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스런 진리' 사성제(四聖諦)의 의미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후 처음으로 녹야원[鹿野苑, 王舍城, 福德寺, 꼬띠가마(Kotigāma)는 모두 같은 곳이다]에서 가르쳐준 초전법문(初轉法文)의 사성제(四聖諦, 산스크리트어: catvāri āryasatyāni) 또는 성제(聖諦, Āryasatya)는 《아함경(阿含經)》에 나오는 원시불교의 가르침으로 불교의 기본교리 중 핵심 교리다. 여기서 "제(諦 · Satya)"는 진리 또는 깨우침을 뜻한다. 사성제는 "네 가지 높은 깨우침(Ārya: 높은, Satya: 깨우침)" 또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 (Four Noble Truths)"라는 뜻인데, 고제(苦諦) · 집제(集諦) · 멸제(滅諦) · 도제(道諦)의 4가지 진리 또는 깨우침을 말한다. 흔히 이를 간단히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도 부른다.
‘고집멸도’는 집(集)과 고(苦)라는 연기(緣起)하는 항목과 도(道)와 멸(滅)이라는 연기하는 항목을 합하여 나란히 늘어놓았다. 여기에서 집은 고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되며, 도는 멸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된다. 고집멸도는 고통의 원인이 집착 또는 갈애이며 고통을 소멸시키는 원인 또는 수단이 도라는 연기관계를 밝힌 것이다. 한편, 고타마 붓다는 "우주는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인 십사무기(十四無記)는 사성제와는 달리 지혜(智) · 깨달음(覺) ·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르치거나 배울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
십사무기(十四無記)와 사성제 고타마 붓다는 십사무기(十四無記)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들은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다운 길이 아니며, 반면 사성제는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제 길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사성제에 대해 늘 말하고 가르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제자들에게도 십사무기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며 사성제라는 실제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고타마 붓다의 견해는 십사무기의 줄거리가 들어 있는 《중아함경 제60권 전유경(箭喻經) 제10》에 잘 나타나 있다.
“世有常者 有生,有老,有病,有死,愁慼,啼哭,憂苦,懊惱,如是此淳大苦陰生。如是世無常,世有底,世無底,命即是身,為命異身異, 如來終 如來不終 如來終不終 如來亦非終亦非不終者 有生,有老,有病,有死,愁慼,啼哭,憂苦,懊惱, 如是此淳大苦陰生。 "우주 시간은 영원하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도 태어남이 있고 늙음이 있으며 병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슬픔 · 울음 · 근심 · 괴로움 · 번민이 있으니, 이리하여 이처럼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생긴다. 이와 같이 "우주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우주 공간은 유한하다. 우주 공간은 무한하다. 자아와 육체는 같다. 자아와 육체는 다르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도 있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여기에 없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없는 것도 아니고 없지 않는 것도 아니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도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으며, 슬픔 · 울음 · 근심 · 괴로움 · 번민이 있으니, 이리하여 이처럼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생긴다.
世有常, 我不一向說此。以何等故 我不一向說此ㅇ 此非義相應,非法相應 非梵行本, 不趣智,不趣覺,不趣涅槃, 是故我不一向說此。如是 世無常, 世有底, 世無底 命即是身, 為命異身異 如來終, 如來不終, 如來終不終, 如來亦非終亦非不終 我不一向說此。以何等故 我不一向說此ㅇ 此非義相應 非法相應 非梵行本 不趣智, 不趣覺, 不趣涅槃 是故我不一向說此也。 "세상 시간은 영원하다"는 말을 나는 언제나 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으로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이치(義)에 맞지 않고 법(法)에 맞지 않으며 또한 범행(梵行)의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혜(智)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깨달음(覺)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우주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우주 공간은 유한하다. 우주 공간은 무한하다. 자아와 육체는 같다. 자아와 육체는 다르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도 있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없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라는 따위 말을 나는 언제나 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으로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치(義)에 맞지 않고 법(法)에 맞지 않으며 범행(梵行)의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혜(智)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깨달음(覺)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何等法我一向說耶ㅇ 此義我一向說 苦,苦習,苦滅,苦滅道跡, 我一向說。以何等故 我一向說此ㅇ 此是義相應 是法相應 是梵行本 趣智,趣覺,趣於涅槃 是故我一向說此。是為不可說者則不說 可說者則說 當如是持 當如是學。” 그러면 나는 어떤 법을 언제나 말하는가? 나는 다음과 같은 이치(義)를 언제나 말하는데, 그 이치란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苦習)과 괴로움의 소멸(苦滅)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苦滅道跡)이다(사성제). 나는 언제나 이것들(사성제)을 말한다. 무슨 이유로 나는 언제나 이것들(사성제)을 말하는가? 이것들(사성제)을 말하는 것은, 이것들(사성제)은 이치(義)에 합당하고 법(法)에 합당하며 범행(梵行)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지혜(智)로 나아가게 하고 깨달음(覺)으로 나아가게 하며,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것들(사성제)만을 말한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말하지 않고, 말해야 할 것은 말한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러한 태도를 가짐으로써, 이와 같이 진정으로 가져야 할 것을 가지고,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을 배워야 한다. (위키백과)
The Buddha teaching the Four Noble Truths. Sanskrit manuscript. Nālandā, Bihar, India.
