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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불교·죽음

[불교상식] '가장 성스런 네 가지 진리' 사성제(四聖諦)

잠용(潛蓉) 2013. 5. 16. 10:59

 

 

◇ '성스런 진리' 사성제(四聖諦)의 의미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후 처음으로 녹야원[鹿野苑, 王舍城, 福德寺, 꼬띠가마(Kotigāma)는 모두 같은 곳이다]에서 가르쳐준 초전법문(初轉法文)의 사성제(四聖諦, 산스크리트어: catvāri āryasatyāni) 또는 성제(聖諦, Āryasatya)는 《아함경(阿含經)》에 나오는 원시불교의 가르침으로 불교의 기본교리 중 핵심 교리다. 여기서 "제(諦 · Satya)"는 진리 또는 깨우침을 뜻한다. 사성제는 "네 가지 높은 깨우침(Ārya: 높은, Satya: 깨우침)" 또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 (Four Noble Truths)"라는 뜻인데, 고제(苦諦) · 집제(集諦) · 멸제(滅諦) · 도제(道諦)의 4가지 진리 또는 깨우침을 말한다. 흔히 이를 간단히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도 부른다.

 

‘고집멸도’는 집(集)과 고(苦)라는 연기(緣起)하는 항목과 도(道)와 멸(滅)이라는 연기하는 항목을 합하여 나란히 늘어놓았다. 여기에서 집은 고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되며, 도는 멸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된다. 고집멸도는 고통의 원인이 집착 또는 갈애이며 고통을 소멸시키는 원인 또는 수단이 도라는 연기관계를 밝힌 것이다. 한편, 고타마 붓다는 "우주는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인 십사무기(十四無記)는 사성제와는 달리 지혜(智) · 깨달음(覺) ·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르치거나 배울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

 

십사무기(十四無記)와 사성제

고타마 붓다는 십사무기(十四無記)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들은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다운 길이 아니며, 반면 사성제는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제 길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사성제에 대해 늘 말하고 가르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제자들에게도 십사무기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며 사성제라는 실제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고타마 붓다의 견해는 십사무기의 줄거리가 들어 있는 《중아함경 제60권 전유경(箭喻經) 제10》에 잘 나타나 있다.

 

“世有常者 有生,有老,有病,有死,愁慼,啼哭,憂苦,懊惱,如是此淳大苦陰生。如是世無常,世有底,世無底,命即是身,為命異身異, 如來終 如來不終 如來終不終 如來亦非終亦非不終者 有生,有老,有病,有死,愁慼,啼哭,憂苦,懊惱, 如是此淳大苦陰生。

"우주 시간은 영원하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도 태어남이 있고 늙음이 있으며 병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슬픔 · 울음 · 근심 · 괴로움 · 번민이 있으니, 이리하여 이처럼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생긴다. 이와 같이 "우주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우주 공간은 유한하다. 우주 공간은 무한하다. 자아와 육체는 같다. 자아와 육체는 다르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도 있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여기에 없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없는 것도 아니고 없지 않는 것도 아니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도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으며, 슬픔 · 울음 · 근심 · 괴로움 · 번민이 있으니, 이리하여 이처럼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생긴다.

 

世有常, 我不一向說此。以何等故 我不一向說此ㅇ 此非義相應,非法相應 非梵行本, 不趣智,不趣覺,不趣涅槃, 是故我不一向說此。如是 世無常, 世有底, 世無底 命即是身, 為命異身異 如來終, 如來不終, 如來終不終, 如來亦非終亦非不終 我不一向說此。以何等故 我不一向說此ㅇ 此非義相應 非法相應 非梵行本 不趣智, 不趣覺, 不趣涅槃 是故我不一向說此也。

"세상 시간은 영원하다"는 말을 나는 언제나 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으로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이치(義)에 맞지 않고 법(法)에 맞지 않으며 또한 범행(梵行)의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혜(智)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깨달음(覺)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우주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우주 공간은 유한하다. 우주 공간은 무한하다. 자아와 육체는 같다. 자아와 육체는 다르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도 있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없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라는 따위 말을 나는 언제나 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으로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치(義)에 맞지 않고 법(法)에 맞지 않으며 범행(梵行)의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혜(智)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깨달음(覺)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何等法我一向說耶ㅇ 此義我一向說 苦,苦習,苦滅,苦滅道跡, 我一向說。以何等故 我一向說此ㅇ 此是義相應 是法相應 是梵行本 趣智,趣覺,趣於涅槃 是故我一向說此。是為不可說者則不說 可說者則說 當如是持 當如是學。”

