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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민족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 (1938) - 나라 잃은 설움 담아

잠용(潛蓉) 2013. 8. 8. 19:29

 

(사진 : 바다 같이 드넓은 두만강 하류)


"눈물 젖은 豆滿江" (1938)

김용호 작사/ 이시우 작곡/ 김정구 노래

 

< 1 >
豆滿江 푸른 물에 노젓는 뱃 沙工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던 그 배는 어데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 2 >
江물도 달밤이면 목메여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쉬니
追憶에 목메인 애달픈 下訴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 3 >
님 가신 江 언덕에 丹楓이 물들고
눈물진 豆滿江에 밤새가 울면
떠나간 그 님이 보고 싶고나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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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사 출처 :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 김정구) - 가요반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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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라 잃은 民族의 설움과
'눈물 젖은 豆滿江'에 얽힌  恨 맺힌 사연 =
 
도문교(圖門橋) : 북한 남양시와 중국땅 연길 투먼시를 잇는 철교. 건너편이 금단의 땅 북한

 

 < 1 >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젖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데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 2 >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여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쉬니
추억에 목메이는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 3 >

님 가신 이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
눈물진 두만강에 밤새가 울면
떠나간 옛님이 보고싶구려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작곡 당시의 가사)

 

[사진] 1920년대 만주 이주민들

나는 중국 도문(圖們), 두만강(頭滿江)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눈물젖은 두만강 노래비> 건립을 추진하는 이종덕박사로부터 귀중한 자료를 건네받았다. 거기에는 1930년대 중엽 극단 <예원좌>의 배우였던 장월성이 구술한 <눈물젖은 두만강 >이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한 피맺친 사연이 담겨 있었다. 1930년대 하반기에 이르러 대중가요는 연정비가(戀情悲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시기 <오케레코드>사는 비탄조가 흐르는 연정비가를 가장 많이 취입한 회사의 하나였다. 이 회사에서 창작된 연정비가들로는 조영출 작사, 이봉룡 작곡인 <눈물의 신호등>을 비롯하여 <눈오는 네온가>, <물방아 사랑> 등 소개해야 할 작품들이 너무 많으나 여기서는 <눈물젖은 두만강>만을 언급하려고 한다.

1930년대에는 가요계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고 그 정도가 날로 악랄해지자 검열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가사를 작사할 때 은유적인 수법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흔히 조국을 <님>으로, 조국 광복을 <님은 언제나 오려나>하는 식으로 은유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시우 작곡인 <눈물 젖은 두만강>도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떠나간 옛님’으로 비유한 노래이다. 1930년대에 이르러 두만강 나루의 선착장은 조선에서 살길을 찾아 중국이나 만주로 건너가는 실향민들로 그야말로 매우 붐볐다.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할 수 없는 낯선 타국땅으로 떠나가는 겨례의 마음은 슬픔에 젖어들었고 사랑하는 남편과 이별하는 여인들의 오열이 그칠새 없었다. 가슴이 터져오는 이별의 슬픔을 두만강 물결 위에 뿌리며 정처없이 떠나간 옛님은 다름아닌 우리 겨례였으며 조국이었던 것이다. 작곡가 이시우(李時雨)는 이 노래가 자신의 체험작이라고 하였다. 이 노래의 창작에 앞서 이시우는 <봄 잃은 낙동강>을 창작하였다. 이 노래에서도 역시 작곡가는 일제에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의 설움과 수난을 외면할 수 없었으며 낙동강에 봄이 와도 그 봄마저도 잃었다고 은유화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 <눈물 젖은 두만강>이 대표작이다.

 