◇ 녹야원(鹿野苑 Sarnath)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 녹야원은 사르나트(Sarnath, Sarnātha)로 불리고 그밖에도 불경에서는 고띠가마(Kotigāma), 왕사성(王舍城), 왕원(王圓), 녹야원(鹿野苑), 죽림(竹林), 복덕사(福德寺) 등은 모두 같은 곳으로 불교 4대 성지의 하나이다. 녹야원은 고대 중인도 바라나국(波羅奈國 Kapila Vastu) 사르나트(Sarnath)에 있었던 숲의 이름.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도하신 후 최초로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였던 곳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곳 인도 베나레스(옛 이름은 Varanasi) 근처의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을 하였다. 이를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브리태니커)
사르나트(Sarnath)사원 =왕사성 복덕사(福德寺)
(Archeological site at Sarnath. Dhamek stupa is visible in background)
사르나트(녹야원)의 내력에 관한 전설 (문화콘텐츠닷컴)
◇ 부처님의 녹야원(鹿野苑) 설법 중인도 베나레스(Varanasi) 교외의 사르나트(Sarnath)에 있는 곳으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뒤 처음으로 이 곳에서 다섯 비구들을 상대로 설법하셨다. 녹원(鹿苑) 즉 사슴동산이라고도 한다. 사르나트(Sarnath鹿野苑)는 ‘성자가 머무는 곳’이라는 뜻의 리쉬파타나(Rishipatana)라고도 불리던 이곳은 부처님이 스스로 증득한 무상(無上)의 위 없는 깨달음의 내용을 처음으로 세상에 펼친 곳이다. 그러므로 사르나트는 부처님이 법의 바퀴(法輪, Darma Chakra)를 처음 굴린 초전법륜지로서 불교의 4대성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
위 없는 고귀한 깨달음을 증득한 부처님이 이를 중생에게 나누어주기로 결심하였을 때, 그 대상으로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들이 한 때나마 그가 스승으로 모셨던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와 웃다카 라마풋타(Uddaka Ramaputta)였다. 그러나 특유의 신통력을 통해 이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된 부처님에게 다음으로 떠오른 사람들은 보드가야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같이 고행하며 수행했던 다섯 도반들 즉, 콘단나(Kondanna), 밧디야(Bhaddiya), 밥파(Vappa), 마하나마(Mahanama) 그리고 앗사지(Assaji)였다고 한다.
그런데 구도를 위한 수행이라면 그 어떤 고행도 망설이지 않았던 구도자 싯달타를 수행의 귀감으로 삼고 따르던 이들 다섯 수행자들은, 싯달타가 스스로 극단적인 고행으로 점철되는 수행은 계속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강가의 소녀 수잣타(Sujata)가 제공하는 우유죽을 얻어먹는 것을 지켜보면서, 크게 실망하고 고행을 깨뜨리게 된 타락한 수행자(고타마)에게 더이상 기대할 것이 무엇이냐는 탄식을 남긴채 모두 떠났다.
위 없는 고귀한 깨달음과 고행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확연하게 증득한 부처님으로서 이들을 그대로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특유의 신통력으로 이들이 사르나트(Sarnath)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부처님은 오직 법을 나누어주려는 일념으로 250키로의 짧지 않는 길을 떠난 것이었다. 멀리서 싯다르타가 오는 것을 바라본 이들 다섯 수행자들은, 싯다르타가 청한다면 앉을 자리를 내어주기는 하겠지만 일어서서 마중하지는 않을 것이고 혹시 불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기로 서로 다짐하였다.