그러면 나는 어떤 법을 언제나 말하는가? 나는 다음과 같은 이치(義)를 언제나 말하는데, 그 이치란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苦習)과 괴로움의 소멸(苦滅)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苦滅道跡)이다(사성제). 나는 언제나 이것들(사성제)을 말한다. 무슨 이유로 나는 언제나 이것들(사성제)을 말하는가? 이것들(사성제)을 말하는 것은, 이것들(사성제)은 이치(義)에 합당하고 법(法)에 합당하며 범행(梵行)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지혜(智)로 나아가게 하고 깨달음(覺)으로 나아가게 하며,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것들(사성제)만을 말한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말하지 않고, 말해야 할 것은 말한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러한 태도를 가짐으로써, 이와 같이 진정으로 가져야 할 것을 가지고,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을 배워야 한다. (위키백과)

 

The Buddha teaching the Four Noble Truths. Sanskrit manuscript.

Nālandā, Bihar, India.

 

◇ 녹야원(鹿野苑 Sarnath)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

녹야원은 사르나트(Sarnath, Sarnātha)로 불리고 그밖에도 불경에서는 고띠가마(Kotigāma), 왕사성(王舍城), 왕원(王圓), 녹야원(鹿野苑), 죽림(竹林), 복덕사(福德寺) 등은 모두 같은 곳으로 불교 4대 성지의 하나이다. 녹야원은 고대 중인도 바라나국(波羅奈國 Kapila Vastu) 사르나트(Sarnath)에 있었던 숲의 이름.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도하신 후 최초로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였던 곳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곳 인도 베나레스(옛 이름은 Varanasi) 근처의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을 하였다. 이를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브리태니커)

 

사르나트(Sarnath)사원 =왕사성 복덕사(福德寺)
사르나트(Sarnath, Sarnātha)는 바라나시(Varanasi)의 북방 약 10 km에 위치해 있다. 불교 전통에 따르면, 고타마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자신과 함께 고행했던 다섯 수행자들에게 처음으로 설법("초전법륜")을 행한 곳으로 유명하다. 불교 ‘4대 성지’의 하나인 사르나트는 붓다가 성도(成道)한 다음 처음으로 설법(說法)을 한 장소이다. 부처님이 설법하던 당시 이곳에 있던 사슴들도 모였다고 해서 일명 녹야원(鹿野苑)으로 불린다. 넓직한 유적지이지만 현재 지상의 구조물은 철저히 파괴되어 커다란 불탑의 터나 승원터만 있고 그 중에 유일하게 기원후 6세기에 건립된 다메크 스투파가 남아있다. 그리고 현재 이곳에는 건물은 없으나 굽타시대에는 벽돌구조의 고층탑 건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1변이 약 20m의 정방형 건물지가 있으며 이곳을 방문했던 현장은 '대당서역기' 에 그 건물 높이가 200여 척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퍼시 브라운(Percy Brown)이 만든 7세기경 사르나트 불교사원 복원도에는 보드가야 고층탑과 같은 건물 형태가 묘사되어 있다.

 


녹야원 불교 유적지와 아쇼카왕이 세운 다메크 대탑

(Archeological site at Sarnath. Dhamek stupa is visible in background)

 


Sarnath Information.

 

