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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옛날 동요] '등대지기' 원곡은 마태복음의 '황금률'

잠용(潛蓉) 2013. 12. 8. 09:14

 

(사진 : big thumb nail)

 

'등대지기'
고은 작사/ 영국 민요/ 노래 은희

(1)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한겨울에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2)
모질게도 비바람이 저 바다를 덮어
산을 이룬 거센 파도 천지를 흔든다.
이 밤에도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한 손 정성이여 바다를 비친다.


은희 - 등대지기 (1972) 



 

[원곡] 'The Golden Rule' (황금률)

= The Golden Rule (Matthew 7:12)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복음 7:12)

“Therefore all things whatsoever ye would that men should do to you,
do ye even so to them: for this is the law and the prophets.”

 

(원곡 ‘The Golden Rule’ (황금률) 악보,출처: http://online4kim.net/xe/9734)

(The Golden Rule: 황금률)

(1) The golden rule, the golden rule, Oh, that's the law for me! !
Were this the law for all the world, How happy we should be!
The golden rule, the golden rule, Oh, that's the law for me!
To do to others as I would that they should do to me.
황금률, 황금률, 오, 나를 위한 법이로다!
이는 세상을 위한 법이로다, 아!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황금률, 황금률, 오, 나를 위한 법이로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2) We love our fathers, mothers too, whose love our life attends;
We love our brothers, sisters too, Our teachers and our friends.
The golden rule, the golden rule, Oh, that's the law for me!
To do to others as I would that they should do to me.
아버지를 사랑하고 어머니도 사랑하네. 그들의 사랑이 우리 생명 보살피네;
형제를 사랑하고 자매도 사랑하네, 선생님과 친구들도.
황금률, 황금률, 오, 나를 위한 법이로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3) The golden rule! then would no war, Be known in any land,
If each one sought the other's good, And loved the Lord's command.
The golden rule, the golden rule, Oh, that's the law for me!
To do to others as I would that they should do to me. 
황금률!지키면 어떤 나라에도 전쟁이 없네,
서로가 다른 사람의 장점만 찾고 주님의 명령을 사랑하면.
황금률, 황금률, 오, 나를 위한 법이로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4) Were this the rule, in harmony, Our lives would pass away;
And none would suffer, none be poor, And none their trust betray.
The golden rule, the golden rule, Oh, that's the law for me!
To do to others as I would that they should do to me. 
이런 법을 지키면, 조화 속에 우리 인생 끝내게 되네;
아무도 고통 없고, 아무도 가난하지 않고, 아무도 배반당하지 않네.
황금률, 황금률, 오, 나를 위한 법이로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번역 잠용)

 
왜 황금률(The Golden Rule)인가?
본문/ 마태복음 7:7-12, 22:34-40
(설교: 이정수 목사)
 

[마태복음 7:7-12]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2)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22:34-40]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1. 들어가는 이야기
황금은 최고의 가치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은메달 100개가 금메달 하나를 당하지 못합니다. 만년필, 시계, 넥타이 핀 같은 물건들도 가장 값 비싸고 최고의 것들은 황금으로 만든 것이고, 소나타 자동차 가운데 최고는 소나타 골드입니다. 성경적으로도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얻는 최고의 상급인 새 하늘과 새 땅에 세워진 하늘나라 천국의 성곽과 그 길도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613가지 계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도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는 이 말씀을 일컬어 황금의 계명(Golden Rule)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의 많은 계명 가운데 왜 이 말씀을 최고의 계명이라고 할까요?

