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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음악

[불교가요] '운주사' (雲住寺) - 정솔모 노래

잠용(潛蓉) 2015. 2. 2. 16:33

 

 

 

'운주사' (雲住寺)
김홍근 작사/ 김기범 작곡/ 노래 정솔모

(제 2회 한국 찬불가요대상 수상작)

 

운주사 돌고돌아 천불 미소에 빠져드니
이내 마음 어느 것도 물이어라 구름이어라

흘러흘러 잘도 간다

절로절로 잘도 간다


사랑도 눈물도 부질없는 욕심도

천불에 보내리라 천탑에 보내리라

천불천탑 운주사여~

 

(간주)

 

운주사 돌고돌아 천불 미소에 빠져드니
이내 마음 어느 것도 물이어라 구름이어라

흘러흘러 잘도 간다
허이허이 잘도 간다


평생에 지은 죄 씻을 길이 없어라
천불에 보내리라 천탑에 보내리라

천불천탑 운주사여


천불천탑 운주사여~

 

 

 


 

'천불천탑의 성지' 전남 화순 운주사(雲住寺) 내력  

 

 

(운주사 와불)

 

천불산(千佛山) 다탑봉(多塔峰)에 자리잡은 운주사(雲住寺, 또는 運舟寺)는 천불천탑(千佛千塔)으로 옛날부터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 불교의 깊은 혼이 서린 운주사는 우리나라의 여느 사찰에서는 발견 할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불사(佛寺)를 한 불가사의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千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라는 유일한 기록이 있다. 번역하면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각 일천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정말 그때까지도 석불 석탑이 각 1,000기씩이 실존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조선조 인조 10년(1632)에 발간된 능주읍지에는 ‘운주사 재현남이십오리천불산좌우산협석불석탑 일천우유 석실이석불상배이좌(雲住寺 在縣南二十五里千佛山左右山峽石佛石塔 一千又有 石室二石佛相背而座)’ 운주사는 현의 남쪽 25리에 있으며 천불산 좌우 산 협곡에는 석불과 석탑이 일 천씩 있고 석실에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1,000기씩의 석불 석탑이 있었던 게 분명하고 그 말미에 '금폐(今廢)' 라는 추기가 있어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후 조사한 기록을 보면 석탑이 22기, 석불이 213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석탑 17기, 석불 80여기만 남아있어 역사 속에서 끝이 없이 유실되어온 뼈아픈 세월을 살아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4차례의 발굴조사와 2차례의 학술조사를 하였으나 창건시대와 창건내력, 조성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을 밝혀내지 못하여 운주사 천불천탑은 아직도 불가사의한 유적으로 남아있다.  

 

운주사 불상들은 천불산 각 골짜기 바위너설 야지에 비로자나 부처님(부처님의 빛, 광명)을 주불(主佛)로 하여 여러 기가 집단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크기도 각각 다르고 얼굴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 단순한 법의(法衣) 자락이 인상적이다. 민간에서는 할아버지부처, 할머니부처, 남편부처, 아내부처, 아들부처, 딸부처, 아기부처라고 불러오기도 했는데, 마치 우리 이웃들의 얼굴을 표현한 듯 소박하고 친근하다. 이러한 불상배치와 불상제작 기법은 우리나라 다른 곳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볼 수 없는 운주사 불상만이 갖는 특별한 가치로 평가받는다.

 

또한 운주사 석탑들은 모두가 서로 다른 모양으로 각각 다양한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연꽃무늬가 밑에 새겨진 넙쩍하고 둥근 옥개석(지붕돌)의 석탑과 동그란 발우형 석탑, 부여정림사지 5층석탑을 닮은 백제계 석탑, 감포 감은사지 석탑을 닮은 신라계 석탑, 분황사지 전탑(벽돌탑) 양식을 닮은 모전계열 신라식 석탑이 탑신석의 특이한 마름모꼴 교차문양과 함께 두루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운주사 탑들의 재료로 쓰인 돌은 석질이 잘 바스라져서 오히려 화강암질의 강한 대리석보다 더 고도의 기술을 습득한 불모(석공)님이 아니면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석질로 빚어만든 탑이 이렇게 수많은 세월의 풍상을 버티어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이곳 불상과 불탑의 조형자들의 기술이 가히 최고 수준이었다는 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듯 싶다.

 

운주사 서쪽 산 능선에는 거대한 두 분의 와불(臥佛, 미완성 석불)님이 누워있다. 조상 대대로 사람들은 “이 천번째 와불님이 일어나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말을 전해왔다. 아마도 운주사 천불천탑은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계시는 부처님이 강림하시어 하화중생(下和衆生)의 대 설법을 통한 불국정토(佛國淨土)의 이상세계가 열리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으로 조성한 대불사(大佛事)가 아닐까한다. [전남 화순군 도암면 운주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운주사(運舟寺)라고도 한다. 이 절의 창건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신라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풍수지리에 근거해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세웠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즉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 모양에 비유, 배를 진압할 물(物)이 없으면 침몰하기 쉽기 때문에 그 중심부분에 해당하는 운주곡에 천불천탑(千佛千塔)을 하룻밤 사이에 세워 내실(內實)을 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운주사와 도선과의 연관은 어떤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조선 후기에 유행한 비보사상을 바탕으로 후에 첨가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동국여지지 東國輿地志〉에 고려승 혜명(惠明)이 무리 1,000여 명과 함께 천불천탑을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혜명을 970년(광종 21)에 관촉사 대불을 조성한 혜명(慧明)과 동일한 인물로 본다면 운주사는 고려초에 건립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절의 연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는 절로서 천불천탑과 석불 2구가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 석조감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84년 제1차 발굴조사 때 '홍치 8년'(弘治八年)이라고 새겨진 기와편이 발견되어 1495년(연산군 1)에 4번째 중수가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으므로 조선 초기까지는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뒤 정유재란으로 폐사된 것을 1800년경에 설담자우(雪潭自優)가 땅에 묻힌 불상과 무너진 불탑을 세우고 약사전 등을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4~89년 4차례에 걸친 전남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금동불입상을 비롯하여 순청자, 상감청자, 분청사기의 파편,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그결과 운주사는 늦어도 11세기초에는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는 비구니가 수도하는 절로 요사채·종각, 그리고 새로 신축된 대웅전·지장전·승방 등이 있으며, 주변에 91구의 석불(완형 50구)과 21기의 석탑 등이 흩어져 있다. 이 가운데 석조불감(보물 제797호)·9층석탑(보물 제796호)·원형다층석탑(보물 제798호)·와불(臥佛) 등이 대표적이다. [브리태니커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