사르나트(녹야원)의 내력에 관한 전설
옛날 이 근처에 우거진 숲이 있었는데, 각각 500 마리 정도의 사슴 두 무리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국왕이 사냥을 나가자 한 사슴 무리의 우두머리가 국왕에게 한꺼번에 사냥할 것이 아니라 하루에 한 마리씩 사냥하면, 국왕은 신선한 것을 먹을 수 있고 또 우리는 생명을 연장할 수 있으니 서로가 좋지 않겠느냐교 제언하였다. 국왕은 그대로 하기로 하였다. 어느날 새끼를 밴 암사슴이 자기 차례가 되어 죽게되자 자기가 속한 무리의 우두머리에게 뱃속의 새끼는 아직 죽을 차례가 아니니 미루어 달라고 간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래서 이웃 사슴 무리의 우두머리에게 가서 같은 간청을 하니 그는 “아, 이것이 어미의 자비심이라는 것이구나. 어미의 은혜는 태어나지 아니한 새끼에게도 미치고 있구나. 좋다. 내가 너 대신 희생하겠다”라고 하면서 곧바로 왕궁으로 찾아가 궁전 문 앞에 서서 자기를 대신 죽여 달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국왕은 크게 감탄하면서 “아, 훌륭한 마음씨로구나. 너는 사슴의 모양을 한 인간이고, 반대로 나는 인간의 허울을 쓴 사슴이다”라고 말하였다. 그 후로 어명으로 이 숲에서는 사슴 사냥이 금지되고 모든 사슴들이 해방되었다. 그 뒤로부터 이곳을 녹야원(사슴들이 노니는 동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문화콘텐츠닷컴)

 

◇ 부처님의 녹야원(鹿野苑) 설법

중인도 베나레스(Varanasi) 교외의 사르나트(Sarnath)에 있는 곳으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뒤 처음으로 이 곳에서 다섯 비구들을 상대로 설법하셨다. 녹원(鹿苑) 즉 사슴동산이라고도 한다. 사르나트(Sarnath鹿野苑)는 ‘성자가 머무는 곳’이라는 뜻의 리쉬파타나(Rishipatana)라고도 불리던 이곳은 부처님이 스스로 증득한 무상(無上)의 위 없는 깨달음의 내용을 처음으로 세상에 펼친 곳이다. 그러므로 사르나트는 부처님이 법의 바퀴(法輪, Darma Chakra)를 처음 굴린 초전법륜지로서 불교의 4대성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

 

위 없는 고귀한 깨달음을 증득한 부처님이 이를 중생에게 나누어주기로 결심하였을 때, 그 대상으로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들이 한 때나마 그가 스승으로 모셨던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와 웃다카 라마풋타(Uddaka Ramaputta)였다. 그러나 특유의 신통력을 통해 이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된 부처님에게 다음으로 떠오른 사람들은 보드가야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같이 고행하며 수행했던 다섯 도반들 즉, 콘단나(Kondanna), 밧디야(Bhaddiya), 밥파(Vappa), 마하나마(Mahanama) 그리고 앗사지(Assaji)였다고 한다.

 

그런데 구도를 위한 수행이라면 그 어떤 고행도 망설이지 않았던 구도자 싯달타를 수행의 귀감으로 삼고 따르던 이들 다섯 수행자들은, 싯달타가 스스로 극단적인 고행으로 점철되는 수행은 계속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강가의 소녀 수잣타(Sujata)가 제공하는 우유죽을 얻어먹는 것을 지켜보면서, 크게 실망하고 고행을 깨뜨리게 된 타락한 수행자(고타마)에게 더이상 기대할 것이 무엇이냐는 탄식을 남긴채 모두 떠났다.

 

위 없는 고귀한 깨달음과 고행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확연하게 증득한 부처님으로서 이들을 그대로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특유의 신통력으로 이들이 사르나트(Sarnath)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부처님은 오직 법을 나누어주려는 일념으로 250키로의 짧지 않는 길을 떠난 것이었다. 멀리서 싯다르타가 오는 것을 바라본 이들 다섯 수행자들은, 싯다르타가 청한다면 앉을 자리를 내어주기는 하겠지만 일어서서 마중하지는 않을 것이고 혹시 불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기로 서로 다짐하였다.

 

옛 도반들과 법을 나누려 짧지 않은 길을 찾아온 부처님의 당당한 걸음걸이와 안온한 표정 그리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이들이 마음 속으로 만들었던 바늘방석을 헛된 것으로 바꾸기에 충분하였다. 서로 다짐했던 것과는 달리 서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마중의 예를 표하였다. 그리고 듣지도 말하지도 않으리라던 그들이 싯다르타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마음을 열지 못하는 이들 다섯 수행자들에게 부처님은 마침내 “내가 언제 이처럼 자신있게 법을 말했던 적이 있었던가” 라고 말하며 그들로 하여금 마음의 문을 활짝 열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Paintings of the First teaching at Sarnath - By Asalha Puja.