2. 그 실마리를 찾아서

 

 

첫째 실마리는 마태복음 7:12과 22;40의 후반부가 동일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에도 이 두 곳 외에는 이런 표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말씀은 내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둘째 실마리는 마태복음 22:39절의 말씀 가운데 “그와 같으니” 라는 말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와 같으니” 라는 말씀을 흔히 지나치고 있습니다마는 이 말씀이야말로 화룡(畵龍)의 눈알과 같은 말씀입니다.(이 발견은 나에게 매우 신선한 시각을 주었다 !) “그와 같다” 니 무엇과 같다는 것입니까? 앞의 말씀, 즉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계명은 말로 나타내자면 두 가지인 것 같지만 그 본래는 둘이 아닌 하나라는 것입니다. 비유를 든다면 고대 로마의 동전 한 데나리온을 설명할 경우 그 동전의 실체를 보여주면 간단한 일이지만 그 동전을 말로 설명하려면 어쩔 수 없이 그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따로따로 설명할 수밖에 없으나 그 둘은 결코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셋째 실마리는 마태복음 7장과 22장 본문 속에는 주체인 나와 객체인 타자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먼저 7:12을 보면 내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으면 내가 남을 먼저 대접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나와 남이 있습니다. 22:33-40에도 나와 하나님, 그리고 나와 이웃이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주체와 하나님과 이웃이라는 객체가 있습니다. 사람은 나와 너라는 관계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란 존재는 나는 나요, 너는 남입니다. 나 이외엔 그 어떤 사람도 남인 것입니다. 나 이외엔 하나님도 분명히 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절대 타자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이 세 가지 실마리를 통하여 우리가 종래 생각해왔던 것처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이 말씀이 단순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그와 같다!” 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3. 마태복음 7:12이 의미하는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 [산상 2:30]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한즉 내가 응답하리라” - [시 91:14-16]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나리라” -[잠 8:17]

이러한 말씀들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너희가 하나님께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하나님을 대접하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롬1:18-23을 참고하십시오).

4. 마태복음 7:12이 의미하는 ‘나와 남들’ 사이의 관계
이 부분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모두 대접받기를 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사실 대접받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나만 좋은 게 아니라 너도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우 먼저, 형님 먼저가 아니라 내가 먼저여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들은 항상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교양 있고, 예의 바르고, 경우 있는 사람이다. 네가 먼저 나를 대접해 봐! 그러면 나는 네가 대접한 것보다 두배, 아니 세배로 갚아줄 수 있는 사람이야! 네가 나를 대접하지 않는데 내가 미쳤냐? 내가 뭐 네 종이냐?” 라고. 그래서 우리는 대접하지도 않고 대접받지도 못하고 삽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면 좋은데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데 모든 인간적인 갈등과 고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은 예외야, 그래도 나만은 대접 받아야 해! 하는 마음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5. 왜 Golden Rule(마스터 키)인가?
이렇게 볼 때 마태복음 7:12 말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란 둘인 것 같으나 본질적으로는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가장 큰 계명을 꿰뚫는 마스터 키와 같은 계명이기 때문에 가장 최고의 계명 곧 ‘황금의 계명’(Golden Rule)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정수 목사)

 


동요 '등대지기'의 원조는 'The Golden Rule'
(해설: 오소운 목사)

오늘 호산나 찬양대의 찬양 곡조는 우리가 잘 아는 “등대지기”라는 노래의 곡조로 부르는 미국 어린이 찬송가다. "등대지기"는 과거 오랜 동안, 한국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었고, 한국에서 일반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 "국민가요"라는 호칭까지 얻으며, 누구나 편히 부르기 쉬운 곡조다. 나는 이 노래를 아주 좋아하여 기회만 있으면 불렀는데, 다 부르고 나면 저절로 ‘아멘’ 하고 찬송가 같이 끝맺음을 했다. 친구들은 ‘어디다가 함부로 아멘을 붙이느냐?’고 놀렸지만, 나는 이 노래가 본래 찬송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으로 기회만 있으면 그 원본을 찾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이 노래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나운영 장로 부인인 유경손 장로가 일본 소학교 5학년 교과서에 실린 노래 "등대지기(燈台守)“를 번역하여 소개한 것이 처음이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등대지기' (燈台守, とうだいもり)
아일랜드 민요, 가쓰 요시오(勝承夫) 작사, 유경손 역사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한겨울에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こおれる月かげ 空にさえて
眞冬の荒波 よする小島(おじま)
思えよ とうだい まもる人の
とうときやさしき 愛の心

はげしき雨風 北の海に
山なす荒波 たけりくるう
その夜も とうだい まもる人の
とうとき誠よ 海を照らす

인터넷이 발달하여 미국 인터넷 헌책방에서는 200년 전에 나온 고서도 판매하고 있다. 나는 찬송가 역사를 저술하면서 Alibris, Biblio, Amazon 등 미국 헌책방에서 찬송가 관련 고서들을 300권 가까이 닥치는 대로 사들이어 연구를 하였다. 그런데 등대지기 곡조가 있는 찬송가를 우연히 사게 되었다. 미국 유니테리언 교단 주일학교 찬송가(Hymn, Tune, and Service Book for Sunday School (American Uniterian Association, 1869) 27쪽에 등대지기의 원곡이 'The Golden Rule'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었다.

