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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전래동요] '새야새야 파랑새야' - 힘 없는 민족 설움 담겨

잠용(潛蓉) 2013. 8. 8. 15:21

 

 

'새야 새야 파랑새야'
작사 작곡 전래민요/ 채보 편곡 채동선

 

< 1 >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남케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 2 >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남케 앉은 새야
녹두꽃이 떨어지면 부지깽이 매맞는다.
< 3 >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남케 앉은 새야
아버지의 넋새 보오 엄마 죽은 넋이외다.

< 4 >

새야새야 파랑새야 너는 어이 날라왔니
솔잎댓잎 푸릇푸릇 봄철인가 날라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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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두남ㅎ게: ‘녹두나무에’의 고어.

우리 할머니들은 ‘녹두밭에’라고 부르지 않고
‘녹두낭케’(녹두남ㅎ게)라고 불렀다.



국민동요 '새야새야 파랑새야'의 유래

전래 동요 
〈새야새야 파랑새야〉는 우리나라 전역에 퍼진 전래 민요(동요)로 지방마다 음조나 가락이 조금씩 다르다. 이 노래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몇 가지 가설이 있다. 먼저, 동학농민운동(1894) 때 일본군이 푸른색 군복을 입어 파랑새는 일본군을 뜻하며, 전봉준(全琫準)이 녹두장군이라 불리었던 점으로 보아 녹두밭은 전봉준을 상징하고 청포장수는 백성을 상징한다는 설이 유력하다. 또 다른 설로는 팔왕설(八王說)이 있는데 전봉준의 전(全)자를 파자하여 팔(八) 왕(王) 이라고도 불렀고 ‘팔왕’이 변형되어 파랑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노래는 어린이들에게 널리 불리는 동요이기도 한데, 실은 어린이들의 입을 빌린 어른들의 동요라고도 볼 수도 있다. 이 노래는 최근 조수미 등 몇몇 성악가들이 부르기도 하였다. 이 전래동요는 뚜렷한 작자나 시창자(始唱者)가 없이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서 구전되는 동안에 어린이들의 마음에 맞도록 다듬어지고 형식적인 틀도 어느 정도 잡히게 된 동요이다. 전래동요의 특성을 들면, 

 

 첫째 리듬을 그 생명으로 한다는 점이다. 곧, 한국의 전통적인 다른 동요와 같이 4 ·4 내지 3 ·4조의 기본 운율(韻律)을 지니면서도 특히 4 ·4조 리듬에 더욱 철저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기본 리듬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전래동요는 같은 내용의 시행(詩行)을 되풀이 하는 반복법이 대부분으로, 1행은 2행으로 2행은 4행으로 발전해간다. 
둘째, 전래동요에는 계급의식이 없다. 어린이들은 보통 그들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그대로 노래한다. 그들의 주변에 있는 해나 달이나 별, 풀이나 짐승이나 새, 그리고 가정에 이르기까지 무궁한 소재를 아무런 비판이나 어떤 사상도 암시하지 않고 노래부르는 것이다.
셋째, 진(眞) ·선(善) ·미(美)를 이상으로 삼는다. 희로애락은 있되, 증오나 추함이 없는 때묻지 않은 세계이다. 이와 같이 전래동요는 다른 구비적(口碑的)인 가요와 비슷한 형식을 갖춘 반면에 그 내용은 서로 상이한 것이며, 오랜 세월에 걸쳐 마을에서 마을로 전해지면서 이어 내려왔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동요 ‘새야새야 파랑새야’는 같은 전래동요 ‘ 달아달아 밝은달아’와 그 가락이 꼭 같다. 그것은 구전으로 쉽게 익혀 노래불렀기 때문에 가락과 리듬이 비교적 쉽고, 이미 널리 통용되고 있는 노래의 가락과 리듬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끝으로 전래동요는 원래 한정된 지역에서 불려진 것이 대부분이지만 ‘새야새야’ 처럼 전국적으로 전파된 동요도 상당수가 전하고 있다. 오늘날의 동요는 음악성이 강조되지만 이런 전래동요는 음악성보다는 가사의 문학적 의미나 철학성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특섹이다. 그것은 전래동요는 노랫말의 내용이 위주이고 가락은 노랫말의 부수적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위키백과]

