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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추억의 가요] '개여울' (1972) - 김소월 시, 정미조 노래

잠용(潛蓉) 2014. 9. 23. 21:37



"개여울" (1972)
(김소월 작시/ 이희목 작곡/ 노래 정미조)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강물이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約束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간 주>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約束이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개여울’-소월 시 1922년 발표)


<소월시 '개여울'의 40년 노래 역사>
-김정희부터 정미조까지-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 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이 봄바람에 해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개여울 원시 -김소월 작 1922년 발표)


"개여울은 그야말로 딱 60년대 스타일이다. 70년대가 통기타 청년문화 시대이듯 60년대는 문학적 요소가 강한 낭만주의 시대가 아니였나싶다. 개여울은 그 시절 소녀들이 좋아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꽃네님
1922년 개벽지에 발표된 소월 시 <개여울>이 최초로 대중가요로 발표된 것은 1966년. 작곡가 이희목이 시에 로맨틱한 멜로디를 담아 아마추어 작곡가 콘테스트에서 가수 김정희의 청초한 목소리에 담아 처음 발표해 1등상을 수상했다.

그 노래는 다시 1967년 킹레코드의 컴필레이션 음반 속에 '개여울'과 더불어 정미조의 또다른 히트곡 '파도'까지 함께 수록되었다. 하지만 전혀 대중적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음반 발표 5년 후인 1972년 이화여대 미대를 졸업한 대형가수 정미조에 의해 리메이크되면서 비로소 <개여울>은 빅히트가 터지며 70년대 불후의 명곡으로 각인되었다. 하지만 엄연히 이 노래는 60년대 중반에 이미 세상에 나온 60년대의 노래이다. 음악이 수록된 킹레코드의 음반 재킷. 재킷의 주인공은 민요 트로트가수 송춘희다. 불행하게도 오리지널 가수인 김정희는 음원만 전해질뿐 단 한장의 사진조차 남아있지 않다.



[출처] 엠파스 카페 (http://cafe.empas.com/)
[원문] 소월시 '개여울'의 40년 노래 역사-김정희부터 정미조까지(글 kje7522 )

 
◆ 가수 정미조(鄭美朝 1950~ )
정미조 : 가수 겸, 화가
출생 : 1950년, 경기 김포시에서 출생
학력 : 이화여대 서양화과 졸업, 파리7대학 대학원 박사 외 1건
데뷔 : 1972년 '개여울' (소속사JNH)



정미조는 1949년 5월 2일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납니다(고향). (정미조 학력 학벌) 배화여자고등학교(배화여고)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학 학사(이화여대), 아카데미 그랑드 쇼미에르, (파리)국립장식미술학교 석사, 파리7대학 박사 학위, 정미조는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정민해(이름)는 김포에서 극장과 양조업을 하던 부자였고, 어머니는 화가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정미조: "외가쪽 핏줄이 이쪽(미술)이에요. 외삼촌, 외사촌이 전부 그림을 그리고 있죠." 게다가 아버지는 사교춤 선생을 집으로 불러 어머니와 함께 배웠을 정도로 풍류를 즐기던 사람이었고, 이런 분위기속에서 정미조는 어릴 적부터 재능을 마음껏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정미조는 노래뿐만 아니라 무용과 그림 모두에 소질을 보였고, 진로에 대해서 행복한 고민을 했죠.(이중 한가지도 타고나기 힘든데, 대단하네요.) 중학교때는 발레리나가 꿈이었는데, 그림쪽의 솜씨 역시 대단했습니다. 결국 대학 진학을 이대 서양학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죠. 하지만 탁월했던 노래 솜씨가 그녀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이화여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때 선배들의 요청에 불렀던 노래 한곡이 그녀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죠. 선배와 동기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은 정미조는 일약 교내 유명인사가 되었고, 학내 공연을 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화여대생 20명으로 조직된 파월장병 위문 공연단에 선발되어서 베트남에도 다녀오죠. 이때쯤 하면 '노래 잘하는 이대생 정미조'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라는 우스개소리로 나올 정도로,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게 됩니다. 당시 정미조의 노래솜씨에 반했던 패티김이 이화여대 2학년생인 정미조에게 자신의 쇼에 나오라고 요청했지만, 그때 이화여대의 교칙상 재학생은 그런 상업적인 프로그램에 나갈 수가 없어서 끝내 좌절됩니다. 그리고 정미조는 이화여대 졸업과 동시에 개여울로 데뷔하게 됩니다. (1972년 3월) 머리도 좋았고, 노래와 춤, 그림 재능에, 부유한 집안까지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었던 인생같습니다. (정미조 프로필 및 경력) 1972년 노래 '개여울'로 데뷔 KBS TV의 신인 가요제 우승 동아방송의 노래 경연 프로그램 10주 연속 우승 78년 야마하 동경국제가요제 우수가창상 수상 1979년 10월 은퇴, 그 이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납니다.
(사진↑ : 정미조 리즈시절 젊었을 때 모습)

이때까지의 대표곡이 개여울, 휘파람을 부세요, 파도, 불꽃 등이며, 정미조는 국민적 사랑을 받습니다.
하지만 정미조는 미련없이 가요계를 떠나고 맙니다. 
정미조: "그 당시엔 인기를 실감하지 못했어요. 그냥 만날 기숙사에서 통기타로 노래하다가 멋진 드레스

입고 훌륭한 밴드가 받쳐주는 가운데 신나게 노래하는 게 좋았죠. 원래 3년만 할 생각이었는데, 5년이
되고 7년 반이 흘렀죠. 그때 되니 ‘이제 노래는 원 없이 했다’ 싶더군요. 끼니도 못 챙길 정도로 빠듯한
일정에도 지쳤고요." (정미조 은퇴 이유)
정미조: "사실 유학을 앞두고  2년여 동안 활동을 줄여나가면서 틈틈이 불어를 배우는 등 나름의 준비를

했었기 때문에 갑작스런 은퇴는 아니었습니다."

