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제(梁 武帝)와 원숭이의 악연(惡緣)
옛날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초대 황제이자 최후의 황제(재위 502∼549)였던 무제(武帝)는 본명이 소연(蕭衍)이고 묘호는 고조(高祖)였다. 막장 황제들의 릴레이였던 남조시대의 몇 안되는 명군으로 48년이라는 긴 치세 동안 천감(天監), 보통(普通), 대통(大通), 중대통(中大通), 대동(大同), 중대동(中大同), 태청(太淸)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제나라 말기 황제 동혼후는 폭거를 저질러 많은 대신들을 살해하고, 같은 종친(宗親)인 소의(蕭懿)을 살해했다. 옹주자사로써 양양에 주둔하고 있던 동생 소연(蕭衍)이 폭군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동혼후를 죽이고, 화제(和帝)을 옹립한 뒤 502년 화제로부터 왕위를 선양받아 건국하였다. 그가 바로 남조 최고의 명군으로 칭송받은 무제(武帝)이다.
무제의 치세는 48년이란 긴 세월이었고, 그동안 내정을 정비하여 구품관인법을 개선하고, 불교를 장려하여 국내를 다스리고 불교문화를 번성시켰다. 대외관계도 비교적 평온하여 약 50년간 태평성대를 유지하여 남조 최 전성기를 보냈다. 또한 31살의 젊은 나이에 죽은 무제의 장남 황태자 소통(蕭統; 소명태자(昭明太子)이 편찬한 《문선 文選)》은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세계적 훌륭한 문헌유산이었다.
그러나 전생에 부처님과의 인연 때문이었을까? 무제의 50년에 걸친 치세 후반에는 불교에 너무도 심취하여 5리마다 암자(庵子)요, 10리마다 절을 지었다. 그것도 모자라 스스로 아예 불제자(佛弟子)가 되어 동태사(同太寺)에 귀의(歸依)하는 무모한 행동을 여러 번 일으켰다. 그럴 때마다 신하들은 막대한 돈을 써서 무제를 되찾아 왔기에 국고가 크게 궁핍해졌다. 퇴위후 법황의 신분이라면 모를까 재임중에 황제를 잃어버리는 일은 중국 역사상 없었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위키백과)
[양무제의 업적] 여담이지만 동북아시아 불교의 승려들이 고기를 못 먹게 한 주인공이자 지금의 콩고기 탄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이전에는 동북아 불교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고기를 먹었고, 초기 불교는 물론이고, 현재의 남방 불교에서는 어지간한 육식은 허용했었다. 그런데 양무제가 종묘 제사에도 고기와 술을 쓰지 않고, 술과 육식을 금하는 <단주육문 斷酒肉文>을 공포하면서 승려들이 황제의 뜻에 거스르지 않으려고 채소만으로 만들면서 고기와 비슷한 맛이 나는 정진요리를 개발했고, 이 과정에서 콩고기가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고착화된 승려의 육식금지가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주욱 유지되면서, 결국 동북아 불교에서 육식은 사라졌다. 일본 승려들은 대처승에다 먹을 거 다 먹었다지만... 사실 이것도 지금처럼 매우 당연시된 것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시기 신토를 부흥시키고 불교를 억제하던 정책 하에서 나온 부산물이니 논외다.
[사저(私邸)를 희사해 광택사로 만들다]
그리고, 법운법사(法雲法師)에게 명하여 이 절을 맡아보게 하였다. 법운법사는 의흥(義興) 양선(陽羨) 사람으로. 그가 태어날 때 방 안에 서운(瑞雲)이 가득했으므로 이름을 운(雲)이라 하였는데, 일곱 살 때 출가하고 법명을 법운(法雲)으로 고쳤다. 차차 자라면서 성품이 인자 우아하고, 경서 연구하기를 숭상하였다.
늘 법운스님을 공양하던 스님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도 밤낮으로 자기의 지혜로 이치를 깊이 해득하게 되기를 소원했는데, 하루는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
[합두스님의 억울한 죽음]
그런데 양무제가 스승으로 지극히 존경하는 승려 중에 합두(榼頭)스님이라는 분이 있었다. 어느 날 양무제는 정사에 자문을 구할 일이 있어 합두스님을 모셔 오도록 하였다. 신하가 합두스님을 모시러 간 사이, 양무제는 다른 신하와 같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황제와 두는 바둑이라 하여 일부러 져 주면 아첨배라 하여 감점을 당하고, 소신껏 두는 신하에게는 칭찬과 함께 상을 내리는 양무제의 성품을 잘 아는 신하들이었으므로 자신의 실력을 다하여 최선을 다해 승부를 가리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상대의 바둑 실력이 만만치 않아 양무제는 열이 오를대로 올랐다. 한 판을 두고 두 판째 들어간 양무제는 자기 바둑알이 자꾸만 죽게 되자 열이 올라 소리쳤다. "에잇, 죽여라." 자신의 바둑알이 죽는 것이 아까웠으므로 화가 나서 "에잇, 죽여라!" 하고 크게 외쳤던 것이다. 그런데 양무제는 이 한 마디가 엄청난 참화를 불러온 저주의 고함소리가 될 줄은 황제 스스로도 미처 알지 못했다. 그 고함소리로 인해 양무제 자신이 그렇게 존경해 마지 않던 합두스님의 목이 끊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 참혹한 사연은 이러했다. "폐하, 합두스님을 모셔왔습니다"
라고 아뢰자마자 안에서 "에잇, 죽여라" 하는 양무제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신하는 속으로 ‘합두스님께 무슨 잘못이 있을 리는 없고, 누군가 모함을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폐하의 목소리가 저다지 진노한 터에 시간을 지체하여 명을 거행하게 되면 되려 나에게까지 무서운 벌이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미친 신하는 다시 진언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백배 사죄하면서 합두스님을 형장으로 데리고 갔다.