또 전래 구전동요들은 그 발생과 전파과정, 지역적 특성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나는데 대표적 구전동요인 <새야새야 파랑새야>의 경우 지금까지 발굴된 것만해도 20여곡에 달한다고 북한 예술잡지 <조선예술> 최근호가 주장했다. 이 잡지는 <조선 구전동요의 지방적 변동>이라는 글에서 우리나라의 전래민요나 동요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것은 ‘창작의 집체성’(어느 한 지방에서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노래가 전파과정에서 사람들의 ‘집체적 재능과 지혜’가 합쳐져서 보다 완전하고 일반화된 노래로 다듬어진다는 논리)과 지역적 특색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같이 밝혔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파랑새야>의 경우 실례로 평북지방에서는 ‘서정적이며 진취적인 정서’를 띠고 있지만, 경남지방에서는 ‘보다 처량하고 구슬픈 정서를 자아내고 있다’고 지적하고 구성면에서 있어서도  평북지방에서 불려지는 노래는 ‘평조에 기초한 2도, 3도의 유순한 음조’인 반면, 경남지방에서는 ‘계면조에 기초한 보다 굴곡이 심한 4도음조와 장식음이 동반된 음조’로 불려졌다고 주장했다. [內外종합]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남게 앉지마라’  
이 노래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몇 가지 설이 있다. 먼저, 동학농민운동(1894) 때에 일본군이 푸른색 군복을 입어 파랑새는 일본군을 뜻하며 전봉준이 녹두장군이라 불리었던 점을 보아 녹두밭은 전봉준을 상징하고 청포장수는 백성을 상징한다는 것이 유력하다. 또 다른 설로는 팔왕설이 있는데, 전봉준은 전(全)자를 파자하여 팔(八)왕(王) 이라고도 불리었고 이것이 변형되어 파랑새가 되었다는 것이다. 민요 가운데 나오는 녹두는 동학란 때 전라도 고부에서 거병하였던 전봉준(全琫準)과 관련된 것이 많다. 이는 전봉준이 키가 작아서 별명이 ‘녹두장군’이었기 때문이다.

①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사 울고간다.”
② “새야새야 파랑새야 전주고부 녹두새야/어서바삐 날아가라 댓잎솔잎 푸르다고/봄철인줄 알지마라 백설분분 휘날리면 먹을 것이 없어진다.”
③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남게 앉지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사 울고간다/새는새는 남게(나무에) 자고, 쥐는쥐는 궁게(구멍에) 자고 우리같은 아이들은 엄마 품에 잠을 자고/ 어제왔든 새각시는 신랑품에 잠을 자고/뒷집에 할마시는 영감품에 잠을 자고.”
④ “아랫녘 새야 웃녘 새야/전주 고부 녹두새야/녹두밭에 앉지마라/두류박 딱딱우여.”

 