 

◇ 여러 경전에 기록된 사성제 

(1)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2.1 그때 세존께서는 아난존자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이제 꼬띠가마(Kotigāma; 코티마을이라는 뜻)로 가자.”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존자는 세존께 응답했다.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많은 비구 승가와 함께 꼬띠가마에 도착하셨다. 세존께서는 거기 꼬띠가마에 머무셨다.

 

2.2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의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비구들이여, 이제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고 꿰뚫었다.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고 꿰뚫었다.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고 꿰뚫었다.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의 진리를 깨닫고 꿰뚫었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갈애는 잘라졌고, 존재로 인도함은 부수어졌으며, 다시 태어남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2.3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서(善逝)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뒤 다시 게송으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사성제 게송]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긴 세월 이생 저생으로 치달려 왔다.
이제 이 네가지 진리를 알았다.
[중생의] 존재로 떨어짐을 근절하였다.
괴로움의 뿌리를 잘라버렸다.
이제 [나에게] 다시 태어남이란 있지 않을 것이다.”

 

(2) 증일아함경(增一雜阿含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마땅히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닦고 실천해야 한다.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첫째는 괴로움에 대한 진리이니,

그 이치는 다할 수 없는 것이어서 생각으로도 다할 수 없고 말로도 다할 수 없다.

둘째는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진리이니,

그 이치는 다할 수 없는 것이어서 말로는 이루 다할 수 없다.

셋째는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이니,
그 이치는 다할 수 없는 것이어서 생각으로도 다할 수 없고 말로도 다할 수 없다.

넷째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진리이니,
그 이치는 다할 수 없어서 생각으로도 다할 수 없고 말로도 다할 수 없느니라.

 

어떤 것이 괴로움의 진리인가? 이른바 괴로움에 대한 진리란,
태어나는 괴로움[生苦],·늙는 괴로움[老苦],·병듦의 괴로움[病苦],·죽는 괴로움[死苦]과 근심·슬픔·번민의 괴로움[憂悲惱苦]과 미워하는 이와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괴로움[恩愛別苦], 구하고자 하나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이니, 통틀어 말하면 5음성고(陰陰苦)라고 한다. 이것을 괴로움에 대한 진리라고 하느니라.

 

어떤 것이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진리인가?
이른바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진리라는 것은 애정이 탐욕과 서로 호응하여 마음이 항상 더러워지고 집착하는 것이니, 이것을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진리라고 하느니라.

 

어떤 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인가?
이른바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라는 것은 저 애욕(愛慾)이 아주 다 없어져서 남은 것이 없고 다시는 새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라고 하느니라.

 

어떤 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진리인가?
이른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진리라는 것은, 곧 현성의 8품도(品道)이니, 말하자면 바른 소견[正見]· 바른 다스림[正治]· 바른 말[正語]· 바른 행[正行]· 바른 생활[正命]· 바른 방편[正方便]· 바른 생각[正念]· 바른 삼매[正三昧]이다. 이것을 일러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진리라고 하느니라.

 

비구들아, 이와 같이 이 네 가지 진리는 진실한 것이어서 허망하지 않으며,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진리라고 한다. 모든 중생인, 두 발 달린 중생, 세 발 달린 중생, 네 발 달린 중생,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생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세계의 온갖 중생들 중에서 여래(如來)가 최상(最上)이신 데, 그 분이 곧 이 네 가지 진리를 성취하셨기 때문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 하느니라.

 

비구들아, 이것을 일러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깨달아 알지 못하면 언제나 나고 죽음 속에 있으면서 다섯 갈래 세계[五道]를 윤전(輪轉)하게 된다. 이제 나는 이 네 가지 진리를 얻었기 때문에 이 언덕에서부터 저 언덕에 이르고 이 이치를 성취하여 나고 죽는 근본을 끊음으로 인하여, 다시는 후생에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알았느니라.”

 

그 때 세존께서는 이런 게송을 말씀하셨다.

 

이제 이 네 가지 진리의 법을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하면
나고 죽는 속에서 윤회하면서
끝내 거기에서 해탈하지 못한다.

만일 이제 이 네 가지 진리를
이미 밝게 깨달아 환히 알면
나고 죽는 뿌리를 끊음으로써
다시는 후생에 몸을 받지 않으리라.