[사진] 중국에서 입수한 작곡가 이시우선생

◇ 다음 이야기는 1930년대 중엽 극단 예원좌의 배우였던 장월성이 1973년 5월 29일 구술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1930년대 중엽 극단 <예원좌>의 일행이 만주 동북지방인 용정(龍井)에서부터 시작하여 조선인 부락들을 찾아다니며 순회공연을 하다가 두만강변의 조그만 도시인 도문(圖門)의 한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이 여관은 조선사람이 경영하면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며 이어가고 있었는데 뒷마당에는 단풍나무가 두 그루 서 있었다. 때는 마침 가을철이라 한 나무는 짙은 홍색(紅色)으로 빨갛게 물들었고, 다른 한 나무는 노랗게 황색(黃色)으로 물들어 집 떠난 나그네의 향수심(鄕愁心)을 안겨 주었다. 그 단풍나무를 바라 보느라니 작곡가 이시우의 마음에도 저도 모르게 쓸쓸한 감정이 젖어들었다. 이시우를 비롯하여 몇몇 배우들이 한참동안 단풍나무를 바라보며 저마다 고향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관집 주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저 단풍나무는 내가 두만강을 건너올 때 떠가지고 와서 심은 것이웨다. 말하자면 고국땅의 나무이지요. 내가 고향을 떠나오던 때가 기미년(1919) 추파월(秋八月)인데 영원히 그날을 잊지 말자고 어린 단풍나무를 몇 그루 떠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저렇게 두 그루만 살아 있습니다. 이 나무를 심은 지가 어언 10여년이 되었는데 이렇게 단풍이 들어 제법 가을맛을 안겨 줍니다.”

기미년으로 말하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해이다. 나라의 독립을 성취하려는 우리 민족의 한결같은 염원이 대중적인 인민봉기로 폭발하였으나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해 봄에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일제경찰에 끌려가 순국하거나 형장에서 최후를 마쳤다. 작곡가 이시우는 단풍나무를 바라보면서 <추억>이라는 주제로 곡상을 잡아 보려고 사색에 잠겼으나 신통한 곡상이 잡히지 않았다. 바로 그날 밤이었다. 밤이 깊도록 잠자리에 누어 사색에 골몰하고 있을 때 옆방에서 난데없이 들려오는 여인의 비통하고 처절한 울음소리에 놀랐다. 이시우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여관집 주인을 통해서 그 오열하는 여인에 대하여 사연을 알아보았다. 그 여인은 독립투사 문창학(文昌學)씨의 부인인 김증손녀(당시30세)씨로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하다 만주로 도피해 온 남편을 찾아 여기 용정까지 왔다.

그녀는 오매불망(寤寐不忘) 남편을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독립군이 있다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간난신고(艱難辛苦)하면서 10여년을 찾아 다녔다. 그런 그녀가 한 가닥 희망의 끈마져 끈어진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남편이 훈춘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체포(1921년 12월)되어 압송된 후 이미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됐다(1923년 12월20일)는 정보를 얻게 된 것이다. 나라를 잃은 슬픔에다 남편마져 이미 사형을 당했다는 소리를 들은 그 여인은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날이 바로 남편의 생일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빈방에서 조용히 술이나 한 잔 부어 놓고 생일제를 지내려 하였다. 그런데 여관집 주인이 이 사실을 알고 제물을 차려가지고 왔던 것이다. 여관 주인과 그녀의 남편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 여관집 주인이 차려준 상에 술을 부어놓고 난 여인은 그만 솟구쳐 오르는 오열을 참지 못해 한밤중에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은 이시우의 가슴에 커다란 충격이 안겨왔다. 이튿날 이시우는 그녀가 남편을 찾아 건너온 두만강을 바라보며 나라 잃은 우리 겨례의 슬픔을 통탄하였다. 이시우가 이러한 감정을 누를 길 없어 가사에다 즉흥적인 선율을 붙인 것이 바로 <눈물젖은 두만강>이라고 한다. 이 노래의 후렴을 통하여 알수 있는 바와 같이 희생된 남편에 대한 그리움에 목메이는 그녀의 애절한 호곡소리는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라는 시어(詩語)로 승화되고 빼앗긴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은유되었던 것이다. 특히 2절에서 <추억에 목메이는 애달픈 하소>라고 표현한 것과 3절에서 <님 가신 이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라는 표현은 여관집 뒷마당에서 본 단풍나무에서 얻은 시상(詩想)을 담았다고 한다.

 

이렇게 되어 <눈물젖은 두만강>이 창작되자 극단 <예원좌>는 장월성이라는 소녀배우를 통해 막간에 나가서 이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이날 소녀배우가 처음으로 이 노래를 부르자 장내에서는 떠나갈듯한 박수가 터져나와 장월성은 2번 3번 재창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장월성은 그 당시 레코드를 취입하는 여류가수들 급에는 비할바 못되는 화술배우였지만 신작 노래가 두만강 연안에서 살고 있는 조선인들의 생활 감정에 딱 들어맞았기 때문에 그토록 관객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던 것이다. 그후 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이시우는 한 시인에게 부탁하여 가사를 다듬고 가수 김정구에게 이 노래를 주어 <오케레코드>에서 취입하도록 하였다. 그 후부터 이 노래가 민간에 급속히 유행되었는데 사람들은 조국이 그리울 때는 언제나 이 노래를 불렀고, 떠나간 옛님이 그리울 때도 이 노래를 불렀다. (출처: wuban777)