여기서 새는 민중을 가리키며 두류박은 전주 고부에 있는 두류산(頭流山)을 말하고 딱딱우여는 날아가라 또는 해산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녹두꽃은 녹두장군인 전봉준(全琫準)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그의 다가오는 불행을 예고하는 내용으로 보기도 한다.  전봉준이 결국은 패할 것이니 그를 따르지 말고 해산하라는 일종의 참요(讖謠)라고 할 수 있다.  ①이나 ③과 같이 본래는 순수한 동요였으나 당시에 가장 친근하고, 애창되던 노래에 참요적인 의미가 첨가되어 ②와 ④같은 노래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또 달리는 이 노래가 서정적으로 변해서 이루어진 것이 “새야새야 파랑새야/녹두밭에 앉지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청포장수 울고간다.”라는 민요로,  어떻든 이 노래가 지금도 전국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 1855~1895)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의 총대장으로 활약한 혁명가. 전라도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에서 전창혁(全彰爀)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봉준의 본관은 천안(天安)이고, 초명은 명숙(明叔)이며, 녹두장군(綠豆將軍)이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조선 말기인 1855년(철종 6)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다. 30여 세에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임명되었고, 은거중인 흥선대원군과도 접촉하여 국정개혁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로 부임한조병갑(趙秉甲)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貪虐)을 자행하고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700섬의 수세(水稅)를 징수하였다. 이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是正)을 진정하였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官衙)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고 강탈당하였던 세곡(稅穀)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태를 조사·수습하도록 하였으나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체포·투옥·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등 동학교도 탄압과 탐학을 자행하였다. 이에 다시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걸고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고부에 인접한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溝)·정읍(井邑)·부안(扶安) 등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봉기하였으며, 8000여 명이 고부 백산(白山)에 모여 제폭구민(除暴救民)·진멸권귀(盡滅權貴)·축멸왜이(逐滅倭夷)를 내세우고 금구·부안을 점령하였다. 이어 전주를 향하여 진격하여 황토현(黃土峴)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정읍·고창·무장 등지까지 장악한 뒤 4월 28일 전주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인천에 상륙한데다가 톄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하여 일본 군대도 입국하여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의 선무(宣撫)에 응하기로 결정하고 탐관오리 응징, 노비 해방, 토지균분제 실시 등 12개 조목의 시정개혁(施政改革)에 대한 확약을 받고 휴전하였다. 이후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강화에 힘쓰고 도정(道政)에 참여하여 감시하였으나 근본적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음에 따라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청일전쟁의 우세를 이용하여 침략행위를 노골화하는 일본의 행태에 격분하여 다시 봉기하였다.

남도접주(南道接主)로서 12만의 농민군을 지휘하였으며, 북도접주(北道接主) 손병희(孫秉熙)의 10만 농민군과 연합하여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하에 구국(救國)의 대일본전(對日本戰)을 시작하였다. 항쟁의 규모는 한때 중부·남부 전역을 비롯하여 함경남도와 평안남도까지 확대되었으나 근대적 무기와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과 관군의 반격에 패배를 거듭하다가 공주(公州) 우금치전투에서 대패하였다. 이로써 패색이 짙어지자 농민군을 해산하고 순창(淳昌)에 은신하여 동지 손화중(孫化仲)·김덕명(金德明)·최경선(崔慶善) 등과 재거(再擧)를 모의하던 중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1895년 교수형을 당하였다. [당골네 사랑방]




 

 

'녹 두 꽃'
(김지하 작시, 김광석 노래)

 

“빈손 가득히 움켜쥔 햇살에 살아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로 붉게 살아

 

타네 불타네 깊은 밤 넋 속의 깊고깊은 상처에
살아 모질수록 매질 아래

 

날이 갈수록 흡뜨는 拒逆(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살아 열쇠소리 사라져 버림받은 끝없고

 

(간주)

 

끝없이 혀는 잘리어 굳고굳은 벽 속에
마지막 痛哭(통곡)으로 살아 타네 불타네 

 

녹두꽃이 타네 별 푸른 屍口門(시구문) 아래 목 베어
횃불 아래 횃불이여 그슬려라 하늘을 온 세상을

 

번득이는 銃劍(총검) 아래 비웃음 아래
너희 나를 戮屍(육시)토록 끝끝내 살아”
 (가사 출처 : Daum뮤직)




‘새야새야 파랑새야’ (미국 몬트리얼 한인합창단, 2004)


새야새야 파랑새야’ - 부산시립 소년소녀합창단


‘새야새야’ - 신예원 편곡 노래(EBS Space 공감)


새야새야 파랑새야 - 서울글로리아합창단 (2012 ) - 천안함46용사3주기


새야새야 파랑새야 - 바리톤 김병호


새야새야 파랑새야 - 소프라노 SusanWheeler


YAYA -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울산시립합창단 (1995)


전봉준 스토리텔링 비디오


새야 새야 - 피아노와 현악 6중주 (Clara Kim 작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