 

"만일 사부대중들이 이 진리를 얻지 못하고 깨달아 알지 못하면 곧 다섯 갈래 세계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모든 비구들아, 마땅히 방편을 써서 이 네 가지 진리를 성취하도록 해야 한다. 모든 비구들아, 꼭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하느니라." 그 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Animation from English talking book Buddha)

 

(3) 잡아함경(雜阿含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마갈국(摩竭國)에 계시며 인간세상을 유행하셨다. 왕사성(王舍城)과 파라리불(波羅利弗) 사이의 죽림(竹林)마을에는 국왕이 지은 복덕사(福德舍)가 있었다. 그 때 세존께서는 모든 대중들과 함께 그 곳에서 지내고 계셨다. 이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나 너희들이나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아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으며, 그대로 따라 깨달은 것도 없고 그대로 따라 받은 것도 없었다면, 마땅히 오랜 세월 동안 나고 죽음 속에서 치달렸을 것이다.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그것은 이른바,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이니라.

 

나나 너희들이나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아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으며, 그대로 따라 깨달은 것도 없고 그대로 따라 받은 것도 없었다면, 마땅히 오랜 세월 동안 나고 죽음 속에서 치달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너희들은 이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그대로 알고 그대로 들어갔기 때문에, 모든 존재의 흐름을 끊고 모든 나고 죽음을 다하여 후세에는 몸을 받지 않는다.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그대로 알고 그대로 들어갔기 때문에, 모든 존재의 흐름을 끊고 모든 나고 죽음을 다하여 후세에는 몸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아직 밝게 알지 못하였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쓰고 왕성한 의욕을 일으켜 빈틈 없는 한결같음으로 이것을 닦아야 하느니라.”

 

그 때 세존께서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나 너희들이나 늘
오랜 세월 동안 나고 죽음 겪으며
성스러운 진리를 보지 못하고
큰 괴로움만 날로 늘어났었네.

만일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알고
존재의 큰 바다를 끊으면
나고 죽음을 영원히 버려서
다시는 후세의 몸을 받지 않으리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4) 장아함 반니원경(長阿含 般泥洹經)

부처님이 파탈리풋타로 가시던 도중 라자가하(王舍城)에서 멀지 않은 왕원(王園)에 쉬면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도를 닦는 이는 반드시 네 가지 진리를 알아야 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진리를 알지 못해 오랫동안 바른 길에서 벗어나 생사(生死)에 매여 헤매느라고 쉴 새가 없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이 세상 모든 것이 괴로움이니 이것을 고(苦)라 한다.
둘째는 괴로움은 집착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니 이것을 집(集)이라 한다.
세째는 괴로움은 집착이 없어져야 다한 것이니 이것을 멸(滅)이라 한다.
네째는 괴로움과 집착을 없애는 길이니 이것을 도(道)라 한다.

 

괴로움의 뜻을 알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므로 오랫 동안 먼 길을 헤매어 생사가 쉬지 않는다. 그러나 반드시 이 세상 모든 것이 괴로움임을 알 것이니, 괴로움이란 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번민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 구하는 것이 얻어지지 않는 것 등이다. 그러므로 오온(五蘊)으로 된 이 몸이 모두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인 줄 알고 애욕의 집착을 끊으면 눈을 얻었다고 하리니, 이 생을 마치고는 뒤에 다시 괴로움이 없게 된다. 집착 때문이라 함은 애욕을 따라 생긴다는 것이니, 괴로움과 집착을 모두 없애고 그 길을 따라 진리를 행하여 눈을 얻으면 이 생을 마친 뒤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이미 진리를 보아 도(道)의 눈을 얻은 이에게는 다시 나고 죽음이 없다. 그리고 도를 얻으려면 여덟 가지 행을 닦아야 한다.

 

첫째는 마음을 다하여 여래의 가르침을 듣고,
둘째는 애욕을 버려 갈등을 없애며,
세째는 살생과 도둑질과 음행 같은 것을 저지르지 않고,
네째는 속이고 아첨하며 나쁜 말로 꾸짖는 일을 하지 않으며,
다섯째는 질투하고 욕심내어 남들이 믿지 않는 일을 하지 않고,
여섯째는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공(空)이고 무아(無我)임을 생각하며,
일곱째는 몸의 냄새나고 더럽고 깨끗하지 않음을 생각하고,
여덟째는 몸에 탐착하지 않고 마침내는 흙에 들어갈 것이라고 아는 것이다.