옛 도반들과 법을 나누려 짧지 않은 길을 찾아온 부처님의 당당한 걸음걸이와 안온한 표정 그리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이들이 마음 속으로 만들었던 바늘방석을 헛된 것으로 바꾸기에 충분하였다. 서로 다짐했던 것과는 달리 서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마중의 예를 표하였다. 그리고 듣지도 말하지도 않으리라던 그들이 싯다르타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마음을 열지 못하는 이들 다섯 수행자들에게 부처님은 마침내 “내가 언제 이처럼 자신있게 법을 말했던 적이 있었던가” 라고 말하며 그들로 하여금 마음의 문을 활짝 열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 여러 경전에 기록된 사성제 (1)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2.1 그때 세존께서는 아난존자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존자는 세존께 응답했다.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많은 비구 승가와 함께 꼬띠가마에 도착하셨다. 세존께서는 거기 꼬띠가마에 머무셨다.
2.2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의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비구들이여, 이제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고 꿰뚫었다.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고 꿰뚫었다.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고 꿰뚫었다.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의 진리를 깨닫고 꿰뚫었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갈애는 잘라졌고, 존재로 인도함은 부수어졌으며, 다시 태어남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2.3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성제 게송]
(2) 증일아함경(增一雜阿含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마땅히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닦고 실천해야 한다.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첫째는 괴로움에 대한 진리이니, 그 이치는 다할 수 없는 것이어서 생각으로도 다할 수 없고 말로도 다할 수 없다. 둘째는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진리이니, 그 이치는 다할 수 없는 것이어서 말로는 이루 다할 수 없다. 셋째는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이니, 넷째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진리이니,
어떤 것이 괴로움의 진리인가? 이른바 괴로움에 대한 진리란,
어떤 것이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진리인가?
어떤 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인가?
어떤 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진리인가?
비구들아, 이와 같이 이 네 가지 진리는 진실한 것이어서 허망하지 않으며,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진리라고 한다. 모든 중생인, 두 발 달린 중생, 세 발 달린 중생, 네 발 달린 중생,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생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세계의 온갖 중생들 중에서 여래(如來)가 최상(最上)이신 데, 그 분이 곧 이 네 가지 진리를 성취하셨기 때문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 하느니라.
비구들아, 이것을 일러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깨달아 알지 못하면 언제나 나고 죽음 속에 있으면서 다섯 갈래 세계[五道]를 윤전(輪轉)하게 된다. 이제 나는 이 네 가지 진리를 얻었기 때문에 이 언덕에서부터 저 언덕에 이르고 이 이치를 성취하여 나고 죽는 근본을 끊음으로 인하여, 다시는 후생에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알았느니라.”
그 때 세존께서는 이런 게송을 말씀하셨다.
이제 이 네 가지 진리의 법을 만일 이제 이 네 가지 진리를
"만일 사부대중들이 이 진리를 얻지 못하고 깨달아 알지 못하면 곧 다섯 갈래 세계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모든 비구들아, 마땅히 방편을 써서 이 네 가지 진리를 성취하도록 해야 한다. 모든 비구들아, 꼭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하느니라." 그 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Animation from English talking book Buddha)
(3) 잡아함경(雜阿含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나나 너희들이나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아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으며, 그대로 따라 깨달은 것도 없고 그대로 따라 받은 것도 없었다면, 마땅히 오랜 세월 동안 나고 죽음 속에서 치달렸을 것이다.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그것은 이른바,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나나 너희들이나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아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으며, 그대로 따라 깨달은 것도 없고 그대로 따라 받은 것도 없었다면, 마땅히 오랜 세월 동안 나고 죽음 속에서 치달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너희들은 이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그대로 알고 그대로 들어갔기 때문에, 모든 존재의 흐름을 끊고 모든 나고 죽음을 다하여 후세에는 몸을 받지 않는다.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그대로 알고 그대로 들어갔기 때문에, 모든 존재의 흐름을 끊고 모든 나고 죽음을 다하여 후세에는 몸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아직 밝게 알지 못하였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쓰고 왕성한 의욕을 일으켜 빈틈 없는 한결같음으로 이것을 닦아야 하느니라.”
그 때 세존께서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나 너희들이나 늘 만일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알고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4) 장아함 반니원경(長阿含 般泥洹經) 부처님이 파탈리풋타로 가시던 도중 라자가하(王舍城)에서 멀지 않은 왕원(王園)에 쉬면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첫째는 이 세상 모든 것이 괴로움이니 이것을 고(苦)라 한다.
괴로움의 뜻을 알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므로 오랫 동안 먼 길을 헤매어 생사가 쉬지 않는다. 그러나 반드시 이 세상 모든 것이 괴로움임을 알 것이니, 괴로움이란 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번민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 구하는 것이 얻어지지 않는 것 등이다. 그러므로 오온(五蘊)으로 된 이 몸이 모두 괴로움이다.
첫째는 마음을 다하여 여래의 가르침을 듣고,
이 세상을 벗어나는 길을 끝내 얻지 못한다. 길은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니 마음이 깨끗해야 길을 얻을 수 있다. 그 마음이 청정하여 다섯 가지 계율을 범하지 않으면 천상에 태어난다.