작사자는 짐머만(I. J. Zimmerman) 이라고 적혀 있는데,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그의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 이름으로 보아 독일계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새로이 발견된 찬송가 "The Golden Rule"의 악보와 현재의 "등대지기"의 악보를 비교해보니, 곡조가 100% 같았다.

어떤 사람은 이 노래가 찬송가 112장 ‘그 맑고 환한 밤중에’의 작곡자 리처드 윌리스(Richard Storrs Willis) 작곡이라고 주장하나, 곡조의 흐름이 전반부가 비슷한 것은 확실하나 그의 작품 목록을 찾아보니 이 곡은 없었다. 이 곡은 많은 자료에 아일랜드(혹은 영국)의 민요곡으로 알려졌다. "The Golden Rule"이란 예수께서 산상에서 가르치신 ‘산상보훈’(마 5:-7장)을 일컫는 말로서. ‘황금같이 귀한 법’이란 뜻으로서 흔히 ‘황금률(黃金律)’이라고 번역한다. 영어 원 가사를 소개한다.

(1) The Golden Rule, the Golden Rule, Oh that's the law for me!
Were this the law for all the world,How happy we should be.
(Refrain)
The Golden Rule, the Golden Rule, Oh that's the law for me!
To do to others as I would, That they should do to me.


(2) We love our fathers, mothers, too, Whose love our life attends;
We love our brothers sisters, too, Our teachers and our friends.
(Refrain)


(3) The Golden Rule, then would no war Be known in any land,
If each one sought the other's good, And loved the Lord's Command.
(Refrain)


(4) Were this the rule, in harmony, Our lives would pass away;
And none would suffer, none be poor, And none their trust betray.
(Refrain)

 

이제 악보를 찾아 분명히 밝혀낸, "등대지기"의 원곡은 19세기 말, 1864년 경부터, 미국에서 여러 찬송가에 수록된 것이 확인되었으나 그 책들은 절판되어서 구입하지를 못했고, 고서점에도 없었다. 일본은 명치유신 후, 서양음악 교육을 위해 미국에 음악교사를 초청하였다. 최초로 일본 땅을 밟은 미국의 음악 선교사 루터 메이슨(Luther W. Mason (1818~1896)은 일본에 와서 미국 찬송가를 가르치며 서양음악을 가르쳤는데, 이 노래가 그 때 처음 소개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은 메이슨의 음악교육만 받고 그리스도는 거부하여, 서양 찬송가 곡조를 배우면 자기네들이 거기 맞춰 작사를 하여 창가(唱歌)를 만들어버려 개화기 일본의 창가들은 거의가 메이슨에게서 배운 서양 찬송가였다. 메이슨이 찬송가를 창가로 바꾸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자 일본 정부는 메이슨을 미국으로 추방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 중에는 '등대지기' 이 노래가 본래 일본 찬송가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 노래는 명치시대부터 신작 창가로 불리다가, 1947년 미군정 기간에 일본 문부성이 발간한 최후의 소학교 "5년생의 음악(五年生の音樂)"에 "등대지기(燈台守, とうだいもり)"라는 제목으로 과거의 가사는 버리고 새로 가쓰요시오(勝承夫) 시인이 작사한 동요 가사로 실렸는데, 해방 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나운영 장로의 부인 유경손 장로가 이를 번역하여 한국에 소개 오늘에 이른 것이다. 한국 교과서에도 실려 전국민이 애창하는 이 노래가 마침내 본고향 찬송가로 돌아오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다. 앞으로 이 찬송가가 더욱많이 불렸으면 좋겠다. (오소운 목사)