지나간 세상의 모든 부처님들이 다 이 네 가지 진리를 알았고, 앞으로 올 부처님들도 이 진리를 볼 것이다. 세속적인 은혜와 사랑을 탐하고 바라거나 혹은 세상의 부귀영화와 명예와 오래 살기를 원하는 이는

이 세상을 벗어나는 길을 끝내 얻지 못한다. 길은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니 마음이 깨끗해야 길을 얻을 수 있다. 그 마음이 청정하여 다섯 가지 계율을 범하지 않으면 천상에 태어난다.


만약 지옥, 아귀, 축생의 길을 끊으려거든 일심으로 여래의 가르침과 계율을 받들어 행해야 할 것이다.
이제 여래가 중생(衆生)들을 나고 죽는 데서 해탈케 하려고 바른 길을 열어 보였으니,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잘 생각해 보아라.“

 

이와 같이 말씀하시고 나서 부처님은 아난다와 함께 파탈리풋타에 이르러 성 밖 어떤 나무 아래에 머무셨다. 그 곳 바라문과 거사(居士)들은 부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오셨다는 말을 듣고 모두 부처님 계신 데로 모여들었다.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해 앉을 방석을 가지고, 혹은 물병과 등잔을 들고 와서 예배하였다. 부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세속에서 함부로 탐욕을 즐기면 다섯 가지 소모되는 현상이 있다. 스스로 방종하므로 재산이 줄어 들고, 몸을 위태롭게 하고, 도를 잃게 되며, 사람들이 공경하지 않고, 죽을 때에 뉘우치게 되며, 추한 소문과 나쁜 이름이 널리 퍼지고, 스스로 방종하므로 죽은 뒤에는 삼악도 (三惡道)에 떨어진다. 그러나 사람들이 마음을 조복(調伏)받아 방종하지 않으면 다섯 가지 덕을 갖추게 된다. 검소하고 절약하므로 재산이 날로 늘어나고, 도의 뜻에 가깝게 되며, 사람마다 우러러 공경하고, 죽을 때도 뉘우침이 없으며, 덕망이 세상에 널리 퍼지고, 검소하고 절약하므로 죽은 뒤에 천상(天上)이나 복된 곳에 태어난다. 사람이 방종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좋은 일이 있으니 잘 생각해서 행하여라.”

부처님께서 여러 사람들을 위해 가르침을 펴시니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A relief depicting the first discourse of the Buddha, from the 2nd century (Kushan).

[web 14] The Walters Art Museum. The Buddha's hand can be seen at right.


◇ 사성제(四聖諦) 해설 

제(諦)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진실, 사실, 진리 등을 가리키는데 쓰이며, 동시에 엄숙한 단어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성제는 '네가지 거룩한 진리'라는 말이다. 즉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네 가지를 설하여 이것을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 삼고 있는 데에서 사성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치 의사가 병을 치료함에 있어 병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원인을 알아 낸 다음, 건강한 상태의 정상적인 표준을 알아서 거기에 맞는 치료 방법을 강구하듯이, '고→ 집→멸'을 알고 멸에 이르는 바른 길(도)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1) 고성제(苦聖諦)의 뜻 
우리 인생의 현실은 고(苦)라는 것으로 경전은 8가지 괴로움(八苦)을 들고 있다. '어떤 것이 고성제인가?' 생(生)하고, 늙고(老), 병들어(病), 죽고(死), 미운것과 만나고,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고,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은 다 괴로움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오취온(五取蘊, 나에게 取着된 몸과 마음)은 괴로움이다. 불교에서 '괴롭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인생에서의 행복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일반적으로 물질적 정신적인 여러 형태의 행복을 인정하였다. 그러한 행복을 인정하고 찬양한 후, 그것들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쉽다'고 하였다. 즉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지 괴롭다는 속성을 가진 의미에서 괴로움인 것이다.