이와 같이 말씀하시고 나서 부처님은 아난다와 함께 파탈리풋타에 이르러 성 밖 어떤 나무 아래에 머무셨다. 그 곳 바라문과 거사(居士)들은 부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오셨다는 말을 듣고 모두 부처님 계신 데로 모여들었다.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해 앉을 방석을 가지고, 혹은 물병과 등잔을 들고 와서 예배하였다. 부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여러 사람들을 위해 가르침을 펴시니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A relief depicting the first discourse of the Buddha, from the 2nd century (Kushan). [web 14] The Walters Art Museum. The Buddha's hand can be seen at right.
제(諦)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진실, 사실, 진리 등을 가리키는데 쓰이며, 동시에 엄숙한 단어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성제는 '네가지 거룩한 진리'라는 말이다. 즉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네 가지를 설하여 이것을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 삼고 있는 데에서 사성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치 의사가 병을 치료함에 있어 병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원인을 알아 낸 다음, 건강한 상태의 정상적인 표준을 알아서 거기에 맞는 치료 방법을 강구하듯이, '고→ 집→멸'을 알고 멸에 이르는 바른 길(도)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1) 고성제(苦聖諦)의 뜻
(2) 집성제(集聖諦)의 뜻
인간에게 온갖 괴로움과 윤회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여러가지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탐욕 욕망 갈애 열망 등이다. 그러나 연기법에서 보았듯이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절대적인 원인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고(苦)의 근본 원인으로 가주되고 있는 탐욕도 다른 것, 즉 느낌(受)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며, 이 느낌은 접촉(觸)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어 이러한 과정이 반복적으로 순환되면서, 결국 연기적 의미의 '집 (集, 緣起)'이 되는 것이다.
(3) 멸성제(滅聖諦)의 뜻
(4) 도성제 (道聖諦)의 뜻
◇ 중도(中途)로서의 사성제 (아함경) 그날, 서력 기원전 528년 7월 보름날 저녁, 해가 지면서 때 맞춰 달이 막 떠오르고 있어,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시파타나의 녹야원에서 부처님은 그들에게 법을 설하기 시작하셨다.
“비구들이여, 이 두 가지 극단은 출가자들이 가까이 해서는 안되느니라. 그 두 가지란 무엇인가? 감각적 쾌락(快樂)에 빠지는 일이니 이는 저열하고, 천박하며, 세속적이고 성스럽지 못하며, 이익됨이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고행(苦行)이니 이는 고통스럽고, 성스럽지 못하며 이익됨도 없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들 극단을 피해서 중도(中途)를 깨달았나니 이는 눈을 뜨게하고, 지혜를 가져오며 적정과 신통지, 깨달음 그리고 열반으로 이끈다. 비구들이여!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성스러운 여덟가지 길(八支聖道)이다. 즉, 정견(正見 ; 올바른 견해), 정사(正思 ; 올바른 의도), 정어(正語 ; 올바른 말), 정업(正業 ; 올바른 행위), 정명(正命 ; 올바른 생활수단), 정정진(正精進 ; 올바른 노력), 정념(正念 ; 올바른 마음챙김), 정정(正定 ; 올바른 정신집중)이다.” 다시 부처님은 그들에게 사성제(四聖諦)를 설하셨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다섯 비구는 환희에 차서 세존의 말씀을 찬탄했다. 신사파 숲에서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얼마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가는 신사파 숲의 메시지에서 다시 확인된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손에 드신 잎사귀는 얼마되지 않습니다. 저편 숲에 있는 잎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렇다. 비구들이여, 내가 완전히 깨닫고서도 너희들에게 설하지 않은 것은 많다. 내가 너희들에게 설한 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비구들이여! 왜 내가 그 모두를 설하지 않는가? 그것들은 유익하지도 않고 청정한 삶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싫은 마음을 일으킴(厭離; nibbidaa ), 탐욕을 멀리함(離慾), 멸진(滅盡) 적정( 寂靜) 완전한 지적 능력(神通智;abhi~n~naa ), 완전한 깨달음 열반으로 이끌어 주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내가 그것들을 설하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내가 설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괴로움이다. - 이것을 나는 설한다.
이렇듯 명쾌하게 일러주신 말씀을 올바로만 이해한다면 불교를 다 이해한 셈이 된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이 한가지 원리의 적용일 뿐 다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부처님이든 발견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이 사성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사성제야 말로 어떤 시대의 부처님 일지라도 한결같이 가르치실 전형적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 註2) 상응부, V 420 전법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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