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용의 타임머신... 영원한 시간 속에서 자세히보기

북한·남북통일

[7·4 공동성명] 43주년… UN 동시가입과 2개 국가로 고정

잠용(潛蓉) 2015. 7. 5. 04:02

7·4 공동성명 43주년... 與 "北 바뀌어야"·野 "정부부터"
연합뉴스 | 입력 2015.07.04. 19:15 
 
(서울=연합뉴스) 조성흠 배영경 기자 = 여야는 4일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43주년을 맞아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3대 통일원칙이 존중돼야 한다는 데 뜻을 함께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7·4 남북공동성명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반면, 새정치민주연합은 대북관계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새누리당 권은희 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원칙을 제시한 7·4 남북공동성명은 오늘날까지 남북대화와 교류협력 사업의 단초로 자리매김해왔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권 대변인은 "43년 전 약속한 평화적 신뢰관계의 원칙은 북한의 끊임없는 군사적 위협으로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며 "최근에는 북한이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 사출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함으로써 한반도의 안보 불안을 부채질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7·4 남북공동성명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북한의 전향적인 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권 대변인은 "정부는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일관성 있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가동에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면서 "새누리당은 7·4 남북공동성명을 포함한 남북기본합의서, 6·15 및 10·4 선언 등 남북 간의 합의를 존중하고 실천해 나가는데 당 차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새정치연합 강희용 부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박근혜 정부는 박정희 정권이 천명한 7·4 남북공동성명의 3원칙(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에 따라 대북 관계에 있어 전향적인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며 "북한 역시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대결적 태도를 중단하고 남북 화해와 통일의 큰 길에 함께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한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 들어 남북 관계는 정체와 퇴행을 거듭하고 있다. 민주정부 10년간 남북 교류와 협력의 성과를 통째로 부정하고 있다"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한국경제와 국민생활에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적용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7·4 남북공동성명이 당시 남북한 정권의 정치적 이해 관계에 따라 추진됐다는 평가도 기억해야 한다"며 "진정성 없는 남북 대화나 정권의 필요에 따른 남북 문제 접근은 오히려 분단체제를 더욱 고착시켜 왔음을 교훈 삼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ykbae@yna.co.kr

 

北에서 온 국군포로 유해, 송환 21개월만에 안장
연합뉴스 | 입력 2015.07.04. 20:41

 

故손동식씨 대전현 충원서 영면… 탈북한 딸 "아버지 예우에 감사"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6·25 전쟁 때 국군포로로 북한에 끌려갔던 고(故) 손동식 씨의 유해가 4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탈북자인 딸 명화(53) 씨의 노력으로 2013년 10월 유해가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지 21개월만에 영면할 자리를 찾은 것이다. 고 손동식 씨의 유해 안장식은 이날 오전 대전현충원에서 육군 9사단장 주관으로 거행됐다. 안장식에는 백승주 국방부 차관을 비롯한 국방부 및 군의 주요 인사들과 유족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국군포로의 유해가 북한에서 남한으로 송환돼 현충원에 안장된 것은 이번이 6번째다. 고 손동식 씨는 6·25 전쟁 당시 육군 9사단 소속 전투병으로 북한군과 싸웠으나 포로로 붙잡혀 북한으로 끌려갔다. 함경북도 무산광산에서 힘든 삶을 산 손 씨는 1984년 북한에서 숨졌으며 명화 씨를 포함해 북한에서 낳은 딸 3명은 2005년 탈북해 남한으로 넘어왔다. 사망 당시 손 씨는 명화 씨에게 자신의 고향이 경남 김해라며 "내가 죽으면 고향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명화 씨는 남한에서 북한 인권단체들의 도움을 얻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2013년 10월 중국을 거쳐 부친의 유해를 송환하는 데 성공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DNA 감식을 통해 유해가 국군포로 손동식 씨의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명화 씨가 그의 딸이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러나 유족측이 생환 국군포로에 준하는 보상금을 지급해달라고 요구하고 국방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갈등이 시작됐다. 손 씨의 유해도 영면할 곳을 찾지 못하고 딸 명화 씨의 집에 보관돼왔다.

 

명화 씨는 요구사항을 내걸고 청와대와 국방부 청사 앞에서 8개월 동안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방부가 손동식 씨의 유해 송환 비용을 부담하기로 하는 등 접점을 찾으면서 갈등은 상당 부분 해소됐다. 국방부는 '국군포로의 송환 및 대우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으로 국군포로 유해 송환 비용을 실비로 지원하기로 했으며 손 씨를 포함한 국군포로 유해 6구에 소급 적용하기로 했다.