 

(2) 집성제(集聖諦)의 뜻 
괴로움의 집(苦集)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는가의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집(集)이라는 술어는 원래 '결합하여 일어난다' 는 뜻으로 한자의 뜻대로 '모은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집기(集起)라고 하면 뜻이 더잘 통할 것이다. 이는 괴로움은 어떤 것으로부터 연기(緣起)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불경에서는 집성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그것(集)은 재생(再生)의 원인이 되는 갈애로서 격렬한 탐욕에 묶여 있으며, 여기저기 새로운 기쁨을 찾아 나선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욕애(慾愛;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 유애(有愛; 존재 그 자체와 형성에 대한 갈망), 무유애(無有愛;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 등이다'

 

인간에게 온갖 괴로움과 윤회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여러가지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탐욕 욕망 갈애 열망 등이다. 그러나 연기법에서 보았듯이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절대적인 원인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고(苦)의 근본 원인으로 가주되고 있는 탐욕도 다른 것, 즉 느낌(受)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며, 이 느낌은 접촉(觸)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어 이러한 과정이 반복적으로 순환되면서, 결국 연기적 의미의 '집 (集, 緣起)'이 되는 것이다.

 

(3) 멸성제(滅聖諦)의 뜻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개념이다. 고의 원인이 애(愛) 탐(貪) 등의 집기라면 멸제는 그것을 없애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괴로움 또는 고의 지속에서 해탈하고 벗어나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無明)에서 연기한 것이라면 무명의 멸진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지를 원적(源寂), 혹은 열반(涅槃)이라고 하여,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고 생사를 초월하여 불생불멸의 진리를 체득한 경지를 말한 것이다.

 

(4) 도성제 (道聖諦)의 뜻
도제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 곧 실천하는 수단을 말한다. 그 방법은 여덟가지의 수행 방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가 곧 팔정도(八正道)의 수행방법이다.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도성제는 위에서 제시된 멸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즉 고의 멸진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항목인 것이다. 종교의 생명은 “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는데 있다”는 말이 있다.


걸어간다는 것은 곧 실천수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성제의 구체적인 실천 항목으로서는 '성스러운 팔지(八支)의 길'이라 불리우는 팔정도가 있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여덟가지 실천사항을 가리킨다. 사성제는 이처럼 고 집 멸 도의 네 가지 진리이다. 이 진리는 고제와 집제를 유전(流轉)하는 인과로 나타내고, 멸제와 도제는 깨달음을 위한 인과로 나타낸다. 곧 고 집은 세간의 인과 속에서 흘러가는 것이고, 멸 도는 세간의 인과를 초월하여 깨달음을 얻는 행위이다. (유계리청솔바람)

 

◇ 중도(中途)로서의 사성제 (아함경)

그날, 서력 기원전 528년 7월 보름날 저녁, 해가 지면서 때 맞춰 달이 막 떠오르고 있어,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시파타나의 녹야원에서 부처님은 그들에게 법을 설하기 시작하셨다.

 

“비구들이여, 이 두 가지 극단은 출가자들이 가까이 해서는 안되느니라. 그 두 가지란 무엇인가? 감각적 쾌락(快樂)에 빠지는 일이니 이는 저열하고, 천박하며, 세속적이고 성스럽지 못하며, 이익됨이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고행(苦行)이니 이는 고통스럽고, 성스럽지 못하며 이익됨도 없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들 극단을 피해서 중도(中途)를 깨달았나니 이는 눈을 뜨게하고, 지혜를 가져오며 적정과 신통지, 깨달음 그리고 열반으로 이끈다. 비구들이여!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성스러운 여덟가지 길(八支聖道)이다. 즉, 정견(正見 ; 올바른 견해), 정사(正思 ; 올바른 의도), 정어(正語 ; 올바른 말), 정업(正業 ; 올바른 행위), 정명(正命 ; 올바른 생활수단), 정정진(正精進 ; 올바른 노력), 정념(正念 ; 올바른 마음챙김), 정정(正定 ; 올바른 정신집중)이다.” 다시 부처님은 그들에게 사성제(四聖諦)를 설하셨다.