"스님,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무슨 영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스님을 모시고 왔다는 말씀을 아뢰자 폐하께서 크게 진노하시면서 '죽여라'고 하셨습니다. 어찌해야 하옵니까?"하고 간신히 말을 꺼내자, 스님은, "걱정 말고 어서 가세. 어느 영이라고 거역하시겠는가?" 합두스님은 ‘허허’ 웃으면서 단두대에 스스로 올라가 가부좌를 하고 앉으신 다음 게송을 읊었다.
四大本來空 (사대본래공) 사대는 본래가 공이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4대요소로 이루어진 인간의 육신은 본래가 공한 것이요,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정신적 작용과 물질적 요소를 다섯가지로 분류한 오온 또한 본래 내가 아니다. 내 이제 이 머리를 가지고 칼날 앞에 임하니, 날카로운 칼이 머리를 베는 것은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내 몸뚱이랄 것도 없고 살고 죽는다고 할 것도 없으니 조금도 괘념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 게송을 외운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태연한 자세로 웃으면서 업부를 이야기했다.
이 말을 마치고 합두스님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바둑을 다 두고 난 양무제는 다시 합두스님 생각이 나서 승지에게 물었다.
"아니옵니다. 폐하께서 '죽여라'는 하명을 내리시와 분부대로 시행했습니다."
양무제는 그 소리를 듣고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존경하던 스님이기에 더더욱 정신을 잃고 끝없이 뉘우쳤다. 그러나 이미 한번 가신 스님을 다시 살려낼 수는 없는 일, 땅이 꺼져라 한숨과 함께 양무제는 한탄조로 다시 물었다.
"그래 스님께서 마지막으로 무슨 하신 말씀이 없었더냐?"
자세한 사연을 다 듣고 난 양무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깊이 참회하였다. 그리고 그뒤부터는 다시는 바둑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달마대사와의 악연]
見之不見 (견지불견) 逢之不逢 (봉지불봉) 古之今之 (고지금지) 悔之恨之 (회지한지). 눈으로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고 맞이해서 만나고도 뜻을 받지 못했으니 후회되고 한스럽구나 (古今悔恨에서)
또 다른 야사가 있는데, 살생을 금지했던 불교의 교리에 따라서 양무제는 기존의 사형제도를 폐지했다. 대신 새로운 형벌을 만들어 냈는데, 누각을 하나 짓고 중죄인에게 새의 깃털로 만든 날개를 달아준 다음에 누각 위에서 스스로 줄없는 번지점프를 하게 하는 형벌이었다. 어쨌든 자기손으로 죽인건 아니니까 누각에서 뛰어내렸을때 살아남은 죄인은 용서를 해주기로 했으나, 현실은 그런 경우는 없었다. 단, 이 야사는 버전이 워낙 다양해서 양무제가 아닌 다른 황제의 일화로 소개되기도 한다
[양무제와 원숭이의 인과업보] 양 무제(梁武帝)는 위 무제(魏武帝)와 함께 중국 불교에 많은 위업을 남긴 사람이다. 그런데 말년에는 그의 부하였던 재상에게 쫓겨나 유폐생활을 하다가 비참하게 죽었는데, 그는 그 유폐생활 중에도 좌선일관(坐禪一貫)하여 숙명통(宿命通)을 얻고 자신의 전생을 모두 꿰뚫어보고 깨달은 바 있어서 자신이 죽은 뒤 자손들에게 털끝만큼도 복수도 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전생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가? 깊은 산속 사람이라고는 전혀 구경할 수 없는 그 곳, 부처님이 계신 동굴 속에 기이한 현상이 생겼다. 어제 자기가 올린 꽃이 동굴밖에 나와 있고 나무 열매가 부처님 팔위에 올려 있지 않는가?
무제가 일생에 새로 모신 부처님이 30만 구가 넘고, 전래에 파괴된 부처님을 보수한 것은 100만 구가 훨씬 넘었으며, 20개의 대찰을 짓고 수륙재, 방생재, 천도재를 지내는 것은 매일매일 하루도 빼는 날이 없었다. 그러나 너무 이것이 지나치다 보니 백성들의 원성이 치닫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궁중에서도 양무제를 정신 이상자로 취급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어떤 고통도 자기가 받는 것은 자기의 업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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