(화가로서의 경력 및 프로필)
1993년 수원대학교 조형예술학부 서양화 교수 (정미조 근황, 미대 교수)
2000년 파리4대학 한국미술 특강

주요작품
1982년 그림 샹젤리제의 밤
2003년 그림 시간의 흐름 시리즈
2004년 그림 강가에서
2004년 그림 푸른 환상 


이제까지 개인전만 거의 30번 정도를 했을 정도로, 화단의 중견작가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2000년에는
파리4대학에서 한국미술에 대한 특강을 하기도 했죠. 약 7년 반의 가수생활을 끝낸 정미조는 약 13년간
의 프랑스 유학 생활을 마친 다음에, 한국으로 귀국해서 수원대학교 교수로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친지
의 소개로 현재의 남편 원용계(남편 이름)와 만나게 됩니다. 약 4개월간의 교제기간을 거친 둘은 1993년
3월 28일 결혼식을 올립니다.

당시 정미조의 나이는 45살이었고, 남편 원용계는 정미조보다 6살 연상이었죠. (정미조는 긴 유학 생활
때문에 초혼이었고, 원용계는 이혼 후 재혼이었음. 직업은 사업가(중소기업 운영)) 둘 사람 사이에 자녀
는 없지만,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정미조: "(제가) 워낙 운동을 싫어했어요. 그런데 남편은 골프,
스키 다 수준급이거든요. 체력이 저와 비교가 되지 않아요. 남편에게 자극받아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운동을 시작했지요. 등산도 사실 썩 잘하는 편은 못돼요. 첫날 북한산을 오르는데 40분 오르고 나서 5분
정도 쓰러져 잤다니까요. 지금이야 4~5시간 정도는 그래도 견딥니다."

남편 원용계 덕분에 정미조 역시 취미가 등산이 되었네요. 둘은 서로 취미를 공유해가는 좋은 배우자라
는 사실을 알 거 같네요. 원용계는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공식석
상에 공개된 적이 한번도 없죠. 다만 정미조는 화가의 삶을 살면서 남편의 비판에 귀를 기울입니다.
정미조: "(남편이) 연애할 때는 전시도 잘 보고 하더니 이젠 전시가는 것도 귀찮아 해요(미소). 하지만 전 작품을 통해 대중의 감성을 알게 돼요. 남편의 대중감각과 평은 매서워요. 그가 좋다 싫다는 그림은 관객에게도 같은 평가를 받아요. 또 작품 때문에 화실에서 늦게까지 일해도 전혀 짜증내지 않고 이해를 해주죠." 현재도 정미조 원용계 부부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정미조의 인생을 보면 두가지 면에서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첫번째는 결단력입니다. 화려한 가
수 생활을 하다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독한 파리 생활을 13년이나 하면서, 결코 다시 가요계로 돌아
오지 않습니다. 사람이라면 화려했던 과거를 꿈꾸면서 처음의 결심이 깨질 수도 있는데, 정미조는 결코
그러지 않았죠. 이런 결단력이 있었기에, 정미조의 두번째 성공이 가능하지 않았나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절제력입니다. 정미조처럼 재능 많은 사람은 스스로 인생을 탕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하무인이 되고 자신의 재능을 맹신한 나머지 노력을 별로 하지 않죠. "괜찮아. 나 정도면 언제든지 할 수 있어."

재능이 특출난 사람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인간은 조그마한 성취라도 이루고 나면 자만하기 쉽상이죠
. 하지만 정미조에게는 이런 방탕함이나 거만함을 찾아볼 수가 없네요. 특히, 그 화려했던 가요계 생활
을 하면서도 2년 동안이나 미리 프랑스어를 공부하면서 준비를 했다는 대목에서 준비성 역시 대단하다
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노래가 하나 히트를 하면, 붕 뜬 생활을 하기 마련이
죠.) 결국 하늘이 내린 재능을 정미조는 최상의 노력으로 화답했네요. 정미조를 보면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한다'가 아니라 '고개를 숙인 벼일수록 더 좋은 결실, 더 많은 결실을 만든다'라는 진리를
조금이나마 알 거 같습니다. <출처 : 희나리 7080 Live>


개여울 - 정미조


개여울 / 정미조


[온스테이지 2.0] 정미조 - 개여울


정미조 - '개여울' [콘서트7080, 2006]


적우 - '개여울' [콘서트7080, 2006]


개여울 - 김윤아 (대한민국 영화 대상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