“고(苦), 고의 생기(苦集), 고의 멸(苦滅), 고의 멸에 이르는 길(苦滅道)의 네 가지 성스런 진리가 바로 그것이다(註1). 이렇게 지고하신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선포하심으로써 마침내 법의 바퀴(Dhamma-cakka)를 굴리기 시작하셨다. 이 첫 법문, 녹야원의 메시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땅 위를 걷는 모든 생물의 발자국이 코끼리의 훨씬 큰 발자국에 담길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포괄된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각 항목을 설명하시면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법들에 관해서 눈(眼; cakkhu)이, 지(智; ~naa.na)가, 혜(慧; pa~n ~naa)가, 명(明; vijjaa)이, 광(光; aaloka)이 나의 내면에 나타났다.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관한 나의 통찰지혜[知見; ~naa.nadassana]가 움직일 수 없는 확실한 것으로 밝혀지기 전에는 나는 결코 자신이 비할 바 없는 지고의 깨달음(無上正等覺)을 얻었다고 선언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네 가지 성스런 진리에 관한 나의 지견이 움직일 수 없는 확실한 것으로 분명해지자 그때 비로소 나는 비할 바 없는 지고의 깨달음을 얻었음을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자 다시 나의 내면에 지견이 솟아났다. 즉 내 마음의 해탈(心解脫)이 확고 부동하며 (akuppaa me ceto vimutti), 금생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며, 더 이상의 몸 받음(再生)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註2)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다섯 비구는 환희에 차서 세존의 말씀을 찬탄했다. 신사파 숲에서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얼마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가는 신사파 숲의 메시지에서 다시 확인된다.

 
한때 세존께서는 코삼비(알라하바드 근처)의 신사파 나무숲에서 머무셨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손에 신사파 나뭇잎들을 주워 들고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 손에 있는 신사파 잎사귀와 저 숲에 있는 잎들과 어느 쪽이 더 많은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손에 드신 잎사귀는 얼마되지 않습니다. 저편 숲에 있는 잎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렇다. 비구들이여, 내가 완전히 깨닫고서도 너희들에게 설하지 않은 것은 많다. 내가 너희들에게 설한 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비구들이여! 왜 내가 그 모두를 설하지 않는가? 그것들은 유익하지도 않고 청정한 삶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싫은 마음을 일으킴(厭離; nibbidaa ), 탐욕을 멀리함(離慾), 멸진(滅盡) 적정( 寂靜) 완전한 지적 능력(神通智;abhi~n~naa ), 완전한 깨달음 열반으로 이끌어 주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내가 그것들을 설하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내가 설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괴로움이다. - 이것을 나는 설한다.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 - 이것을 나는 설한다.
이것은 괴로움의 멸진이다. - 이것을 나는 설한다.
이것은 괴로움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 - 이것을 나는 설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왜 이러한 진리를 설하는가? 이 진리들은 실로 유익하고 청정한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들은 싫은 마음을 일으킴, 탐욕을 멀리함, 멸진 적정 완전한 지적능력 완전한 깨달음 곧 열반으로 이끌어 준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내가 이 진리들을 설하는 이유이다. 비구들이여! 따라서, 이것이 괴로움이고,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고, 이것이 괴로움의 멸진이고, 이것이 괴로움의 멸진에 이르는 길임을 깨닫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느니라.” (註3) 부처님은 역설하신다. “나는 오직 한가지를 알려줄 따름이니 괴로움과 괴로움의 멸진이노라. (dukkhamceva pa~n~naapemi, dukkhassa ca nirodham)”. (註4)

 

이렇듯 명쾌하게 일러주신 말씀을 올바로만 이해한다면 불교를 다 이해한 셈이 된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이 한가지 원리의 적용일 뿐 다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부처님이든 발견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이 사성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사성제야 말로 어떤 시대의 부처님 일지라도 한결같이 가르치실 전형적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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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1) 사성제에 대한 개괄적 설명은 저자의 ‘부처님의 옛길(The Budd-ha's Ancient Path)’참조. 보다 자세한 설명은 (The Wheel No. 17 냐나몰리 스님의 ‘세 주요 법문(Three Cardinal Discourses)’과 No. 34/35 프란시스 스토리의 ‘사성제’, 냐나틸로카 스님의 ‘부처님의 말씀(The Word of The Buddha)’ 참조.

註2) 상응부, V 420 전법륜경.
註3) 상응부 V 437
註4) 중부 22 경 (허공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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