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와 베토벤 '월광곡' <月光의 曲>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의 옛날입니다.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조차 쓸쓸한 가을 저녁, 친구의 집에서 저녁밥을 끝내고 난 베토벤은 쌀쌀스런 달빛을 온몸에 받으면서, 고요히 초저녁잠에 들어있는 본(Bohn) 성(城)의 거리를 소요(逍遙)했던 것입니다. 그때의 본 성으로 말하면, 좀처럼 얻기 어려운 큰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물을 것도 없이 천재의 대작곡가 베토벤이 이 성에서 나고, 또 그의 이름이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로 온 세계에 높아가는 까닭이었습니다.
불세출(不世出) 대천재 베토벤의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자연의 멜로디가 솟아 넘쳤으니, 나무 등걸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나, 코스모스의 잎 위에서 반짝이는 아침 이슬의 빛까지도 그의 귀에는 음악 아닌 것이 없었으며, 그의 눈에는 미(美) 아닌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달 밝고 하늘 높은 가을밤, 가인묵객(歌人墨客)들의 심회조차 뒤숭숭한 그 달밤의 소요중에서 베토벤의 가슴인들 어찌 타오르는 감흥이 없었겠습니까? 중추(仲秋)의 보름달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바쁜 일 없는 다리를 힘없이 옮겨놓을 때, 베토벤의 귓가에는 어디서부터인지 들릴락말락하게 피아노의 실 같은 가는 멜로디가 가벼운 바람결에 들리다간 끊어지고, 끊어지다간 또 들려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베토벤은 무아몽중(無我夢中)에 싸여서 음악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하여 한 걸음, 또 한 걸음 가까이 갔던 것입니다.
이윽고 눈에 뜨이는 것은 불도 없이 어둠컴컴한 나무 그늘 옆에 서 있는 조그만 오막살이, 그 집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가냘픈 멜로디야말로 베토벤 자신이 작곡한 〈F장조 소나타〉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하다면 이상도 하고, 기이하다면 기이한 일입니다. 캄캄한 이 오막살이에 피아노는 웬 것이며, 이것을 치는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물어볼 데도 없으려니와, 묻고자 하지도 않고 베토벤은 자아를 잊어버린 채 이상한 감흥의 충동으로 말미암아 가슴을 설레면서, 어느 결에 그 집 문을 열고, 자기도 모르는 틈에 아무 소리도 없이 문 안으로 들어섰던 것입니다.
"웬 사람이오? 아닌 밤중에 무슨 일이 있길래 아무말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온단 말이오?" 베토벤은 자기 곡조를 이같이도 열심히 쳐주는 사람, 그 사람을, 또는 자기의 불운한 경우를 마음 속으로 동정해 주는 위로자를,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중에 사모하고 그리워하여 문을 열고 들어서기는 했지만, 주인의 재우쳐 묻는 말소리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휘둘러 살펴보니, 아아! 이것이 무슨 운명의 작희(作戱)일까! 그 집 주인은 어둠컴컴한 속에서 무릎 위에 헌 신짝을 놓고 꿰매고 앉은 신기료 장수! 들창 밑에는 금발이 눈을 황홀케 하는 한 소녀가 피아노 앞에 앉은 채로 자기 오라비의 떠드는 말소리에 놀란 듯이 두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돌이켜 쳐다보는 것입니다.
방 안에는 깜박거리는 작은 촛불이 밤의 정적을 깨뜨릴 뿐! 베토벤은 아무 대답이 없이 방안을 한 번 휘돌아다본 후에, 다시 그 피아노 앞으로 시선을 옮겼던 것입니다. 피아노─ 다 낡은 궤짝 피아노─ 위에는 악보(樂譜)는 고사하고 종이 조각 하나도 없습니다. 상하좌우 어디에도 악보 같은 것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친 그 곡조는 어디 있나요?" 이 말을 들은 소녀는 적이 부끄러움을 깨달은 듯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아무 대답도 못할 때에, 그 오라비 되는 신기료 장수가 대신 대답을 했습니다. “그 애는 장님인 까닭에 악보 같은 것이 있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답니다.” 하고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의 음성은 벌써 울음이 반이나 섞였던 것입니다.
“아아, 장님? 그러면 어떻게 그 어려운 곡조를 배웠습니까?” “배운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전에 살던 집 뒷댁이 어떤 백작의 댁이었는데, 화조월석(花朝月夕)으로 백작부인께서 타시는 피아노 소리를 저의 집에서도 일음일부(一音一符)를 빼지 않고 다 들을 수가 있었답니다. 그래서 저 애가 장난하는 곡조들은 모두 그때에 담 너머로 듣고서 배운 것들인데, 악보도 모르고 들은 대로 장난하는 것이니 무엇이 변변하겠습니까? 가엾고도 놀랍습니다. 눈먼 소녀의 이 재주, 이 운명…
본시 구차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별별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다 겪으면서 자라난 베노벤의 가슴은 이 몇 마디 문답에 벌써 터질 듯 무너질 듯했던 것입니다. “아아, 참 가엾은 일도 있소. 나 역시 넉넉지 못한 사람으로 음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베토벤은 이 말 한 마디밖에는 다시 더 무엇이라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신기료 장수는 처음에는 불의의 틈입자(闖入者)에게 시비를 걸다시피 했지만, 그러나 어느 틈에 그들은 서로 동정하고 서로 위로하는 사이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베토벤의 어딘지 범할 수 없는 위품(威品)과 또 그의 동정적인 태도에 속마음으로 슬그머니 감동이 되어 앞치마를 툭툭 털고 일어나서 옆에 있던 조그만 걸상을 베토벤의 앞에 내어놓으며 앉으라고 권했던 것입니다. “부모도 없이 외롭게 자라난 저 애에게는 이 넓고 넓은 세상에 오라비 되는 나와 다 깨어진 피아노만이 오직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위안물이랍니다. 조금만 웬만해도 음악회에나 데리고 가서 그 애의 평생 소원인 베토벤 선생의 연주나 한 번 들려주었으면 합니다만, 보시다시피 집안 형편이 이 꼴이고 보니 무엇 하나 해볼 수가 있겠습니까? 오라비의 구슬픈 이 말을 눈물 없이는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정다감한 베토벤의 무릎 위에는 자기도 모르는 더운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옷을 적시었을 뿐이었습니다.