 

안장식에 참석한 명화 씨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에게 국군포로에 합당한 예우를 해줘 많은 감동과 위안을 받았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국군포로의 딸로 고생할 때는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다는 그는 "아버지를 원망한 데 대해 죄송한 마음도 있었는데 오늘 안장식으로 죄책감을 덜었고 딸로서 효도를 했다는 생각도 든다"고 밝혔다. 명화 씨는 "국군포로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며 "앞으로 국군포로의 명예를 위해 일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ljglory@yna.co.kr]

 


[참고자료]


◇ '7·4 남북공동성명'과 '독립국가'로 서로 인정 / 위키백과

(원문은 미국 Wikipedia)

 

7·4 남북 공동 성명은 1972년 7월 4일 대한민국과 북한 당국이 국토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 발표한 공동성명이다. 1972년 박정희의 지시로 이후락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파견되어 김일성과 만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원칙을 제정하였다.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와 주한미군 철수선언, 군비경쟁 축소를 위해 제정되었으나 이후 통일논의를 통해 남북 양측이 자국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이용되었다.

 

역사적 배경

대한민국의 경우 당시 박정희가 이끌던 제3공화국의 정치적 위기가 가장 큰 배경이었다. 전태일 열사 사건 등 대내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 ‘남한의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 사회단체 및 개별적 인사들과 아무 때나 접촉할 용의’를 표명했는데 이는 1971년 국제연합의 성격 변화(중화민국의 추방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가입)에 아우른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화해무드를 등에 업은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당시는 미국과 중공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변해가던 시기와 맞물리면서 1972년에는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과 중화인민공화국 수상 저우언라이가 상하이에서 공동성명을 통해 미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와 한반도 긴장 완화, 교류증진에의 노력을 지지하는 것과 중공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평화통일 8개항 방안과 언커크 해체 요구입장의 지지를 주 내용으로 함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대외적 상황을 배경으로 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북회담 제스처에 대한민국 정부가 부응함으로써 1971년 9월 20일 비밀리에 남북 적십자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후 서울과 평양 간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문제 협의를 위한 여러 회담이 진행되어 공동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성명 내용

쌍방은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 원칙에 합의하였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의의와 계승

남북의 양 정권이 통일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최초의 합의로서 의의를 가진다. 즉 최초의 남북회담이다. 또한 기존의 외세 의존적이고 대결 지향적인 통일노선을 거부하고 올바른 통일의 원칙을 도출해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한편 이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으로 이어져 6·15 남북 공동선언 으로 계승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1970년대까지 남북 사이에는 1·21 사태 등 특수공작대를 보내 상대를 타격하는 무장도발이 지속되었으며, 이에 따른 전쟁 재발의 두려움과 특수공작대 유지에 대한 부담이 증가하여 7·4 남북 공동 성명 2항에서 무장도발을 자제하기로 타협하였다.[1]

 

북한의 국가승인과 유엔 동시가입

성명 발표를 한 이후락 중앙정보부 국장은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할 것이라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원래 유엔은 국가만 가입할 수 있으므로, 한국 정부가 북한을 국가로 승인하겠다는 취지의 공식발표를 최초로 하였다. 그리고 20년이 지난뒤 1991년에 남북한은 유엔에 동시 가입하였다.

 

통일 조항

1972년 7월 성명 직후 1972년 10월, 남측은 개정된 유신헌법에 최초로 통일조항이 생겼다. 이전의 헌법에는 통일조항이 없었고 북한 땅도 대한민국 영토라는 영토조항만 있었다. 통일조항은 북한을 국가로 승인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현재의 영토조항에서 처럼 북한땅이 대한민국 영토라면 '국가간 통일'이라는 표현 자체가 모순이 될 수 있다.

 

성명의 한계와 비판

양측은 이 선언을 자신들의 권력기반 강화에 이용하였다.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한 지 3개월 만에 성명을 구실삼아 대한민국은 10월 유신을 발표하여 헌법을 이용한 유신독재를 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첫 남북간 대화의 물꼬를 튼 분위기 속에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하여 주체사상을 확립하였다.