[사진: 위- 작곡가 이시우선생, 아래- 취입 당시의 가수 김정구]

◇ 北韓서도 인기있는 ‘눈물 젖은 두만강’
연합뉴스ㅣ2002.04.28 06:59)

 


이미 고인이 된 가수 김정구씨의 ‘눈물젖은 두만강’은 남한에서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도 인기있는 노래 중의 하나이다. 북한의 전문지 <문학신문’(주간)>은 최근호(3.9)에서 “이 노래가 오늘날에도 우리 인민들의 기슴 속에 강한 여운을 남기고 있는 것은 일제 식민지 통치의 철쇄(쇠사슬) 아래서 신음하던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모습, 민족수난의 발자취를 되새겨 주고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북한은 ’눈물젖은 두만강’을 ‘계몽기 가요’(일제 강점기에 나온 노래)의 대표곡으로 꼽고 있다. <문학신문>은 “노래에서는 사랑하는 ‘님’을 그리는 서정적 주인공의 형상을 통해 가사 전반에 관통시켜 주고 있다”면서 “여기서 노래되고 있는 ‘님’은 생이별을 당한사랑하는 ‘님’과 함께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을 은유적으로 노래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신문은 이어 이 노래가 은유적으로 표현된 것은 “일제가 조국광복과 자기들에 대한 반항심(저항정신)을 마구 탄압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이 노래는 ‘뱃사공’, ‘어데로 갔나’, ‘추억’ 등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이는 소박한 표현을 통해 주제를 잘 살렸고 간결하면서도 통속적인 선율을 사용, “비가(悲歌)적인 가사의 내용에 맞게 선율도 비통하면서도 애조적인 정서를 띠고 있다”고 신문은 설명했다. 이와 함께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면 오려나?’라는 후렴구는 단순히 반복효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우리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모습을 더욱 강조해 주고 있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 정연식기자)

북한 '눈물 젖은 두만강' 김정일 찬양가요로 해석
연합뉴스ㅣ2002.12.04 (수) 11:47

가장 대표적인 해방 전의 대중가요 '눈물젖은 두만강'이 북한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찬양하는 가요로 재해석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의 대표적인 문학잡지인 <조선문학> 최근호(2002.11)는 '우리 님' 제하의 정론에서 이 노래에 등장하는 '님'을 김 위원장이라고 주장하면서 "님 잃은 뱃사공의 노래 구슬프던 두만강, 그러나 지금은 님을 찾아 지난날의 피눈물은 흘러가고 기쁨과 환희만이 떠있는 우리 조국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조선문학>은 또 이 가요가 "님을 잃고 헤매이던 두만강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으며 태양의 빛을 받아 눈부신 두만강의 햇빛 밝은 강으로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 세차게 출렁이게 한다"고 말하고 "우리 조국, 우리 민족의 존엄이 어느 분에 의해 세상에 높이 떨쳐지는가를 두만강은 역사의 증견자로 똑똑히 보았다" 고 강조했다. 이 노래는 특히 지난 8월 김 위원장이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극동지방을 방문하고 돌아온 후부터 이처럼 김 위원장 찬양가요로 바뀌기 시작했고, 이에 이 가요의 속편격인 '추억의 두만강'이라는 노래까지 등장했다.

 

북한은 종전에는 이 가요를 넓게는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을 그린 작품"으로, 좁게는 "님을 그리는 여인의 애절한 정서를 노래한 작품"이라고 해석했었다. 북한은 이 노래의 작사자를 남한과는 달리 북한의 시인인 한명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명천은 1940년대 후반 북한 정권 초창기 시절 왕성한 활동을 한 그는 서사시 '북간도'를 대표작으로 가지고 있다. 남한에서는 김용호가 이 노래의 작사자로 소개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눈물젖은 두만강 - 김정구 (1938)


김정구 눈물젖은 두만강 (1987)


김정호 - 눈물 젖은 두만강


涙に濡れた豆満江~周炫美 (일본에서 취입)


[북한] ‘눈물 젖은 두만강’- 가수 배윤희
(3절까지 완창하여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