 

'아름답고 숭고한 순종의 삶'
(글: 김승환 목사)

 


(I)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한 겨울에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삶이 힘겹다고 생각될 때 부를 노래가 있다는 건 행복하다. 부르다 보면 어느 새 욕심이 없이 겸손하고 묵묵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등대지기처럼 조금은 겸손해지고 고요한 평화가 찾아온다. 이 노래가 내게는 그리스도의 찬가처럼 느껴져 성경공부 시간에도 자주 이 노래를 부르곤 한다. 그리스도야말로 깊은 밤 거친 파도 위에서 방향을 잃고 고단한 항해를 하는 인생 길에 소망과 믿음을 변함없이 선사하는 등대지기 같은 존재가 아닌가? 그리스도 그분이 있음으로 우리에게 안식과 평화가 있고, 그분이 일깨워준 용서와 사랑이 있음으로 오늘 우리들의 웃음과 따뜻한 삶과 소망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이처럼 고단한 인생의 등대지기와 같은 분이라고 해도, 그분을 만나는 게 쉬운 것만은 아니다. 저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가물가물 비쳐올 때, 그 곳을 향해 소망을 품고 성실하게 항해하는 자만이 등대를 만날 수 있고 등대 너머의 안식에 다다를 수 있다. 때로는 그곳이 가까워 보이지만 막상 배를 저어보면 멀 수도 있고, 때로는 거친 파도와 오랜 항해에 지쳐서 빤히 불빛을 보면서도 포기하고 싶어질 때도 있겠지만, 어떤 경우라도 포기는 안 될 말, 온 힘을 다해서 빛을 향해 나아가는 자만이 그 소망의 항구에 다다를 수가 있다. 그러나 물론 그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II)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의롭다 여기시는가? 믿음을 가지고 성실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자다. 하나님은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를 찾지 않으시고, 그 행위가 완전한 사람을 찾지 않으신다.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것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을 사람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 그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도덕적 성취와 행위를 통해 의에 이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좌절만 깊어진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너무도 절실하게 경험한 바요, 종교개혁자 루터도 역시 재발견한 진리이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완전무결함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그를 향해 한결같은 믿음으로 꾸준히 나아가고, 가다가 넘어지면 일으켜주시는 그 사랑에 감사하면서 오직 "믿음 하나로" 앞을 향해 또다시 나아가는 겸손함이다. 그 겸손이 바로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사는 자만이 온갖 시련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항해를 계속하여 마침내 소망의 언덕에 닻을 내리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소개하는 첫번째 인물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자벳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 두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어서, 주의 모든 계명과 규율을 흠잡을 데 없이 잘 지켰다" (눅 1:6) 어떻게 이들이 이토록 흠 없는 삶을 살 수 있었는가? 지금 당장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보이는 곳 너머 "저편"으로부터 오는 빛을 보는 믿음, 그 곳에서 펼쳐질 새로운 현실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다. 분명히 희망이 먼저다. 희망이 있었기에,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타락하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자기 직무에 충실할 수가 있었다. 제사장의 최우선적 직무가 무엇인가? 기도하는 일이다.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이 백성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보여주신 그 길을 가게 하시고, 주께서 가르쳐주신 일을 준행하게 해주시고, 그리하여 주께서 하신 약속된 축복을 기어이 차지하는 백성이 되게 하소서. 그러나 이대로는 안 되겠사오니, 물 가지고 날 씻든지 불 가지고 태우든지 내 모든 죄 멸하시고 주의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옵소서." 이렇게 통회하고 매달리며 간구하면서, "예루살렘이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여호와 하나님으로 쉬지 못하시게 하는"(사 62:7)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바로 제사장의 직무이다. 기도를 쉬는 죄야말로 죄 중의 큰 죄다. 사가랴는 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 눅 1:13에 의하면, 그는 늘 소망중에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III)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혀 기복도 없고 낙심도 없이 한결같이 소망 중에 견고하였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기도한 내용이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를 도중에 포기하였으며 천사의 말을 듣고도 의심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였다. 13절을 보면 그는 하나님께 아들을 달라고 간구하였으나, 18절을 보면 막상 천사가 나타나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말하자 "어떻게 그것을 알겠습니까? 나는 늙은 사람이요, 내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 말입니다" 고 함으로써 과거 자신이 했던 기도를 무색케 하는 모순적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는 책망을 받고 아이가 출산할 때까지 말을 못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굴곡에도 불구하고, 사가랴는 본래의 믿음을 회복할 뿐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상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받아들이고 찬양한다. 아기가 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에, 그들은 아기에게 할례를 행하러 와서,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그를 사가랴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가 "안 됩니다. 요한이라 해야 합니다" 하고 말하니, 그들은 "친척 가운데는 아무도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들은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으로 하려는지 손짓으로 물어 보았다. 그가 서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하고 쓰니, 모두 이상히 여겼다. 그러자 그의 곧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눅 1:59-64)