------------------------------------------

※ 남측의 국가승인 부정 의견 대두 

 (이 문단에는 기여자 고유의 독자적인 연구 또는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적절한 참고 자료나 출처를 제시해 주세요.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한국 정부는 연이은 국가승인의 행위를 하고도, 현재도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며, 국가승인을 하지 않았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도 국가승인에 반대한다.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헌법 3조 영토조항과 북한을 국가승인한 취지의 헌법 4조 통일조항이 아직도 병존하고 있다. 2회의 정상회담을 했다. 테러집단과는 정상회담이라는 단어 자체를 쓸 수 없다. 정상이란 국가정상이란 뜻이고, 테러집단의 우두머리는 정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상호간에 정부대표에 대해 국가간의 공식 행사인 군대사열을 했는데도, 아직도 남측에서는 반국가단체이지 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 이 글의 중립성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습니다.
주관적인 내용이나 감정적인 표현은 없는지, 고려할 가치가 있는 여러 관점이 편견 없이 공정하게 반영되었는지 확인해 주세요.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3년 6월 23일에 문서의 중립성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습니다.)


※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서를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2년 12월 7일에 문서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위키백과]


◇ 7·4 남북공동성명/ 브리태니커

 

1972년 7월 4일 남북한 당국이 분단 이후 최초로 조국통일과 관련하여 합의 발표한 공동성명을 말한다. 

 


7·4 남북공동성명서를 발표하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1972. 7. 4)

 

이 공동성명은 당시 남한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김영주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했던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

 

즉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획기적인 통일의 3대 원칙을 발표했던 것이다. 공동성명에서는 이밖에도 상대방에 대한 중상비방 금지와 무장도발 금지, 민족적 연계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한 다방면의 제반 교류 실시, 남북적십자회담 실시를 위한 적극협조, 서울과 평양 사이의 상설 직통전화 설치 등 중요한 합의사항들이 발표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합의사항을 추진시킴과 함께 남북한 사이의 제반 문제를 개선 해결하며 또 합의된 조국통일 원칙에 기초하여 나라의 통일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남한의 이후락과 북한의 김영주를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운영하기로 합의했다. 7·4남북공동성명은 남북한이 무력통일을 포기하고 자주적·평화적인 통일을 다짐하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공동성명이 발표되기까지는 중요한 국내외적인 배경이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1972년 2월 미국과 중국의 국교정상화 등 국제적인 화해 분위기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나온 닉슨 독트린은 한국 정부가 완강히 반대해온 주한미군의 철수를 의미해 한국의 국가안보에 심대한 위기감을 조성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후보인 김대중 후보와의 경합에서 위협을 느낀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안정과 명분추구를 위해 남북대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70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은 광복절 기념식 경축사를 통해 남북한 간의 '선의의 경쟁'을 제의했고, 이어서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가 남북한 이산가족의 재결합을 위한 회담을 열자고 제의했다. 북한도 1970년대 들어 국제적인 화해 분위기에 자극을 받아 통일정책에서 전환을 보여왔다. 이에 북한은 남한의 제의를 즉각 받아들여 양측은 각각 서울·평양을 상호 방문했으며, 1972년 5월 이후락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수상을 만나고 북한의 박성철 부수상이 서울을 방문했다.

 

이같은 비밀접촉을 통해 남북한이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통일 3대원칙에 합의했으며 이를 7·4남북공동성명을 통해 천명한 것이다. 이 성명은 분단 이후 통일과 관련한 최초의 남북한 공동성명이라는 의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7·4남북공동성명이 남북한 주민의 통일에 대한 열망의 결과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국제적인 화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남북대화의 결과라는 것이다.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다음날인 1972년 7월 5일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이 국회에서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정부측 입장을 설명하면서 "국제연합(UN)은 외세가 아니다", "7·4남북공동성명이 북한과의 공존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반공법·국가보안법은 폐기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이는 공동성명에서 남북한이 합의한 조국통일을 위한 3대원칙에 어긋나는 내용이기도 했다. 더욱이 남한에서는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지 3개월 만에 통일을 구실삼아 10월유신을 통해 반민주적인 유신체제가 들어섰고, 북한도 유신헌법이 선포된 후 2개월이 지난 1972년 12월 주석제를 도입하고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헌법을 공포해 더욱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창출했다.

 

결국 7·4남북공동성명은 통일문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도 없이 정부당국자들간의 밀담을 통해 처리되었다는 한계성과 통일논의를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에 이용하려는 남북한 권력자들의 정치적 의도로 빛을 잃었다. 그러나 기존의 외세의존적이며 군사적·이념적 대결을 절대시했던 통일노선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조국통일의 올바른 원칙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브리태니커]