이윽고 베토벤은 눈물 어린 고개를 들었습니다. “당신네들은 그다지도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싶습니까?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람인지 신인지 모를 대천재, 우리 본 성의 자랑거린인 베토벤 선생이야말로 온 천하가 모두 숭배하고 찬미하지 않습니까? 그렇건만도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그 선생의 음악을 한 번도 못 들었대서야 세상에 났던 보람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아, 저 애만이라도 제 생전에 한 번 그 선생의 연주를 들려주고 싶습니다만은 그것조차 못하고 있습니다그려…”
촛불은 점점 녹아내려서 깜박깜박 꺼져가는 불빛은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출둥 말둥 했습니다. 아아, 세상에 다시 없을 가엾은 남매의 이 정경! 감정이 복받쳐 올라오는 베토벤의 가슴은 터지는 듯 미어지는 듯했습니다. 그는 가만히 피아노 앞으로 가서 눈먼 소녀를 붙잡아 일으킨 후, 자기가 그 피아노에 앉아서 이 불행한 남매를 위하여 구곡간장(九曲肝腸)이 끊어지는 듯한 감정을 억제해 가며 천천히 한 곡조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곡조는 조금 전에 소녀가 치던 바로 그 곡조. 베토벤 자작(自作)의 〈F조(調) 소나타〉의 묘한 소리는 침침한 작은 방 안에 고루고루 퍼져서 이것을 듣는 두 남매는 물론이요, 이것을 치는 베토벤 자신까지도 진세(塵世)를 떠나서 멀리 천계(天界)로 올라가는 듯한 이상하고 신비한 감흥에 싸였던 것입니다. 옆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듣고 있던 소녀는 무엇에 감촉(感觸)이 되었던지, 별안간 베토벤의 옷 소매를 잡고 늘어지며 흑흑 느끼는 음성으로 애원했습니다.
“오오, 선생님! 당신께서는 베토벤 선생이 아니십니까?” 베토벤은 피아노에서 손을 내려서 소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나직한 음성으로 달래듯이 말했습니다. “그대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이 내가 베토벤이오.” 너무도 기쁘고 너무도 감격한 끝에, 두 남매는 서로 목을 얼싸안고 한참 동안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평생 소원이 이것뿐이오니, 이 어린 소녀를 위하여 한 곡조만 더 들려주십시오.”
이윽고 베토벤이 다시 피아노를 향하여 앉았을 때, 창 틈으로 불어 들어오던 바람은 깜박거리던 촛불을 그나마 꺼버리고 방 안은 침묵과 감격의 신비에 잠겨 있을 제, 들창으로는 넘어가는 달빛이 교교(皎皎)하게 흘러 들어와서 피아노의 건반 위에 비쳤던 것입니다. 들창을 훨씬 열어젖히고 밤이 낮과 같이 환한 하늘을 우러러볼 때에, 수없이도 많은 저녁별들은 금강석을 뿌린 듯 반짝거리고 복판에 가로 흐른 은하수의 한 끝이 땅에 닿을 듯한 이 달밤 ! 젊은이의 뜨거운 피가 바야흐로 용솟음치듯이 끓어오르는 베토벤은 피아노 위에 손을 올려 놓자, 자기 심중(心中)에 끓어오르는 감흥 그대로를 천천히 타시 시작했습니다.
황홀하고도 신비한 이 광경 속에서 두 남매는 자기네의 심장 뛰는 소리가 행여나 대악성(大樂聖)의 감흥을 건드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듯이, 두 손을 가슴에 꼭 대고 고개를 숙인 후 귀를 기울여서 달의 여신이 흰 비단치마를 발로 차면서 춤을 추는 듯한 아름답고도 구슬픈 멜로디에 심혼(心魂)이 함께 취하여 멀리 달라나로 소요를 하는 듯 무아몽중(無我夢中)에 싸여 있을 제, 별안간 베토벤의 두 손이 우박이 쏟아지듯 불꽃이 튀듯 빨리 뛰어놀기 시작하자, 산이 울며 천지가 감동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다시 가볍고 아름다운 곡조가 평화와 영광을 두 남매의 가슴 속에 가득히 부어주었습니다.
두 남매의 황홀한 음악에 취했던 잠이 채 깨기도 전에 베토벤은 슬며시 일어나서 그 길로 곧 자기 집으로 돌아온 후, 종이와 붓을 들어 그 밤이 새도록 조금 전에 타던 즉흥의 곡조를 베껴놓으니, 이것이 만고불후(萬古不朽)의 명곡〈월광(月光)의 곡(曲)〉인 줄이야 모르는 이가 누구겠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천재 작곡가도 기박(奇薄)한 운명의 신의 작희(作戱)로 나이가 서른이 될락말락해서 귀머거리가 되고, 귀머거리가 된 후에도 명곡대작을 많이 지어놓고는 58세를 일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마니, 그의 이름은〈월광의 곡〉과 함께 천추(千秋)에 빛날 것입니다. <音樂慢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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