자신이 벙어리가 되는 일을 체험하고 나서 그는 진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는 항상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분이시며, 상식을 뛰어넘는 방법을 통해서도 일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시며, 나의 인생은 내 멋대로 포기하고 주저앉아도 되는 인생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능력과 뜻을 나타내도록 택함받은 소중한 인생이라는 것, 믿음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공적(公的)인 생애라는 것을 온전히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요한이라고 지었고, 그제서야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니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지난날의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나 굳건히 서는 순간이었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는 어떠한 경우라도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희망이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인 한, 지금 내가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것인 한, 내 멋대로 중도에 포기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사는 삶"으로 퇴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더욱 중요한 것은 이렇게 실패한 그 다음이다.

창세기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삶을 생각해보자. 그는 “네 고향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해서 가나안 땅으로 갔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형편 없었다. 가뭄이 들자 너무도 쉽게, 어떻게든 그 땅에서 버텨볼 생각을 하지 않고, 이집트로 갔다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으면 일단 좀 끈기있게 기다릴 일이지 얼마 안 되어서 첩을 얻어 이스마엘을 낳았다.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퇴행 아닌가? 그러나 아브라함의 훌륭한 점은 그가 그렇게 실패하였지만, 그의 실수를 책망하고 약속의 말씀을 새롭게 일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다시 새 출발하였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겸손함,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최고의 장점이었다.

오늘 본문의 사가랴도 마찬가지다. 그는 칠흑같이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저 멀리에서 비쳐오는 한줄기 빛을 바라보며 온 힘을 다해 희망을 지키며 믿음 속에서 기도하였다. 도중에 너무도 지쳐 믿음 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그 때문에 하나님의 책망을 듣기도 했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믿음으로 다시 시작하였다. 그는 완벽한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허물을 덮고 다시 말씀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다시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다시 시작하는 겸손한 믿음을 통해서, 마침내 그리고 그리던 등대, 소원의 항구, 곧 그리스도 곁에 이르게 되었다.

(IV) 사가랴에 비하면 마리아는 더욱 더 아름다운 순종적 삶의 모범이다. <마리아의 찬가>를 통해 평소 그녀가 어떤 생각과 어떤 믿음으로 생활하는지 짐작해 볼 수 있거니와 그녀는, 인간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천사의 수태고지마저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나는 주의 여종입니다. 천사님의 말씀대로 나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비록 내게 고난이 닥친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고난이라면 묵묵히 인내하면서 오늘 바로 내 십자가를 지고 앞을 향해 정진하는 마리아의 올곧은 순종!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살아가는 인간이 취해야 할 아름다운 모범이 아닐 수 없다.

 

요컨대, 미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하여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말씀에 순종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자의 것이다. 비록 도중에 넘어질지라도 과거로 퇴행하기보다 내 죄를 사하시고 새롭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다시 소망의 언덕을 향하여 정진하는 삶, 그곳에서 만날 주님을 생각하며 설레이는 마음으로 몸바쳐 헌신하는 아름다운 순종,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주시는 삶이다. 오늘 성서본문에 기록된 사가랴와 마리아의 그 아름다운 순종적 삶을 본받아 믿음으로 정진하는 소망찬 하루하루가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