산 짐승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날도 짐승은 한 마리도 구경을 하지 못했다.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또 동굴 속을 들어보니 한 마리의 원숭이가 자기의 올린 꽃을 내려 놓고 또 빨간 과일들을 나뭇가지까지 꺾어 올리고 기도하고 있었다.


“부처님, 저도 저 포수쟁이와 같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게 될 때는 원숭이의 과보를 벗고 나라에 큰 재상이 되어 저 사람을 돕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이러한 서원을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포수쟁이는 그저 자기의 꽃을 내려 놓고 다른 과일을 올렸다는 것만 괘씸하게 생각하였다.


“요 괘씸한 것, 네가 내가 올린 꽃을 내려놓고 네 것을 따로 올려?”

 
하고는 즉시 뛰어가서 그가 올린 열매를 내려 두 발로 지근지근 밟아 버렸다. 그리고 또 산에 올라가서 꽃을 꺾어다가 올려놓고 내려왔다. 그런데 그 이튿날 또 가서 보니 원숭이도 화가 나서 그 꽃을 온 몸으로 진탕을 만들어 버리고 다시 제 열매를 올렸다. 화가 난 포수쟁이는 흥분한 가운데 열매를 올리고 기도하는 원숭이를 그대로 놓아두고 동굴 문을 꽝 막아버렸다. 아주 큰 돌을 들어다가 누구도 함부로 밀고 들어갈 수없도록 막아 버렸다. 그리고 집으로 내려와서는 그 일을 잊어버리고 다른 일에 몰두하였다. 그런데 그 후 약 16일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대낮에 방에 누워 있는데 원숭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꽥, 꽥꽥...”


하도 이상히 여겨 귀를 막으면 막을수록 더 큰소리로 들려왔다. 불현듯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서 산으로 뛰어올라갔다. 가 보니 원승이가 빈 동굴에서 몸부림치다가 그대로 쓰러져 죽어 있었다. 아무리 사냥꾼이라고는 하지만 가엾게 생각되어 그를 땅에 묻어주고 부처님께 사죄하였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잠깐 사이 흥분한 마음 때문에 한 생명을 굶어 죽게하여 죄송합니다.”


이렇게 사죄하고 돌아와서부터는 무엇인가 죄책감 때문에 사냥하는 것까지도 잊어버리고 오직 남의 농사일을 거들어 주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그런데 그 때 부처님 앞에서 서원한 대로 원숭이는 죽어서 양씨 집안의 재상이 되고 사냥꾼은 죽어서 양씨 집안의 왕자가 되었다. 나면서부터 이 재상은 무제를 좋아하며 늘 보호하고 공경하였으나 무제는 어려서부터 글공부는 좋아하지 않고 사냥을 즐겼다.


매일 산으로 쏘다니며 토끼, 꿩, 돼지, 노루 등을 잡아 포식하고 힘을 기르더니 마침내 임금이 되어서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였다. 서원을 따라 불법을 좋아하고 부처님과 절을 무진장 조성하고 수 천명 만 명씩의 스님들을 공양하여 부족함이 없이 하였다. 이렇게 외상(外相)에만 팔려 복 짓는 일에만 몰두하다 보니 달마대사 같은 훌륭한 스님이 인도로부터 와서 법을 주려 하였으나 그릇이 비지 못하니 오히려 사마 외도의 취급을 하고 말았다.

 


 

무제가 일생에 새로 모신 부처님이 30만 구가 넘고, 전래에 파괴된 부처님을 보수한 것은 100만 구가 훨씬 넘었으며, 20개의 대찰을 짓고 수륙재, 방생재, 천도재를 지내는 것은 매일매일 하루도 빼는 날이 없었다. 그러나 너무 이것이 지나치다 보니 백성들의 원성이 치닫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궁중에서도 양무제를 정신 이상자로 취급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특히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것은 어떤 때 반승을 위해 절에 올라가면 스님들의 공양을 낱낱이 차려주고 또 후원에 나와 손수 설거지를 하는데 신하들이 쩔쩔 매고 있으면, 자기를 돈을 주고 사가라 하여 신하들의 마음이 안정될 날이 없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중의(衆議)를 따라 대왕을 동굴 속에 흔금(軟禁)하여 치료키로 하였는데 그 뜻을 발의한 사람이 바로 전생의 원숭이 재상이었다. 양무제는 깨닫고 그이 자손들에게 유칙하고 죽었다.


“내가 내 전생을 알지 못함으로써 이런 슬픈 일을 당했는지라.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는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은 것이다. 누구도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원숭이를 16일 동안 가두어 죽인 과보로 160일 만에 이 곳에서 가지만 원망할 것은 도리어 이 어리석은 마음이니 조금도 그를 해치거나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명심하라.”


이 글을 본 자손들은 도리어 그 원숭이 재상을 부모 섬기듯 하고 잘 모셔 백세유방(百歲遣芳)의 꽃다운 세상을 살았다 한다.

 

어떤 고통도 자기가 받는 것은 자기의 업이니
그러므로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다. 
몸을 닦음도 이와 같으니 자신이 지은 업을 
모두 받아 들이려는 마음으로 수도해야 하느니.



정수년 해금독주 - 진달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